사신 – 179화
“어디서부터… 언제부터….”
백천의는 찻잔을 들어 올려 입에 댔다.
하오문주에게 준 한 시진이란 시간은 긴 시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짧은 시간도 아니다. 마음이 답답한 백천의가 많은 생각을 할 만큼 넉넉한 시간이다.
차는 따뜻했다. 곁에 대기하고 있는 시녀는 성심껏 차 시중을 든다. 식은 차는 내 가고 따뜻한 차를 들여오고.
차에 독을 탔을 법도 하건만 백천의는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차를 마셨다.
“비객이 너무 손쉽게 죽었어. 차라리 허허로운 들판에서 무공 대 무공으로 겨뤘다면… 살수 비기… 그게 문제야. 비객이 익힌 은신술은 비망사의 것. 살문의 은신술이 더 뛰어난 거야. 은신술로 싸우는 한은 승산이 없어.”
비객에 대한 고민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비객은 지금이라도 살수들의 은신술을 버려야 한다. 그들이 자파에서 익힌 무공으로 승부를 벌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문 살수들이 은신술을 펼치지 못하도록 해야 하고.
살문에는 뛰어난 고수들이 있다.
모진아가 그렇고, 종리추가 그렇고 묵월광을 이끌었던 소고도 뛰어난 무공을 익혔다. 소여은, 적사, 유구, 음양철극. 광부… 하나같이 뛰어난 고수들이다. 비객에게 당해 기반을 모두 잃은 비망신사까지도 고수다.
하지만 승산이 있다. 천외천 무인들을 동원하지 않고 비객만으로도 살문을 제거할 수 있다. 은신술만 펼치지 못하게 한다면. 기습, 암습만 방비한다면.
백천의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은 살문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해답이 나와 있는데 살문을 신경 쓸 필요가 무엇인가.
살문과 개방, 하오문, 살문 외장을 연결하던 선이 끊어졌다. 오기를 죽였으니 하오문과 개방은 더 이상 살문과 연락을 취하지 못한다.
하오문이나 개방이나 내놓고 살문과 접촉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자칫하면 그들 문파 역시 무림 공적으로 몰릴 위험에 처해지니까.
살문 외장을 관할하던 등천조를 제거했으니 당분간 살문 외장은 가동되지 않는다. 살천문주를 죽였으니 살문의 자금줄도 끊어진 셈이다. 기타 또 다른 자금줄인 천 노인의 상권은 야이간이 단단히 움켜쥐고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
야이간은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지만 지금은 천 노인의 자금이 쓸데없는 곳으로 흘러드는 것을 방비하기 위해 필요하다. 야이간은 다른 건 못해도 그것 하나만은 딱 부러지게 할 놈이다.
하오문주만 제거하면 살문에 붙어 있던 가지는 모두 쳐진다.
하오문주를 제거하고 하오문주가 축출했던 자 중에 한 명을 하오문주로 앉히면…. 하오문주는 개방을 너무 우습게 봤다.
자신은 은밀히 움직인다고 움직였겠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개방도의 눈에 걸렸다. 개방이 비록 분열되어 있다고는 해도 흑봉광괴가 장악한 개방도의 눈은 아직 중원 곳곳을 보고 있다.
하오문에 관한 일도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하오문 하남성 모지를 찾아온 것으로 하오문에 대한 일은 해결되었다.
하오문주 정도를 죽일 수 있는 무인은 많다. 천외천 고수들은 일가를 이루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중에 아무나 골라도 하오문주가 승패를 가를 수 있다.
등천조를 죽일 때도 살천문주를 죽일 때도 천외천 고수를 파견했다. 그들에게는 천외천 고수와 손속을 맞댄 것만도 영광일 것이다. 그만한 고수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그만한 영광이 또 어디 있으랴.
백천의가 천외천 고수를 파견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찾아온 것은 하오문의 특이성 때문이다. 하오문은 잡초다. 그들은 밟는다고 밟히지 않는다. 중원 전역에서 대살육을 벌이지 않는 한 하오문은 되살아난다.
대살육을 벌이기도 힘들다. 하오문도 중에는 무공을 익힌 자들도 있지만 범인이나 다름없는 자들이 단지 적만 하오문에 둔 자들이 많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대살육을 벌일 경우 무인이 아닌 일반 범인들을 죽이는 꼴이 되고 만다.
백천의는 두 번 다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머릿속을 완전히 바꿔줄 심산으로 하오문을 찾아왔다. 하오문도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천객의 무공을 본다면 감히 천외천의 뜻을 거스를 생각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리라. 잡초가 자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너무 자라 풀을 깎을 때는 군소리 없이 따르도록 만들어놔야 한다. 십망이 건재할 때처럼.
백천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살문도 하오문도 아니다.
정운…. 개방….
그들이 백천의를 난감하게 만든다.
정운은 진중한 자였다. 성격을 말하라면 돌다리도 두드려 본 다음에 건너는 자다. 정운을 팔부령에 남겨둔 것도 진조고만 남겨두었다가는 예상치 못한 혈풍이 불 것을 염려해서다. 확실히 그랬을 게다. 팔부령에 진조고만 남겨두었다면 그는 공격했을 게 틀림없고 껍데기나 다름없는 살문 총단은 피바람에 휩싸였을 게다.
껍데기는 굳이 손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잡아두기는 해야 한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팔부령에 남아 있는 살문도는 좋은 인질이 될 수 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비객이나 천외천의 희생이 예상을 넘어섰을 경우에는.
싸우지 못해 안달 난 진조고와 하양 진인을 교체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개방 용두방주의 싸움에서 보여주었듯 하양 진인은 손에 사정을 남긴다. 천외천에 몸을 담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깊은 도심이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런 자는 싸움터에서 크게 소용되지 않는다. 팔부령으로 달려갈 때는 살문 총단을 없애 버리겠다는 생각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 하양 진인과 정운이면 충분할 듯싶었다.
“역시 소림이 변수였어. 음, 사숙이 발목을 잡을 줄이야….”
백천의는 시녀가 식은 차를 가져가고 따뜻한 차를 가져오자 차 한 모금을 또 마셨다.
한 잔에 한 모금. 백천의는 생각을 잇느라 부심했다.
하오문을 벗어나면 본격적으로 행동을 취해야 한다. 살문도 정리하고 개방 문제도 해결하고 야이간이 장악한 천 노인의 상권도 천외천에 귀속시키고…
뜻을 달리하는 사제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한다.
생각은 하오문주를 처리하기 전에 끝내는 것이 좋다. 마침 넉넉한 시간마저 벌었으니. 팔부령에 진을 치고 있는 육십칠단승과 백팔나한은 살문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소림오선사까지 죽은 마당에. 그렇지 않았다면 살문도들이 중원을 횡행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으리라.
정당하게 무공으로 싸워서 제압한다? 지나가던 개도 웃을 말이다. 살수들을 상대하는 데 정당한 무공이면 어떻고 사파 무공이면 어떤가. 죽여서 악행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지.
살문도를 잡을 사람은 정운이다. 하양 진인이라면 살문도들을 놓아 줄 우려가 있다. 아녀자와 삼현옹이라는 늙은이만 있을 것이 분명한데.
더군다나 그들을 인질로 사용하겠다면 두 손을 휘휘 내저을 게 분명하다. 진조고와 하양 진인이 절반씩만 섞였어도 아무런 근심이 없는데. 사숙들이 제지하고 나섰을 경우도 생각해야 한다. 그럴 경우 정운은 검을 들이대지 못한다.
개방 용두방주를 등 뒤에서 베어 넘긴 독심이지만 몇 해 동안 얼굴을 마주했던 사숙들만은 벨 수 없다. 그건 하양 진인이 맡아야 한다.
무공만 제압하면 다행이고 죽이는 경우가 발생해도 어쩔 수 없다.
육십칠단승과 백팔나한, 그리고 하양 진인.
누가 이길지는 점칠 수 없다. 하양 진인이 구진법을 통과했지만 육십칠단승의 무공도 녹록지 않다. 백팔나한은 크게 신경 쓸 것이 없다. 팔부령 같은 지형에서는 백팔나한진을 펼치지 못한다.
아무려면 어떤가. 정운이 살문 총단을 휘젓는 동안만 길을 막아주면 되는 것을.
그래서 진조고와 하양 진인을 교체했다. 진조고를 그대로 두면 틀림없이 천객과 소림사 간에 큰 싸움이 일어날 것이기에. 진조고를 데려갈 때만 해도 자신이 따라갔기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자신이 빠지다 보니 교체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
돌이켜 봐도, 어디서 틈이 벌어졌나 곰곰이 생각해 봐도 착오를 발견할 수 없다.
어쨌든 결과는 참패다.
종리추에게 완벽하게 졌다. 문득 백천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운을 읽지 못했어. 그래, 정운이야!”
정운이 팔부령을 초토화시켰다. 아마도 살문 살수들 대부분이 정운의 손아귀에 잡혀 있으리라. 하양 진인은 뭘 하고 있었던가? 그것만은 의문이지만…..정운이 변했다. 정운의 마음속에는 천하를 오시하고 싶은 욕망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이제야 돌출된 것이다. 구진법을 통과한 천객이 여덟 명일 때도 정운은 속마음을 숨겼다. 한 명 두 명 죽고 남은 자가 몇 명밖에 되지 않자 본심을 드러냈다.
“후후후, 사제라면 가능하지. 비객도 손아귀에 넣었겠다. 비객만 데리고 있으면 가능하지. 새로운 문파를 창건해도 되고, 현재만으로도 천하를 조종할 수 있어. 사제….무서운 자였군. 사제는.”
생각이 정리되자 오히려 편안해졌다. 백천의는 비로소 찻잔에 든 차를 음미하기 시작했다.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차를 마셨다.
그는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려놓은 후였다. 차후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하오문주는 장삼을 벗었다.
단단하게 동여맨 무복이 나오고 무복 곳곳에 작은 비수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백천의는 태연했다.
검을 뽑아 기수식을 취하는 것도 아니었다. 장검을 왼손에 든 채 팔짱을 끼고 양광을 즐겼다. 하오문도는 멀찍이서 두 사람을 빙 둘러섰다.
절정 고수의 싸움은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진귀한 광경이다. 수천 번의 수련을 거치고도 깨닫지 못한 무리를 단 한 번의 싸움을 견식한 후에 깨달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전개하는 초식을 깨닫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안목을 넓힐 수 있다. 초식에 깃든 경력을 읽을 수 있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싸움에 임하는 두 사람의 몸가짐은 볼 수 있다.
백천의가 가늘게 뜬 눈으로 태양을 쳐다보다가 하오문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
“물어보시오.”
하오문주는 손가락을 풀면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천의는 태연했다.
싸움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개방과 하오문은 밀마가 달라. 개방이 밀마를 공개할 리도 없고. 어떻게 오기가 개방의 밀마까지 전달할 수 있었지?”
“하하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구려.”
“아! 그렇지. 비공식이야. 밀담이라고 해도 좋고. 여기서 들은 이야기는 한 귀로 들으면서 한 귀로 흘려 버리지.”
“….”
“약속하지, 천외천 천주의 명예를 걸고. 그 말로 인해 개방에 어떤 보복도 하지 않겠어.”
“좋소, 천외천 천주의 명예를 건다면. 개방이 밀마를 알려줄 필요는 없소. 살문주가 개방 밀마를 알고 있으니까.”
“종…리추가 개방 밀마를? 하하하! 이거야말로 놀라운 일이군. 절대 외인에게 누설되지 않던 개방 밀마가 드디어 외인에게 흘러나갔군. 개방 사조가 알면 관 속에서 일어나겠어.”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
“개방은 밀마를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후개가 아무리 살문과 한통속이라고 해도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없지. 개방 밀마는 살문 외장이 파악해 낸 것이오.”
“그 말을 믿으라는 말인가? 살문 외장이 개방 밀마를 분석해 냈다고?”
“믿든 안 믿든 천주 마음이지만 사실이 그렇소. 개방은 용두방주 사후 지금까지 같은 밀마를 사용하고 있소. 그만한 기간이라면 우리 하오문이라도 분석해 낼 수 있었을 것이오.”
하오문주의 말은 하오문이 이미 개방 밀마를 분석해 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역시 분열된 개방은 힘을 쓰지 못한다. 흑봉광괴도, 후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로 상대에게 정보를 받고 역정보를 흘려보내기 위해 같은 밀마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기 다섯 명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오문과 개방의 정보를 살문에 전달해 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리라. 약정된 장소에서 밀마를 받아다가 약정된 장소에 놓아두면 그만이었을 테니.
“정보”라는 세계에 둔감했던 백천의는 새로운 신세계를 보는 듯했다.
“재미있군. 종리추는 참 재미있는 데까지 착안하는 놈이야. 하하하! 놈에게 일패했어. 완벽하게.”
하오문주가 양손을 깍지 껴서 앞으로 쭉 내밀었다.
손가락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많이 지루한 모양이군. 좋아, 준비되었으면 공격해 봐.”
하오문주의 눈에 기광이 흘렀다. 은은한 노기라고 해야 하나? 무림에 몸을 담은 이후 지금까지 일수비백비 앞에서 백천의처럼 태연한 자는 없었다.
“준비는 이미 끝났소. 타앗!”
하오문주는 양손을 쭉 뻗었다.
양손에서 검은 묵광이 폭죽 터지듯 터져 나왔다.
하오문주는 연신 손을 놀렸다. 처음 양손을 뻗어냈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열 번째 손을 뻗어내고 뒤로 신형을 물리기까지는 그야말로 촌각에 불과했다.
쉿! 쉬쉬식 쒜에엑….!
허공은 검은빛으로 뒤덮였다.
백천의를 중심으로 방원 이장 범위는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는 철망으로 뒤덮였다. 허공을 난 것은 분명히 비수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은 철망으로 뒤덮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아!”
누군가가 탄성을 토해냈다.
전부터 문주의 한성천류비결은 무적이라고 공공연히 말해 왔다.
많은 사람이 문주를 적으로 두었으나 모두 한성천류비결에 도리어 죽음을 맞고 말았다.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는 천은탁 모지처럼 문주의 무공을 본 사람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문주로 모시고 있으면서도 무공을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물러서야 해. 맞받을 수 없는 무공이야.”
한결같이 자신이 백천의라도 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지만 피할 방도가 없다.
뒤로 물러선다 해도 이미 허공을 날고 있는 비수는 자신들의 신법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와 피를 부르리라. 옆으로 움직일 수도 없고, 주저앉을 수도 없으며, 허공으로 몸을 빼낼 수도 없다.
하오문주의 일수비백비는 하늘, 땅, 전후좌우를 모두 막아버린 채 피만을 원하고 있다. 비수가 백천의의 몸에 틀어박히려는 순간, 그제야 백천의의 검이 한성을 토해냈다.
쒸리링….! 타앙!
첫 번째 비수가 검을 뽑은 발검술에 걸려 튕겨 나갔다.
탕! 타타탕….!
백천의의 검이 보이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도무지 무슨 초식을 사용하는지 경력의 흐름은 어떻게 되는지 볼 수가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비수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철검으로 빨려 들어와 튕겨 나간다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다. 백천의의 검이 자검도 아닌 바에야 비수를 빨아들일 리 없다.
백천의는 검을 휘둘러 비수를 쳐내고 있었다. 그 손속이 너무 빠르기에 비수가 빨려드는 듯이 보이는 게다.
“아!”
또다시 경탄이 새어 나왔다.
하오문주의 일수비백비를 보고 놀랐고 백천의의 검공을 보고 또 놀랐다. 첫 번째 놀람과 두 번째 놀람은 같은 소리를 뱉어내게 했지만 싸우는 두 사람의 운명은 천양지차로 갈라놓았다.
쉬이이익!
백천의의 신형이 바람처럼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 하오문주가 걸렸다.
쒜에엑!
“…..”
하오문주는 눈을 부릅떴을 뿐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역류된 피가 식도를 타고 올라와 입가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여, 역시… 천객의 무공….”
“영광으로 알고 가.”
“하지만….”
“…..?”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겠어.”
백천의는 웃었다.
죽어가는 자의 말에 신경 쓸 건 없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한다. 다시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죽음 직전에서도 미망을 떨치지 못하는 게다.
하오문주는 무너지려는 신형을 굳은 의지로 붙잡았다.
“후후후! 모자도에서… 용두방주… 가 죽음 직전에… 한 말. 알 만한 사람은… 음!
모두 알고 있지. 헉! 그, 그 말… 천객의 무공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알겠어. 무엇인지…”
비웃던 백천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금 무슨 말을….!”
백천의는 무너지는 하오문주의 신형을 움켜잡았지만 곧 손에서 힘이 빠졌다.
하오문주의 신형은 힘없이 무너졌다. 그는 궁금증만 남긴 채 죽은 것이다.
모지 중에 섬서성 모지가 걸어 나와 백천의에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백천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부터 네가 하오문주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섬서성 모지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백천의가 둘러서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오문에 십은비가 있다는 것을 알아.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지도 모르지. 분명히 들어둬. 하오문에 변괴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모지를 비롯해 망주까지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될 거야. 화가 나면 향주까지 처단할 수도 있어.”
백천의의 말은 농이 아니다.
하오문이 거둬들인 정보를 절반만 믿는다 해도 천외천은 그럴 능력이 충분하다.
“문주, 먼저 전임 문주의 수족부터 잘라야 될 거야. 저자부터.”
“알겠습니다. 그러잖아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말씀드렸던 대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섬서성 모지는 백천의와 가졌던 모종의 거래를 드러내고 싶어 했다. 변괴가 일어났을 때 발동하는 십은비가 두렵기도 했거니와 백천의가 돌아가고 난 후 모지들의 행동도 막아낼 자신이 없었던 게다.
“약해 빠진 놈… 하긴 네놈 같은 놈이 문주를 맡아야 뒤탈이 없지.”
섬서성 모지가 백천의를 안심시켰다.
“다음에 오시면 말씀하신 대로 처리되어 있는 걸 보실 겁니다. 저희 같은 놈들이 어떻게 무림을 휘젓겠습니까. 생업을 보살펴 주신 것만으로도 큰 은혜입니다.”
백천의는 섬서성 모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인상이 굳어진 모지들을 헤치고 유유히 걸어 나갔다.
“문주!”
모지들은 통곡했다.
배반으로 점철되었기에 문주로 즉위하여 십 년을 버티지 못한다는 하오문이다.
그 속에서 하오문주는 진정으로 강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세상에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강한 것이 무엇이랴.
“문주님! 반드시… 반드시 하오문을 강하게 만들겠습니다. 반드시! 반드시요!”
하오문주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사람은 뜻밖에도 섬서성 모지였다.
“천외천의 눈길도 있고 하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문주님의 뜻을 어기는 결과가 될 겁니다.”
천은탁 모지가 모지들에게 포권지례를 취해 보였다.
“장례나…”
“아닙니다. 문주님의 뜻이 아닐 겁니다. 허허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숨어 지내는 데는 이골이 난 몸입니다. 잘하면 돌아오는 시기가 빨라질지도 모르겠군요. 살문주가 모자도로 향하고 있으니.”
“그런 소리 마시게. 백천의의 무공을 보았지 않은가.”
“보았지요. 그리고 천객 중 네 명이 살문에게 당한 것도 알고 있지요. 하양 진인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 아닙니까.”
“음….!”
“섬서 모지께서는 문주님 뜻대로 백천의의 비위를 맞춰가며 잘 이끌어주십시오.”
“능력 없는 이 몸이….”
“그런 말씀 마십시오. 문주님이 지목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문주님을 모욕하는 것이 되지 않습니까. 휴우! 문주님 말씀대로 폭우가 쏟아지면 일단 몸을 피해야지요. 문주님 장례나 잘 부탁드립니다.”
천은탁 모지는 돌아섰다.
그의 뒤로는 망주일 때부터 붙어 있던 문도 몇 명밖에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문주님의 뜻대로 됐어. 문주님 뜻대로. 백천의는 섬서 모지를 믿고 있으니 이제 하오문은 번창할 거야. 허허! 그러나저러나 이제 난 어디로 간다…”
천은탁 모지의 머릿속에 종리추가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