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32화
여든네 명의 홍리족 용사가 살아남은 사람들 손에 거둬져 초원 곳곳에 눕혀졌다. 홍리족이 풍장을 치른다고는 하지만 초원 아무 곳에나 방치하는 것은 아니다. 집집마다 비바람에 육신을 삭히고, 동물들로부터 뼛조각이 손상되지 않도록 돌볼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장례는 조용하게 치러졌다. 다른 때 같으면 요란한 의식 속에 떠나는 자를 애도할 터이지만 전쟁처럼 사람이 무더기로 죽어 나갈 때는 젖은 헝겊으로 시신을 닦아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루가 지나자 홍리족 사람들은 암연족이 왜 갑자기 물러갔는지 연유를 알게 되었다.
“화자와 모진아가 이 년 후에 싸운다고? 그런 약조가 있었어?”
“화자가 서른두 명이나 죽였대.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꼬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화자니까 그렇지. 화왕의 아들이잖아. 화왕도 목탄을 단숨에 죽였다던데? 왜, 밝게 빛나는 빛 봤지? 그게 화왕이 한 거래. 화왕이 몸을 빙글빙글 돌리자 몸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대.”
“정말 화왕이야.”
이기지도 않았지만 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앞으로 이 년 동안은 싸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홍리족 부락민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런데 화왕이면 우릴 죽여야 하는데 왜 우릴 도와줬지?”
“마음씨 좋은 화왕인가?”
“예끼! 그런 화왕이 어디 있어. 하기는 마음씨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그런 화자가 무덤에서 한 일은 뭐지? 고병 말대로 영혼을 빼먹은 건가?”
“시옹을 만지지도 않았잖아. 봉함도 풀지 않고… 그렇게 하고도 영혼을 빼갈 수 있나?”
“모르지 화왕이니까.”
“아냐, 그럴 것 같았으면 도와주지도 않았어.”
적지인살과 종리추, 배금향에 대해 의견들이 분분했다. 의견들은 점차 좁혀져 자신들을 위해 하늘이 내려준 천인이라는 사람과 무당이 고병의 주장대로 인간의 영혼을 빨아먹는 화왕이라는 의견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 년 전, 종리추가 무덤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무신타가 화왕에게 죽은 뒤 부족이 몰살하는 한이 있어도 화왕을 죽이고 무신타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의견과 화자를 죽이려 했으니 죽었다는 의견 쪽으로 나뉜 것과 같았다. 마을 청년들은 화자를 실컷 때려 분풀이를 했다. 마지막에는 화자에게 얻어맞았지만 죽도록 때리는 동안에 어느 정도 속이 풀렸다. 화자가 납득하기 힘든 기행을 벌이지 않았다면 진작 요절을 냈을 것이다. 당시 구맥은 화왕의 편이었다. 화왕의 행동을 조금 더 두고 보자는 쪽이었고, 시옹에 손을 대지 않는 한 무덤을 어슬렁거린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구맥도 화왕 편을 들지 못했다. 이번 문제는 종리추가 놀라운 신위를 보인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어쩌면 용사 여든네 명이 죽은 것과 버금가는 큰 문제였다.
“어린이가 화자에게 오빠라고 불렀대.”
“벌써 혼이 빨린 것 아냐? 어떻게 족장이 될 여자가 외간 사내에게 오빠라고 부를 수 있어?”
홍리족 부족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내가 여인을 미쳐 내고 가장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화왕 가족은 자신들과는 달랐다. 배금향은 적지인살에게 순종했고 모든 의견을 적지인살이 결정하는 듯했다. 그런 점이 홍리족 부락인들에게는 낯설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화자 편이다. 그 아이는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웠다. 암연족 전사를 서른두 명이나 죽였어. 우리 중에 누가 그랬나! 만약 화왕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몰살했어. 지금쯤 사내들은 이마에 낙인이 찍히고 있을 테고, 여인들은 강간당하고 있겠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도 유분수다. 화왕에게 불만 있는 자는 나부터 꺾어라!”
권투왕 역석은 분노했다. 그들은 화왕 가족이 이번 싸움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똑똑히 보았다. 그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얻었고, 결정적으로 그들이 있었기에 암연족 전사들이 물러섰다.
“어린이가 화자에게 오빠라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린아이들이 오빠 동생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그걸 가지고 가타부타 언성을 높인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역석의 이마에 힘줄이 불거졌다. 그때,
“가만히 있어. 나설 자리가 아냐.”
역석의 아내가 역석을 제지했다. 그녀는 임신 중이었다. 해산이 한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
역석은 아내를 쳐다보다 큰집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출산. 전쟁에 죽고 맹수에게 죽고 열병에 걸려서 죽고… 자식 열을 낳아야 대여섯밖에 성장하지 못하고, 그나마도 서른 넘게 사는 자식이 두셋밖에 없는 현실에서 여인의 출산과 능력은 부락의 존폐를 좌우했다.
“마을에 들여놔서는 안 돼! 만나서도 안 되고! 화왕과 어울리는 사람은 신벌을 받은 거야. 신벌을!”
무당 고병은 목청을 높였다.
“생각 같아서는 돼지라도 잡아서 잔치를 벌여야겠지만…”
구맥은 곤란했다. 마을 사람들은 족장의 권위까지 의심하고 있다. 어린이 종리추에게 오빠라고 불렀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구맥 또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차기 족장은 만인 위에 군림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다. 아무리 어리다고 하지만 어떻게 외간 남자를 오빠라고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안는 것과는 다르다. 어린이 역시 혼인할 나이에 접어들었으니 마음에 드는 사내를 고를 수 있고, 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빠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사내 위에 군림해야지 사내와 동등한 위치로 내려가서는 안 된다.
“괜찮아요. 우리는 초원으로 돌아갈 거에요.”
종리추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어린이와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게요.”
“내일부터는 권법을 배우자. 이 년이라면 긴 시간이 아냐. 휴우… 어쩌자고 이 년을 말해 가지고는. 말할 바에는 한 오륙 년쯤으로 길게 말할 것이지.”
“그럼 아버지께서 말하지 그랬어요?”
“그럴 참이다.”
“예…?”
“이거야 원 답답해서… 네가 말하지 않아도 이곳 사람들 말을 배울 참이다. 네놈이 제멋대로 싸움에 끼어들고 결전 약속을 하고… 네놈 눈에는 아비가 보이지도 않는 거냐?”
“보이기야 보이죠. 근데 이상해요. 왜 아버지가 보이지 않고 이빨 빠진 호랑이가 보이죠?”
“뭐, 뭣? 네 이놈!”
“하하하!”
홍리족이 어떻게 생각하든 세 사람은 즐거웠다. 이 년 후에 모진아와 겨뤄야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야반도주를 할 생각도 없다. 열심히 수련해서 당당하게 싸운다는 생각은 기본이었다. 홍리족을 위해서도 아니고 자존심 때문만도 아니었다. 세 사람은 모진아를 넘어야 할 장벽 하나쯤으로 생각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인간의 몸에는 움직일 수 있는 부분과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상대가 주먹을 내질러오면 어떻게 막을 것인가? 상대의 주먹은 무섭게 변화한다. 주먹을 그대로 보지 마라. 주먹을 보면 따라잡지 못한다. 주먹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다.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을 봐라. 팔목에서 팔꿈치까지,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상대가 공격을 해올 때 공격 자체를 막기보다는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을 막아야 한다.”
탁! 타탁! 탁…!
종리추는 목각 인형을 상대로 권법을 수련했다.
“어느 문파가 최고냐 하는 질문은 우문이다. 각 문파마다 수많은 비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비기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수련하느냐에 따라 강자와 약자가 정해지는 거다. 무공의 차이가 아니라 수련의 차이다.”
적지인살의 지도는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훌륭한 무공은 이미 오랜 시간 그 무공을 수련한 무인이 실전을 통해 뛰어남을 입증했다. 소림사에는 나한권을 비롯한 칠십이종절예가 있고, 무당파에는 태극혜검을 비롯하여 삼십육종의 절정 무학이 있다. 이 두 문파만 해도 하나만 절정에 이르도록 익히면 초일류 고수가 된다는 무학들이 백팔종이나 된다. 신법, 보법, 장공, 검법, 도법…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공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 훌륭하다고 입증된 무공도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다. 적지인살은 그 많은 무공을 모두 배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중 하나만이라도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무공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깊은 경지까지, 빠르고, 정확하게.
“중심이 너무 뒤로 처졌어! 칠성보! 철보! 신법이나 보법에 신경 쓰지 마! 몸의 중심이 어디 있느냐에만 신경 써!”
따닥! 따다닥…!
종리추는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다. 쉬지 않고 수련한다는 그런 종류의 집중력이 아니라 권을 뻗어 낼 때 쏟아 붓는 집중력이 무섭다. 종리추는 발경을 터득하고 있다. 권에 깃든 힘은 주먹의 강도를 이용한 힘이 아니라 몸 전체에서 우러나오는 힘이다. 권을 내뻗기 전에 허리를 비틀어 힘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축경이다.
단경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타격하기 전에 자세를 낮추는 침신, 보법, 전신이 한곳에 쏠리도록 손을 최대한 뒤로 뺐다가 타격하는 축경.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창출되는 촌경은 어느 정도 숙련된 권법가만이 익힐 수 있다. 실제로 발경을 익히지 못한 무인은 아미자라는 점혈침을 사용하기도 한다. 발경 중에서도 명경은 어느 정도 수련으로 터득할 수 있지만 종리추처럼 암경이라고도 부르는 촌경을 사부 없이 배우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이놈은… 타고났어!’
적지인살은 종리추가 가는 데로 따라가다가 조금씩 방향만 비틀어 주면 되었다. 어떤 무공을 선택하여 수련하든 어느 문파에 입문하든 제일 먼저 배울 것이 그 무공, 문파의 발경이다. 초식은 발경을 수련한 다음에 배워도 늦지 않다. 초식은 투로에 불과하며, 정확한 발경이 없는 투로는 모양도 매끄럽지 못하고 실전에서도 무용지물이다.
“경이란 정확한 자세와 몸의 균형이 어우러졌을 때 위력이 나온다. 경은 방향에 따라 앞으로 찌르는 충경, 찔러 내리는 췌경, 팔꿈치를 이용하는 탄경, 위에서 아래로 치는 벽경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앞으로 지르는 직경, 옆으로 치는 횡경, 비스듬히 치는 사경으로 나뉜다. 어느 것이나 축경을 이룬 다음에 발경이 나온다는 점을 잊지 마라. 활시위를 바짝 당긴 것이 축경이면, 화살을 튕겨내는 것은 발경이다. 몸의 상중하가 하나가 되었을 때… 몸의 모든 것이 한 점을 향해 폭발될 때 발경의 위력이 나온다. 힘은 오랫동안 지속되지만 발경은 순간적인 폭발력! 발경은 손으로 쳐내는 것이 아니다. 다리에서 시작되어 허리가 주를 이루어야 한다.”
타닥! 타타탁…!
종리추는 계속해서 궁보, 마보… 다리를 움직였다. 몸을 움직이고 허리를 비틀며 권을 쳐냈다. 종리추는 점점 발경에 익숙해져 갔다.
‘명경은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 이제 암경과 화경을 가르칠 차례군. 정말 경이적이야. 나도 무골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이놈처럼 빠르지는 못했어.’
무공 수련은 태양이 동녘에 머리를 내미는 순간부터 서산 너머로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저녁을 먹은 후에도 수련은 계속되었다. 다만, 무공을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수련하는 학문을 배운다. 질이 좋지 않은 기름 탓인지 유등에서는 그을음이 심하게 났다. 냄새도 머리가 아플 만큼 지독했다.
“학문을 배우는 목적이 무엇이냐?”
“극기를 배우고자 합니다.”
“극기란 무엇이냐?”
“욕망을 누르는 것입니다.”
“그것뿐이냐?”
“극기에는 욕망을 누르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극기와 욕망을 누르는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극기가 있습니다. 전자는 정진에, 후자는 평정에 의미를 둡니다.”
“네가 추구하는 극기는 어느 극기냐?”
“후자입니다. 정진보다는 평정을 추구하겠습니다.”
종리추는 또렷하게 말했다. 원래 ‘송영의 글씨’로 유명한 적지인살이다. 그가 종리추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글을 먼저 배웠다면 선비가 되었을 아이… 내가 이 아이를 무인으로 키우고 있는가? 아니야, 황정이 추아의 형을 죽였을 때부터 이 아이는 무인의 운명을 걷기 시작했어. 휴우…!’
종리추는 문에도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하나를 가르치면 두셋을 미루어 생각해 냈다. 배우는 것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몸에 붙여 나갔다. 실천.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으랴. 글 공부는 해시 초가 되어서야 끝났다.
“오늘도 갈 참이냐?”
“네.”
“피곤한데 쉬지.”
“아뇨, 전혀 피곤하지 않아요. 힘이 넘치는걸요.”
종리추는 배금향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만물이 모두 숨을 죽이고 잠들 무렵이다. 종리추 또한 하루 종일 몸을 혹사한 관계로 잠에 곯아떨어져도 모자랄 만큼 몸이 묵직하다. 종리추는 초막을 나와 밀림으로 발길을 돌렸다. 밀림 속은 발길을 옮겨놓기가 두려울 만큼 어둠침침했다. 세상을 휘황하게 비추고 있는 보름달도 밀림은 밝히지 못했다. 종리추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유유히 걸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오간 길이라 눈을 감고도 걸을 수 있을 만큼 밀림을 잘 안다.
쿠르르릉…!
천폭이 토해내는 우렁찬 굉음이 들려왔다.
‘아흔여섯 걸음…’
종리추는 소리를 듣고 거리를 계산해 냈다. 소리를 듣는 시점은 매번 바뀌었다. 천폭에서 흘러내는 소리는 밀림에 들어서기 무섭게 귓전을 때리지만 종리추가 마음속으로 ‘몇 걸음’하고 결정하는 시기가 달랐다.
‘하나, 둘, 셋…’
걸음을 헤아렸다. 마음속으로 생각한 천폭과의 거리와 실제 거리가 맞는가.
‘일흔여섯, 일흔일곱…’
보폭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다른 사람의 걸음이 아닌 자신의 걸음이다. 종리추는 자신의 걸음 폭을 정확히 알았고, 유지하려고 애썼다.
‘여든하나.’
그가 막 여든한 번째 걸음을 떼어놓았을 때,
“흐흐흐! 네놈이냐!”
숲 속에서 칼칼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여든둘, 여든셋…”
숲 속에서 시커먼 인영이 툭 튀어나왔다. 손에는 번들거리는 창을 들었고 상의를 입지 않은 상체에는 지렁이가 기어가는 것같이 크고 작은 상처로 빽빽한 암연족 전사였다. 그중에서도 이마 정중앙에서 오른쪽 눈을 지나 턱 밑까지 그어진 상처가 제일 보기 싫고 치명적이었다. 그 상처는 암연족 전사의 오른쪽 눈을 앗아갔지만 암연족 전사는 안대도 하지 않았다.
“미친놈, 오늘도 천폭에 뛰어들 생각이냐?”
“말시키지 마요. 헷갈려요. 여든일곱, 여든여덟…”
“네가 앉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두 걸음 정도 더 앉아. 기왕 맞으려면 정통으로 맞아야지.”
‘오른쪽으로 두 걸음? 그쪽은 물살이 세지 않은 것 같았는데?’
그날, 녹요평 싸움이 있던 날부터 뜻밖에도 모진아가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천폭을 무공 수련 장소로 사용하라는 제안도 그가 먼저 해왔다. 모진아의 전갈을 가져왔다며 초막으로 불쑥 들어선 암연족 전사는 적지인살에게 죽은 목탄 못지않은 고수였다.
“내 이름은 유구다.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집은 물건이 단추지.”
“…”
“족장님의 전갈이다. 천폭을 무공 수련 장소로 사용해도 좋다.”
“천폭을요?”
“예로부터 폭포는 기를 수련하는 장소로 널리 애용되었다.”
종리추가 적지인살을 쳐다보자 적지인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밀림으로 들어서는 자는 너 하나로 국한한다. 그 누구도 밀림으로 들어설 수 없다. 너만 들어설 수 있어.”
“…”
“질문 있나?”
“없어요.”
종리추는 밝게 웃었다.
“족장님 말씀이… 가타부타 의견을 달면 실망스럽다고 전하라 했는데 그런 말을 하지 않게 돼서 다행이다. 목숨에 대한 보장은 하지 못한다. 목숨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 암연족 전사는 네놈을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이 년 동안은.”
“그런데요…”
“…?”
“안대는 일부러 하지 않는 거예요? 너무 끔찍해요.”
“…”
“장가도 못 갔죠? 그럴 거예요. 어떤 여자가 그 끔찍한 얼굴을 보고 호감을 느끼겠어요? 장가가려면 안대부터 쓰세요.”
“음…!”
유구는 신음을 토해냈다. 모진아는 약속을 지켰다. 유구를 시켜 천폭 주변을 감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적당한 조언도 해줬다. 마치 바로 곁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이런다고 제가 안 죽일 것 같아요? 후회되나 보죠?”
“제발 그래라.”
“안 믿죠? 제 말?”
“믿고 안 믿고는 상관없다. 내가 믿어도 네 실력이 안 되면 족장님에게 죽는다. 내가 믿는 것하고 네 무공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
종리추는 얼어붙었다. 모진아가 여러모로 배려를 해줬지만 가장 큰 배려는 유구를 곁에 두었다는 것이다. 유구도 많은 조언 해줬지만… 지금 한 말처럼 도움이 되는 말은 없었다.
‘그래… 세상 사람이 다 믿어도 내가 아니면 아닌 거야. 세상 사람이 다 안 믿어도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다 소용없어. 무공은… 나 혼자 익혀야 돼. 아버님이 아무리 잘 가르쳐도 내가 배우지 못하면 그만이야. 나야, 나. 무도는 나 혼자 걷는 거야. 싸움도 상관없어. 반드시 이길 필요도 없어. 각오? 각오가 무슨 필요가 있어. 실력이 있으면 이기는 것이고 없으면 죽는 거지. 모두 필요없어. 오로지 무공을 얼마나 열심히 익혔느냐 하는 것뿐.’
종리추는 세상에 홀로 버려진 듯한 고적감을 느꼈다. 형이 죽고, 형의 시신을 거적때기에 말아 산에 묻고, 형이 머물렀던 작은 공간에 들어가 옷가지를 만졌을 때 느꼈던 외로움이었다. 하지만 달랐다. 당시에는 ‘이제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구나.’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지금은 혼자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했다. 세상 만물이 친구이고 스승이다.
‘무공… 나 혼자 걷는 길…’
무공을 싸우는 기술쯤으로 생각했던 종리추는 무공을 새롭게 인식했다. 무공은 다른 사람과 싸우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과 싸우는 기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