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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23화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옛날의 금슬을 다시 회복한 부부였고 종리추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에 대한 사랑은 지극했지만 한참을 들어오지 않아도 혹시 무슨 변이나 당하지 않았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누구 앞에 내놔도 자랑할 만큼 똑똑한 아이인지라 혼자서 하남성까지 심부름을 보내도 안심이 될 만했다.

“금종수를 익혔어요!”

종리추는 멀리서부터 고함을 질러대며 달려왔다.

“뭣!”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금종수를 익혔어요, 하하!”

“정말이냐?”

“그럼요, 귀신하고 얼마나 싸웠다고요. 하마터면 죽는 줄 알았어요. 귀신도 노파 귀신하고 반 뼈다귀 귀신하고 두 명이나 있었어요.”

종리추는 유난히 호들갑스러웠다. 격동하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하고 있는 게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종리추가 금종수를 익혔다는 말은 믿지 않았지만 신변에 이상이 있다는 것은 눈치챘다.

“어디… 그럼 우리 추아가 연공한 금종수를 한번 볼까?”

“예!”

종리추는 밝게 대답했다.

퍼억!

어린아이 머리만한 바윗돌이 반으로 쩍 갈라졌다. 종리추는 어떠냐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이, 이게… 금종수?”

“예, 제가 바위를 쪼갰어요. 아까는 이것보다 더 큰 바위도 쪼갰는걸요.”

“음…! 아주 잘했구나. 그래, 축하한다.”

“피곤하겠다. 어서 가서 자거라.”

적지인살도 배금향도 종리추처럼 들뜬 표정은 아니었다.

‘뭐가 잘못됐어. 뭐지?’

종리추는 양부모의 얼굴에서 실망스런 기색을 읽어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추아가 불쌍해요. 일 년이 넘게 그 고생을 해가지고.. 흑!”

배금향은 가늘게 어깨를 떨었다. 늦게 정을 붙인 자신이라서인지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도 유난히 신경을 쓰는 그녀였다.

“아주 헛고생만 한 것도 아냐. 추아의 몸은 철포삼을 익힌 것처럼 단단해. 그만하면 고생한 보람이 있지.”

“그래 봤자 무인에게는 일초지적도 안 되는걸요.”

“하하, 우물가에서 숭늉을 달라고 해도 유분수지. 이제부터 가르쳐도 늦지는 않았잖소. 내일부터 부지런히 가르쳐 봅시다.”

“그래요, 저도 가르칠 거예요.”

“그럽시다. 그나저나 이제 금종수 수련이 끝난 것 같으니 거처를 옮깁시다. 괜히 홍리족 사람들 마음을 괴롭힐 필요는 없지.”

“그래요, 내일은 먼저 살던 곳으로 가요. 오래 비워놓아서 다시 지어야 할 거예요.”

“하하, 초막쯤이야 반나절이면 충분하지.”

“그리고 금종수… 내색하시면 안 돼요!”

“알았소. 내 전혀 모른 척하지. 아니, 금종수를 익힌 것으로 인정하고 수련을 시키지 뭐. 어떻소?”

“풋! 그래요. 그렇게 해요.”

적지인살은 종리추가 쪼갠 바위를 들어 절단된 면을 살펴보았다.

“비록 금종수는 포기했지만 수투 사용법은 제대로 익힌 것 같더군. 바위 결을 잘 찾아냈어. 밤이라 찾기 힘들었을 텐데.”

“똑똑한 아이잖아요.”

“똑똑한 놈이라면 이런 거짓말은 하지 않지. 당신은 너무 감싸고 도는 것 같아.”

“호호, 질투하시는 거예요?”

“응? 말이 그렇게 되나?”

“호호호!”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종리추가 무덤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동안 금종수를 익힌다고 무덤 앞에 앉아 있을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답답했던지. 부수적인 효과로 육신이 철갑처럼 단단해지니 내버려두었지, 그런 효과마저 없었다면 진작 만류했을 게다. 그랬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종리추가 금종수를 익혔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종리추가 수투를 끼고 있지 않다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종리추가 선보인 격파 정도는 수투를 낀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금종수의 위력이 그 정도에 불과했다면 소림의 대력금강장과 비교도 하지 않았을 게다. 그들은 종리추가 금종수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포기는 해야겠는데 억척스럽게 매달렸던 일이 쑥스러워 간단한 격파를 선보인 것이라고. 머리가 영민한 종리추이니 그들 부부가 수투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테고, 격파를 곧이곧대로 믿지 않을 거라는 것도 생각했을 테고… 이 정도 선에서 봐달라는 애교를 부린 것이라고.

“놈… 내일부터는 정말 혹독하게 수련시켜야겠어.”

“너무 심하게 다루지는 마세요.”

“또 감싸고 돈다.”

“그랬나요? 호호호!”

“당신은 아무래도 그냥 집 안에만 있는 게 낫겠어. 아까워서 어디 수련이나 시키겠어? 하하하!”

두 사람은 종리추의 애교를 받아들였다. 쉬지 않고 쏟아 붓는 빗줄기는 푸석한 땅을 금방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뛰기는 좋은 날씨지?”

“네?”

“오늘부터 초원을 달려라. 야생마처럼 펄펄 날아야 한다.”

“네.”

적지인살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모래주머니를 꺼내 건네주었다. 초막을 지을 때부터 무공을 가르칠 심산에 준비해 두었던 것이다. 무려 일 년여 만에 빛을 보는 모래주머니지만 하필이면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궂은 날씨였다.

“그냥 뛰면 심심할 것 같아서 준비해 뒀다. 팔과 다리에 차거라.”

“그냥 뛰어도 심심하지 않은데…”

종리추는 종알거렸지만 싫다는 뜻이 아니라 장난하고 싶은 마음이 발동해서였다.

‘처음부터 성정을 단단히 잡아둬야 해. 어디로 튈지 모르니.’

적지인살은 호되게 수련시키기로 다시 한 번 작심했다.

“초막을 완성할 때까지 계속 뛰어야 한다. 걷는 것은 좋지만 쉬어서는 안 된다. 알아들었느냐!”

일부러 근엄하게 말했다. 부모의 정을 느끼기 시작한 종리추는 툭하면 어리광을 부리려 들었다. 근래에는 금종수에 미쳐 장난기가 사라졌다 싶었는데, 다시 돋아나고 있다. 무공은 장난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전심전력을 다해야 한다.

“네.”

종리추가 대답을 하고는 초원을 달리기 시작했다. 폭우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쏟아졌다. 종리추는 분명 초원 어딘가를 달리고 있을 터이지만 초막에서는 달리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맑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초원이다. 하물며 폭우가 앞을 가리고 있으니 형체조차 보일 리 없었다.

“점심때가 다 돼가는데…”

배금향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쑥 내뱉고 말았다. 무공을 배우지 않으면 모를까, 배우기 시작했으면 철저하게 배워야 한다. 지금 흘리는 땀 한 방울이 훗날 목숨을 살려주는 절대병기가 될 것이다. 배금향은 모성애와 무림인으로서의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제법 버티는데. 모래주머니에 빗물까지 스며들어 꽤나 무거울 텐데. 땅도 질척거리고… 두고 보자고, 얼마나 버티는지.”

적지인살이 폭우 너머 보이지 않는 곳을 보며 말했다. 종리추는 움직이지 못했다. 벌써 한 시진. 독이 잔뜩 오른 녹색 뱀 떼는 종리추를 둘러싸고 뒹굴거렸다. 초원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늪이 있고 풀이 길게 자라 한 길이 넘지만 평화롭고 아늑한 곳인 듯했다. 크나큰 착각이다. 초원에는 종리추 가족뿐만이 아니라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생물들이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다.

‘여, 여긴 뱀 굴이야!’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발길은 뱀 굴 한가운데 들어섰고, 연녹색의 연약해 보이는 뱀들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놈들은 참 묘하다. 보통 뱀들보다 훨씬 가느다랗고 길이도 짧다. 색깔도 나뭇잎보다 연한 연녹색이다. 그런데…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물리기만 하면 즉사할 수밖에 없다는 예감이 든다. 보통 뱀들은 바위틈이나 땅속에 보금자리를 틀어놓는다. 먹이도 기다리지 않고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이놈들은 널찍한 모래 구덩이를 파놓고 먹이가 굴러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모래 구덩이 여기저기에 손가락 크기로 뚫려 있는 작은 구멍들이 놈들의 보금자리다. 놈들은 성급할 게 없다. 굴러 떨어졌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듯 느긋하게 뒹굴거리고 있었다. 얼핏 봐도 수십 마리는 될 듯한데…

‘움직이면 바로 달려들거야.’

폭우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씻어냈다. 발목과 팔목에 찬 모래주머니가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풀어버리고 싶었지만 연녹색의 뱀들은 그런 행동조차도 용납하지 않을 것 같았다.

쉭! 쉬이익! 쉭쉭…!

연녹색의 뱀들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종리추는 뱀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일정한 음률을 찾아내진 못했다. 뱀이 사물을 지각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가까운 것은 눈으로 보고, 먼 것은 냄새로 알아내거나 땅의 울림으로 감지한다. 귀는 퇴화되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다. 종리추가 그나마 할 수 있는 방법인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위기를 빠져나갈 방법이 또 하나 있다. 다른 먹이가 구덩이에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인데, 그야말로 요원하기 짝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옷 속에 손을 집어넣어 뱃가죽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수투를 뜯어냈다. 그동안 수투는 홍리족 사내들의 거친 주먹에서 내장을 보호해 주었다. 수투 두 개를 활짝 펴면 복부 전체를 가릴 수 있었고, 홍리족 사내들의 주먹이 아무리 세다 해도 창검까지 막아내는 수투의 방어막을 뚫지는 못했다.

수투를 손에 끼고 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자 수투는 살 속에 녹아버린 양 흔적 없이 사라졌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며 가까이 있는 뱀을 잡아갔다.

쉬익!

위기를 감지한 연녹색 뱀이 머리를 꼿꼿하게 치켜들었다. 두 갈래로 갈라진 혓바닥은 거리를 재는 듯했고, 얇게 벌려진 입속에서는 새하얀 이빨이 번들거렸다.

“네가 내 목숨을 살려줘야겠다. 얌전하게 있어. 옳지. 그렇게. 얌전히…”

먹이 대체. 종리추가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자신 대신 뱀 한 마리를 잡아 먹이로 던져 주고, 자신은 그 틈에 뱀굴을 빠져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지금으로써는 그 방법 외에는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쉬익! 쉬이익…!

연녹색 뱀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손을 노려보았다.

‘수투를 끼고 있으니 물리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걱정되는 것은 다른 뱀들이었다. 자신이 움직이는 것을 감지하고 한꺼번에 달려들기라도 하는 날에는…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쒜에엑!

머리를 곧추세웠던 뱀이 느닷없이 달려들어 손가락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지금!’

쉬익!

종리추의 손가락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좌우로 흔들거리는가 싶더니 엄지와 검지로 뱀의 머리를 잡아갔다. 오채산 암굴에서 적지인살에게 배웠던 지법이다. 적지인살은 혈도를 정확히 타격하는 방법을 일러주었고, 잠깐에 불과하지만 수련까지 시켰다. 종리추는 그 지법을 잊지 않고 있다. 변검을 익히는 동안 습관화된, 한 번 익힌 동작은 잊어버리지 않도록 수련을 반복하는 습관이 당시의 지법을 몸에 배이게 만들었다. 적지인살은 모른다. 종리추가 틈이 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정확히 지르는 연습을 했다는 걸.

타악!

하나 종리추는 뱀의 머리를 잡지 못했다.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였지만 뱀의 움직임도 종리추에 못지않게 빨랐던 것이다. 두 손가락으로 머리를 잡으려는 순간, 뱀은 뒤로 머리를 젖히더니 다시 물어왔다. 당황한 종리추는 잡을 생각을 버리고 손가락으로 툭 퉁겨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튕긴 손가락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연녹색 뱀은 일 장이나 나가떨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엉?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가볍게 퉁긴 것뿐인데…’

종리추는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금종수를 전개했다. 변검을 익히며 배웠던 운기토납법이 자연스럽게 일어났고, 백회혈을 통해 들어온 천지간의 기운이 몸속 진기와 어우러져 손가락에 운집되었다. 거기에 수투의 힘까지 가세했으니 전신을 철갑으로 두르고 있어도 부서지지 않을 수 없다. 종리추는 자신감이 생겼다. 바위도 단숨에 부숴 버리는 금종수와 점 한가운데를 정확히 가격할 수 있는 지법이 있지 않은가. 철갑과 다름없는 수투까지 끼고 있다.

‘그래, 겁먹을 것 없어. 난 금종수를 익혔어.’

살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었다. 가급적이면 뱀이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땅이 울리는 것도 방지하려고 애썼다. 소리는 내도 상관없지만 땅이 울리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다행히 옷이 펄럭이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을 모두 물속에 잠겨 버리겠다는 듯이 퍼부어대는 폭우가 종리추를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어 버렸다. 냄새는 어쩔 수 없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냄새가 공기를 타고 이동될 것이고, 날름거리는 뱀의 혓바닥이 냄새를 실어 코와 입천장으로 전달할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듯이 움직여야 돼. 천천히…’

종리추는 일 다경이 흐르는 동안 겨우 한 걸음을 옮겼다. 뱀들은 나가떨어진 뱀에게도 종리추에게도 달려들지 않았다. 아직은 배가 고프지 않은 듯.

“휴우!”

구덩이를 빠져나온 종리추는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추위와 배고픔이 밀려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구덩이에 빠진 게 아침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는데 벌써 사위가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한나절이 지나는 동안 뱀 굴에서 혼자만의 사투를 벌였다니. 뱀 굴을 들여다보자 아찔한 현기증이 치밀었다. 둘러보니 이곳저곳에 마구 뚫린 구멍 속으로 연신 들락거리는 연녹색의 뱀들이 보였다. 놈들 중 어느 한 놈은 배가 고팠을 터인데 그가 제 발로 빠져들어도 달려들지 않았다니… 그거야말로 기적이었다.

‘아냐, 뱀은 먹을 수 있는 것에만 달려들어. 사람을 먹이로 알고 달려드는 것은 왕뱀뿐이야. 독사가 사람을 공격할 때는 위험을 느꼈을 때… 난 위협을 주지 않았어. 그래서 달려들지 않았던 거야. 휴우! 어쨌든 조심해야 할 곳이군.’

다시 한 번… 이곳에 빠진다면 빠져나올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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