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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85화


종리추는 모도에서 빠져나와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는 지금까지와는 양상이 달라지리라. 무인들은 살문 살수들을 공격하지 못한다. 전에는 관도에서 길을 막고 공격을 가할 수가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합당한 명분을 내세워야 한다. 인면수심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죽은 사람이 있으면 복수라는 이름으로 검을 들 수는 있다. 혈육이, 지인이 복수를 하겠다는데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무리를 지어 복수할 수도 있다. 정당하게 비무를 요청할 때도 있겠지만 오직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해서 암습을 가해올 수도 있다. 복수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어떤 행위도 동정받을 수 있다.

후일 지탄을 받는 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모두들 살문이 살수 문파인 것을 알고 있으니 크게 손가락질하는 일은 없을 게다. 어쩌면 잘했다고 칭찬을 할지도… 무림 영웅으로 부각될 수도..

하지만 지금처럼 무림인들의 공분을 모아 십망을 전개할 때처럼 우르르 달려들 수는 없다. 그것만 해도 살문에게는 큰 보탬이다. 무엇보다 죽음을 생각했던 모도에서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빠져나왔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혈전을 예상했는데 몇 마디 말로 천외천 고수들을 무력화시켰으니 이보다 더 좋은 싸움은 없다. 살문 살수들은 날아갈 듯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기뻐할 수 없었다. 팔부령에 남아 있던 가족과 문도가 정운에게 도륙당했다는 말을 들은 후부터 무거운 바위가 가슴을 짓눌렀다.

팔부령에 가 보아야 한다. 시신이 남아 있다면 매장이라도 해줘야 한다.

살문 외장이 땅속으로 숨고, 하오문과 개방에게서 받아들이던 정보가 두절되면서 종리추는 장님에 귀머거리가 되었다. 그들을 욕할 수도 없다. 하오문과 개방 같은 경우에는 살문과 연계되었다는 것을 드러낼 수 없다.

“수레를 사 와.”

“주공, 지금 수레라고 하셨습니까?”

“환자가 많은데 걸어갈 수는 없지. 지금까지도 고행이었어.”

“기왕 사 올 바에는 수레보다 마차가…”

“마차는 하오문과 연결이 돼.”

“아! 예….”

유구가 광부, 혼세천왕을 데리고 마을로 뛰어갔다.

그것밖에 할 것이 없다. 장님에 귀머거리가 되었으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세상을 알지 못하니 취할 행동도 없다.

모도에 들어갈 때부터 우중충하던 하늘이 빗줄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돌멩이처럼 굵은 빗줄기가 나뭇잎을 후드득 때렸다. 지나가는 비가 아니다. 쉽게 그칠 비도 아니다. 적어도 서너 시진 동안은 계속 쏟아질 모양이다.

살문 살수들은 기름종이로 만든 우의를 꺼내 뒤집어썼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몸을 끔찍이 아끼지만 살문 살수들처럼 아끼는 사람은 없을 게다.

살문 살수들은 오직 하나, 살행을 하기 위해 몸을 아낀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죽일지는 몰라도, 명을 받는 순간 즉각 움직여 살행에 임할 수 있도록 최선의 상태를 유지한다. 한낱 빗줄기에 불과하지만 괜히 체온을 떨어뜨릴 필요는 없다.

“어린…… 좋아했지?”

소고가 종리추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

“무사할 거야. 너무 염려하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고 자신도 그녀들이 무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객이 들이쳤다면 죽었다고 봐야 한다. 팔부령에는 천 객을 상대할 사람이 없다. 그들 모두가 떼를 지어 합공을 펼쳐도 천객에게는 역부족이다.

종리추가 대답을 하지 않자 소고는 어스레히 보이는 마을로 눈을 돌렸다.

유구 일행이 수레를 사 오고 있다. 말에 수레라….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지만 살문 살수들 입장에서는 더 바랄 게 없다.

그때 대답을 기대하지 않던 종리추가 말했다.

“어린은 내 부인이야. 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여자지. 어린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빼앗긴다 해도 여한이 없어.”

소고는 움찔했다.

사내들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하는 말 중 가장 흔한 말이 이것이다.

‘너를 위해서는 죽어도 좋아.’ 혹은 ‘평생 내 목숨을 걸고 널 지켜줄게.’

무척 달콤한 말이다. 불행히도 사내가 쉽게 내뱉은 말에는 영속성이 없다.

실제로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정말 목숨을 내놓는 사내는 무척 드물다. 드물다 못해 희귀하다. 죽음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한 말은 믿을 수 없다.

소고는 종리추의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종리추는 정말 그럴 사내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살수가,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살수가 한 말이기에 믿을 수 있다.

‘어린…. 죽었다면…. 편히 눈 감아. 행복하잖아? 이런 낭군이 있으니..’

소고의 생각을 종리추가 잘랐다.

“난 지켜야 할 사람이 많아. 부모님도 그렇고 살문 살수들도 그래. 내가 문주니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모두 나와 연관있지. 이걸로 끝이야. 모자도 다녀온 것으로 다시는 죽음으로 내몰지 않아. 내 목숨을 걸고.”

‘그래, 그래야 돼. 팔부령에서 또 한 번 통곡을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지금 마음 잊지 마. 이겨내야 돼.’

소고는 종리추를 보듬어 안아 가슴에 묻고 싶었다. 그리고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말하고 싶었다. 가슴이 미어질 때 속이 풀릴 때까지 울고 나면 시원하지 않을까 싶어서.

한참 동안 빗줄기를 응시하던 종리추가 불쑥 다른 말을 했다.

“구류검수…… 행복할까?”

행복할지도 모르고 불행할지도 모른다.

외관상으로는 분명히 불행하다. 사지 근육을 모두 절단당했으니 죽은 것과 진배없는 폐인이다.

그는 다시는 살행을 하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종리추가 구류검수를 팔부령에 남겼을 때, 구류검수가 종리추의 명령을 받아들였을 때 두 사람은 모두 죽음을 생각했을 게다. 거기에 비하면 폐인일지언정 살아 있으니 다행이다.

하나 구류검수는 용서를 받지 못했다. 사지 근육을 절단당하면서도 여숙상의 마음을 풀어주지 못했다. 그는 여숙상에게 죽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불행할 거야.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을 거야. 여숙상이 삐뚤게 나가면 나갈수록 죄책감은 더욱 깊어질 거야.’

확신한다. 구류검수는 불행하다.

종리추가 살문 살수들의 숙원을 풀어주려고 한 것은 좋지만 이번만은 명백한 실수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정보를 살행 제일 조건으로 생각하는 종리추가 이번만은 정보를 정확하게 분석하지 못했다. 구류검수를 내어주기 전에 여숙상이 어떤 여인인지 명확히 알았어야 했다.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소고 자신도 천 노인의 정보를 통해 각 문파 무인들의 신상 내력을 전달받았지만, 정보에 기재된 여숙상은 지금의 여숙상과는 사뭇 달랐다. ‘어떻게 이런 여인을 강간할 수가…..’

솔직히 심정이 그랬다.

여숙상은 착했다. 순진했고, 무공을 좋아했으며, 사형제들 간에 스스럼없이 지냈다. 강간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그녀는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조금 우울해하는 것 정도와 구류검수에 대한 복수심을 강하게 키우고 있다는 정도인데, 여인으로서 일생일대 최대의 사건이랄 수 있는 일을 당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나마 천성이 순진 발랄했기에 그렇게 이겨내는 것이지.

살문 살수들 중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구류검수다. 아 아마도 그때의 인상이 지워지지 않고 있어서 그럴 게다. 그런데 모도에서 본 여숙상은 그런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서웠다. 마음이 무섭고 표독했다.

사람은 일정한 계기를 만나면 본심을 드러낸다. 아마도 여숙상에게는 비객으로 선출된 것, 그리고 살수 비기를 배우고, 사람들을 죽이고, 천객을 만나보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견식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소고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여숙상과 죽은 정운이 보통 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여인만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숙상과 정운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만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랬을 게다. 정운과 그런 관계였다면 본심을 드러낼 동기가 충분하다.

모두 큰 실수를 했다.

실수가 여숙상을 망쳤고 구류검수를 망쳤다.

“….. 모르겠네.”

소고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어쨌든 이번 일로 종리추는 하나 더 알았을 게다. 살문 살수들의 숙원을 풀어주는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된다는 것을. 기회가 닿았다고 덥석 잡으면 큰 낭패를 초래한다는 것을.

다각! 다각….!

말 두 필에 수레 하나씩, 모두 세 대의 수레가 빗길을 뚫었다. 환자만 다섯 명이다. 소고와 소여은, 모진아로도 부족해서 구류검수와 좌리살검이 부상자 대열에 합류했다. 살문 살수들 중에서 삼 할이 제 무공을 발휘할 수 없는 부상자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불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팔부령에 도착하여 보게 될 죽음들을 생각하면 자신들이 입은 상처는 상처로도 보이지 않았다.

구류검수도 여숙상만 생각하지 않았다.

“내 탓이야. 그때 팔부령을 떠나지 말았어야 해.”

“미친놈, 네놈이 있었다면 벌써 불귀의 객이 되었을 거야. 네놈 무공으로 천객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래도…. 그래도 남아 있었다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생각할 게 그렇게도 없어!”

좌리살검과 구류검수는 연신 티격태격했다.

주로 구류검수가 말을 하고 좌리살검이 타박하는 형식이다. 구류검수는 팔부령 재난 소식을 살문 살수 중 제일 늦게 알았다. 모도에서 빠져나온 다음 좌리살검이 말해 준 다음에야 알았으니까.

정운이 팔부령을 초토화시켰는데 구류검수가 왜 몰랐을까?

가능성은 한 가지뿐이다. 정운이 여숙상에게 말해 주지 않은 것. 여숙상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면 혼자만의 단독 행동으로 팔부령을 침입했을 공산이 크다. 늘 붙어 다니는 하양 진인의 눈을 속이기는 힘들었을 테니 같이 움직였을 가능성도 높고. 어쨌든 백천의에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백천의는 알고 있으리라.

완전하지는 못하다고 하지만 그 정보를 잡아내지 못할 개방이 아니다.

백천의에게 동의를 구하지 못한 살겁. 즉, 팔부령을 초토화시킨 것은 천외천의 뜻이 아니다.

종리추는 착잡했다. 팔부령에 식솔을 남겨둔 것은 확실히 실수다. 천객이 다가설 줄 알았다면 대비도 해놓았어야 한다. 해놓기는 했다. 비적마의와 삼현옹의 기관진식이면 서너 달 정도는 천객의 발목을 붙들어 놓을 줄 알았다. 그렇다고 동행하고 있는 살문 살수들처럼 포기한 것도 아니다.

그는 믿는다. 벽리군을 믿고, 삼현옹을 믿는다. 아버지를 믿고. 어머니를 믿고. 화령살수, 사령살수들을 믿는다.

그들은 살아 있다. 틀림없이.

“나중에 하려고 했어, 나를 죽인 후에. 살문 살수들을 몰살시킨 후에 총단을 파괴하려고 했어. 그게 백천의의 뜻인데…. 정운이 움직인 거야. 모도에서 비객이 양분된 것…. 이해하지 못했는데 납득이 되는군. 정운과 백천의가 갈라서다니… 어쩐지 하양 진인이 무당으로 돌아갔다 했더니.’

힘이란 무서운 것이다. 절대적인 힘이란 때때로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원수도 같은 배를 타면 손을 맞잡는다는 말이 있다.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원수 간일지라도 손을 맞잡고 위기를 타개해 나간다는 말이다. 절대적인 힘은 그런 속담마저도 무색하게 만든다.

살문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았겠지만, 단지 생쥐처럼 요리조리 잘 빠져나가는 약은 놈들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천외천에게는 몹쓸 질병이다.

자신이 정운을 죽였다. 모순되게도 모도에서 살문의 위기를 넘긴 대신 천외천의 질병을 치료해 주었다. 앞으로 천외천은 백천의를 중심으로 더욱 강해질 게다. 비객들은 백천의를 대형으로 여길 것이며, 살문을 치기 위해 절치부심하리라.

가장 급해진 것은 개방이다. 이번 일을 기화로 백천의는 살문을 잠시 버려두고 개방부터 정리할 공산이 크다. 하오문은 ….. 벌써 정리되었을 게다. 오기가 죽는 순간 하오문주도 무사하지 못하리란 생각이 제일 먼저 뇌리를 스쳐 갔으니.

‘천객이 백천의 한 명만 남았다고는 하지만 후개는 감당할 수 없어. 천외천 입장에서 개방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할 명분도 없고, 결국은 암살을 시도할 텐데…’

살문주의 입장에서 제일 먼저 할 일은 개방으로 달려가는 일이다.

하오문과의 인연이 끊겼고 살문 외장을 어둠 깊이 침잠시켰다.

지금은 겉에 드러나면 무조건 천외천의 표적이 된다. 모도에서 말한 명분은 정정당당하게 공격할 경우에 통용되는 말이고 암습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막힌 눈과 귀를 열기 위해서는 개방의 도움이 필요하다.

후개는 죽어서는 안 된다. 팔부령에 다녀와서는 늦다. 지금쯤 백천의는 움직이기 시작했을 터인데….

그러나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식솔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곤궁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상처를 입고 앓아 누웠을지도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달려가 혹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줘야 한다.

몸은 하나인데 갈 곳은 둘이다. 살문 살수들을 양분하는 일도 생각해 봤지만 지금으로써는 불가능하다. 살문 살수들은 싸움을 할 수 없는 상태다. 부상자는 다섯 명뿐이지만 부상을 입지 않은 살수들도 싸움을 하지 못한다. 팔부령이 파괴되었다는 충격은 침착함과 자제심을 빼앗아갔다. 사리 판단을 명확히 하지 못하는 상태인데 싸움으로 내모는 것은 죽으라는 말과도 같다.

살문의 장래를 보느냐, 인간적인 도리를 따르느냐.

‘후개…. 서로 깊게 숙의한 일이니 대책을 세워놨으리라 믿어야겠지. 힘든 싸움이 되겠지만 무림에 몸을 담은 이상 이런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 이겨내기를, 그리고 용서를.’

종리추는 살문의 앞날을 버렸다. 살수 문파를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개방의 도움을 받는 것이 말할 나위 없이 좋지만, 큰 것을 망각하고 작은 일을 탐내는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살문은 특급 살수 문파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문 독자적인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무엇보다 특급 살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팔부령으로 길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비적마의와 삼현옹의 기관진식을 믿었던 한 번의 판단 착오가 팔부령 식솔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한 번의 판단 착오가 구류검수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같은 일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에 죽었던 사람들…. 유회, 역석, 쌍구광살, 산호단창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 그리고 혈살편복과 혈영신마. 그들과 같이 싸우다가 죽는 자도 발생하지 않도록 적에 대한 조사도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

종리추는 개방에 대한 생각을 애써 접었다. 그런데..

‘응?’

종리추의 눈에 이상한 글씨가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글씨가 아니라 문양이다.

‘저, 저건!’

종리추는 깜짝 놀랐다.

비가 오고 있어서 보지 못했다. 머리 속이 복잡해서 보지 못했다. 개방과 팔부령에 대한 생각 때문에 눈앞에 있는 문양을 보지 못했다.

“멈춰!”

고삐를 잡고 있던 유구가 화들짝 놀라 말을 세웠다.

종리추가 이토록 급하게 명령을 내린 것도 보기 드문 일이다.

“유구! 혼세천왕! 말 다리를 잡아!”

“….?”

말고삐를 쥐고 있던 유구와 뒷수레에 앉아 있던 혼세천왕은 느닷없는 명령에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 혼세천왕이 수레에서 내려와 종리추 옆에 섰다.

“우측에 있는 놈, 뒷다리를 잡아라. 움직이지 못하게.”

“주공….?”

종리추는 말 엉덩이에 찍힌 낙인을 가리켰다.

“저, 저건!”

여태껏 말을 몰아온 유구도 처음 본 듯 깜짝 놀랐다. 그와 혼세천왕은 마을에서 말을 사 온 장본인이면서도 보지 못했다. 낙인이 너무 작고 말꼬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 외장이!”

혼세천왕이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 문양은 틀림없이 살문 외장이 살문 살수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표식이다.

유구와 혼세천왕이 우측 말 뒷다리를 하나씩 잡았다.

이번에는 후사도가 나섰다.

“주공, 앉아 계십시오. 제가 꺼내겠습니다.”

후사도는 말꼬리를 위로 제치고 항문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히히힝!

놀란 말이 거친 울음을 토해내며 앞발을 치켜들었지만 유구와 혼세천왕이 뒷다리를 꼭 잡고 있어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후사도가 말의 항문 속에서 꺼낸 것은 작은 목통이다. 불순물이 묻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잘 감겨져 있다.

“무슨 일일까요? 살문 외장은 활동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시지 않았나요?”

기름종이에 묻은 말의 오물을 빗물에 씻은 다음 종리추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동은 중단됐다. 비망신사는 부랴부랴 주변을 뒤졌고 농민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어설프게 마련해 놓은 오두막을 찾아냈다.

살문 살수들은 오두막으로 갔다. 전부 들어가기에는 비좁은 오두막이다. 위에 화자들을 눕히고 아래까지 들어섰지만 열여섯 명이 전부 비를 피하기에는 너무 비좁다. 형식에 불과한 것이다. 비를 맞으면 어떻고 피하면 어떤가. 살문의 재기를 위해서 꼭꼭 숨어 있으라던 외장은 무엇 때문에 활동을 재개했고 그들이 전해온 소식은 무엇인가.

살문 살수들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맹렬히 쏟아지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면서 종리추만 쳐다봤다.

“팔부령은 정운과 하양 진인이 공격했다. 죽은 사람부터 말해 주겠다. 팔부령에는… 팔부령에 남아있던 사령 살수, 화령 살수가 몰살당했다.”

“아!”

소여은이 작은 비명을 토해냈다. 불안한 그림자는 실체가 되어 다가왔다.

정운이 거짓을 말했을 리 없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가지고 있었는데…. 팔부령이 피로 물들었다.

“비부는 동혈 안에서 폭사했고.”

“동혈 안에서 폭사요? 주공, 폭사라니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음양철극이 반문했다.

살문 살수들이 군웅들에게 밀려 대래봉 동혈로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방어 계획부터 논의했다. 화약이 언급된 것은 당연하다. 그때 삼현옹이 말했다.

밖에서라면 몰라도 군웅들이 동혈 안으로 진입하면 화약을 사용하기 어렵다. 화약은 동혈을 무너뜨릴 것이며,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죽게 된다. 다 함께 죽겠다는 생각이 아니면 화약을 사용할 수 없다. 비부가 동혈 안에서 화약을 터뜨려 폭사했다면 모두가 죽었다고 봐야 한다.

유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인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건만 정원지와 모지의 얼굴에 눈에 밟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종리추가 말했다.

“그 외 죽은 사람은 없다. 모두 몸을 피했어.”

“네엣?”

더욱 알지 못할 소리지만…. 모두가 몸을 피했다는 소리에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이처럼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정운과 하양 진인, 천객이 두 명이나 공격했는데 사령살수와 화령살수, 그리고 비부만 죽었다면 아주 잘한 방어라고 할 수 있다. 그들마저 죽지 않았으면 더욱 잘했겠지만.

“그, 그럼 남은 사람은 모두 무사하다는 말입니까? 동혈에서 화약을 터뜨렸는데요? 다행입니다. 모두들 어디 있답니까?”

광부가 성급하게 물었다.

종리추는 다른 말부터 했다.

“밖에서는…. 살천문주가 죽었다. 등천조도 죽었고.”

“아!”

“네? 등천조까지요?”

탄식과 반문.

그들이 죽은 것은 가슴을 아리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외장을 총괄하던 등천조가 죽었다면 이 소식은 누가 전해준 것이란 말인가. 혹시 벽리군이?

살수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종리추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백천의가 손을 썼어. 살천문주와 등천조는 천외천 고수에게 당했지. 백천의는 하오문주를 제거했고, 하지만 하오문은 제거할 수 없어. 문주만 바꿨어. 죽은 하오문주에게는 충실한 수하가 있지.”

“천은탁 모지!”

“그래, 천은탁 모지. 등천조는 천은탁 사람이었지. 그동안 천은탁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왔던 모양인데 이번 일로 천은탁이 등천조 일을 도맡았어. 천은탁은 이런 글귀를 적어왔다.”

종리추가 목통에서 나온 서신을 들고 읽어 내려갔다.

“사내로 태어나 목숨을 맡길 만한 사람을 찾았다. 이제 주인이 죽었으니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 지극히 위험하다는 것은 아나 목숨에 미련이 없으니 살문 외장을 가동시킨다…..”

서신의 내용은 길었다.

천은탁은 치밀한 사람이다.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살문 외장을 가동시켰다. 백천의에게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한 것이다. 그렇다고 살문 외장까지 피해를 입힌다면 외장을 가동시키지 않느니만 못하다. 그는 외장 총단을 두 군데 마련했다.

모든 정보는 자신이 관할하여 수집하고 분류하며 통보한다. 당연히 천은탁은 표적이 된다. 천은탁은 암중 세력을 만들었다. 종리추의 말대로 지하에 꽁꽁 숨은 살문 외장이다. 지하 외장은 벽리군과 팔부령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관리하며, 그들은 천은탁이 수집해 온 정보를 전달받는다. 후일 천은탁이 불의의 변을 당하더라도 살문 외장이 재기할 수 있도록.

“음! 천은탁이 보호하고 있었군요. 고마운 사람입니다.”

가슴이 무거웠다. 천은탁의 사내다움이 살문 살수들의 얼굴을 붉히게 했다. 천은탁의 서신은 살문 살수들에게 살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자신들은 종리추가 죽었을 경우 뒤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종리추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빠른 결단을 내렸다.

“지금부터 이 조로 나눈다. 일조는 천은탁에게 가서 벽 총관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라.”

“주공, 주공이 같이 가셔야….”

광부가 말했지만 종리추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른 일조는 나와 함께 개봉으로 간다. 후개가 위험해.”

“…..”

“음양철극, 비망신사, 광부, 너희는 나와 함께 간다. 다른 사람은 길을 재촉해.”

“주공,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주공, 저도….”

유구와 적사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종리추는 두 사람을 지그시 쳐다보다가 말했다.

“난 특급 살수를 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지켜내는 특급 살수. 적사, 적각녀를 살려내라. 내가 돌아갈 때까지 완벽하게 완쾌시켜라. 유구, 넌 내가 집안에 신경 쓰지 않도록 해라. 목숨을 걸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라. 그리고 네 아내와 자식을 보호해라. 그게 너의 임무다.”

“주공, 염려 마십시오. 이놈, 목숨을 걸겠습니다.”

유구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주공… 적각녀가 아니라 소여은입니다.”

적사가 한마디 했다.

“하하하!”

“호호호!”

모두 웃었다. 소여은까지도 웃었다.

묵직하던 분위기가 일신했다.

죽은 사람들을 추모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추모는 나중에… 나중에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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