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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94화


중촌은 시골에 있는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었다.

중촌에 들어선 사람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아무 집에나 들어가 거주할 수 있다는 것만이 하촌과 달랐다.

집도 작지만 깨끗했다.

방을 준비하지 않고 집을 준비해 놓은 것은 청부자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 듯싶었다. 실제로 집에 들어가 보면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구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시중을 드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들은 살문이라던가 청부에 대한 말은 입가에도 담지 않았다.

빨래를 해주고, 밥을 지어주고, 필요한 것이 없나 물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촌에 든 사람들은 지상낙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안한 휴식을 취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무료함이다. 간혹 기다림에 지쳐 짜증을 내는 사람도 있지만 크게 나서지는 못했다. 모두들 살문을 두려워한다.

살문에 청부를 하기 위해 들어섰지만 살문의 심기를 살피고 있다.

중촌에까지 들었는데도 살문 살수들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건네는 사람도 없었고, 무엇 때문에 중촌에 들었는지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중촌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찾았다.

서로 만나 애환을 이야기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후후!”

백천의는 가늘게 웃었다.

종리추다운 발상이다.

중촌에서 청부자들의 신상 내력을 알아내고 살문 외장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리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있는 자는 상촌에 들이지 않는다. 상촌에 들였어도 칠 주야 동안 밥만 축내다 보내면 그만이다.

그들은 나가서도 살수 문파 따위는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중촌과 상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살수 문파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증명된다.

자신들이 내침을 당한 것은 살문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게다.

청부를 하는 사람의 단속도 된다.

천령은 살문 청부자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무공으로 위협을 가할 경우, 스스로 자진하면서까지 비밀을 지켰다고 한다.

가슴속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곳이 살문이다.

살문을 토설하지 않으면 한이 풀린다. 살문에 청부를 넣은 사실을 고변하면 한도 풀리지 않고 살문 살수들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

기왕 목숨을 잃을 바에는 한이라도 풀자는 생각이 지배적일 게다.

천령은 살문과는 영원히 비공식적인 암중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백천의는 차분히 기다렸다.

종리추는 벌써 알고 있을 게다. 자신이 와 있다는 것을.

칠 주야 후 상촌으로 들어서는 길이 열렸다.

백천의는 눈을 부릅떴다.

혜명 사숙, 혜정 사숙. 팔부령에서 만나본 후 소식조차 알 길 없던 사숙들이 상촌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소림 노승들은 첨봉 비무를 끝낸 후에도 중촌으로 내려가는 길이 열릴 때까지 상촌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와서는 살문조차도 통제할 수 없어 비켜서며 합장을 했다.

“백…천의.”

혜명 대사가 가는 신음을 토해냈다.

“사…숙.”

백천의도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흉금 없이 가슴을 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면 밤을 꼬박 밝혀도 모자라겠지만, 그러기에는 혈로를 너무 많이 걸어왔다.

“살문주와 겨루기 위해서냐?”

“네.”

“소림 무공으로?”

“천객의 무공입니다.”

“그게 네 길은 아니었는데. 아미타불!”

혜명 대사는 합장을 한 후 등을 돌렸다.

사숙들이. 늘 얼굴을 맞대고 환하게 웃어주던 사숙들이 멀게만 느껴진다.

백천의는 소림승들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수그린 채 합장했다.

어차피 불가와는 인연이 멀었던 몸이었던 것을.

상촌 역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전혀 없었다. 단지 중촌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집과 집의 간격이 뚝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집 밖으로는 독물들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우리 안에 갇힌 신세다.

어떤 사람은 칠 주야 동안 관찰만 당하다가 쫓겨날 게다.

그에 비하면 백천의는 아주 대우가 좋았다. 상촌에 들어서자마자 살문 살수를 보게 되었으니.

“오랜만이야.”

대문을 밀치며 들어선 노인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모진아.”

“쯧! 건방진 놈이군. 어른 함자를 함부로 불러대다니.”

백천의는 모진아의 다리를 쳐다봤지만, 의족을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모진아의 걸음걸이는 정상이었다.

백천의는 웃었다.

“그새 다리를 찾았군. 축하해야 하나?”

모진아의 눈빛도 달라졌다.

백천의의 모습에서 모도에서와는 다른 절정 고수를 읽었기 때문이다.

‘더욱 강해졌군.’

백천의의 몸에서는 살기가 풍겨 나오지 않는다. 여유도 많아졌다. 눈빛도 포근해졌다.

소문에서처럼 살문을 상대로 혈배를 들고 싶어 미친 무공광이 아니다.

백천의는 그 정도를 벗어났다. 백천의 정도는 상대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종리추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종리추가 검을 들었다.

백천의도 검을 뽑았다.

돌은 다 같은 검이지만 기도는 사뭇 달랐다.

종리추의 검이 버들가지처럼 흐느적거린다면 백천의는 굳건한 느티나무처럼 뻣뻣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달라지는군.”

백천의는 심중 놀람을 숨기지 않았다.

“그대도.”

“하나만 묻지. 천홍을 죽인 이유가 뭔가? 그대를 위해 적지 않게 힘을 썼는데.”

” “

종리추는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았기 때문일까?

백천홍은 천전홍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왔다. 등천조 휘하에 있던 십점 중 한 명으로 대외산에서 쫓긴 종리추에게 천부라는 은신처까지 제공해 주었다.

당시만 해도 백천의와는 생사대적이 아니었다.

종리추가 천부를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검을 겨누고 있을 일은 없었으리라. 백천홍이 언제까지 천전홍이라는 이름으로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도 죽지 않았을 게고.

그를 살려둘 수 없었다.

혈영신마를 구해 도망가는 와중이라 무림 문파와 관계된 자는, 십망을 선포한 구파일방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자는 모두 죽여야만 했다.

그러나 꼭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죽이는 방법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천전홍을 떼어놓는 방법은 없었을까?

잠시 생각하던 종리추가 말했다.

“혈기 때문이었지. 사과하네.”

“팔부령에서 죽은 공화 소저가 천홍의 정혼녀였다는 사실은 알고 있나?”

“그랬군.”

“내 검은 두 사람을 위한 검이야.”

” “

“네 검은 누구를 위한 검이지?”

“나.”

종리추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것밖에 되지 않는가? 하하하! 실망했군.”

“십망이라. 그럼 말을 바꾸지. 나는 곧 사무령이니까. 천하의 모든 살수를 대변하는 검이지.”

비로소 백천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됐어. 그런 검이면 싸울 흥취가 나. 그럼 어디. 사무령의 검을 견식해 볼까?”

백천의는 성큼성큼 다가섰다.

죽음을 도외시하고 오직 죽이기 위해 싸우는 사람 같았다. 상처 입은 맹수가 활을 겨누고 있는 궁수에게 달려드는 기세였다.

쒜에엑!

하늘에서 번개가 터졌다.

백천의의 검은 섬광처럼 다가와 푸른 빛을 가르며 지나갔다.

천객의 무공이 아니다. 과거의 천객보다 훨씬 빠른 검이다. 무림사에 전무후무할 놀라운 속도다.

타악!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종리추의 적룡검이 붉은 노을을 뿜어내며 검신을 받아넘겼다.

쒜에에엑!

섬광이 다시 터졌다.

과거 천객들은 일격으로 모든 것을 끝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격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백천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일격에 이어 이격, 삼격. 적이 죽을 때까지 몰아칠 무공을 연구했다. 일격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속도로, 세기와 힘으로.

탁! 탁탁!

종리추는 계속 받아넘겼다.

움직임도 별로 없었다. 어찌 보면 소림사의 금강부동신법을 전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르다. 금강부동신법은 상체의 움직임을 이용하는데 종리추는 가볍게 발을 움직이고 있다.

‘맥을 차단하고 있어. 검이 흐르는 길을 알고 있어. 치잇! 이래서야 아무리 빨라도 칠 수 없지. 방법은 오직 하나. 파!’

백천의는 전신 경락을 모두 열었다.

구진법을 통과하며 전신 근육에서 느꼈던 감각을 새삼 일깨웠다. 모든 신경을 곤두세웠고, 혈맥을 활짝 열어 진기의 흐름을 더욱 빠르게 했다.

“타앗!”

허공으로 솟구친 백천의의 검에서 번개가 쏟아졌다.

종리추는 한 발 앞으로 쑥 나섰다.

허공에 뜬 백천의와 거리를 좁힘으로써 검의 거리를 빼앗았다. 동시에 검이 추켜 올려졌다.

타악!

내려치는 검과 올려치는 검이 부딪치며 불똥을 튀겨냈다.

종리추는 검이 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백천의가 사력을 다해 전개한 검이다. 적룡검을 부러뜨리고 몸을 벨 각오로 전개한 검이다.

종리추의 손목이 미끄러지듯 꿈틀거렸다.

적룡검은 백천의의 검신을 타고 위로 흘렀다. 백천의의 심장까지.

‘아아!’

종리추는 탄식했다.

백천의를 죽이고 싶지 않았건만. 다시는 검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건만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니.

‘무공이 빈약한 탓. 무공이 조금만 더 강했어도.’

종리추는 백천의의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는 사무령이 무엇인지를 근래에서야 깨달았다. 사무령은 검을 들고 싸우는 살수가 아니다. 사람을 완벽하게 죽일 수 있다고 해서 특급 살수가 아니듯이.

검을 들고 싸우는 한 사무령이 되지 못한다.

사무령은 검을 들지 못하게 하는 살수를 말한다. 두려움도 좋고 경외감도 좋지만, 검을 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정히 검을 들었어도 스스로 물러서게 만들어야 한다.

사무령은 싸우는 자가 아니다.

‘아직 멀었어. 사무령이 되기에는.’

검을 굳게 쥐고 있는 백천의가 웃는 듯 보였다. 최선을 다해 싸웠다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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