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사신 – 27화


둥둥둥둥둥!

암연족이 두들겨 대는 전고 소리는 무척 가깝게 들렸다. 수환봉에서 내려와 녹요평에 이르렀다는 전고다. 그들은 곧 세 번째 전고를 울릴 것이고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며칠을 넘기지 못할 것 같은 노인과 환자들이 공격을 개시할 게다. 암연족은 그들의 죽음을 가만히 관전한다. 어차피 자의로 나선 사람들이지 않는가. 일차 공격이 무산되어 모두 몰살하고 나면 이차 공격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진짜 싸움이다. 녹요평은 긴장으로 물들어 햇볕이 풀잎에 닿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넌 어떻게 된 계집애가 싸움터까지 따라 나오냐?”

“계집애! 이게 화왕에게 맞아 죽을 걸 살려주니까…”

“쉿!”

“…”

“암연족에게 잡혀가고 싶어? 아휴! 이렇게 골치 썩을 줄 알았으면 데리고 나오지 않는 건데.”

“너, 자꾸 그럴 거야!”

“너? 쪼그만 게 어디서 사내에게 반말이야! 좋게 말할 때 말버릇 고쳐라.”

소녀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 씩씩대기만 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일촉즉발의 전쟁터다. 홍리족 사내들은 너무 긴장해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한다.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암연족의 흉맹함은 소녀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어린 소년 소녀라고 봐주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만난 사람은 무조건 죽이는 것이 그들 습성이다. 종리추가 나가서 자세히 보자고 유혹만 하지 않았으면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멀쩡했던 화자가 나가자고 하니 믿을 수 있겠다 싶어 따라 나왔는데… 소녀는 분한 마음이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도리도 없었다. 소녀는 종리추가 얄미우면서도 버리고 떠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을 지우지 못했다.

“너, 이름이 뭐야?”

“…”

“말 안 해?”

“…”

“홍리족은 참 묘해. 어떻게 사내들이 여자들에게 꼼짝 못 하지? 여자들이 더 잘 싸우나? 그래?”

“…”

“그런가 보구나. 그럼 잘 싸워봐. 나는 무서워서 그만 도망가야겠다. 아이구, 무서워!”

“가, 같이 가.”

소녀는 종리추의 옷소매를 잡고야 말았다.

“이름이 뭐야?”

“어, 어린.”

“어린? 물고기 비늘을 말하는 어린?”

“응.”

“무슨 이름이 그러냐?”

“…”

소녀는 대꾸하지 못했다. 화자는 왜 자꾸 엉뚱한 시비를 거는 것일까? 이름이 뭐가 어쨌다고. 아무렇지도 않은데. 홍리족 사람들은 예쁜 이름이라고 부러워하는데. 소녀는 구박을 받은 적이 없었다. 모두들 소녀를 귀여워했고 열 살이 넘으면서부터는 상전처럼 받들여졌다. 난생처음 당하는 구박에 소녀의 울음보는 터지기 직전이었다.

‘넌 버릇부터 단단히 뜯어고쳐야 돼. 계집애가 감히 어디서 기어오르려고 들어. 그나저나 이름은 예쁘네. 어린이라…’

종리추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홍리족 사내와 싸움을 하기 위해 부락을 찾는 동안 그들 풍습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홍리족은 아이가 태어나면 바로 이름을 짓지 않고 백일이 될 때까지 기다린다. 백일이 되는 날, 준비한 물건 다섯 개를 아이 앞에 늘어놓고 하나를 집게 한다. 아이가 집는 물건… 그것이 아이의 이름이 된다. 어찌 보면 참 쉽게 이름을 짓는구나 싶겠지만 결코 쉽지 않다. 물건은 여자가 준비하는데, 부락민이 이미 이름으로 쓰고 있는 물건을 준비해서는 안 된다. 죽은 지 오 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의 이름도 사용할 수 없다. 아이의 이름이 될 만한 물건을 찾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 ‘어린’처럼 예쁜 이름을 지어주려면 더욱 고생해야 한다. 족장의 이름인 구맥은 풀 이름이다. 족장은 백일 날 풀을 집었을 게다. 그런 풍습은 암연족도 같은 것 같다. 흉포하기도 둘째라면 서러워할 암연족 족장의 이름인 모진아는 배내옷을 뜻한다.

“어린이 너, 몇 살이야?”

“열한 살.”

이번에는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난 열세 살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오빠라고 불러. 알았어?”

“난 그런 말을 쓰면 안…”

“부를래, 안 부를래?”

“부를게.”

“불러봐.”

“오… 오, 오빠.”

“그래, 앞으로 그렇게 불러. 알았지?”

“응.”

종리추는 씩 웃었다. 홍리족 차기 족장은 친오빠도 오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이름을 부른다. 누구도 족장 위에 설 수는 없고 혼인하면 다른 집 사람이 될 남자는 더더욱 그렇다.

‘진작 고분고분했으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잖아. 히히! 오빠라… 들어보니 좋긴 좋네.’

종리추가 어린을 유혹해 전쟁터로 끌고 나온 것은 단순히 어린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아넣기 위해서였다. 그래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을 테니까.

둥둥둥둥…!

마지막 전고가 울렸다. 그리고 전고 소리에 맞춰 녹요평과 밀림이 붙어 있는 곳에서 노인 두 명이 창을 들고 나타났다.

둥둥둥둥…!

전고는 노인들의 발걸음을 재촉이라도 하듯 점점 빠르게 울렸다.

“저 사람들 왜 안 죽이지? 화살을 쏠 수 있는 거린데.”

“화살이 아깝잖아. 노인에 불과한데. 코앞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창으로 찔러 죽일 거야.”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야.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데 걸음을 떼어놓기가 얼마나 힘들까.”

종리추는 두 노인이 불쌍했다.

“내가 죽일까?”

“네가?”

“오빠!”

“오… 빠가?”

“한 번만 더 오빠라는 말을 빼먹으면 정말 버려 버릴 거야.”

“쳇! 그럴 마음도 없으면서.”

“이게 정말!”

딱!

종리추는 어린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아프지 않게 살살. 어린은 종리추에게 색다른 감정으로 돌아왔다. 오누이. 그에게는 형밖에 없었고, 형편이 너무 어려워 형제간의 정도 풋풋하게 나누지 못했다. 하지만 진한 형의 사랑을 잊을 순 없었다. 이제 어린이라는 동생이 생겼다. 형이 그랬듯이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줄 수 있는 존재가 생긴 것이다. 종리추는 어린이가 친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거봐. 손에 힘이 빠졌잖아. 내가 좋으면 그냥 좋다고 그래.”

“쉿!”

갑자기 종리추가 어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사삭…!

풀이 흔들렸다. 바람도 없는데 풀이 흔들린다는 것은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다. 종리추는 어린의 허리를 바싹 껴안았다. 이번에는 장난이 아니었다. 종리추의 매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는 풀잎이 흔들리는 곳을 주시했다.

사사삭…!

사람 키를 넘길 만큼 길게 자란 풀잎이 마풍에 흔들리는 것처럼 살짝 흔들렸다.

“조용히 해. 알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소리 지르면 안 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어.”

어린의 귀에다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때 같으면 귓전을 스치는 입김에 간지럽다고 팔짝팔짝 뛰었을 어린이지만 지금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종리추의 돌연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짐작했다. 종리추는 어린을 허리에 끼고 이동하려다 불편함을 느꼈는지 아예 등에 업어 버리고 허리띠를 풀어 꽁꽁 묶었다.

‘두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돼.’

사삭! 사사삭…!

풀잎이 흔들리면 종리추도 움직이고 풀잎이 멈추면 같이 멈췄다. 흔들리는 풀잎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아졌다. 종리추는 뒤나 옆으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흔들리는 풀잎을 향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사삭!

다시 풀잎이 움직였다. 그리고 종리추가 번개처럼 흔들리는 풀잎을 향해 뛰어들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역시 생각했던 대로 암연족 전사였다.

‘역시… 급습을 하는 즐거움을 놓칠 리 없지. 나 같아도 정면 공격보다는 기습을 택하겠어. 깜짝 놀라는 표정을 보는 것도 재미있으니까. 기습을 허용해서는 안 돼. 제길! 오늘 땀나게 생겼네.’

암연족 전사의 이번 공격에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 홍리족을 밀어내고 녹요평을 차지하는 것도 목적 중에 하나이지만 그보다는 홍리족 전사를 사로잡으려고 한다. 노예가 부족한 것이다. 그들은 비교적 순한 홍리족을 희생물로 택했고, 죽이지 않고 사로잡으려면 아무래도 기습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종리추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예상이 맞았다. 암연족 전사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황망히 창을 고쳐 잡는 동안 종리추는 전사의 앞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지금은 유시 필 사혈 요유혈. 치기 어렵다. 칫! 어려우면 포기해야지.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은 몸을 날리기 전에 굳혔다. 적지인살이 가르쳐 준 뇌인일지공에 따르면 지금 시간에는 요유혈이 가장 취약하다. 엉덩이뼈 중 움푹 들어간 곳에서 조금 위에 있는 혈. 일반적으로 ‘엉덩이’하면 뼈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독맥을 구성하는 주요 혈도가 네 개나 있다. 요유혈은 정말 치기 어렵다. 뒤에서라면 모를까 정면에서는 더욱 칠 수가 없다. 종리추는 암연족 전사의 앞가슴으로 파고들며 손가락을 쭉 뻗었다. 전사는 상대가 겨우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는 씩 웃으며 손을 마주 뻗었다. 종리추는 앞가슴을 쳐가는데 전사는 멱살을 잡아왔다.

뻐억!

중정에서 둔탁한 소리가 터졌다. 중정에 극심한 충격을 받으면 구토가 치밀며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해진다. 졸도를 시키는 혼혈이다. 암연족 전사는 일 장가량이나 나뒹굴었다. 그는 졸도 대신 죽음을 택했다. 종리추는 긴장한 나머지 전력을 쏟아 부었고, 그가 쳐낸 일장에는 금종수의 묘결이 가미되었다. 수투에서 폭출되는 거력도 함께했다. 나뒹군 전사는 앞가슴이 깊이 함몰되었고 입과 코에서 검은 피를 흘리고 있었다.

사삭! 사사삭…!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는 연이어 들렸다. 쓰러진 전사가 있던 곳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했는지 주변에 있던 암연족 전사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들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짓쳐 왔을 때는 텅 빈 공간과 이미 절명한 암연족 전사밖에 남은 게 없었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