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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83화


종리추는 천외천 천주를 찾았다.

하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다. 군웅들을 제지하던 철권 구양춘이 상황을 짐작하고 앞으로 나섰다.

“내가 천주다. 살수 놈이 내게 볼일이 뭐냐!”

철권 구양춘의 큼지막한 주먹 관절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문을 핍박하는 이유가 듣고 싶어서. 왜 살문을 공격하는 거지? 무인이라면 비무를 청해왔어야지. 비겁하게 암습을 가해온다는 것은 살문을 초토화시키겠다는 뜻. 이유나 알고 당해야겠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찾아왔지.”

“뭐야? 살수 놈이 감히!”

“닥쳐!”

철권 구양춘의 안색이 샛노래졌다.

배분으로만 따져도 한참 아래 후배다. 배분을 논할 것도 없다. 살수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대꾸 한마디 못해야 한다. 살수 놈 주제에 모자도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적부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라는 것은 인지했지만 이토록 안하무인이라니!

“누가 살수인가! 청부를 목격하기라도 했는가?!”

종리추의 얼굴에 서릿발이 맺혔다. 그럴수록 철권 구양춘의 얼굴은 새하얘졌다.

종리추는 살문이 살수 문파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살문이 살수 문파라는 것은 중원무림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뻔뻔스럽게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우습게도 천외천 무인들은 그 말에 대답할 말이 없다.

“네놈은 혈영신마를….”

“혈영신마. 좋지. 소위 협의를 숭앙한다는 정도문파 사람들이 정당한 비무를 복수극으로 몰아간 것도 모자라서 합공을 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십망을 선포해 무림공적을 만든 것이 잘한 일인가! 혈영신마는 정당하게 비무했다. 혈첩을 전달해서 정당하게 치른 비무였다.”

이번에는 철권뿐만이 아니라 천외천 명숙들의 안색까지 변했다.

비로소 안 것이다.

모도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무엇인가 꿍꿍이속이 있으려니 생각했지만 이것일 줄은 몰랐다. 종리추는 싸우려고 모도로 온 것이 아니다. 종리추는 천외천과 비객이 가진 명분을 빼앗으려고 왔다.

“당했어. 꼼짝없이…!”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살문이 살수 문파라는 것은 비밀도 아니다. 무림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태연히 죽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살문 살수들을 죽이는 데는 명분이고 자시고 필요 없다고.

살문이 살수 문파가 아니라고 하나 터무니없는 말. 하지만 그 말을 반박할 증거가 없으니….

살문은 팔부령 대래봉에서 청부를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청부를 넣었다. 은자도 지불했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증언을 끌어내지는 않았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실수다. 삼절기인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다시 목격한 바를 말했겠지만, 살절기인은 자신의 청부에 자신이 죽었다.

“혈영신공이 어째서 마공인가! 부단한 노력 끝에 얻은 무공이 마공인가! 심성이 변하던가! 혈영신공을 그렇게밖에 보지 않았던가! 혈영신마의 심성이 변했다면 무림은 벌써 피로 물들었을 것. 내 말이 틀렸는가! 양심으로 말해 보라. 혈영신공이 마공인지!”

종리추는 거침없었다.

“네, 네놈은 벽도삼걸을 죽이고 인피면구를….”

철권 구양춘이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종리추가 벽도삼걸을 죽이고 그들의 얼굴 가죽을 벗겨 인피면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무림인 아닌 일반 평민들도 알고 있다. 당시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금수도 못 할 짓이라면서. 더군다나 하후 가주가 그 일로 인해 하후가를 봉문하고 복수의 길로 들어선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후 가주는 진실을 알고 문도를 물렸다. 백석강에서 무엇 때문에 물러갔다고 생각하는가! 혼세천왕!”

“넷!”

우람한 덩치가 앞으로 쑥 나섰다.

“포대를 내려놔!”

“넷! 존명!”

혼세천왕은 등에 매고 있던 커다란 자루를 내려놓았다. 종리추가 살문을 살려줄 것이라던 포대 자루. 무림인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포대 속에 무엇이 들어 있단 말인가. 반면에 살문 살수들은 바짝 긴장했다.

지금이… 지금이 죽을 순간이다. 혼세천왕이 폭사하는 순간 신형을 날려 적을 쳐 나가야 한다.

“어?”

혼세천왕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공할 병기나 화약…. 이런 것을 기대했는데, 자루 속에는 서신 뭉치로 가득했다. 어쩐지… 화약치고는 너무 가볍다 싶더라니.

“벽도삼걸을 찾아라.”

“네? 네네.”

혼세천왕은 어리둥절해서 허둥댔다.

포대 속을 뒤지면서 일면으로는 종리추의 얼굴을, 또 군웅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폭사를 각오했는데 서신 더미를 뒤적이다니. 그는 어렵지 않게 겉봉에 ‘벽도삼걸’이라고 쓰인 서신을 찾아냈다.

“찾았습니다.”

“개봉해!”

혼세천왕이 서신을 펼쳤다.

“아!”

서신을 흘낏 읽어가던 혼세천왕이 탄성을 터트렸다. 입가에는 가는 미소까지 매달면서.

“읽어라!”

명령을 내리지 않았어도 읽을 참이었다. 읽지 않고는 입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을 지경이다.

“하후량, 을유년, 서재에서 하천화 간(姦). 동년 하우민 연공실에서 하천화 간. 병술년 하후광 침실에서 하천화 간.”

혼세천왕은 서신에 적힌 글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군웅들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을유년이라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을유년은 영락 삼년으로 하후 가주의 장남인 하후량이 혼인을 한 해다.

더욱 사람을 경악스럽게 만드는 것은 하천화가 하후가 삼형제의 의붓동생이라는 것이다.

하후 가주는 딸을 원했으나 부인들과 다섯 명에 이르는 첩들은 한결같이 아들만 낳았다. 그러나 인연이란 땅이 맺어주는 법도 있는 것, 하후 가주는 입에 풀칠도 못 하는 빈곤한 집에서 예쁜 딸아이를 발견했고 사 왔다.

그 아이가 하천화이다. 하후 가주는 하천화를 무척 예뻐했다. 사내와는 다르게 간살을 떠는 모습을 보고는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오죽 예뻐했으면 이름도 천화라고 지었을까.

“기축년 하후량 후원에서 하천화 간….”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천화는 무자년에 혼인했다. 하후가처럼 명망 높은 가문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인들에게는 꽤나 알려진 송양 민가의 둘째 자식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기축년이라면 무자년 다음 해다. 하후가 삼형제는 의붓동생인 하천화를 농락했다. 패륜이다. 혼인 전이라도 큰 문제일 텐데 혼인 후까지 농락을 했으니. 남편이 있는 여자를, 그것도 의붓동생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청부를 넣었다면 누가 넣었는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하천화의 남편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혼세천왕은 근 십여 년간에 걸친 패륜지사를 읽었다. 어떨 때는 하후량이, 어떨 때에는 하후광이, 또 하후민이….

하후 가주는 이러한 패륜을 알고 있었을 게다. 그렇기에 종리추의 귓속말 한마디에 하후가 무인들을 물렸겠지. 또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혼세천왕이 가져온 포대 자루 속에는 그동안 청부를 했던 수많은 무인들의 기록 역시 담겨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비밀은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 목숨을 부지시켜 주는 구명줄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목숨을 빼앗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종리추는 미련한 자가 아니다. 자신이 가진 비밀을 공공연하게 풀어놓을 자가 아니다. 살문 살수들을 죽이고 포대 자루에 든 서신을 불태운다 해도 어디선가 똑같은 괴서신이 나돌게 되리라. 자루 속에는 청부 대상자는 물론이고 청부자의 신상 내력까지 소상히 담겨 있으리라.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살수 문파에게 청부를 할 적에 가장 염려했던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혼세천왕이 읽기를 마치고 서신을 포대 자루 속에 넣었다. 마치 더러운 물건 만지듯 손가락 끝으로 살짝 잡고.

“패륜지악을 저지른 자들이다. 인간이 아닌 금수다. 죽어서나마 그들의 인피가 혈영신마를 구하는 데 쓰였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자, 이제는 천주가 말할 차례인 것 같은데? 왜 살문을 공격하는 건가!”

“네놈은 소림오선사를…”

“공격해 오는데 앉아서 죽어야 하는가! 잘못된 십망이라고 구구히 설명한다고 해서 믿어주겠는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격해 오면 응대한다. 앉아서 죽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든 공격하고 싶은 사람은 명분부터 말하라. 그대들이 파락호 같은 무림 패거리가 아니라 정도무인들이라고 자부한다면.”

사태가 이상하게 변했다.

종리추의 말은 분명히 궤변인데 반박할 말이나 증거가 없다. 살문 살수에게 죽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또는 확신하는 사람들은 많이 생각난다. 하지만 그들이 거론한다면 아마도 두 번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벽도삼걸처럼.

철권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명분 없이 공격할 수는 없다. 그럴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다.

비무.

“난전으로, 피를 보면 군중들은 흥분하게 되어 있으니까.”

“상황이 아무래도….”

“쓸데없는 소리! 배짱이 없으면 물러서. 내가 불을 붙일 테니까.”

“으음..! 좋아. 하지. 백천의만 책임져. 나중에 군말하면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여숙상과 비객은 주의해서 들어야 간신히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청성파에는 향후 청성파를 이끌어갈 열 명의 기재가 있다. 무림인은 그들을 청성십도라고 부른다. 여숙상과 말을 나누는 비객도 청성십도 중 한 명이다.

유운 도인이라는 도명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청성십도 중 넷째 유운 도인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리 없다. 그는 여숙상이 어떤 방법으로 정운을 사로잡았는지 알고 있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백천의에게서 구진법을 얻어낼 유일한 방법인 것은 틀림없다. 구진법을 얻어야 한다.

살문 살수들에게조차 맥없이 쓰러져 가는 비객이 아니라 이런 놈들쯤은 웃으면서 베어 버릴 수 있는 천객이 되어야 한다. 유운 도인은 눈짓을 보냈다.

쒜엑! 쒜에에엑….!

유운 도인은 자신 있게 일검을 뻗어냈다. 손에 익을 대로 익은 칠십이파검이다.

일검만 들어가면 끊임없이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칠십이 검이 밀고 들어간다. 일검보다 이검의 위력이 더욱 강하며, 이검보다는 삼검이 훨씬 강하다. 칠십이파검은 모든 초식이 공격과 동시에 뒷초식이 위력을 발전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싫어. 나 아파.”

유운 도인은 느닷없는 칭얼거림에 깜짝 놀랐다. 소고의 눈을 보았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던가? 여숙상도 빼어난 미인이지만 소고의 아름다움에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는데, 지척에서 보니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모두 조각 같다.

“나 지금 검을 들고 있을 힘도 없어. 살수도 싫고 싸움도 싫어. 모두 다 싫어. 그런데 왜 나를 죽이려고 그래?”

유운 도인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 그건 네가 살문….”

말을 잇던 유운 도인은 ‘아차!’ 싶었다.

“넌 살수야.”

“살수니까.”

소고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여럿이다. 소고를 급습한 비객 네 명이 동시에 입을 열어 대답했다. 이건 명백한 실수다. 무엇인가 잘못됐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금방 알았다. 칠십이파검을 소고를 향해 가지 않고 방향을 꺾어 허공으로 흐르고 있다. 쉬익!

시디시린 한광이 흘러왔다. 눈에 불똥이 튀고 땀이나 물과는 전혀 다른 끈끈한 액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상이 캄캄해졌다.

‘이게 죽는 건가?’

유운 도인은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고통 없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으니까.

“어엇!”

유운 도인이 쓰러짐과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다급한 비명이 터졌다. 그는 유운 도인처럼 당하지 않았다. 한광이 흘러온다 싶은 순간 신형을 뒤로 물렸고, 소고의 검은 아슬아슬하게 목젖을 스쳐갔다.

전신에서 소름이 오싹 돋았다. 검이 한 치만 깊게 다가왔어도 턱 밑에 또 하나의 입이 생길 뻔했다. 목숨에 지장이 없어서 그렇지 입이 생기기는 했다. 실낱같이 가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니.

소고는 식은땀을 흘렸다. 진기 운용을 삼가야 할 몸인데 억지로 과도하게 진기를 운용했더니 속이 울렁거린다. 토할 것 같고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 정기신이 하나라는 기본적인 무리를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다.

서서 당할 수만은 없기에 일검을 뻗어냈지만, 네 명 중 한 명을 놓쳤다.

‘맞았어! 이게 진정한 혈뢰삼벽이야. 몸만 정상이었더라면…’

내심 아깝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전 같으면 두 명은 베고 두 명은 놓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이 정상이 아닌데도 한 명밖에 놓치지 않았다. 길을 오면서 수련한 것이 옳았다. 그때 얻은 감흥이 혈뢰삼벽을 진일보시켜 주었다. 쒜익! 쒜에엑…!

소고는 이검을 전개할 시간적인 여유마저 잃었다. 살문 살수들이 황급히 다가와 그녀를 둘러쌌다. 광부가 벽력사부를 들고 주위 군웅들을 노려보았다. 음양철극이 쌍극을 들고 주위를 훑었다. 한 번 기습은 용서하지만 두 번째 기습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소고가 유운 도인의 공격을 받을 때 좌리살검은 여숙상의 공격을 받았다. 비객 무인들 이십여 명이 병기를 꺼내 들고 틈을 살피는 동안 여숙상은 비객 다섯 명과 함께 검을 날렸다. 그녀는 이번 공격에서 전신 진기를 모두 쏟아냈다.

초식도 이십사수 매화검법 중 살초에 해당하는 매화비산을 펼쳤다.

초식의 형상이 꼭 매화 꽃잎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모습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검끝이 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며 다섯 방위를 점하니, 어느 것이 실초이고 허초인지 구분할 수 없다. 병장기로 검을 막을 수도 없다. 검과 병장기가 부딪치는 순간 허초를 때렸을 때는 실초가, 실초를 때렸을 때는 허초가 실초로 변환한다. 문제는 너무 순간적인 변환이라 시전자조차도 위력을 조절할 수 없다. 매화비산을 펼치면 반드시 죽이든가 죽든가 양단간 결단이 난다.

여숙상과 함께 몸을 날린 다섯 비객도 각기 문파에서는 최고를 다투는 영걸들이다. 아미파의 절학도 쏟아져 나오고, 무당파의 대라검법도 모습을 드러냈다.

합격도 완벽하다. 각기 다른 문파에서 다른 무공을 수련한 여섯 명이지만 마치 한 사부에게서 수련한 듯 일사불란하다. 좌리살검이 몸을 뺄 공간은 없다.

전후좌우 상하가 모두 막혔다. 좌리살검은 당황하지 않았다. 살문 살수들은 이러한 합격을 대비해 충분히 수련했다. 무공의 고하를 가를 수는 없지만, 일단 모두 상수(上手)로 봐야 한다. 상수가 합격을 가해오는데 살길이 어디 있으랴. 한 명만 잡으면 된다. 한 명만. 그러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 게다.

좌리살검은 전면에서 짓쳐오는 여숙상을 노렸다.

파앗!

좌리살검은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다. 오래전에 죽은 천왕검제는 좌리살검에게 좋은 무공을 선물했다.

천왕구식

천왕검제의 가공할 거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검법이다.

좌리살검에게는 천왕검제와 같은 신력이 없다. 그것 때문에 한때 고개를 갸웃거린 적도 있다.

‘이건 내가 아니라 혼세천왕이 익혀야 할 무공 아닌가? 아니면 유회 형님이나. 신력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제 위력이 나오는 검법인데….’

초식의 정교함보다는 패력을 위주로 한 검법. 그러나 수련을 중단하지는 않았다. 문주가 익히라고 했으면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게다. 다른 살수들에게는 병기를 취하라고 했으면서 자신에게는 무공을 수련하라고 했으니.

일 년이 거의 지나갈 무렵 좌리살검은 종리추의 뜻을 이해했다.

신력을 바탕으로 펼치는 검법이나 고스란히 따라 할 필요는 없다. 천왕구식은 펼치는 순간 강력한 위력이 발출된다. 천왕검제처럼 역사이거나 내공이 심후하다면 끝까지 펼칠 수 있지만 좌리살검처럼 역사도 아니고 내공도 두각을 나타낼 정도가 아니라면 마무리를 지을 수 없다. 초식이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는 도중 위력이 흩어진다. 초식은 헝클어지고 크나큰 틈이 생긴다. 누구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달려들 게다. 거력으로 다가오던 검이 갑자기 미약해지면, 좌리살검은 그걸 노린다. 검이 다가오는 순간 그의 묵린검에서는 묵린이 발출된다. 적은 몸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으니 몸을 뺄 여유가 없다. 실에서 허로, 허에서 다시 실로 변환하는 암공이다.

여숙상의 입가에 미소가 일렁거렸다. 검에 실린 진기가 흩어져 검끝이 흔들리고 있으니 당연히 웃음이 나올 게다.

쒸이익!

좌리살검은 여숙상의 검에 부딪쳐 갔다. 그때.

“안 돼!”

더 멀리서 누군가가 거센 고함을 질렀다.

‘구류?’

좌리살검은 한 번에 구류검수의 음성을 알아들었다. 살문 살수 중에서도 나이가 같아 가장 뜻이 잘 맞는 친구이니 음성을 모를 리 없다.

좌리살검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대로 검을 뻗으면 여숙상은 죽는다. 또한 자신도 죽는다. 검을 회수하면 자신만 죽는다. 구류검수가 왜 고함을 질렀을까? 자신의 죽음이 안타까워서? 살문 살수가 죽음에 임하는데,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적을 끌고 가는데 안타까울 리 없다.

그러면…..여숙상이다. 구류검수는 여숙상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 눈 한 번 깜짝이는 것보다 짧은 순간이지만 좌리살검의 머리 속에는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제길! 네놈이 끝내….’

좌리살검은 손에 든 묵린검을 위로 치켜올렸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을 향해. 그리고 기다렸다. 검이 틀어박히기를.

‘더럽게 아프던데….’

오른팔을 잃을 때 그랬다. 뼛골까지 욱신거리고 전신 근육이 모두 뒤틀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때는 육신의 일부가 잘렸을 때이고, 사검을 맞으면 조금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탕! 탕탕! 탕탕탕…!

쇠와 쇠가 부딪치는 묘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좌리살검은 옆구리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살았어!’

옆구리에 틀어박힌 검은 쑤셔 박히는 검이 아니라 흘러가는 검이다. 들어오는 검과 나가는 검 정도는 직감할 수 있다. 좌리살검은 다시 한번 허공으로 도약하여 세류비요라는 신법을 펼쳤다.

쉬이익!

얼굴은 하늘로, 등은 지면을 향한 채 뒤로 쑥 날아간 좌리살검은 몸을 한 번 비틀며 착지했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자신을 공격했던 여숙상과 다섯 비객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다.

격전을 벌였던 곳에는 자루가 없는 날만 있는 작은 비수가 떨어져 있다.

‘주공!’

좌리살검은 종리추에게 감사의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 곧 소리가 들려왔던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구류검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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