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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35화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었다. 남만에는 열두 가지의 비가 내린다. 단시간에 많은 비를 쏟아 붓는 소나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뇌우, 추막을 날려 버릴 듯 맹렬하게 몰아치는 돌풍에 편승한 비, 바로 앞에서 일직선으로 쏘아져 오는 비… 우기가 시작되면 밀림은 생기를 찾는다. 식물은 목마름을 해소하고 동물은 번식을 한다. 밀림의 많은 동물들이 우기 동안에 새끼를 낳는다. 당연히 먹이도 풍성하다. 초원이 살아나면 풀을 뜯는 동물들의 수가 늘어나니 육식 동물도 굶주리지 않고 편히 살 수 있다. 배금향, 종리추와 마주 앉은 적지인살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추아야, 너도 이제 무공이 어떤 것인지 대충 알 테니… 선택은 네가 해라.”

‘열다섯 살… 아직 이런 것을 선택하기는 일러.’

하지만 어쩌랴. 방법이 없었다. 세월을 두고 차분히 무공을 전수하는 것이라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게다. 기본공을 익히는 시간도 좀 더 늘렸을 게고, 권법 또한 완전히 숙달되어 자신의 무도를 스스로 찾을 때까지 기다렸을 게다. 모진아와의 싸움이 반년밖에 남지 않았다. 도대체 반년 동안 익힐 수 있는 무공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뇌인일지공’, ‘혈염도법’, ‘무형필살 삼십육초천풍선법’, ‘한성천류비결’. 탁자에 놓여 있는 비급은 하나같이 절기였다. 그러나 반년 동안에 익힐 수 있는 무공은 하나도 없었다. 사 개월 동안 적지인살의 무공을 익히고, 남은 기간 동안 천풍선법을 익힌다. 그것도 방법이 되기는 했다. 완벽히 소화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흉내는 낼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해서는 모진아를 이길 순 없어.’

종리추가 권법을 배우고 무기술을 수련하는 기간 동안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대안을 찾기에 부심했다. 이제 결정할 순간이 왔다. 무엇을 어떻게 익히든 남은 기간은 반년이고, 어떤 무공으로 모진아와 싸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결국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녹요평 싸움이 있은 다음부터 줄곧 고민해 오던 숙제를 풀지 못했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추정되는 결과는 절망스러웠다. 종리추가 열여섯 살을 맞이할 가능성은 일 할도 되지 않았다. 모진아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암연족 전사의 특성상 터무니없는 희망에 불과했다. 암연족 전사에게는 전통이 있다.

-도전하는 자와는 생사를 가른다.

한 번도 깨지지 않은 전통이다. 도전은 언제든 누구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도 있고 족장에게 할 수도 있다. 암연족 전사끼리도 가능하고 암연족이 아닌 타 부족이라도 도전을 할 수 있다. 도전받은 사람은 피하지 못한다. 도전은 곧 싸움의 시작이며, 전쟁의 신인 아부타가 지켜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쟁을 피한다는 것은 아부타를 불신하는 행위다. 죽어서 아부타의 곁에 가지 못하고 이승에도 저승에도 머물 수 없는 떠돌이 혼이 된다. 도전하는 자, 받는 자. 두 사람은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운다. 그것이 암연족 전사의 전통이었다. 차라리 이들의 말을 배우지 않았다면 기대나 하고 있을 터인데, 이들의 말을 몰랐으면 전통이니 의식이니 하는 따위들도 알지 못했을 터인데.

“뇌인일지공. 이건 반년 안에 익힐 수 있나요?”

종리추도 두 부부의 고민을 알고 있었다. 현재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도.

‘희망이라도 갖게 하려면 거짓말을…’

적지인살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없다.”

“그럼 뇌인일지공을 배우면 모진아를 이길 수 있나요?”

‘반반… 무공이란 어느 것을 배우든 얼마나 정확히, 얼마나 깊이 배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

종리추가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종리추는 기간을 묻고 있다. 반년 동안 익힌 뇌인일지공으로 모진아를 상대할 수 있는지.

“불가능할 것 같구나.”

종리추는 미련 없이 뇌인일지공을 제쳐 놓았다.

“혈염도법. 비응회선은 저도 봤어요. 당시는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는데… 놀라운 회전력이에요. 그런 회전력이람녀 운기를 하지 않아도 경력이 뿜어져 나올 거예요. 발경까지 가미하면 가히 필살이라고도 할 수 있죠. 반년 안에 가능해요?”

“…”

적지인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걸로 대답은 충분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분위 부공이군요. 백부님의 무공. 무형필살 삼십육초천풍선법. 히유! 이름도 기네요. 무명에 무형필살이라는 말이 들어가니 얼마나 무서운지는 알겠고… 이것도 불가능하겠죠?”

“…”

종리추는 마지막으로 한성천류비결을 집어 들고 처음 몇 장을 넘겨 보았다.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이건 어머니 비술이네요?”

“하오문은 내공법도 부실하고, 초식도 정교하지 못해. 무공은 오랜 세월 동안 체계적으로 정비되어야 하는데, 하오문에는 그럴 만한 사람도, 시간도 없지. 최장으로 하오문주의 직위를 지켰던 사람이 팔 년이란다. 온갖 암계와 음모가 난무하는 속에서 목숨을 보존하기는 쉽지 않지.”

한성천류비결은 배금향의 무공이었다. 하오문의 무공은 무공이라기보다는 싸움 기술에 가까웠다. 중원 무인들에게 무인으로서의 대접은 기대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익히는 무공이니. 체계적인 정리도 되어 있지 않고, 뛰어난 내공심법도 없으며, 사부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려운 무공. 거기에다가 배금향은 향주 적에 머무를 만큼 무공 방면에는 뛰어나지 못했다. 한성천류비결은 하오문의 무공이기는 하나 배금향의 무공은 아니다. 배금향이 말한, 하오문 문주로 팔 년이란 세월 동안 밀려나지 않고 자리를 보존한 현 하오문주의 무공이다. 하오문주는 배금향에게 한성천류비결을 전수해 줬다.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여인으로 만들어주겠소’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그가 배금향이 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무공은 볼 게 없습니다만 문도들의 신망이 가장 두터운 향주입니다.”

보고는 맞았다. 배금향은 한성천류비결을 익힐 만한 무재가 아니었다. 지산바저도 미처 다 터득하지 못한 한성천류비결을 배금향이 익힌다는 것은 죽은 시신이 눈을 뜨는 것과 같은 기적이다. 그래도 주고 싶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무도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은 여인이었다. 여인이 원한다면 하오문주라는 자리도 과감히 떨쳐 버릴 각오까지 되었다. 배금향은 적지인살 앞에 그의 무공을 내놓는다는 것이 미안했지만 종리추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종리추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기로에 섰지 않은가.

“이건 하오문주의 무공이란다. 하오문주도 다 익히지 못한 난해한 무공이야.”

적지인살에게 눈이 가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미안해요, 가가…’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적지인살이 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대와 멸시에 이골이 난 하오문이지만 문주의 무공은 어느 절기에 못지않아. 그 정도의 무공이 없으면 하오문주라는 자리를 지키지 못해. 하오문은 다른 문파와 달라서…”

‘문주라는 자리는 힘으로 얻는 곳이란다.’

그 말만은 하지 못했다. 배금향에게 하오문은 소중했다. 그녀의 말대로 천대와 멸시에 이골이 났지만, 불행했던 상처를 치유해 준 곳이 그곳이었다. 중원 전 무림인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흉악범을 ‘도와주세요.’ 말 한마디에 목숨을 내걸고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그곳에 있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암살당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머리를 조아렸던 자가 비수를 꼽고…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는 나쁜 쪽의 하오문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오문주의 무공은 어느 절기에 못지않다. 하지만 그 비급은 네 어머니가 기억을 더듬어가며 기술한 것이라 부족한 부분이 많아. 완성되지 않은 비급인데… 괜찮겠니?”

적지인살이 배금향 대신 말했다.

종리추는 씩 웃었다.

“새로운 초식을 배운다고 모진아와 싸울 수 있겠어요? 저는 아버님의 무공도, 백부님의 무공도 모두 거절할 생각이었어요. 그것은 싸운 다음에나 익힐 무공이지 지금은 아니에요.”

“그럼…?”

“병기로 승부를 낼 거예요. 십팔반 병기로요. 이 무공은 비술이라서 택한 것뿐이에요. 초식이 아니라 무기술 같아서요.”

“병기로? 병기는 초식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생각이 있어요.”

종리추가 적지인살의 말허리를 잘랐다.

“길이 없다면 제 방법대로 해보고 싶어요.”

“…?”

“우기 동안은 천폭에 있을 거예요. 괜찮죠?”

“추아야…”

“어! 정말 괜찮다는 표정들이시네? 햐! 되게 섭섭하다. 난 적어도 ‘가지 마라’ 소리 한마디쯤은 하실 줄 알았는데.”

“가지 마라.”

“됐어요!”

“그럼 가라.”

“가요, 가!”

종리추는 늘 사람을 편안하게 해준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종리추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한다. 종리추는 남보다 뛰어나지 않다. 그렇기에 그의 곁은 편안하고 아늑하며 즐겁다.

‘이게 너의 최대 장점이야. 다른 어떤 능력보다도 뛰어난 능력이지. 네가 모진아와의 싸움에서 살아남아 살수가 된다면.. 누구도 너의 검을 피하지 못할 거야. 경계하는 마음보다는 사귀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 테니까. 필살수라… 허허! 이제 필살수라는 허명도 추아에게 빼앗기게 생겼군.’

적지인살의 눈에 툴툴거리며 빗속을 걷는 종리추의 뒷모습이 잡혔다. 종리추는 밀림으로 들어섰다. 밀림에 몸뚱이 하나 뉠 공간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천폭 부근에도 그런 공간이 있다. 밀림에 사는 동물들을 관찰하다 발견한 장소로 어른 열 명이 손에 손을 맞잡아야 감쌀 수 있는 거대한 고목의 밑동이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기어 들어가야 될 만큼 작았지만 안은 널찍해서 무공 수련도 가능했다. 종리추는 안에다 살림을 차렸다. 유등도 만들어 박아놓고, 덩굴로 그물을 짜 걸어놓았다. 덩굴 그물은 허공에 매달린 침상이었다. 보기는 투박했지만 그물 속에 몸을 뉘이면 흔들흔들하는 것이 비단금침을 깔아놓은 것보다 편안했다.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탁자도 만들어놓았고, 나무로 깎은 병기이지만 진열해 놓을 진열대도 만들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하루 온종일 어둡다는 점이다. 빛이 새어 들어올 구멍이라고는 어린이 하나가 엎드려야만 간신히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밖에 없었다.

우르르릉…!

엄청난 양의 물을 거침없이 뱉어내는 천폭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종리추는 유등에 불을 붙였다. 우기에는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빗줄기가 빛을 차단해 밀림 속은 한낮에도 어둠침침했다. 탁자에 앉아 한성천류비결을 펼쳤다.

“어디 보자… 일수비백비 천하만비? 손짓 한 번에 비수 백 개가 하늘을 나니, 온 천하가 비수로 가득하다? 거짓말도 엄청 심하군.”

종리추가 보는 부분은 제일 뒷장이었다. 거기에는 ‘일수비백비 천하만비’라는 글자 외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았다.

‘제육공’이라고 적혔으니 여섯 번째 무공인 것 같은데… 다시 한 장을 넘겼다.

제오공. 일비살광, 일흔승천.

“뭐야? 비수에서 빛이 나니 사람이 죽는다는 말이잖아? 이것밖에 없는 거야?”

종리추는 제일 첫 장으로 돌아갔다.

제일공. 비류흔, 일침유혈.

첫 장에는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는 ‘송영의 글씨’로 널리 알려졌으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머니 배금향 역시 글과 그림에 탁월한 조예를 지녔다. 그림은 하나하나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을 지녔다. 그림 밑에 이해하기 쉽도록 주석도 쓰여 있어 어머니의 세심한 배려가 피부에 와 닿았다. 제일공 비류흔은 장장 서른 쪽이 넘게 상세히 기술되었다. 반면에 제이공부터는 처음 봤던 것처럼 초식 명만 적혀 있을 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풋! 그렇군. 어머니는 제일공만 익힌 거야. 아마 제일공도 다 익히지 못하셨을걸? 좌우지간 어머니는 알아줘야 된다니까.”

웃음이 키득키득 새어 나왔다. 어머니는 정말 둔재다. 그런 분이 무림에 몸을 담고 있었다니, 그것 자체가 무림사에 기록되어야 한다.

“하오문주라는 자도 그렇지. 비술을 전수할 사람이 없어서 어머니에게 전수했나? 풋!”

보나마나 어머니에게 한성천류비결은 그림의 떡이었으리라. 비수는 극히 짧은 칼이다. 호신용으로도 부적합해 암기용으로나 사용하는 병기다. 그것도 살상력이 약해 독을 묻혀 사용하곤 한다. 아주 가까운 거리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고, 찔러도 치명적인 요혈을 골라서 찔러야 한다.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비록 찌르는 데까지는 성공했어도 즉각 반격을 받는다. 현 무림에서 비수를 성명병기로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아! 있기는 있다. 하오문주.

제일공 비류흔.

비수가 흔적 없이 흐른다는 뜻이리라. 첫 장부터 삼십여 장까지는 비수를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서 나열되어 있었다. 검을 사용하듯, 도를 사용하듯 싸움에서 비수를 사용하는 방법이다. 종리추는 조그만 나뭇가지를 들고 그림대로 움직여 봤다. 십팔반 병기가 손에 길든 종리추에게 그리 어렵지 않은 동작들이었다.

“상체를 우로 틀어, 우궁보를 취하고, 동시에 좌비를 앞으로 내지른다. 우비는 허리로 당긴다? 뭐야! 이거 우궁보충권하고 똑같잖아?”

종리추는 어이가 없었다. 제일 첫 장에 그려진 그림은 우궁보충권을 권 대신 비수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우궁보충권이면 다음은 좌궁보벽권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어디?’

다음 장을 펼쳤다.

“응?”

종리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궁보… 오른쪽 다리가 앞으로 나와 궁보를 취하고 있을 때는 전신의 힘이 우궁보에 집중된다. 다음에 움직일 다리는 왼쪽 다리다. 궁보는 아닐지라도 왼쪽 다리가 움직여야 한다. 그림에는 궤보반료조와 비슷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조대신 비수가 들려 있을 뿐. 서로 연결이 안 된다. 종리추는 다시 첫 장으로 넘겨 빠진 곳이 있나 살펴보고 난 다음 뒷장을 펼쳐 연결점을 찾았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연결점이 없다. 억지로 딧자면 잇지 못할 것도 없다. 우궁보를 취하고 있는 오른쪽 다리를 그대로 고정시키고, 왼쪽 다리를 앞으로 끌러 무릎을 땅에 대면 궤보가 된다. 허리에 있는 오른손을 머리 옆까지 들어올리고, 앞으로 내뻗어 있는 좌수는 위로 쳐올린다. 그러면 우궁보충권에서 궤보반료조로 이을 수 있다. 하나… 무공의 초식이란 도도히 흐르는 강물같이 끊어짐이 없어야 한다. 앞의 초식은 뒷 초식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앞 장과 뒷장을 연결하다 보면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걸 어머니가 익혔단 말이야? 맙소사! 그러니까 아예 말씀도 안 꺼냈구나.”

종리추는 비급을 한쪽 구석에 치워놓으려다 생각을 바꿨다. 비급은 아무 쓸모가 없다. 첫 장과 둘째 장밖에 보지 않았지만 무공이 아니라 춤사위 같다. 하지만 버릴 수는 없다. 어머니가 심혈을 기울여 정성스럽게 쓰신 책이지 않은가. 어머니의 숨결이 배여 있고, 정성이 스며 있다. 종리추는 비급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창을 집었다.

쉬! 쉬익! 쉭-!

창에서 예리한 경풍이 새어 나왔다. 십팔반 병기는 그 자체가 무공이었다.

‘초식이 없는 병기 사용법은 있을 수 없다. 병기를 잘 다룬다는 것은 초식을 잘 알고 있다는 말과도 상통한다.’

적지인살은 병기마다 하나씩 열여덟 가지의 초식을 가르쳐 주었다. 초식 명도 없는 강호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초식들이었다.

‘초식에 경중이 있을 수 없다. 병기가 지닌 자결을 깨달을 수 있다면 훌륭한 초식이다.’

적지인살은 본인이 말해 놓고도 초식의 경중을 생각한다. 삼십육초천풍선법이 아니면 모진아를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초식의 암수에 걸려든 것이다. 물론 상승무공에는 필살이 깃들어 있다. 기본 초식에는 필살이라는 기운이 들어가 있지 않다. 상승무공은 병기의 이점을 극대화시켰지만 기본 초식은 병기를 사용하는 선에서 그친다. 일반적으로 무가에서는 세 단계에 걸쳐 무공을 전수한다. 먼저 기본 초식을 익혀 병기를 활용할 수 있게 만들고, 두 번째로 기본 초식보다는 조금 더 난이도가 높은 초식을 전수하여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준다. 최상의 절초는 최소한 무공에 입문한 지 십여 년이 지난 다음에야 전수하는 것이 관례다. 일부러 늦장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상승무공을 받아들일 만한 준비가 되려면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병기가 지닌 자결을 깨달을 수 있다면 훌륭한 초식이다.’

종리추는 그것으로 모진아와 싸울 생각이었다.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승부한다.’

훗날 종리추의 좌우명 중 하나가 된 이 말은 이때 생겨났다. 기본 초식에 불과할망정 병기가 몸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면 싸워 볼 만하지 않은가.

‘상승무공… 상승무공이 도대체 뭐기에…’

종리추는 창을 놓았다. 자꾸만 탁자 위에 놓인 비급에 신경이 쓰였다. 말도 안 되는 무공이지만 기술된 것이 정확하다면… 그 무공으로 한 사내가 하오문주의 자리까지 오르지 않았는가.

‘비류흔, 비류흔… 좋아, 다시 한 번 보자.’

종리추는 창을 놓고 탁자에 가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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