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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44화


종리추가 산정에서 눈보라를 맞으며 번민과 싸울 무렵, 적지인살은 삼백육십여 리나 떨어진 남양부 방성산의 산자락에 있는 다루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년에는 풍년이 들 모양일세. 눈이 무척 많이 와.”

“내년에 풍년이 들면 뭐 하나? 당장 굶어 죽을 판인데. 나도 이제 그만 짐 꾸리고 집에나 틀어박혀 있을까 봐. 이거 백날 쏘다녀 봤자 다리품도 나오지 않으니.”

“집에 있는다는 뾰족한 수 있나. 되나 안 되나 돌아다녀 봐야지.”

행상인 듯한 사람들이 값싼 차를 홀짝거리며 투덜거렸다. 하남은 백 년 이래 처음이라는 극심한 흉년에 아사자가 속출했다. 극심한 가뭄이 농사꾼들의 애간장을 녹였다. 비가 와서 다행이다 싶었더니 폭우로 이어져 황하가 범람했다. 가을에는 난데없이 나타난 메뚜기 떼가 남은 몇 알갱이마저 싹 쓸어버렸다. 민심은 흉흉했다. 산에는 도적들이 들끓고 마음에서도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 살인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한적한 곳에 알몸으로 죽어 있는 시신은 거의 대부분 둔푼깨나 있다고 거드름 피우던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은 가급적 문밖 출입을 삼가했고 나올 경우에도 호위를 하는 무인을 대동했다. 적지인살은 인정이 말라붙은 중원 땅을 밟은 것이다.

“이보게, 여기 차 좀 주게.”

점소이가 적지인살의 몸부터 재빨리 훔쳐보았다.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인가 없는 사람인가… 인심은 정말 너무 많이 변했다.

“헤헤, 무슨 차를 드릴깝쇼?”

말투가 간사했다.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인 걸 알아본 게다.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간이라도 빼줄 것같이 살랑거려도 부족할 판이다.

“용정차 있나?”

적지인살의 말은 다루에 있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용정차는 절강성 항주 서남쪽 풍황령의 남녘 기슭에서 산출된다. 시중에는 용정차를 모방한 차들이 종종 나돌지만 적지인살의 말투는 풍황령에서 재배된 용정차를 찾는 게 분명했다.

“쳇, 이런 파국에 팔자 좋은 인간도 있군.”

행상 중 한 명이 투덜거렸다. 이 정도면 다행인 셈이다. 나무뿌리조차 남아나지 못하는 형편이니 적지인살의 말투 정도면 배알이 뒤틀리기에 충분했다.

‘하필이면 흉년이 들어가지고…’

풍황령의 용정차는 귀하기는 하지만 찾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루라면 입맛이 고급스러운 사람을 위해 진귀한 차를 준비해 놓는 것이 상례이기도 하다. 흉년이 들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주문이지만 지금은 문제가 되고 있다.

“헤헤, 용정차는 없습죠. 아시다시피 요즘은 워낙 물자 사정이 나빠서.”

“그럼 무슨 차가 있는가?”

“산현에서 재배한 추차가 제일 좋습죠.”

“그걸로 주게.”

“예, 예.”

점소이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가지가지 찾는구먼. 누구는 죽 한 그릇 못 먹고 나뒹구는데 좋은 차나 찾고 앉아 있으니… 에잇! 퉤!”

누군가가 가래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적지인살은 못 들은 척 방성산 산자락에 눈길을 주었다. 워낙 차를 좋아해 밥은 안 먹어도 차는 마셔야 되는 사람들이 중원인이지만, 요즘 같은 세월에 다루를 찾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눈에도 적지인살이 호사스럽게 보인 겐가. 적지인살은 다음 날 같은 시각, 다루에 들어섰다. 점소이는 한눈에 알아봤다.

“아이구, 어서 오십시오. 마침 좋은 자리가 비어 있습죠.”

점소이는 창가로 안내했다. 눈보라가 몰아쳤지만 화로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추위를 말끔히 씻어주었다. 겨울의 차가움과 화로의 따스함을 동시에 느끼며 방성산을 감상하니, 자리 중에는 좋은 자리였다.

“용정차 있는가?”

“아이구, 또 용정차를 찾으시네, 그게 어디 하루 이틀 사이에 구할 수 있는 겁니까요? 더군다나 눈보라에 길이 막혀 있으니… 어떻게 추차라도 올릴깝쇼?”

“그거라도 주게.”

“퉤! 눈꼴 시려서…”

다루에서 차를 마시던 장한이 어제 행상이 그랬던 것처럼 투덜거리며 침을 뱉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적지인살은 같은 시각에 다루에 들렀다. 점소이는 어제와 똑같은 자리로 안내한 후 먼저 입을 열었다.

“헤헤! 손님, 오늘도 용정차는 없습니다요.”

“그럼 어제 마시던 걸로 주게.”

“그럽죠.”

오늘은 손님도 없었다. 삼십여 명은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한겨울의 매서운 찬바람만 휑뎅그렁하니 스쳐 갔다. 날씨가 더욱 추워져 길손들이 객잔에서 꼼짝하지 않는 탓이다.

“손님, 방성산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유람차 오신 분 같지는 않고…”

이번에는 점소이 대신 다루 주인이 직접 차를 들고 나와 공손히 따라주며 물었다.

“친구를 만나러 왔소. 눈보라가 거세져서 발걸음이 늦어지는 모양이오.”

“그랬군요. 용정차를 즐기시는 모양입니다.”

“친구가 좋아하는 차요.”

“그럼 손님은 어떤 차를 좋아하시는지…”

“나는 녹차 중에서 볕에 말린 일쇄차를 즐긴다오.”

“제가 다루를 운영한 지 여러 해지만 손님과는 같이 차를 즐길 수 있겠군요. 안으로 드셔서 한담이나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저 역시 일쇄차를 즐기는데, 좋은 차가 있습니다.”

“고맙소.”

적지인살은 주인을 따라 안채로 들어섰다. 안채로 들어선 다루 주인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빨리 바닥에 엎드리시지요.”

적지인살은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러자 아미 바닥에 엎드려 있던 초로의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노인과 적지인살의 풍채는 비슷했다. 키도 입고 있는 의복도… 다루 주인은 한겨울 매서운 북풍이 휘몰아치는데도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활짝 열어젖혔다.

“차를 끓이겠습니다. 우선 앉으시지요.”

“그럽시다.”

초로의 노인은 적지인살과 비슷한 어조로 말했다. 차를 끓이러 가던 다루 주인의 발길에 물 항아리가 툭 걸렸다. 아마도 좋은 물을 받아 놓은 항아리인 듯싶었다.

스르릉…

바닥이 조용히 움직이며 캄캄한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 하나 간신히 기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작은 구멍이었다. 적지인살을 빨려들 듯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스르릉…

뚜껑이 다시 덮였다.

“일쇄차를 왜 좋아하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닫힌 뚜껑 너머로 다루 주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난 사흘 동안 다루 주인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주변에 낯선 사람이 서성이지는 않는지, 주목할 만한 무림인은 없는지… 긴장을 늦추지 않을 수 없이 많다. 지난 사흘 동안 다루 주인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주변에 낯선 사람이 서성이지는 않는지, 주목할 만한 무림인은 없는지… 긴장을 늦추지 않을 일은 수없이 많다. 모든 것이 안전하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안채에 들이지 않는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이 년 동안 같은 행동이 반복되더라도 주변에 미심쩍은 사람이 있으면 들여놓을 수 없다. 적지인살은 벽을 더듬어 횃불을 찾아낸 후 불을 붙였다. 동혈은 바람이 통하지 않아 후텁지근했다. 퀴퀴한 냄새도 심하게 풍겼다. 적지인살은 열 걸음 정도 나아간 후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급하게 꺾인 암굴 저쪽에는 이미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 이게…”

“후후! 오제, 오랜만이군.”

“이, 이 목소리는!”

“잊다니요, 이형… 정말 이형이십니까?”

“좀 많이 변했지? 자네는 변하지 않았군. 후후, 우리들 중 누가 가장 나은가 하는 문제로 참 많이도 다퉜지. 이제 증명된 셈인가?”

적지인살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횃불이 켜진 곳에 있는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모습… 그들은 또 십 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었지만 한시도 잊어버릴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이형 소천나찰은 내공이 깊어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사십 대 장한처럼 보였던 분이다. 그런 분이 지금은 제 나이보다도 십 년은 더 늙어 보인다. 소천나찰의 인상은 온후하고 부드러웠다. 누가 봐도 호감을 느낄 만한 인상이었다. 지금은 쇄혼수에 당한 듯 얼굴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가 있다. 왼쪽 머리 위에서 오른쪽 아래턱까지 길게 그어진 다섯 줄기의 상처가 그의 코와 입술을 문질러 버렸다. 눈도 한쪽은 파열된 듯하다. 소천나찰은 또한 몸집이 좋고 혈색이 붉었었다. 누가 봐도 이웃집 아저씨처럼 훈훈한 모습이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를 대로 말라 비루먹은 망아지보다도 못하다. 다리도 한쪽은 의족인 듯싶다. 이게 이형 소천나찰의 모습이란 말인가! 다른 의형들도 형편이 나아 보이지 않았다. 삼형 비원살수는 원래가 마른 체격이었다. 거기에 팔다리가 유난히 길어 걷는 모습을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불안해 보였었다. 하지만 이제 삼형 비원살수는 키가 가장 작아졌다. 그의 두 다리는 허벅지 윗부분에서 깨끗이 절단되었다. 축 늘어뜨리면 무릎까지 내려오던 긴 팔도 한쪽 팔만 남았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광이다. 갈색으로 퇴색된 듯한 눈에서는 전보다도 훨씬 강렬한 살기가 줄기줄기 뻗쳐 나왔다.

“우린 네가 오지 않아서 당한 줄 알았다. 용케 왔구나.”

“삼… 형… 삼형… 님.”

“하하! 우리 형제가 다 모였어. 이제는 받을 대로 돌려줄 때가 온 거지. 내 작은 뱀은 독사가 되었어. 잔뜩 독이 올라 있지. 어느 놈이든 걸리는 놈은 불행할 거야. 지독히 불행한 놈이지.”

비원살수의 말을 듣다 보면 마치 검이 저며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어 꽁꽁 묶여 있는데, 악마가 이빨을 드러내며 조롱하는 느낌이었다.

“하하! 적사만 독사가 된 줄 아십니까?”

사형 미안공자, 그 역시 폐인이 되었다. 그는 기루에만 가면 어떤 기녀라도 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미공자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도 기품이 배어 나와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곤 했다. 이 자리에 예전의 미안공자는 없다. 이리저리 찌그러진 얼굴에 목에까지 검을 맞아 음성까지 탁하게 변질된 추한 사내만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어떻게들 당했단 말인가.

“혀, 형님들…”

적지인살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제일 마지막으로 육제 공지장이 도착했다.

“대형께서는 어떠신가?”

모두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건강하십니다. 식사도 잘 하시고… 요즘은 남달리 활기에 차 계십니다.”

“소고는?”

“무공을 완성했습니다.”

“휴우!”

“아!”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불어냈다. 적지인살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보니 모두 같은 심정이었던 것 같다. 데리고 간 아이들이 너무 뛰어나 오히려 소고가 걱정이 되는.

“형님들,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공지장의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렸다. 의형들의 몰골은 지난 세월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여실히 말해 주었다.

“자! 형님들, 오랜만에 만났으니 오늘은 실컷 취해 봅시다.”

공지장이 술 항아리를 가져왔다. 십 년 전 십망이 선포되기 직전에 준비해 두었던 술 항아리다. 감회가 새로웠다. 십 년 전 이 술 단지를 준비할 때 느꼈던 감정이 소록소록 되살아났다. 살아서 마실 수 있을까. 술 단지를 열 때 몇 명이나 살아남아 같이 잔을 기울일 수 있을까. 모두 살아남았다. 형편없이 구겨지고 찢겨졌지만 모두 함께 모여 잔을 기울인다.

“이 술을 마시게 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어.”

소천나찰이 축축이 젖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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