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8화
“정회루 소홍이가 배를 빌렸습니다.”
일결제자가 다급히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역시 그놈이!”
수천 호법은 햇볕을 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사람 발길이 끊어진 칠성각은 잡초만 무성했다. 문짝은 반쯤 떨어져 나가 너덜거렸고, 서까래는 거미줄 투성이였다. 수천 호법이 머무는 곳이다.
“배를 어디다 빌려놓았느냐!”
“모래사장이 넓어서 백리평이라 부르는 곳인데, 나루터에서 이 리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경치가 좋아서 배를 띄워놓고 주색을 즐기기 좋은 곳이라 한량들이 제법 몰려드는 편입니다.”
수천 호법은 습관적으로 얼굴에 난 흉터를 만졌다. 창기의 손을 빌리는 수법은 도망자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수법이다. 유혹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뒤끝도 깨끗하니 도망자에게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생각될 게다. 수천은 백하를 맡는 순간부터 창기들을 주목해왔다. 장로 흑봉광괴는 천음산 봉분 폭파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타로 불려갔다. 들리는 말로는 사 년 동안 폐관수련을 명령받았다고 한다. 현재 십망의 집행을 총괄하는 사람은 이장로 분운추월이다. 분운추월은 무영에서 알 수 있듯이 개방에서 제일 빠른 신법을 지녔다. 나라에서 특별 관리하는 파발의 경우 초비상시 기발의 역마 속도는 하루에 육 역정이다. 삼십 리마다 건장한 말과 가마술이 뛰어난 군졸을 배치시켜 놓고 이어달리기를 할 경우 하루에 백팔십 리를 달릴 수 있다. 분운추월의 기록은 여양에서 감수까지 하루 만에 달렸으니 삼백여 리가 넘는다. 무림사에 남을 대기록이다. 개방의 신법을 천하제일로 끌어올린 이장로 분운추월이 흑봉광괴에게서 십망 총책을 물려받았다. 분운추월은 수천에게 백하의 경계를 맡겼다.
‘이쪽에서는 포위를 좁혀갈 테니, 백하 쪽은 철벽이 되어야 하네. 철벽이 뚫리면 포위를 좁혀 가는 의미가 없어져. 잡을 생각은 하지 마시게. 도주하지만 못하게 막아놓게. 의심스러운 사람은 관직이 높더라도 신분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통과시키지 말아야 할 게야.’
수천 호법은 분운추월 장로가 하는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발악을 하는군. 백하를 뚫어보겠다? 남양 분타주! 문도 삼십 명을 데리고 지금 즉시 달려가!”
“옛!”
천애유룡은 즉시 대답하고는 비상 대기 중이던 문도 중 남양 분타 걸개 삼십 명을 추려서 달려갔다. 분운추월은 수천에게 사 개 분타를 맡겼다. 흑봉광괴가 쏘아올린 전갈, 총타가 간여해야 한다는 전갈을 받고 하남성에서 달려온 분타 무인들이다. 덕분에 백하를 중심으로 사방 오백여 리는 개방 걸개들로 득실거렸다.
“자네들도 준비해!”
동주, 침악, 사례 분타주는 이미 일어서서 자신이 데려온 문도들을 추스르고 있었다.
“이곳이란 말이지.”
수천 호법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걸개가 엉성하게 그려놓은 지도에는 백리평이라고 적힌 곳은 없었다. 하지만 미숙한 솜씨로 백리평을 천리평이나 된 듯이 그려놓아 위치를 짐작하기는 쉬웠다. 그는 만일의 경우 빠져나갈 곳이 있는지 점검했다. 사 개 분타를 모두 보내지 않고 남양 분타만 보낸 것도 그런 연유였다. 남양 분타 걸개들은 지리를 잘 알고 있으니 매복도 잘 할 것이다.
“배를 강심으로 띄웠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이 어디냐? 전복되었다고 가정하면.”
“강심까지 갔다면 유영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은 없습죠. 물살이 워낙 거세서… 게다가 거리도 멀고요.”
백하를 잘 아는 걸개가 옆에서 대답했다.
“네 능력의 두 배를 지닌 자라면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느냐?”
“두 배가 아니라 세 배를 지녔어도 유영으로는 갈 곳이 없습죠. 물살이 워낙 거세다니까요. 거긴 물고기들도 휩쓸려 떠내려갈 겁니다요.”
“물에 떠내려갔다고 가정하면 어디쯤에서 솟구치느냐.”
“못 찾죠.”
“…”
“아직까지 거기 빠져서 찾은 시신은 없습죠.”
“음…! 놈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면 좋겠군.”
준비가 끝났다. 놈이 도망갈 곳은 없다. 백리평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육로는 천애유룡이 알고 있으니, 배를 타고 백리평을 포위하면 끝난다.
‘지겨운 싸움도 끝났군.’
수천 호법은 다시 검흔을 만지작거렸다. 일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삼 개 분타 무인들을 이끌고 백리평으로 달려가려고 할 때부터였다.
“노기 유하가 배를 빌렸습니다. 나루터에서 상류로 일 리쯤 가면 버들고개라고 있는데 경치가 썩 좋습니다.”
“노기가 배를 드디어 빌렸습니다. 은신이라는 년인데…”
“노기가…”
“노기가..”
보고는 무려 아홉 군데에 이르렀다. 천애유룡은 삼십 명을 이끌고 떠났으니 비상 대기 중인 걸개는 구십여 명. 보고받은 곳만 달려가려고 해도 열 명 남짓밖에 동원할 수 없다. 더욱 큰 문제는 책임자가 없다는 것이다. 수천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분타주 세 명밖에 없었다. 이결제자에게 막대한 중책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수천 호법은 이를 악물었다.
‘놈이 또 약은 수를 쓰고 있어.’
수천은 백하에 포진해 있는 문도를 동원할까 생각했지만 곧 포기해버렸다.
‘놈은 잡지 못해도 경계가 뚫릴 수는 없어.’
수천은 지도를 펴놓고 보고받은 지점을 묵점했다.
“백리평과 버들고개는 삼 리. 넌 지금 곧 천애유룡에게 가. 문도를 절반으로 나눠서 절반은 백리평을 절반은 버들고개를 지키라고 해. 노기가 빌린 배에 누가 타는지 살펴보고, 배가 강변을 떠나면 즉시 보고하라고 해.”
“옛.”
말 빠른 개방 문도가 칠성각을 벗어났다.
“동주 분타주, 자네는 문도를 여섯으로 나눠서…”
수천은 포획에서 감시로 계획을 바꿨다. 노기 여덟, 창기 한 명이 거의 동시에 빌렸다면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여덟 명은 찬바람만 맞을 게 분명하다. 사내와 아이가 나타났을 때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 천애유룡은 내버려 두었다. 백리평이나 버들고개는 나루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 놈이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코가 주독에 걸려 빨갰어. 색칠한 건가? 횡성산이나 천음산에서 벗긴 인피는 아니었는데… 그럼 다른 사람을 또?’
개방은 까닭 없이 죽은 사람을 점검해 왔다. 적지인살이 인피를 즐겨 착용하니 반드시 인피면구를 제조할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놈은 바보가 아니다. 횡성산과 천음산에 개방이 깔렸는데 거기서 얻은 인피를 착용할 리 없다. 현재까지 까닭 없이 급사한 사람은 모두 열네 명. 하지만 인피가 벗겨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침악 분타주! 문도들을 점검해. 근래 의문사한 사람들이 있을 거야. 파악해.”
“의문사는…”
“파악해!”
“옛!”
“특히! 연고가 없거나 산골에 혼자 쳐박혀 사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알아봐!”
“그러기에는 문도가 너무…”
“알아봐!”
“예.”
침악 분타주가 급히 뛰어나갔다.
“은신이라는 년에게 사내가 나타났습니다.”
보고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던가?”
“아뇨. 최가촌에 사는 최필이란 놈입니다. 신분도 확인했습니다.”
“그…래?”
“한동안 옥신각신하더니 그 짓을…”
보고하던 걸개는 입을 다물었다. 수천 호법의 눈에서 살광이 새어 나오는 것을 봤기에.
“남양 분타주님의 보고입니다.”
“그래? 정회루 소흥에게 사내가 나타났나?”
“예. 나루터에서 생선 장사를 하는 신용입니다.”
“신…용?”
“계집을 억세게 좋아하는 놈입니다. 서로 따귀를 치고받고… 정말 가관이 아닙니다.”
수천은 보고를 더 듣지 않았다.
‘적지인살…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게냐. 무슨 수작을…’
“보고드립니다. 노기 유하에게 사내가 나타났습니다. 투전 판에서 굴러먹는…”
“시끄럽다.”
“예?”
“입 다물어.”
전신에 맥이 쭉 빠졌다. 적지인살이 나타났고,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데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으니.
“모두 끌고 나와. 사내, 계집 모두.”
아홉 사내. 그들은 빙 둘러선 걸개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고 머리를 조아렸다.
“네가 소홍이를 산 신용이라는 놈이냐?”
신용은 덩치가 우람했다. 그렇다고 주먹깨나 쓰고 다닐 주제는 못 되고, 남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딱 좋을 만큼 단순했다.
“저, 저는 부탁을 받고…”
“무슨 부탁?”
“어떤 놈이 나타나서는 마누라를 달래줘야겠다고 그 짓 좀 해달라고… 자기는 성불구자라 양물이 서지 않는다고 하면서… 저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소홍이 년이 있는 줄 알았으면 가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년은 동네방네 사내만 있으면 치마를 훌렁 벗는 화냥년 아닙니까.”
“주독에 걸린 놈이더냐?”
“예? 예. 코가 빨간 놈이었습니다.”
“어! 나도 그놈인데?”
“맞아. 나도 그놈이야. 나한테도 불구자라면서 마누라 좀 달래 달라고…”
아홉 여자. 그녀들은 사내들보다는 태연했다.
“아랫도리 팔아먹고 사는 년인데 무슨 짓인들 못 해! 왜 이래! 잡지 마! 더러운 손을 어디다 대는 거야?”
“씨팔! 어쩐지 어제저녁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라니.”
“아랫도리 내주고 돈도 못 받고…! 미친개에게 물려도 정말 재수 없게 물렸네.”
하지만 아무리 막 나가는 여자들일지라도 수천 호법을 대하는 순간 입을 다물었다. 수천 호법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신장은 육 척이 조금 못 되고, 체격은 잘 단련되었고… 주독이 걸린 놈이냐?”
“마, 맞는데…”
“놈에게 부탁받은 말은?”
“그, 그저 배 한 척 빌려 놓으면… 배에서 그 짓을 하고 싶다고…”
수천은 일어섰다. 더 들어봤자 똑같은 소리만 들을 게다. 그 시간, 적지인살은 나루터에서 당당하게 뱃삯을 내고 배를 탔다. 범선으로 상어처럼 생긴 백하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이었다. 백하의 상어 입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백중산이 걸려 있다. 거기서 백하는 제수와 이어진다. 제수를 따라 백이십여 리를 더 가면 지겹게 뒤를 쫓는 개방 남양 분타의 본거지 남양에 이른다. 남양에서 제수는 다시 혁수와 백하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강으로 나뉘고, 이 두 강은 하남성 경계에서 다시 합쳐진다. 닻을 올린 범선은 손님을 가득 싣고 백하의 물결을 가르며 날 듯이 경쾌하게 달렸다.
‘간신히 빠져나왔군.’
적지인살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어져 가는 나루터가 인상 깊게 새겨졌다. 삶과 죽음을 가르던 나루터이지 않은가. 수천 호법의 눈을 창기들에게 돌렸으니 수월하게 배를 탈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배를 탈 수 없었을 게다.
‘후후!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골치께나 아팠겠군. 그래 봤자 겨우 몇 시간을 벌었을 뿐이야. 이제 강심에서 부딪친다. 인원 점검이 있을 테고…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야 해.’
백하의 강심은 깊고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다. 아무리 유영에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백하의 강심에 빠져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적지인살은 사지를 스스로 택한 것이다. 적지인살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님들은 강변에 펼쳐진 풍경을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물로 갈 수 없다면 배에서 버티는 방법밖에 없겠는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보고 싶었다. 또 그래야 살 구멍도 생기는 것이고. 그는 선실로 발을 옮겼다. 선실에는 예쁘장한 소녀가 무언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하니?”
“아교를 보고 있었어요.”
음성도 꾀꼬리처럼 아름다웠다. 종리추였다. 종리추가 머리를 땋아 내리고, 여장을 했다. 그러고 보니 꼭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예쁜. 입고 있는 옷도 서민들은 입어볼 엄두도 못 내는 분홍색 비단 옷이었다.
“아교?”
“아무리 봐도 이 두 개가 구분되지 않아요. 다른 것 같기도 한데 똑같아 보여요.”
적지인살은 종리추에 대해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특이한 집중력이다. 종리추는 생각도 행동도 하나밖에 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우는 행동도 하지 않고, 아교를 들여다보면서 딴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아교를 들여다볼 때는 오로지 아교 속에만 파묻힌다. 정말 누가 잡아도 모를 만큼 푹 파묻힌다. 그러다가도 옆에서 말만 걸면 즉각 반응한다. 집중하던 곳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집중에서 두 번째 집중으로 넘어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집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적지인살은 어린아이에 불과한 종리추의 능력을 짐작하지 못했다.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도 추측하지 못했다. 세상에서 불가사의한 사람이 있다면 서슴지 않고 종리추를 꼽을 정도였다. 적지인살은 종리추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 후 경대 앞에 앉았다. 돈은 사람을 편하게 해준다. 선실만 해도 종리추가 감탄을 터뜨리며 펄쩍 뛸 만큼 편안하고 아늑했다.
“아교를 이리 가져와라.”
적지인살은 얼굴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아교의 끈끈한 접착 성분을 제거시키는 소청제를 발라가며. 주독에 걸린 듯한 얼굴 가죽이 벗겨지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청수해 보이는 중년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정성을 들여 다시 새 얼굴을 만들기 시작했다. 종리추의 집중이 다시 시작되었다. 얌전히 앉아 경대에 그려지는 얼굴을 보고 있지만 머리 속은 무섭게 돌아가고 있을 게다. 초벌로 아교를 얼마나 바르며, 어떤 끈기 상태에서 수액 굳은 것을 덮씌우는지… 그 위에 또 아교를 얼마나 바르며… 종리추의 눈빛은 호수처럼 맑고 또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