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38화
가족이 세 명이나 더 늘었다. 부족보다 모진아를 따르는 유구와 유회가 남았다. 노예가 된 자를 따라서 남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도 노예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 길을 기꺼이 감수했다. 그들의 가족은 이 순간부터 그들을 잊을 것이다. 부모도, 자식도, 살을 섞고 살았던 아내까지도 깨끗이 잊을 것이다. 그것이 암연족의 관습이다. 모진아보다, 사제지간의 정리보다 부족을 따르는 사람들은 수환봉으로 돌아갔다. 정리는 있지만 노예가 된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을 게다. 암연족은 얌전히 물러갔다. 족장이라 할지라도 싸움에 졌으니 내침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노예가 되었으니 죽어서 아부타를 뵐 낯짝인들 있겠는가. 중원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암연족에게는 일상적이고 보편화된 일이었다. 홍리족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홍리족은 노예가 없지만 암연족이 하는 것을 숱한 세월 동안 지켜봐 왔으니 어느 정도 관습에 물든 것은 사실이다. 홍리족도 싸움에 진 사람이 죽거나 노예가 되는 일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앞으로 주인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모진아는 말투부터 바꿨다.
“그러지 마요. 쑥스럽게…”
“하려면 똑바로 하십시오.”
“네?”
“노예는 아무나 두는 것이 아닙니다. 노예를 부릴 만한 권세가 있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권위와 체통을 잃지 마십시오.”
“끄응! 이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주인님, 무공을 수련할 시간입니다.”
“예?”
“주인님의 무공을 보니 한참 더 수련하셔야겠습니다. 노예를 두기에는 너무 어쭙잖은 무공입니다.”
“하! 아, 이건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제가 녹요평에 있는 한 암연족은 준동을 못 합니다. 저의 무공을 알고 있으니 함부로 쳐들어올 수가 없죠. 홍리족도 마찬가지입니다. 감히 우리의 영역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역요?”
“말씀을 낮추십시오. 우리의 영역은 녹요평에서 천폭까지입니다.”
“이거 정말 미치겠네.”
“말씀도 자중하셔야겠습니다.”
초막에 있는 사람들 중 신체적으로는 모진아가 제일 작았다. 여자인 배금향보다 작았으니. 나이는 두 번째로 많았다. 적지인살이 쉰여섯으로 제일 많았고, 다음이 마흔네 살로 모진아였다. 그런 사람이 어린아이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고 있으니, 종리추도 곤란했지만 적지인살이나 배금향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오독마군이라고 들어봤습니까?”
“들어봤소만…”
“말씀을 편히 놓으십시오. 전 노예입니다.”
“족장, 그건 암연족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고…”
“들으라고요? 누가 들으라고 한 소리랍니까? 저는 노예입니다. 말씀을 편히 놓으십시오.”
“허!”
“마님께서도 말씀을 놓으셔야 합니다.”
모진아는 단단히 못을 박았다.
“아, 알겠…어.”
배금향은 억지로 말을 놓았다.
“아까 그 이야기부터 해보시…게.”
“명확히 말씀해 주십시오.”
“음… 정말 사람을 곤란하게 하는군. 아까 그 이야기를 마저… 해.”
“오독마군. 구파일방으로부터 십망을 선포받은 자입니다. 기억나십니까?”
“기억나네. 청성파가 추살에 실패한 후, 화산파와 연합하여 추살했다고 들었네만.”
모진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정말 못하겠어요. 자꾸 이러시면 우리랑 같이 있지 못해요. 추아에게는 어떻게 하셔도 좋지만 우리는 그냥 우리 편한 대로 해요.”
옆에서 배금향이 거들었다. 그래도 일족의 족장이었던 사람이고, 일신에 지닌 무공도 범상치 않은데 하란다고 반말을 툭툭 할 수는 없었다.
“…”
모진아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는 빈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노예를 자처했던 것이다.
‘맙소사! 이 사람들은 정말…’
배금향은 남만인이 이해되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모진아가 드디어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노예가 반말을 듣는 건 당연한 건데 자꾸 그러시니… 그럼 온말을 사용하십시오.”
“그래요.”
배금향이 비로소 활짝 웃었다. 예쁜 보조개가 살짝 패이며 옛날의 아름답던 모습이 우러났다.
“그 이야기를 마저 해보게. 오독마군 이야기는 왜 꺼냈나?”
“구파일방이 십망을 선포한 이유도 아십니까?”
“음… 마공을 연마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지. 임신 육 개월에서 칠 개월 된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태아를 꺼내 화음단을 만들었다고 들었네. 아마 그때 죽은 임산부가 이십 명은 넘는다고…”
“와하하하하핫…!”
모진아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어찌 들으면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그의 웃음은 한참 동안 이어지다가 뚝 그쳤다.
“오독마군이 십망을 받은 것은… 청성파의 장로인 현도 도인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뭣!”
적지인살은 정말 깜짝 놀랐다. 청성파의 현도 도인은 전설적인 사람이다. 청성파의 절기인 청명심법을 깊이 깨달았고, 청운적하검과 칠십이파검은 청성파 역사상 가장 깊은 경지를 이루었다는 사람이다. 그가 어느 날 문을 걸어 잠갔다.
‘무를 버리고 도를 얻으리.’
현도 도인이 마지막으로 했다는 말이다. 그랬는데… 그럼 오독마군은 어떤 사람이기에 현도 도인을 죽일 수 있었단 말인가. 그리고 모진아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소상히 알고 있단 말인가.
“오독마군은 정상적인 비무를 청했습니다. 현도 도인은 응했고, 둘의 실력이 너무 높다 보니 한순간만 방심해도 목숨이 위험한 지경이었죠. 할 수 없이 비무의 차원을 넘어 최선을 다했는데… 그만 현도 도인이 죽고 말았습니다. 청성파는 당장 장문인들을 소집했고 십망을 발표했죠.”
“자, 자네는 어떻게 그렇게 소상히…”
“오독마군은 곤륜산으로 간 게 아닙니다.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실은 이곳 남만으로 왔습니다. 저의 사부님이십니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너무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독마군… 흐흐흐! 오독마군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독에 대해서 전혀 모를 수 있습니까? 사부님은 평생 각법 하나에만 매달려 오신 분입니다. 구연진해라고 하죠. 사부님은 구연진해를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구파일방이 누명을 씌웠다는 말이지 않은가.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당금 무림에 사실이 이렇다고 말했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한다. 아니면 미친놈 취급을 받던가. 십망… 확실히 구멍이 있다. 오독마군이 빠져나왔고 자신들이 빠져나왔다.
“그럼 족장의 무공도 각법일 텐데…”
“각법을 썼으면 주인님이 죽었습니다. 주인님의 가장 큰 단점은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거죠. 지닌 무공의 절반도 채 펼치지 못했습니다. 그 비도술, 일수비백비 천하만비. 실전 경험이 조금만 있었다면, 전 정말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음…!”
“후후후! 앞으로는 실컷 하게 되겠죠. 하기 싫어도 말입니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보지 않아도 종리추의 고생길이 환하게 보였다.
“잘된 일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싹수있는 놈 하나 살리자 하는 생각에서 봐줬는데… 일수비백비를 겪어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중원… 그곳을 가봐야겠어요. 도대체 어떤 놈들이 있는지. 내 희망은 이제 그곳입니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모진아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살아왔으며 어떻게 좌절했는지. 그는 다시금 삶에 활력을 찾고 있었다.
‘추아에게도 잘된 일이야. 이런 사람이 옆에서 도와주면…’
그들은 날이 밝아오는지도 모르고 이야기꽃을 활짝 피웠다. 어린이가 말한 홍리족 최고의 무공 단철각은 오독마군에게서 풀려 나갔다. 오독마군이 제일 먼저 발걸음을 디딘 곳은 홍리족 부락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중원에서 입은 내상을 치료하며 젊은 용사들에게 구연진해를 가르칠 생각이었으나 여인들의 기세가 너무 세고 사내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을 보자 생각을 바꿨다. 그때 전수한 무공이 단철각이다. 흉맹하기로 소문난 암연족을 찾아간 것이다. 암연족은 과연 흉맹했다. 그들은 다짜고짜 오독마군을 공격했고,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지칠 줄 모르고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오독마군은 살인마가 아니다. 그는 무의미한 살인이 싫어 자리를 피했다. 평생 각법 하나에만 매달려 살아온 오독마군을 잡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진아는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현란하고 강맹한 발길질을 눈여겨 봤다. 세상을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자르르 전율이 일었다. 그는 오독마군을 찾아 나섰고, 두 달 만에야 밀림 한구석에서 찾아냈다. 무공을 배우고자 하는 모진아, 무공을 사장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오독마군. 두 사람의 이해는 쉽게 맞아 떨어졌다. 모진아는 오독마군에게서 십 년에 걸쳐 각종 권법을 비롯한 병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구연진해를 전수받아 또 십 년을 수련했다. 오독마군이 말했다.
“이제 절반을 배웠구나.”
오독마군은 그 말을 한 지 일 년이 못 돼 죽었다. 무리하게 운기를 하다 내상이 도지는 바람에 손쓸 사이도 없이 절명해 버렸다. 그는 편히 눈을 감았을 게다. 평생 동안 공들인 구연진해가 무사히 전수되었으니까.
“구연진해를 터득하느라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이제 주인님이 고스란히 그 고생을 물려받아야죠. 절반 정도 익히는 데 십 년은 걸릴 겁니다.”
적지인살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 년 안에 끝내야 되네. 십 년이 되는 해, 우리는 만나기로 약조되어 있어.”
적지인살은 길고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