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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84화


저벅! 저벅!

좌리살검은 눈에서 살광을 뿜어내며 걸었다.

앞을 가로막는 자는 모두 죽여 버리겠다는 독한 심성이 눈길에 묻어났다.

군웅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 비객들 앞에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가타부타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그들의 틈바구니로 태연히 들어섰다.

누구든 병기만 뻗으면 좌리살검을 죽일 수 있다. 좌리살검은 거무튀튀한 검을 들고 있지만 싸울 의도에서 뽑은 것은 아니다. 먼저의 일전에서 뽑은 검을 집어넣지 못하고 들고 있을 뿐. 그의 눈에서 뿜어지는 살광은 중원무림인들에 대한 분노일 테고.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살문주는 명분을 대라고 했는데 비객은 명분조차 대지 않은 채 기습을 가했다. 성공했다면 체면이라도 섰을 텐데, 세 명이 죽고 나머지는 물러서고 말았다. 무림군웅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그러나 비객들이 정작 손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지렁이처럼 전신을 이용해 기어나온 구류검수를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모도에 저런 자가 있었던가?

살문 살수들이 눈에 불을 켜는 것으로 보아 살문과 인연이 있는 자인 것 같은데… 비객들은 마침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자의 신분을 짐작해 냈다.

‘구류검수….’

여숙상이 비객 칠조를 이끌고 팔부령에 다녀온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또한 그녀를 강간했던 구류검수를 산 채로 생포해 온 사실도.

여숙상이 팔부령에서 돌아와 비객들과 합류한 다음에도 구류검수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궁금하기는 했지만 자칫 여숙상의 아픈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다는 물음이다.

소문은 무성했다. 살점을 한 점 한 점 도려낸다는 말도 있었고, 깨끗이 목을 잘라 버렸다는 말도 있었다. 화산파로 압송했다는 말도 있었지만 비객의 신분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객은 문파와 단절된 사람들이니까. 수많은 유언 중에 제일 신빙성 있는 말은 마차에 태우고 다니며 과거의 잘못을 회개시킨다는 말이다. 그 말만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여숙상은 검은 휘장으로 창문을 모두 봉쇄한 마차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마치 십망을 당한 듯 사지를 못 쓰고 몸으로 엉금엉금 기고 있는 저자가 구류검수란 말인가! 여숙상이 구류검수를 저렇게 만들어놨단 말인가? 청초하다 못해 버들가지처럼 가녀려 보이는 여숙상이?

좌리살검은 구류검수에게 다가가 몸을 안아 일으켰다.

“이거야?”

“오랜만이야.”

“이거냐고! 네가 용서를 빌겠다는 게!”

“아직…. 아직 다 못 빌었어.”

“미친놈! 빌어먹을 놈!”

“그러지 마. 마지막으로 주공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가자. 주공이 저기 계셔.”

“아니, 얼굴을 뵈었으니 됐어. 난 남아야 돼. 후후후! 이제야 알겠어. 난 한 여자의 몸을 취한 게 아니었어. 한 여자의 일생을 망가뜨린 거였어. 후후!”

좌리살검은 구류검수의 몸을 안아 일으켜 종리추가 잘 보이도록 앉혔다.

“주공이 보여?”

“응.”

“주공이…. 손짓하고 있어. 오라고.”

“못 가.”

“미친놈! 네가 안 간다고 해도 내가 데려갈 거야. 이대로 둘 수 없어. 넌 충분히 용서를 빌었어. 빌었단 말야. 미친놈아!”

좌리살검은 구류검수를 안아 들었다.

구류검수가 싫다는 의사 표시로 고개를 내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좌리살검은 막무가내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포기했는지 여숙상을 찾았다.

“호호호호!”

여숙상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모든 꿈이 날아갔다. 난전을 불러 무림군웅들을 동요시키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더군다나 원수는 끝까지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얌전히 틀어박혀 있을 일이지 무엇 때문에 기어나온단 말인가.

여숙상은 비객 무리에 머물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천외천도 비객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마당에 백천의를 만나 어쩌겠다는 생각은 더 더욱 하지 못했다.

‘모두 저놈 때문이야. 저놈!’

여숙상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좌리살검은 구류검수를 질질 끌다시피 데려가고 있었다. 왼팔만 있는 그로서는 장정 한 명을 안아서 데려간다는 게 용이치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사지를 못 쓰는 인간이라면.

구류검수가 여숙상 앞을 지날 때,

쒜에엑….!

여숙상은 독검을 날렸다. 아마도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펼치는 검공이 될지도 모르지만 구류검수만은 죽여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죽여 버리는 건데.

좌리살검이 사태를 직감하고 몸을 돌렸다.

피윳!

여숙상의 일검은 좌리살검의 등을 길게 찢어 놓았다.

“안 돼! 제발!”

구류검수가 소리쳤다.

“사매, 사매! 제발! 내 목숨은 사매 거야! 사매에게 줄 테니, 제발…. 제발 그러지 마”

마지막 말은 절규에 가까웠다.

쒜에엑…!

두 번째 검이 날았다. 여숙상은 이를 악물고 좌리살검과 구류검수를 동시에 베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검은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파라랑….!

허공을 찢는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파공음은 정확히 여숙상에게 다가왔고 그녀의 검을 밀쳐 냈다.

따앙! 따아앙!

첫 번째 소리는 검을 밀쳐 내는 소리다. 두 번째는 여숙상의 검을 반 토막으로 분질러 버리는 소리다.

“휴우! 그만하시게.”

청노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여숙상의 검을 제지한 사람은 뜻밖에도 비영파파였다. 비영파파가 그녀의 독문병기인 월영반을 날려 검을 막았고, 분질렀다.

종리추의 명분 논리에 이어 구류검수의 처절한 육신까지… 비객과 천외천 무인들은 철저히 당했다. 더 이상 살문을 향해 검을 들이댈 수가 없는 처지에 빠졌다.

혼세천왕이 다가와 구류검수의 육신을 받아 들었다.

“주공!”

산만큼 큼지막한 사내가 울먹였다.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음! 괜찮다면….. 돌아가게. 하지만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말게. 조만간 정식으로 비무를 청할 테니.”

“그 말을 믿지. 앞으로 살문에서 청부 살인을 했다는 확증을 잡기 전에는 비겁하게 암습하는 일이 없도록.”

종리추는 당당했다.

‘사면초가…. 이래서는 군웅들의 동조를 얻어낼 수 없다. 약은 놈… 간특한 놈…’

철권 구양춘은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종리추는 그런 구양춘을 힐끔 쳐다본 후 등을 돌렸다. 적 앞에서 등을 보인 것이다. 그것은 그만큼 자신 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호호호호!”

여숙상이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모도를 울렸다.

군웅들도 살문 살수들의 길을 막지 않았다. 한 사람이 다가오면 한 사람이 물러섰고… 그러다가 길을 내주었다.

모도에 모인 군웅들은 거의 같은 생각을 했다.

‘살문은 큰 두통거리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이 검을 들고 모도로 달려온 것은 살문에 직간접적으로 원한이 있기 때문이다. 친구가, 자식이, 아는 사람이 살수들에게 죽었다.

살문이 죽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살수들이란 모두 한통속 아닌가.

그런데 살문이 비사를 지니고 있으니.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은 하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 지인이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없다. 살문이 비사를 공개라도 한다면….

‘죽여야 돼, 소리 소문 없이!’

생각은 같았지만 지금은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다. 원통하지만..

“허! 허!….!”

백천의는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두 번째 완패다.

천음 백석강에서 하후가와 양가가 물러섰을 때 왜 물러섰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았어야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후 가주가 죽었는데도 문도라는 사람들이 가주의 명 한마디에 썰물처럼 빠져나갔으니,

벽도삼걸이 그런 위인이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지만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종리추의 말이 완전한 거짓이라면 하후 가주가 귓속말 몇 마디에 문도를 물릴 리 없다. 그때만 이유를 알았어도 오늘 같은 참패는 당하지 않았을 텐데.

백천의는 종리추가 배를 타고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모도에 발을 디뎠던 군웅들도 한 명 두 명 자리를 떴다.

모두 착잡한 표정들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비객도, 천외천 고수들도 썩은 감을 베어 문 듯 떫은 표정들이다.

살문을 끝장내는 날인 줄 알았는데 망신만 당한 날이 되었다. 백천의는 강변으로 걸어갔다. 제일 먼저 죽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운은 말 그대로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 있다. 전신에서는 붉은 핏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백천의는 땅에 떨어진 비수 하나를 들어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하오문주의 비수와는 다르다. 두께도 매미 날개처럼 얇고 길이도 자루를 없애 훨씬 짧다. 정운은 비수에 죽었지만 비수는 보이지 않는다. 모두 몸속으로 파고든 게다. 묵월광의 소고가 전개한 검법은 과거 십망을 받았던 혈암검귀의 혈뢰삼벽이 틀림없다. 혈암검귀와 맞선 자들은 모두 공격을 주춤거렸다고 한다.

알지 못할 힘에 의해 공격의 맥이 끊겼고, 혈암검귀는 그 틈을 노리고 일검을 가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혈암검귀의 무공은 정도가 아닌 사도로 낙인찍혔다.

소고가 바로 그 검을 전개했다.

좌리살검은 또 어떤가.

여숙상은 죽을 뻔했다. 구류검수가 나서지 않았다면 동귀어진이 분명했다.

비객이라는 사람이, 은신술을 펼치지도 못하는 지형에서 검을 맞댔는데 동귀어진이라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리인가.

여숙상은 깨달았을지 모르지만 백천의는 분명히 보았다. ‘안 돼’ 하는 소리에 묵검이 허공으로 쳐 들리는 것을.

‘명분… 이거였군. 이것 때문에 사숙이 살문을 치지 못한 거야. 팔부령을 에워쌌으면서도 치지 못한 이유가 이것이었어. 바보같이 이제야 깨닫다니….’

그토록 원망했던 사숙, 사백, 사형제인데… 그들은 한 수 앞을 보고 있었다.

십망이 통했을 때는 십망이라는 이름 하에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구파일방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무림인이 십망이라는 이름으로 뭉쳤다.

십망 대상자는 무조건 척살당한다. 잘잘못은 나중에 따진다. 우선은 공격을 했고, 그런 방식이 통용되었다. 십망이 거둬진 다음에는 사태가 달라졌다.

살문이 청부 살인을 했다는 확증을 잡지 못하는 한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 살수들의 방식대로, 천외천의 초심대로 암습이나 기타 방법을 총동원하여 죽인다면 몰라도 공공연히 내놓고 기습을 할 수는 없다.

육십칠 단승과 백팔 나한…. 그들의 생각이 일면 옳아 보이기도 한다.

소림승들이 암습을 할 리는 없으니 정당한 비무로 살문도를 척살하는 길밖에 없으리라.

문득 백천의는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소림승들은 팔부령을 에워싸고 있다.

그들은 살문이 중원을 횡행하도록 방치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암중으로 살문도들의 청부 살인 현장을 포착하지는 않았을까?

‘사숙을 만나 봐야겠군.’

백천의는 만지작거리던 비수를 던져 버렸다.

그의 시선이 여숙상에게 향했다.

“아직도 남아 있었나? 비객 제일 비주라고 알고 있는데, 제일 비주는 죽었어, 오늘 이 자리에서.”

“난 자질이 있어. 구진법을 통과할 자질이 있단 말야!”

“……”

“제안을 하지. 구진법을 전수해 주면 제일 먼저 종리추 그놈의 목을 따오겠어!”

“모르겠어? 난 악마와도 거래할 수 있어.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줄 수 있어.”

“그렇기에 안된다는 거야. 악마와 거래할 수 있는 여자는 너무 위험해. 아무 배나 타고 가. 어디로 가든 상관하지 않으니까.”

“호호호! 비겁한 놈! 종리추가 왔을 때 어디 있었어? 사제는 죽을 둥 살 둥 싸우는데 어디서 뭐 하다 이제야 온 거야? 종리추가 그렇게 무서웠어?”

“한마디만 더 하면… 죽인다.”

백천의는 살광을 뿜어냈다.

농담이 아니다. 백천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광은 진심을 담고 있다.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가 되어 있다. 어쩌면 사람을 죽여서라도 마음속에 갇힌 울분을 토해내려는지도.

“호호호호!”

여숙상은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배를 고르지도 않았다. 허름한 배에 훌쩍 올라탄 여숙상은 힘차게 노를 저어 멀어졌다.

삐걱! 삐이걱!

여숙상의 노 젓는 소리가 천외천 고수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모도에서의 경험은 후일 종리추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실제로 사신 어록 첫 장에 명분을 확보하라는 말부터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남고, 어떻게 명성을 날릴 것인가. 명분을 얻어야 한다.

표적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인정할 만큼 명분을 쌓아야 한다. 표적을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천하 악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증거도 확보해야 한다.

만인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 합당한 죄목과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없으면?

후훗!

만들어야겠지. 표적의 일가붙이까지도 복수를 포기할 만큼 강력한 죄목으로.

명분만 확보되면 계획과 행동밖에 남은 게 없다.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죽음의 그물에서. 표적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되리라. 죽어서도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진하고 말았을 것을’ 하며 땅을 치고 통곡하리라.

살수가 표적을 죽일 때는 불구대천지수를 노리는 것보다 더 많은 생각과 과감한 행동이 필요하다. 표적을 죽이는 게 급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명분으로 죽이고 어떤 흔적을 남겨 놓느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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