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30화
둥둥둥둥…!
마지막 전고는 거의 반 각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죽은 노인들을 조상하는 의식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노인들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자연스럽게 싸우다 죽은 사람들은 아부타의 품 안에 스스럼없이 안길 수 있지만, 억지로 죽음을 만든 사람들은 혹 내침을 당할 수도 있기에 싸우다 죽었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반 각 동안 전고를 울려준다.
둥…! 둥…! 둥…!
전고 소리가 바뀌었다. 연속적으로 짧게 치는 소리에서 길게 여운을 남기는 소리로. 홍리족 용사들은 바짝 긴장했다. 창을 쥔 손에 땀이 배이는지 연신 닦아댔고 창날을 살펴보는 사람, 활을 점검하는 사람, 독침을 넣었다 뺐다 하는 사람… 시간이 흐를수록 긴장은 도를 더해갔다. 암연족의 전고 소리는 단지 추모를 하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진을 빼는 역할도 했다.
둥…! 둥…!
북소리가 울리면서 암연족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넓은 초원에 비하면 한 부분을 차지한 것에 불과한데, 초원 전체가 암연족 전사들로 가득 찬 듯 느껴졌다. 실제로 암연족 전사는 수적인 면에서 홍리족보다 훨씬 많아 거의 배는 되는 듯했다.
쿵! 쿵! 쿵!
홍리족 용사들은 창으로 땅을 치기 시작했다. 심리적인 불안을 다소나마 해소시키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행동이리라. 암연족은 서둘지 않았다.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질서 있게, 천천히 다가왔다. 홍리족처럼 창으로 땅을 치지도 않았고 소리도 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다가올 뿐이다.
‘안 돼! 이건 싸움이 안 돼!’
홍리족 용사들의 생각은 얼굴에 나타났다. 잔뜩 굳어진 얼굴 뒤에는 죽음의 공포로 가득했다.
‘몸만 성했어도… 혈염도법이 무섭기는 하지만 왼팔 하나만으로는 부족해. 진기도… 대거혈만 손상되지 않았어도… 무리하게 진기를 끌어올리며 주화입마를 당하는데. 반 각… 반 각 안에 싸움을 끝내야 하는데 어림도 없어.’
적지인살은 암울했다. 살기를 번뜩이며 다가오는 암연족 전사들은 두렵지 않았으나 죽음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음이 자신 혼자만으로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배금향과 종리추에게까지 영향이 미칠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암연족이 삼십여 걸음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그들 정중앙에 고릴라처럼 덩치가 큰 전사가 이목을 끌었다. 그는 옆에 선 전사보다 족히 머리 하나는 더 컸고 근육도 바윗덩어리처럼 단단했다. 옆에 선 전사도 단단하기로는 손색이 없는데 그 전사에 비하면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가 창을 높이 쳐들고 뭐라고 소리쳤다. 순간 홍리족 용사들의 안색은 더욱 굳어졌고, 암연족 전사들은 창을 높이 쳐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와아아…!”
초원은 암연족 용사가 지르는 함성으로 가득했다. 그것이 신호였다.
“와아아…!”
암연족은 병아리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거침없이 밀려왔다.
‘저 자를 죽여야 돼!’
적지인살은 목표를 정했다. 덩치가 산처럼 큰 자가 암연족을 이끌고 있다. 설혹 족장은 아닐지 몰라도 이 싸움은 그에게 맡겨진 것이 틀림없다.
쉬이익.
적지인살은 빗살처럼 날았다. 일순 앞서 달려오던 암연족 전사가 주춤거렸다. 적지인살의 신형은 남만인들로서는 처음 보는 놀라운 것이었다. 빠르고, 현란하고, 아름다우면서 죽음의 공포를 담고 달리는 자.
“타앗! 크윽!”
그는 재빨리 창을 내뻗었지만 적지인살의 기형월도는 이미 창대를 반으로 갈라 버리고 전사의 앞가슴에서 선혈을 뽑아냈다. 동시에 몸을 좌로 틀며 오른발로 틀어 돌려 찬 뒷발질에 전사의 가슴뼈는 잘게 부서졌다. 암연족 전사들이 금룡파미를 알 까닭이 없다. 그냥 뒷발질에 죽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적지인살은 다시 몸을 돌렸다. 몸이 회전하면서 발생하는 가속을 얻고자 함이다. 기형월도가 회전하는 몸을 따라 허공을 갈랐다.
“으아악…!”
암연족 전사가 황급히 방패를 들어 막아왔지만 기형월도는 방패마저 반으로 갈라 버리며 전사의 목을 잘라냈다. 목 없는 동체가 비틀비틀 몇 걸음 걷다가 풀썩 무너졌다.
“와아아…!”
홍리족 용사들의 피가 끓어올랐다. 적지인살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전사 두 명을 죽여 버리자, 이길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팽배했다. 그들은 일제히 암연족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이 자는! 무공을 배웠다!’
느낌이었다. 고릴라처럼 우람한 전사는 극히 정제된 몸놀림으로 기형월도를 피해냈다. 전사가 씩 웃으며 거만하게 고개를 휘둘렀다. 전사의 몸에서 자신감이 풍겨났다. 가소롭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적지인살은 기형월도를 곧추세워 가슴을 겨냥했다.
‘빨리 끝낼수록 희생이 줄어든다. 필살도 비응회선으로 끝내자.’
수직으로 들어 올려진 기형월도가 수평으로 벌려졌다. 운신이 불편한 오른팔도 왼팔과 균형을 맞춰 수평으로 올려졌고 다리 한쪽은 학처럼 들어 올렸다.
‘아! 오른팔이… 오른팔이 회전을 주지 못해.’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다. 적지인살은 오른팔로만 비응회선을 수련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며 월광을 뿜어내는. 한데 지금 자세는 정반대다. 왼손에 월도를 들었으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
‘한 번밖에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적지인살은 완벽한 기회를 잡기 위해 눈을 빛냈다.
“…흐흐흐…!”
전사가 뭐라고 말했지만 웃음소리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아마도 비웃는 듯했다.
‘단 한 번. 단 한 번…’
“타앗!”
우람한 전사는 창을 내질러 왔다. 고함은 우렁찼지만 긴장해서 내지른 창이 아니라 갓난아기를 상대하는 듯 가볍게 툭 밀어낸 창이었다.
‘기회!’
적지인살의 신형이 팽이처럼 돌기 시작했다.
타앙!
첫 번째 회전에서 창날을 퉁겨냈다.
타악!
두 번째 회전에서 창대를 잘라냈다.
슈우욱…!
세 번째는 회전하는 그대로 신형이 허공에 떠올랐다. 기형월도에서는 태양이 빛을 뿜어내는 듯한 강렬한 광채가 새어 나왔다.
“비응회선!”
배금향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배금향이 있는 곳에서도 기형월도에서 뿜어지는 광채가 확실히 보였다. 적지인살의 기형월도에는 빛을 발광하는 인이 숨겨져 있다. 기형월도의 도신에 숨어 있는 인은 무서운 속도로 공기와 마찰될 때 새어 나온다. 무서운 속도… 인을 태울 만큼 무서운 속도… 혈염도법의 마지막 절초인 비응회선은 회전에서 속도를 얻어냈다. 그냥 회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 회전에 스무 번의 변화를 가미한다. 공기와의 마찰을 최대한으로 얻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월도의 도신을 뒤집는 것이다. 회전력이 가미된 기형월도는 상상 이상의 힘으로 상대를 짓누른다. 창이 되었든 대부가 되었든… 월도에 부딪친 모든 것이 부서져 나간다. 비응회선은 인이 뿜어져 나오지 않는다 해도 초식 자체만으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다. 하물며 인이 발산되어 시력까지 빼앗긴 상태에서는 더더욱 막아낼 수 없다. 비응회선에도 단점이 있다. 회전이 축이 되는 발과 월도를 뒤집는 손목에 극심한 무리가 온다. 또한 일신의 모든 진기를 월도에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에 비응회선을 펼친 다음에는 탈진 현상을 겪는다. 상대가 비응회선을 미리 알고 멀찌감치 피해 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목숨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다. 짧은 거리에서 완벽한 허점을 잡고 필살을 노릴 때 사용하는 도법이 비응회선이다.
“도, 도대체 암연족 전사 중에 누가 있기에 비응회선을!”
배금향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신음을 삼킬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가봐야지.’
그녀는 누가 말릴 겨를도 주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말릴 사람도 없었지만.
빠아악-!
천둥 소리도 이보다 크지는 않으리라. 녹요평 한가운데서 천지를 삼켜 버릴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피보라도 자욱하게 피어났다. 조각조각 찢어진 살점과 작게 흩어져 피어나는 피보라는 녹요평을 붉게 물들였다. 일시에 싸움이 중지되었다. 암연족 전사도 홍리족 용사도 창을 맞댄 채, 몸을 맞댄 채 소리가 터진 곳을 응시했다. 태양보다 뜨거운 열풍이 스쳐 갔다. 기형월도에서 쏟아져 나온 백린이 가뜩이나 더운 날씨를 더욱 덥게 만들었다. 원래 백린에 맞닿은 물체는 불이 붙어야 한다. 백린은 화의 성질을 지니고 있어 쇳조각도 태워 버린다. 하지만 바싹 마른 초원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비응회선의 강력한 회전은 백린이 퍼져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큰 회전 속에 숨어 있는 작은 회전이 백린을 끌어당긴다. 백린은 월도의 도신에서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빙글빙글 도는 월도를 따라 같이 돈다. 강렬한 광채를 발산하면서. 백린이 원래의 성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는 상대와 부딪친 후다. 부딪치는 것이 무엇이든 충돌이 일면 돌고 돌던 백린은 탈출구를 찾았다는 듯 부딪친 상대에게 쏠린다. 찢겨진 살점은 월도의 회전력 때문이다. 핏줄기가 솟구치지 않고 피보라가 이는 것은 백린이 핏물을 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고릴라처럼 덩치가 우람한 전사는 검게 그슬린 처참한 모습으로 초원에 누웠다. 시신마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찢겨져 시신만 보고는 우람한 전사였다고 믿기 어려웠다. 다른 시신도 있었다. 우람한 사내 곁에 있던 전사 세 명이 어겁결에 불벼락을 맞았다.
“헉헉…!”
적지인살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형월도를 들고 있을 힘도 없었다. 아니,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여세를 몰아야 돼!’
“공격하라!”
적지인살은 힘껏 고함을 내질렀다. 하나 그 고함은 아예 치지 않느니만 못했다. 목청을 뚫고 새어 나온 음성은 개미가 기어가는 듯 작고 맥이 없었다. 홍리족은 한어를 모른다. 그들은 ‘공격하라’는 소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너무나 힘이 없어 ‘부축해 줘’ 혹은 ‘호위해’ 등등 좋지 않은 소리로 들렸다. 암연족 전사들 중 누군가가 뭐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적지인살 주변에 있던 전사 몇 명이 창을 내질러 왔다.
‘아버지가 탈진했어! 아버지는 정상이 아냐. 대거혈을 치료하지 못했는데… 안 돼! 아버지가 죽어!’
종리추는 다급했다. 싸움터에 끼어들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고 무공도 미숙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다. 종리추는 등에 어린을 업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오는 암연족 전사는 땅에 쓰러져 있는 홍리족 용사의 가슴을 창으로 내리찍고 있었다.
“그냥 뛰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 없다. 어느 순간이고 용천혈을 놓치지 마라. 발바닥이 땅을 디딜 때마다 대지의 기운이 용천혈을 타고 몸속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해라. 대지의 기운은 네 몸을 한결 가볍고 빠르게 해줄 것이다.”
‘대지의 기운이 용천혈로!’
신형을 허공에 띄웠다. 띄우기가 무섭게 양 발을 번갈아 걷어찼다.
퍽! 퍼억!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암연족 전사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넘어질 때는 머리가 완전히 뒤로 꺾였으니 목뼈가 완전히 부러진 듯하다. 종리추는 땅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다시 튀어 올랐다. 이번에는 왼발을 올리자마자 오른발을 추켜올려 휘돌려 찼다. 원앙각에 이은 선풍각. 종리추는 자신이 무슨 초식을 전개했는지도 몰랐다.
“초식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초식이란 싸우다 보니 잘 먹히는 수가 있고, 그런 수들을 모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전에서는 가장 적합한 권형을 찾아내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가지만은 변하지 않는 게 있다. 호흡이다. 호흡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강호흡과 유호흡이다. 한껏 들이킨 후에 멈추고 강렬하게 뿜어내는 호흡이 강호흡이다. 강호흡은 폭발하는 힘이 크다. 소림의 백보신권 같은 무공이 대표적이지. 유호흡은 부드럽게 흡입하고 조금씩 내쉬며 진기를 골라 무공을 펼친다. 마지막에는 아주 잠깐 지식을 하고 폐에 남은 잔기를 모두 쏟아 낸다. 무당파의 면장이 대표적인 무공이다. 하지만 소림이라고 강호흡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무당파라고 유호흡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어느 호흡이든 고루 사용할 줄 알아야 하고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종리추는 강호흡을 선택했다. 강호흡은 폭발력이 강한 반면 내부의 균형을 무너뜨려 자칫하면 내상을 초래한다. 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여유가 없었다. 가장 강한 힘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일만 있을 뿐이다.
“타앗!”
작은 몸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적지인살은 찔러오는 창을 막을 힘이 없어 풀밭으로 몸을 굴렸다. 천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온 사람처럼 몸이 무거웠다. 현기증까지 치미는지 눈앞이 노래졌다. 어디서 창이 찔러오는가. 적지인살은 단지 느낌으로만 창날을 피해냈다.
퍼억!
허벅지에 극렬한 통증이 일었다. 통증은 곧 뼈마디를 타고 올라와 뇌 속까지 마비시켰다.
‘크으윽…!’
적지인살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았다. 와중에도 자신이 비명을 지르면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슈욱!
느낌이 좋지 않다. 적지인살은 다시 뒹굴었다.
‘이렇게 당할 순 없어!’
암연족 전사들은 다소 사기가 꺾이는 듯했지만 처음보다 더 피에 미쳐 날뛰었다. 적지인살이 꿋꿋이 버티고 있으면 계획대로 힘없이 무너졌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진기를 모으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분노를 끌어낼 뿐이었다.
‘주화입마에 걸리는 한이 있더라도…’
적지인살은 일창을 맞을 각오를 하고 호흡을 크게 들이쉬었다. 진기란 진기는 모두 훑어 모으려는 행동이었다. 그때,
“아버지!”
적지인살은 환청인가 싶었다.
‘이건 추아의 목소린데… 그럼 추아가! 안 돼! 아직은 안 돼!’
적지인살은 더 다급해져 내리찍은 창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려 음성이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적지인살… 그는 어느새 자신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을 만큼 종리추를 사랑하고 있었다.
쒜에엑!
하늘을 선회하는 매처럼 양팔을 활짝 벌리고 날아오르는 종리추의 모습이 보였다.
“비호무영보! 이, 이 정도까지!”
적지인살은 감탄을 터뜨렸다.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마저 감돌았다.
빠악!
창을 내리찍던 암연족 전사가 강력한 둔기에 등짝을 얻어맞고 나뒹굴었다.
“네게 초식을 전수하지 않고 달리기만 시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심장 강화다. 너는 심장을 강화시키는 일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다. 먼저 심장을 강화시킨다. 지구력이 좋아져 쉽게 피로하지 않고 회복 속도도 빨라질 게다. 둘째, 네 몸을 바꾼다. 네 몸에는 무공을 익히는 데 장애가 되는 지방이 많이 있다. 달리면서 말끔히 태워 버려라. 셋째, 혈로를 넓힌다. 기가 원활히 달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몸을 만드는 것은 무공을 익히는 데 가장 중요하다. 발로 차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하루에 천 번씩 수련한 사람과 한두 번 깔짝댄 사람 중 누가 낫겠느냐? 든든하게 뿌리를 내린 천 년 고목과 이제 갓 심은 묘목 중 어느 것이 돌풍을 이겨내겠느냐? 기본공은 아무리 거듭해도 모자란다는 점을 명심해라. 달리는 것은 기본공을 익히는 초석에 불과하지만 많은 이득이 있으니 일 년 동안은 아무 생각 말고 달려라.”
종리추는 단숨에 십여 명이나 때려눕히며 달려왔지만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지난 일 년 그는 정말 혹독하게 수련했다. 적지인살이 잔인하리만치 수련을 강요했지만 종리추는 거기에 한술 더 보태 시키지 않은 수련까지 해왔다. 그 효과가 녹요평 전투에서 발휘되고 있다.
“아버지, 제가 호법을 설게요!”
적지인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지금 무슨… 빨리 기력을 회복해야 돼.’
그는 싸움판 한가운데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단시간에 흩어진 진기를 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적지인살이 눈을 떴을 때는 배금향까지 싸움에 가세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기를 죽여야 돼.’
그는 일어서면서 진기를 끌어내 사자후를 터뜨렸다.
“우하하하핫…!”
과연 싸움이 멈췄다. 적지인살의 회생은 커다란 무게로 암연족 전사의 가슴을 짓눌렀다. 홍리족 용사는 이미 절반가량이 핏속에 드러누웠다. 홍리족 사내 중 건장한 사람 절반이 혈해에 몸을 누인 것이다. 서 있는 자들 중에도 부상을 입지 않은 자는 없었다. 홍리족은 수환봉을 내줬고 천폭도 순순히 빼앗겼다. 그러나 녹요평만은 사내들 모두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내어줄 수 없다는 기세였다. 이들이 부족 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보여주는 명확한 사례다. 옛날에 종리추가 만약 무덤을 손상시키기라도 했다면… 이들은 암연족 대신 적지인살에게 덤벼들었을 게다. 화왕이 아니라 염라대왕이라 해도.
‘여기서 싸움을 말려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홍리족은…’
“물러가랏! 물러가지 않는 자 모두 죽는다!”
적지인살이 다시 한 번 사자후를 토해냈다. 그의 말뜻을 종리추가 정확히 전달해 주었다. 종리추도 피투성이였다. 종리추의 등에 업혀 있는 소녀도 피투성이였다. 배금향도… 모두 피투성이였다. 적지인살은 비응회선을 펼치리 때의 자세를 취해 보였다. 비응회선을 펼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기가 꺾여 얌전히 물러가 주면 고마울 뿐. 그때였다. 암연족 전사들 뒤쪽에서 키가 작고 몰골도 추레한, 뼈마디도 가늘어 암연족 전사라고는 믿기 어려운 중년인이 나서며 뭐라고 말했다.
“암연족 전사들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명을 내렸어요. 모진아예요.”
종리추가 통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