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28화
변검을 익히기 위해서는 빠른 손재주 외에도 극도로 발달된 오감이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면 오감을 뛰어넘어 육감으로 발전해야 한다. 변검이란 손재주가 아니라 감각이다. 변검 양부가 종리추를 변검 후계자로 지목하고 양자로 맞이한 것은 그의 뛰어난 감각을 읽었기 때문이다. 종리추의 감각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을 고르라면 단연 청각이다. 작은 소리도 잘 듣는다는 것 정도로는 청각이 발달되었다고 할 수 없다. 소리를 구분해 내는 감각. 종리추는 이것이 발달되었다.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어른인지 아이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키는 어느 정도이고 체중은 얼마나 나가는지… 거의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새들의 소리를 듣고,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듣고, 살아 있는 생물의 소리를 듣고 무엇을 하려는지,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은 선천적인 것이고 변검 양부는 그런 점을 잘 읽었다. 종리추의 귀에는 풀잎 움직이는 소리가 뚜렷이 들렸다.
‘좌측에 넷, 우측에 둘… 전면에 둘, 물러설 수밖에 없군. 그렇지. 유인하는 거야, 다른 곳으로.’
암연족 전사들은 불의의 일격을 당한 후 서로 간의 간격을 최대한으로 좁혔다.
둥둥둥둥…!
북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전고 소리는 노인 두 사람이 녹요평을 가로질러 홍리족 용사들에게 찔려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풀숲에서 암약하는 암연족 전사는 기습을 가할 수 있는 위치를 점거해야 하리라.
“어린, 작게… 아주 작게 속삭여. 아무 말이나 괜찮으니까 계속 중얼거려.”
종리추가 모깃소리보다도 작게 말했다.
“말하면 들키잖아.”
어린도 작게 속삭였다.
“그래, 그렇게 계속 중얼거려. 알았지?”
“응… 모두 이렇게 피부가 하얗니?”
종리추의 피부는 하얗지 않았다. 초원을 뛰어다니느라 검게 그을렸다. 하지만 홍리족 사람들에게는 하얗게 보이는 모양이다.
“왜 대답 안 해?”
“혼자 중얼거려. 계속.”
“치잇! 재미없어. 알았어, 계속할게. 그런데 정말 계속 말해도 괜찮아? 암연족 전사들에게 들키면 어떻게 하려고?”
종리추는 어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풀숲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되었다.
‘좁혀온다!’
슬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암연족 전사들은 무작정 용맹만 내세우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싸우는 방법을 알고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 방법 또한 알고 있다. 확실한 기회가 포착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게다.
‘발각됐어!’
어린이 계속 중얼거리고 있으니 발각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하다. 암연족 전사는 사방에서 질풍처럼 덮쳐 왔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함 소리 같은 것은 더더욱 들리지 않았지만 종리추는 분명히 느꼈다. 종리추는 숨어 있는 곳에서 튀어나와 돌 주머니를 달고 뛸 때처럼 치달리기 시작했다. 등에 어린이가 업혀 있지만 돌의 무게에 비하면 종이처럼 가벼웠다. 몸의 일부처럼 차고 다니던 돌 주머니를 풀어놓아서인지 신형이 날아갈 듯 가뿐했다. 종리추는 비호처럼 뛰었다. 거침없이 뛰었다. 구덩이가 나타나도 훌쩍 건너뛰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치달리기만 했다.
‘어디 한번 따라와 봐. 누가 빠른가 볼까.’
“저, 저건!”
배금향은 깜짝 놀랐다. 전고가 아직도 들리고 있고 암연족 노인 두 명이 녹요평을 가로지르고 있어서 잠시 종리추에게 시선을 거뒀다. 그 틈에 사단이 벌어지고 말았다. 배금향이 있는 곳에서는 종리추의 정확한 모습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풀숲이 흔들리는 모습을 확실히 보였다. 앞에서 풀숲을 가르는 자는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뒤에서, 사방에서 먹이를 노리고 달려드는 뱀처럼 갈라지는 풀숲은 도주하는 자를 뒤쫓고 있는 게 틀림없다.
‘추아야! 추아가 쫓기고 있어!’
싸움도 시작되기 전에 쫓길 사람은 종리추밖에 없었다. 아니, 틀림없이 종리추였다. 직감이 그랬다. 배금향처럼 큰 집 지붕에 올라와 녹요평을 바라보던 족장 구맥도 풀숲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봤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뭐라고 고함쳤다. 홍리족이 술렁거리는 가운데 중년을 넘었을 여인이 달려와 연신 풀숲을 손가락질 해대며 뭐라고 말했다. 구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구맥의 딸이며 차기 족장인 소녀가 종리추와 같이 녹요평에 간 사실을 이제야 안 듯했다.
‘추아를 믿어야 돼. 추아는 살천문의 추적도 벗어난 아이야.’
배금향은 태연한 표정으로 구맥을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추아가 잘 보살필 거예요.”
구맥도 한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배금향의 표정을 보고 말뜻은 알아차린 듯 이내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깊게 그늘진 수심은 지워지지 않았다. 수심이 지워지지 않기는 배금향도 마찬가지였다. 종리추는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배금향이 아무리 빨리 달려가도, 적지인살이 달려가도 도와줄 수 없는 곳으로 치닫고 있다. 영민한 아이, 살천문의 추적을 벗어난 아이… 아무리 마음을 편하게 가지려 해도 편해질 수 없었다.
쉬! 쉬이익…!
종리추는 달리는 와중에도 암연족 전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추격전은 팽팽하다. 종리추나 암연족 전사나 초원의 성질을 잘 알고 있다. 지리적이점은 누구도 얻지 못한다. 종리추는 어린아이이지만 신법을 익혔고, 암연족 전사는 어른이면서 본능적인 움직임이 빠르다. 암연족 전사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동물도 사냥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치잇! 그냥 따라오는 게 아냐. 포위하고 있어.’
싸움, 사냥에는 따라갈 자가 없다던 암연족 전사들은 사냥감을 한 곳으로 몰아넣었다. 준비가 되어 있다.
‘아버지는 지면에 닿는 부분을 최소한으로 줄였어. 걸을 때는 발끝으로만… 엎드릴 때는 발끝과 양손 검지만 땅에 닿았지. 땅과 맞닿는 부분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소리를 죽인 거야. 엎드려 있기만 한다면 몰라도 움직여야 될 처지라면 접촉하는 부분이 적을수록 소리는 줄어들어.’
종리추는 적지인살이 천음산 입구에서 개방도를 죽이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람이 이렇게도 할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할 만큼 아버지의 움직임은 신속하고 조용했다. 종리추는 적지인살처럼 발끝과 양손 검지로 전신을 떠받쳤다. 이런 자세는 즉시 일어나야 할 경우에 아주 유용하다.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를 죽이고 몸이 풀잎에 스치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소리 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사악…! 삭!
암연족 전사들은 극히 은밀하게 걸었지만 종리추는 그들과의 거리를 정확히 계산해 냈다. 그리고,
슉! 퍼억!
번개같이 일어서며 내지른 관수가 전사의 거궐혈을 꿰뚫었다. 손끝에서 부르르 떨리는 횡격막의 경련이 느껴졌다. 옛날… 벽에 뚫린 구멍으로 살천문의 황정을 찌를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죽음의 느낌.
“…커억! 컥!”
전사는 쓰러진 다음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컥컥거렸다. 작정하고 내친 금종수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무사할 수가 없었다.
‘금종수는 전신에 깃든 내력을 일시에 쏟아 붓는다. 그래서 타격이 큰 거야. 금종수는 소림의 대력금강장과 버금가는 위력을 지녔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어. 단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전신 기력을 모두 쏟아냈으니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처지가 되지. 그런데 나는 그렇지 않아. 움직일 수 있어. 금종수를 연속적으로 쳐낼 수 있어. 백회혈을 통해 받아들인 외기를 내기 대신 사용하기 때문이야. 아버님이 가르쳐 준 운기토납법은 금종수와 단짝이야. 아주 궁합이 잘 맞아.’
종리추는 왼발을 축으로 빙그르르 신형을 돌려세웠다. 뒤에서 쫓아오던 암연족 전사는 두 명이었다. 아직 한 명이 남아 있다. 다른 자들도 기척을 듣고 달려들고 있다. 시간이 없다. 시간이. 몸을 반쯤 틀었을 때 코앞까지 짓쳐온 창날이 보였다. 종리추는 얼굴을 비틀어 창날을 흘려보내고, 왼손을 계구로 만들어 창대를 쳐냈다.
따악!
계구는 정확히 창대를 쳤고, 창대에서 맑은 울림이 터지더니 창날 부근이 뚝 부러져 튕겨 나갔다. 이어서 몸을 낮게 숙이고 돌진해 어깨로 전사의 복부를 들이쳤다.
“헉!”
전사는 다급한 헛바람을 토해냈다. 그는 첫째로 상대가 꼬마인 것에 놀랐고, 둘째로 눈 깜짝할 순간에 창대가 부러져 나가는 것에 놀랐으며, 마지막으로 복부에 틀어박힌 몸뚱이가 돌덩이처럼 단단한 데 놀랐다. 종리추는 전사가 주춤 뒤로 물러난 틈을 이용해 허공으로 도약했다. 그의 양손은 이미 평권이 되어 있었다.
뻐억!
조금은 둔탁한 소리가 났다. 전사의 이빨이 부러져 나오는 소리였다. 전사의 광대뼈와 턱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였다. 종리추는 전사의 양쪽 뺨을 평권으로 후려쳤고, 전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혼절해 버렸다.
‘살아도 죽는 것만 못할 거야.’
종리추는 계구로 전사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내리쳤다.
퍼억!
계구는 정확히 입술 아래에 있는 승장혈을 타격했다. 승장혈은 안면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혈이다. 하지만 강도가 조금만 강해도 사망까지 이르게 한다. 음식을 씹지 못하고, 말도 못하고… 그래도 사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죽는 것이 좋은가.
…종리추는 죽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