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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82화


“엇! 저, 저건!”

백천의는 앉아 있던 바위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운은 보지 못했지만 그는 예전부터 모도에 들어와 있었다. 현 상황을 천외천 명숙들에게 설명하고 자신은 원하는 바를 말했다. 비객이 무림 세력으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무림 판도를 비객이나 천외천이 바꿔서는 안 된다는 것도.

천외천 명숙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동의했다.

비객들 중에서도 정운이나 여숙상과 깊게 연결되지 않은 자들을 골라 설득했고 동의를 얻어냈다.

비객이나 천외천은 처음 가졌던 이상 그대로 숨어서 사마외도를 척결한다는 데.

살문과의 싸움은 정운에게 맡겼다. 천외천 고수들이 물러나면 싸울 사람은 정운밖에 없다. 그렇다고 사제가 죽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다.

정운은 이길 것이며 종리추는 죽을 것이다. 종리추가 빠진 살문은 정운의 편에 선 비객들만으로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으리라.

정운이 질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천외천 고수들을 물린 것은 정운에게 직접 싸우라는 간접 명령에 불과하다. 또 다른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천외천 고수들과 비객 무인들 상당수가 떨어져 나왔으니 마음을 돌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간접 권고이다.

모습을 숨기는 배려까지 해주었다. 앞에 나서면 정운을 적으로 돌리는 필연적인 상황이 전개되지만, 숨어서 드러내지 않으면 정운에게 다시 한 번 생각할 시간을 주게 된다. 정운이 마음만 돌리면 된다.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비객을 손아귀에 움켜쥐는 것은 이해해도 그들을 세력화하여 무림에 나서려는 생각만 버린다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사형제 간에 용서하지 못할 잘못이 어디 있으랴. 설혹 살인을 저질러 쫓기는 처지가 되더라도 사형제 간에는 감싸주어야 한다.

하물며 정운은 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

팔부령 살문 총단을 급습하고 살문 식솔을 모두 죽인 것은 큰 잘못이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그리 큰 잘못도 아니다. 만일을 위해 인질로 사용하겠다는 생각이 나약했는지도 모른다.

살문을 여기서 죽이면 된다. 이곳 모도에서 살문이란 이름을 지우면 된다. 그것이 백천의가 원하는 바였다.

정녕 사제를 죽음으로 내몰 생각은 없었다. 정운이 그랬듯 백천의도 죽은 천객들이 무공이 부족해서 죽었다고는 보지 않았다. 종리추가 무공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암습과 병행된 공격이 아니라면 천객을 죽일 수 없었으리라고 보았다. 세상에 누가 있어 천객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천객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천객뿐이다. 정운처럼 종리추와 대면한 상태라면 경각심을 가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백천의가 서 있는 곳처럼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종리추의 기도를 정확히 읽을 수 없다.

그것이 실수다. 실수가 정운을 죽게 했다.

종리추가 전개한 수법은 바로 하오문주의 한성천류비결, 일수비백비다.

아니다. 전혀 다르다. 하오문주의 일수비백비와는 천양지차다. 초식이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수비백비를 연성한 수준을 말하는 게다.

하오문주의 일수비백비는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자신이 막았으니 정운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정운은 막지 못했다. 결정적인 틈을 노리고 달려드는 비수에 목숨을 잃었다. 치달려오는 신형이 뒤로 퉁겨질 만큼 강한 힘이 깃든 비수에 당했다.

정운은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종리추를 죽일 수 있었다. 죽였다. 정운의 검을 맞은 종리추는 죽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음…!”

백천의는 신음을 토해냈다. 종리추의 일수비백비는 확실히 하오문주의 무공과는 다르다. 하오문주는 일수에 비수 백 개를 던져 냈지만 종리추는 열 개밖에 던지지 않았다. 하오문주의 비수는 모두 땅에 떨어졌지만 종리추의 비수는 모두 정운의 몸뚱이에 틀어박혔다. 열 개만 던졌다면… 다른 비수도 있으리라.

종리추는 허리를 내어줬다. 비수가 꽂혀 있는 허리를. 조금만 각도가 틀어져도 정말 척추가 잘려 나가는 위험한 모험이지만 훌륭히 성공시켰다.

무모한 방법이다. 정운이 한 치만 방향을 틀었어도….

‘아냐, 이건 무모한 방법이 아냐. 종리추, 저자는 정운의 검이 흐르는 방향을 읽었어. 비룡번신을 펼치기 전에 검이 흐르는 각도를 알아냈어. 모험이 아니라 치밀한 계산이야.’

백천의는 질투마저 느꼈다. 살수 몇 명을 데리고 모도에 들어온 것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하물며 정운과 싸운 방법은 두 번 다시 구경하지 못할 미련한 싸움이다. 미련한 짓을 과감하게 저지르는 종리추에게 왜 질투마저 느낀단 말인가.

‘저자를 상대할 자는 나뿐이야!’

백천의는 숨어 있는 곳에서 뛰쳐나와 달려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달려나가지 못했다.

“아!”

가벼운 탄성이 새어 나왔다.

모도 강변…. 그곳에는 천외천과 살문 살수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토록 금족령을 내렸는데도 무림군웅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배를 타고.

불길한 예감이 머리 속을 스쳐가는 것은 왜일까?

모도 강변에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흘렀다.

누구도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은 천객이 촌각 만에 죽었다. 팽팽한 긴장이 흐르지 않을 수 없다. 여숙상이 검을 뽑았다. 비객은 너나 할 것 없이 병기를 뽑아 들었다. 백천의에게 합류한 비객도, 정운에게 남았던 비객들도, 천외천 명숙들도 병장기를 움켜잡았다.

그들은 살문 살수들을 강변으로 끌어들인 이유를 알고 있다. 살수비기는 필요 없다. 무공 대 무공으로 싸워 죽이는 길만 남았다.

천외천 무인들은 병기를 뽑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섰다. 사정이야 어떻게 되었든 정운은 소림사룡 중 일 인이다. 천외천의 천객이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덤벼들지 못했다. 천객을 죽인 종리추의 무공은, 그것이 비록 기습에다 암기나 다름없는 비수를 사용한 것일지라도 놀라운 것이었다.

상대의 무공이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판가름할 수 있다. 모도 강변에 모인 사람들은 그만한 일은 짐작할 수 있는 무공을 지녔다. 다른 자들은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종리추에게만은 일 대 일 승부가 어려웠다. 살문 살수들도 준비를 갖췄다. 그들의 분노 역시 천외천 고수들 못지않게 컸다. 팔부령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몰사했다는 소식은 충격 중의 충격이다. 눈에서 피눈물이 쏟아질 만큼 고통스럽다. 소고가 검을 들고 일어섰다.

싸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지만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모진아도 의족에 의지해 일어섰다. 모도로 오는 동안 의족 사용 방법을 숙지해 놓았다. 두 발이 다 있을 때처럼 위력적이지는 못하겠지만 그 역시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살문 살수들에게 더욱 어렵게 되어갔다.

황하 저쪽에 남아 있던 군웅들이 떼를 지어 강을 건너왔다. 두세 명이 탄 배도 있고 십여 명이 탄 배도 있지만, 황하는 작고 큰 배들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살문 살수들은 독 안에 든 쥐다. 팔부령에서는 의지할 만한 지형이라도 있었고 비적마의가 큰 방패 역할을 해주었지만 모도 강변은 바람을 막아줄 나무 한 그루 없다. 살문 살수들은 마음이 급해졌고, 반대로 천외천 무인들은 침착함을 되찾았다.

무림군웅들이 모도 강변으로 들어서는 것은 천외천 무인들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의 계획 속에 들어 있지 않았다.

“음….! 너희는 빨리 가서 군웅들을 막아라!”

흑봉광괴가 주변에 늘어서 있는 비객에게 말했다. 사태가 어려워졌다.

살문 살수들에게도 어려웠지만 천외천 무인들에게도 어려워졌다. 천외천 무인들은 거의 대부분 소속 문파를 가지고 있다. 흑봉광괴는 개방, 비영파파는 공동파다. 철권 구양춘이나 천기신군 호종악의 경우에는 소속 문파가 없으니 행동이 자유롭지만 소속 문파가 있는 무인들은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천외천 명숙들의 신분은 거의 노출되었다. 하지만 소문일 뿐이다.

사문도, 무림군웅들도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천외천 명숙들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소속 문파에서 쉬쉬하며 감싸주고 있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실체를 확인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개방 문도이면서 천외천이라는 개방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집단에 가입했다는 것은 파문 조치에 해당된다. 장문인이 인정을 베풀어 면벽 몇 년 정도로 간단한 조처를 취할 수도 있지만 심한 경우에는 문파에서도 축출된다. 사문에서 익힌 무공을 사용할 수 없게 절맥될 수도 있고, 평생 옥에 갇혀 지낼 수도 있다. 실체가 확인되고 나면 좋든 싫든 장문인은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비객들은 한달음에 달려나가 모도 강변에 접안하려는 배들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철권 구양춘을 비롯하여 소속 문파가 없는 무인들도 사태를 짐작하고 힘을 보탰다. 살문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목전의 일인데, 엉뚱한 일에 힘을 분산시켜 버린 것이다. 비영파파가 여숙상과 비객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이오. 전에 비해 무공이 한층 진일보했구려. 이제는 나 같은 노파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

“과분한 말씀.”

종리추는 전혀 숨이 차 보이지 않았다. 정운을 상대하기 이전부터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가 한 행동이라고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 비룡번신이란 신법을 구사했고 비도 몇 개를 던진 것뿐이니 숨이 찰 리가 없다.

“천외천이 살수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면서 모도까지 들어오다니 대단한 뱃심이오. 노신 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거지.”

비영파파가 인상을 찡그렸다.

적아를 불문하고 무림에는 배분이라는 것이 있다. 죽고 죽이는 비정한 생태 속에서도 배분만은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이 예의다 한데 종리추는 그것마저 인정하지 않고 있다.

“군웅들을 모도로 끌어들인 게 소협이오?”

“그럼 어때서? 가릴 게 없는 사람은 하늘을 떳떳하게 볼 수 있어.”

“뼈 있는 말씀이오.”

“후후후,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싸우든지 싸움을 잠시 미루든지. 그 말을 하려는 것 아닌가?”

비영파파는 싸움을 잠시 물리고 싶었다. 비영파파 뿐만이 아니라 모도에 있는 천외천 명숙들의 생각은 한결같았다. 군웅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천외천 무인으로 싸울 수는 없다.

살문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싸움이 끝난 후의 입지도 생각해야 한다.

악이 미워 천외천에 가입했다. 그렇다고 사문을 등지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사문이란 고향이다. 인생을 살아온 보람이며 생을 마칠 곳이다.

사문에 머물면서도 악을 징치할 수 있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 연락을 주고받으며 사마외도를 타도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천외천의 뜻이었다.

형제나 다름없는, 자식이나 다름없는 사형, 사제, 제자들을 버리는 것은 큰 결단이다. 버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들과 검을 맞댈 수도 있으니 문제다. 비영파파는 싸움을 한 시진만 미루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서 앞으로 나선 것이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모도로 들어선 것은 살문을 핍박하는 천외천 고수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지. 천외천 천주하고 이야기하고 싶군.”

비영파파는 노기를 띠었다. 종리추는 자신에게 천외천 고수임을 자인하라고 핍박하고 있다.

“건방진 놈!”

“시간 낭비할 생각 없다. 천주가 아니라면 비켜라.”

종리추의 음성이 모도를 쩌렁 울렸다. 일부러 진기를 실어낸 음성이다.

효과는 컸다. 배에서 막 내려 모도 강변으로 올라서던 군웅들이 움찔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도 강변을 밟았다. 배는 계속 대어지고 무인들이 속속 몸을 날려온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다. 종리추가 모자도를 향해 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중도에서 공격을 가한 무인들도 있지만, 많은 무인들이 종리추가 모자도로 들어서는 시각에 맞춰서 당도했다.

개별적으로 살문을 공격했다가는 낭패만 당한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했다.

하후가와 양가의 연합을 물리쳤고, 구파일방의 후기지수들로 결성된 비객이 무너졌다. 그들 중 어느 한 사람 자신들에 비해 넘치면 넘쳤지 모자라는 사람들이 없으니 중도에서 길을 가로막고 공격을 가할 사람은 지극히 드물었다.

무인들은 모도 강변에 발을 딛자마자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일부는 배가 닿기도 전에 병장기를 뽑아 든 자도 있었다. 배들이 밀려 쉽게 닿지 못하자 물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오는 무인도 있었다.

살문 살수들은 포위되었다. 한 사람, 두 사람, 사람이 늘어감에 따라 포위망은 자연스럽게 좁혀졌다.

누구든 고함 한 번 지르면 당장 싸움이 벌어질 판국이다.

비객들이 동분서주하며 접안하는 배들을 돌려보내고 있지만 한 손으로 열 손을 감당해 낼 수는 없다.

종리추의 고함 소리는 군웅들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 그들의 시선은 일제히 종리추와 대면하고 있는 비영파파에게로 향했다. 소문으로만 회자되던 천외천의 비밀을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비영파파는 뒤로 물러섰다. 군웅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중에는 공동파 문도도 있을 터인데 그 앞에서 천외천 문도임을 자인할 수는 없다.

여숙상도 사태를 짐작했다.

‘몸보신에 급급한 늙은이들. 사문이 뭐 그렇게 중요해. 돌아가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파문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어차피 천외천 무인이 되었으면 끓는 기름 속도 들어갈 각오를 했던 것 아냐?’

여숙상은 사문도 유지하고 천외천 명숙 자리도 탐하는 노선배들이 가증스러워 보였다. 사문을 유지하겠다는 것이 꼭 무림에서 얻은 배분과 명성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공격하는 게 어때? 종리추, 저놈에게 몇 명이 죽겠지만 난전으로 이끌면 모두 공격할 수밖에 없어. 등을 돌린 비객이나 천외천 모두. 불만 붙이면 될 것 같은데? 저들도 합류하면 살문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옆에 있는 비객에게 말했다.

“정운이 죽었으니 구진법은…”

비객은 망설였다.

여숙상은 백천의를 떠올렸다. 정운이나 백천의나 똑같은 사내다.

여숙상은 판단력을 잃었다. 정운이 죽는 순간 자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구진법까지 날아갔다는 충격이 올바른 판단력을 저해시켰다. 구진법이 없는 비객은 힘이 없다. 기재라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사문 명숙들과 비교할 때 한 수 뒤진 무공을 지닌 게 사실이다. 구진법이 있어야 한다. 구진법이.

“백천의가 있잖아. 우선 살문부터 정리하고 백천의는 내가 어떻게 요리해 볼게. 늙은이들이 뒤로 물러서고 있으니, 가만 내버려 두면 아예 싸움도 없을걸? 살수 놈들이 모도에 발을 디뎠는데 얌전히 돌려보내면 체면이 안 서지.”

“좋아. 그럼 공격하지.”

“그래. 천외천 늙은이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기습적으로 공격해. 가급적 피를 보는 게 좋아. 군중 심리란 피에 열광하게 되어 있으니까. 저 계집…. 저 계집부터 죽이는 거야. 그럼 난전이 되게 되어 있어.”

여숙상이 소고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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