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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92화


한동안 잠잠하던 중원무림이 발칵 뒤집어졌다.

폭풍은 살문이 살행을 재개하면서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소림사룡 중 한 명이었던 백천의가 혈배를 들고자 사천으로 간다.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번져 갔다.

“백천의의 마지막 선택이야. 결전이지. 그럴 수밖에 더 있어? 천외천도 없어졌고 고립무원으로 혼자 남았는데.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지. 죽은 천객들이 있는데.”

“그래도 사천으로 직접 간다는 것은 너무 무리 아냐?”

“모르지. 종리추가 모도로 갈 때는 무리가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그때와는 꼭 정반대네.”

사람들은 두 명만 모여도 백천의 사건을 이야기했다. 정도 무림인이 살수가 되겠다고 말한 것 자체가 소문거리다. 하물며 살수들의 성역이나 다름없는 오채산 사천으로 가고 있다니, 그것도 살문을 상대로 혈배를 들겠다니 입이 근질거려서라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채산에 틀어박힌 살문은 일 년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살문을 잊었다.

모도 사건으로 횡액을 면한 살문주가 살수의 길을 접고 동해 멀리 섬으로 들어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그러나 그런 소문도 잠시, 세월이 가면서 살문은 망각되어 갔다. 그저 한때 중원을 피로 적신 살수 문파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은 채.

그 후 중원무림은 평안했다. 살수들은 중원 어느 구석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각 성마다 하나씩 건재하던 살수 문파는 흔적조차도 지워졌다.

혈배를 들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고, 소리 소문 없이 살수 문파를 창건하는 자도 없었다.

소문은 끊임없이 나돌았다.

“이번에 사천성에서 구유음마가 살수 문파를 세웠대. 사천성 오대마를 끌어들여서.”

“이 사람아, 그런 소리 하지 마. 살수 문파 소리 들은 지 오래네.”

“정말이라니까.”

“문파 이름은 뭔데?”

“그게 글쎄 말야 구유음마가 죽어버려서 흐지부지 흩어져 버렸대. 들리는 소문으로는 오대마도 죽었다고 하던데.”

“그게 뭐 세운 거야. 헛소문이잖아. 자네, 혹시 누구에게 원한 있는 것 아냐? 살수 문파라면 귀를 쫑긋 세우게.”

“예끼, 이 사람이!”

심심찮게 중원을 흘러다니는 소문이다.

중원에서 일확천금을 벌 수 있는 직업이라면 단연 살수업이다. 살수치고 제 명에 죽은 사람이 없지만, 돈을 벌지 못한 자도 없다.

사람들 중에는 하루를 살아도 돈을 흥청망청 써보다가 죽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무인들 중에서도 그런 자들이 있을 수 있다. 또 정말 복수심에 불타 살수를 찾는 사람도 있다.

찾는 사람이 있으니 살수가 있어야 하는데, 중원무림에는 살수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그런 시점에서 오채산 사천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오채산에 살수 문파가 생겼나 봐.”

“예끼! 이 사람, 또 그 소리여?”

“이번에는 정말이라니까! 오채산에 가면 제일 먼저 보는 게 출입자사라는 팻말이래.”

“정말?”

“정말이라니까!”

소문의 진위는 금방 가려졌다.

” “

백천의는 ‘출입자사’라고 쓰인 팻말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는 팻말을 보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스쳐 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소림사룡으로 협명을 드날렸던 정운, 고진명, 사태수 동생 벽천홍의 얼굴도 떠오르고 동생의 정혼녀였던 공화 소저도 생각난다.

삼절기인도 황주일학도 많은 사람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구진법을 받던 시절도 생각난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결 한 구절을 붙잡고 목숨을 구걸해야 했던 때. 백천의는 일 년이란 시간을 허비한 후에야 종리추가 어떻게 천객을 죽일 수 있었는지 알아냈다.

개방 용두방주의 말처럼 구진법에는 결정적인 허점이 있었다.

종리추가 아니라 무공을 궁극으로 익힌 무인이라면 잡아낼 수 있는 허점이다.

감각의 검은 놀랄 만큼 빠르다. 전신 경락이 일시에 발동하며 뿜어내는 진기는 속도와 힘을 배가시킨다. 세상의 그 어떤 쾌공도 천객의 눈에는 느리게만 보였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하지만 천객도 하늘이 만들어준 육신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한다.

긴장이 있으면 이완이 있다. 강직된 진기는 풀어줘야 다시 강직시킬 수 있다.

그 이치만은 변하지 않는다.

구진법을 통과한 후 진기가 풀리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은 지극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진기가 풀렸다가 다시 발출되는 시간차가 극히 짧아 의식하지 못한 것뿐.

종리추는 그 틈을 찾아냈다. 검이 허공을 흐르는 사이에도 풀어졌다 뭉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틈을.

틈을 찾아낸 사람은 많다. 모진아도 찾아냈고, 혈영신마도 찾아냈다.

손속을 부딪쳐 보지는 않았지만 삼십육로 타구봉법을 익힌 개방 용두방주도 찾아냈을 게다.

천객은 천객만이 죽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잘못이다.

상대의 진기를 읽고 부딪칠 수 있는 무인이라면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

천객은 천하제일의 무인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이젠 됐어, 이젠.’

백천의는 팻말에서 손을 떼려다가 움찔했다.

“올 줄 알았다. 소문을 듣고 긴가민가했다만 역시 왔구나.”

등 뒤에서 들리는 음성은 소림사 계율원 원주인 혜선 대사의 음성이었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천령 소문은 들었습니다.”

백천의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무림의 일은 지금 그에게는 모두 남의 일에 불과하다. 차후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전, 종리추와의 대결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된다.

“많은 일을 했지. 아미타불!”

두 사람은 말없이 찻잔만 홀짝거렸다.

혜선 대사는 소림 방장의 뜻이 미흡하다 여겨 천외천이 탄생하도록 주도한 장본인이다. 백천의가 천외천을 해체한 후에는 산문을 박차고 나와 직접 비객을 이끌었다. 소림 계율원 원주가 소림사의 계율을 깨고 무림 집단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큰 결단이다.

하지만 혜선 대사가 비객을 떠맡자 구파일방은 다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객이 원래 구파일방에서 생각했던 비객의 본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비객은 사라졌다. 대신 ‘하늘의 명령’ 천령이 탄생했다.

그들의 무공은 더욱 강해졌고,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사천성의 구유음마 정도 되는 마인이라면, 전 같으면 십망에 처해졌을 악인이나 천령은 소리도 없이 제거해 버렸다. 구유음마는 혼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대마라는 다섯 명의 마인이 곁을 지켰다. 그래도 천령은 해냈다.

“아미타불.”

혜선 대사가 묵직한 침묵을 깼다. 소림사를 떠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승복을 입고, 머리를 깎고, 염주를 들었다. 천생 승려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백천의는 혜선 대사가 온 뜻을 알고 있다.

구진법 아직도 무인들은 구진법을 잊지 않고 있다. 천객이 보여준 무공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이리라. 오랜 시간 수련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목숨이 위험하더라도 짧은 순간에 속성할 수 있는 무공이기에 탐을 내는 게다.

지금은 옛날과 다르다. 백천의가 구진법을 통과할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 구진법을 실시한다고 하면 자칭 영재라는 사람들은 모두 지원을 할 게다. 구진법을 통과하여 몰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은 기재들이 죽었는데도.

“오면서 팻말을 봤습니다.”

” “

“역시 종리추더군요. 이곳 오채산은 팔부령보다 더한 험지입니다. 정해진 길이 아니면 죽음이 기다리는.”

“천령 두 명이 들어갔지만 소식이 끊겼지.”

“그럴 겁니다. 이곳은 인간이 사는 땅이 아니군요.”

” “

혜선 대사는 묵묵히 차를 들었다.

종리추는 오채산을 온갖 독물들의 사육장으로 만들었다. 걸음마다 뱀과 지네와 독화가 우글거린다. 팔부령에 있던 비적마의는 물론이고 사람을 순식간에 뜯어 먹는 식인 개미까지 존재한다. 오채산은 많은 사람들이 약초를 뜯고 사냥을 하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그림자조차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죽음의 산, 사산.

백천의가 놀란 것은 사산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종리추는 팔부령에도 이와 비슷한 방어막을 형성했지만, 팔부령 방어막은 뚫을 수 있었다.

이곳은 살아 있다. 독물들이 누구의 조종을 받지 않고 스스로 살아간다.

스스로 영역을 만들고, 먹이를 구하고, 번식한다.

산이라면 독물들이 살기에 이상적인 곳이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

오채산처럼 산 전역에 걸쳐 독물이 살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은 단연코 없다.

인위적인 공력이 깃들지 않았다면.

정운이 다시 살아온다 해도 오채산은 뚫을 수 없다. 그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완벽한 죽음의 산으로 변해 버렸으니까.

백천의가 말했다.

“제가 살아 나온다는 보장이 없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혜선 대사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지난 일 년간 무공을 참오했습니다. 정운이 죽는 것을 보았기에 천객의 무공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를 알아야 했죠. 그 결과 천객의 무공은 나한십팔장으로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죠.”

“음!”

혜선 대사가 침음했다.

나한십팔장이라면 소림 무승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무공이다.

알고 있다고 해서 절정 무공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베는 것, 단 한 초식만 익히고도 절정 무인이 될 수 있는 게 무공이다.

백천의는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 무엇인가 다른 말이기는 한데 천객의 무공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제가 천외천과 살문의 싸움을 이끌었다면 사숙께서는 천령과 살문의 싸움을 이끄시겠군요.”

살문과 천령의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

오채산에 살수 문파가 창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 쯤에는 일차 격전이 있었을 게고 천령이 졌을 게다. 그러니 살문이 개파를 할 수 있었겠지.

혜선 대사가 자신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얼마나 곤궁한 상태인지 알 수 있다.

천령은 오채산을 뚫을 수 있는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다. 옛날 무림 군웅들이 팔부령을 에워싸고도 꼼짝하지 못했듯이.

한 가지 궁금증이 치밀기는 했다. 종리추가 살행을 하기 위해서는 살수를 움직여야 한다. 오채산에 틀어박혀 있을 때는 안전하다 해도 살수들이 밖으로 나오면 보호벽이 사라진다. 천령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터인데 그렇다면 싸움이 있을 텐데. 중원 어느 한구석에서 소리 없이 전개되고 있을 싸움이 궁금했다.

묻지는 않았다. 혜선 대사가 찾아온 것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모도에서처럼 혜선 대사는 명분을 찾지 못했다. 자신 역시 살문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문만 들었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죽였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다. 누가 청부를 넣었다는 소리는 물론이고.

그러니 종리추를 무림 공적으로 만드는 것은 무리다. 단지 산 전체를 사산으로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는 살수 문파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비공식적인 살수는 계속 실패하고 있으리라.

종리추는 치밀하다.

행동 하나에도 수십 수백 가지의 가정을 세워놓고 완벽한 대비책이 나온 다음에만 움직인다. 그 속에 천령의 움직임까지 모두 들어 있다면 당할 수 없다.

‘먼저 살문 외장을 뿌리 뽑아야.’

백천의는 목구멍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이것은 이제부터 혜선 대사의 싸움이다. 자신은 종리추만 겨누면 되는 것을.

“차가 식었습니다. 드시지요.”

“아미타불! 돌아오기를 바라겠네. 부처님께서 가호해 주시겠지.”

두 사람은 차디차게 식은 찻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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