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45화
“하하하! 소리 땜중들하고 부딪쳤을 때는 아찔했지. 이건 도대체 상대가 안 되는 거야.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말 있지? 실감나더군.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지.”
“하하, 그래서요?”
“그래서는 뭐가 그래선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수밖에 더 있는가? 휴우,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네. 가는 곳마다 귀신처럼 알고는 불쑥불쑥 나타나니…”
화제는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소천나찰은 소림의 추적을 뿌리치고 하남성을 벗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적지인살이 생각한 대로 소천나찰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하남성을 벗어나 협서성을 가로질러 청해에 도착했다. 십망이 탄생한 이후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청해성으로의 도주’를 성공한 것이다. 소천나찰의 이야기 중 백미는 단연 지략 싸움이었다. 소림과 그리고 후에는 소림, 청성파의 연합과 쫓고 쫓기는 싸움에서 간발의 차이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뛰어난 머리 덕분이었다. 무공이 아니었다. 두뇌 싸움이었다. 철저히 싸움을 피하고 오로지 ‘도주’ 한 가지에만 목적을 맞춘 혈로였다.
“청해에 도착하니 긴장이 탁 풀리더군. ‘아! 이제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들면서 안 아픈 데가 없는 거야, 무려 일 년이나 쉬었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수련을 시작하고 싶었지만 몸이 안 따라주었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모두들 경험한 일이니 그 심정을 잘 안다.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기쁨, 새 생명을 얻은 기쁨…..
“야이간을 곤륜 문하로 집어넣는 데 성공했네. 원래 무재이고 워낙 약삭빠른 아이라 쉽게 성공했지. 그래, 휴우! 야이간은 내공을 익히지 않았어. 야이간은 곤륜 문하일세. 야이간이…. 살수행을 걷는다면….”
소천나찰은 마지막 말을 잇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야이간이 살수행을 할 경우 곤륜파는 야이간을 파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야이간은 곤륜파의 제거 대상이 된다. 곤륜파의 명예를 걸고 달려들 테니… 곤륜파가 남느냐, 야이간이 남느냐 하는 싸움이 되리라. 승산이 없다. 무엇보다 야이간이 안정된 곤륜 문하라는 자리를 버리고 중원 전 무림인을 죽이려고 하는 살혼부의 살수가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소천나찰은 야이간을 너무 크게 키워 놓았다.
“야이간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적지인살이 답답한 심정으로 물었다. 탈출을 하고, 무공을 가르치고, 소고의 수하로 들여보내면 깨끗이 끝날 것 같았는데 일이 이상한 방향에서 꼬이고 있었다.
“중원에 들어오긴 왔네만… 소고의 수하가 될지는 의문이네.”
“어느 정도입니까?”
공지장이 물었다.
“완벽하네. 곤륜의 무공과 내 경륜을 배웠네. 무공이야 하루아침에 높아질 수 없는 것이니까 그렇다 해도 도망치는 재주만은 천하제일이라고 자부할 수 있네. 십망이 다시 선포된다 해도 야이간을 쉽게 잡을 수 없을 거네. 도주한다면.”
소천나찰이 자신 있게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야이간의 약삭빠른 눈동자가 생각나는 것은 우연일까? 그가 이형의 병략까지 완벽하게 습득했다면 문파 하나쯤은 혓바닥을 놀리는 것만으로도 없앨 수 있으리라.
‘도주한다면… 종리추도 잡을 수 없을 거요.’
적지인살은 종리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주하는 능력, 천지만물을 모두 이용하는 그의 도주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
“솔직히 말하겠네. 야이간은 살혼부를 보고 판단할 걸세. 기대에 미흡하다면… 곤륜으로 돌아가겠지. 기대에 흡족하고 살혼부를 움켜쥘 수 있다면 남을 걸세.”
원래 영웅이니 호걸이니 하는 쪽과는 거리가 먼 아이들이었다. 야이간이 곤륜의 무공을 배웠으면서도 소천나찰을 따라 중원으로 들어선 것은 소천나찰과의 의리보다는 살혼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식… 나는 자식을 키웠어.’
적지인살은 다시 종리추가 생각났다. 종리추는 살혼부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살수 집단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싫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따라왔다. 아버지가 가고자 하는 길이기에. 종리추와 도주할 때, 그가 영웅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잘해야 효웅, 아니면 간웅이 될 것이라고, 지금은 아니다. 종리추는 자식이다. 부모의 말이라면 거역을 못 하는 미련한 아들이다. 적지인살은 괴로웠다.
“전 화산파와 부딪쳤죠.”
비원살수는 역시 생각한 대로 산서성을 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몽고인인 비원살수가 세상에서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역시 몽고밖에 없을 테니까.
“화산파의 매화검수는 소문 이상으로 무서웠죠. 후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습니까? 제가 그랬죠. 평소에는 ‘매화검수쯤이야’ 하는 생각을 가졌지만 막상 부딪쳐 보니… 처절한 심정으로 도주하지 않았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겁니다.”
비원살수는 미련하게도 화산파와 정면으로 부딪쳤던 것 같다. 비원살수의 성격이라면 당연한 행동이다. 검으로 부딪치고 안 되면 죽는다는 것이 그의 신조였으니. 사실 비원살수가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살아남아도 비원살수는 죽었을 줄 알았다. 그는 도주하고 싶어도 그의 성격이 죽음으로 몰아넣을 테니까. 그런 그가 자존심을 굽히고 도주했다.
“십망을 당했을 대형이 생각나서 살자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잘했네.”
“이 복수는 반드시 한다. 오늘 나에게 검을 쑤셔 박은 인간들… 살려두지 않는다 하고 다짐하면서.”
비원살수의 입에서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말을 하다 보니 분기가 솟구쳐 입술을 물어뜯은 것이다.
“적사는 내만 족장님의 은덕을 입어 축혼팔도를 익혔지. 축혼팔도를…”
모두 침묵했다. 비원살수 역시 소천나찰처럼 적사를 너무 강하게 키웠다. 그가 말한 축혼팔도… 어떤 무공인지는 모르지만 한두 번쯤은 들어본 적 있다.
‘내만족은 몽고족들 가운데서도 금나라로부터 대왕의 칭호까지 받을 정도로 가장 융성했던 부족이다. 내만족의 강성함은 성길사한이 나타나 몽골고원을 통일할 때까지 삼백 년 동안 이어졌다. 그들이 지배하던 몽골고원은 성길사한의 셋째 아들에게 넘겨졌지만, 그들의 문자는 몽골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내만족은 원이 무너지고 명이 들어선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비록 옛날의 강성함은 찾지 못하고 있지만 몽골고원을 지배했다는 자긍심만은 살아 있다. 그들에게 살아 있는 것이 또 있다. 성길사한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족장이 전사하여 부족의 존폐가 염려될 지경에서도 족장의 아들이 서요로 도주하여 요의 왕이 된 데는 축혼팔도라는 무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일설도 전해진다. 비원살수는 내만족이다. 그는 같은 몽골인이면서도 원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적사가 한때는 몽골을 지배했던 비원살수의 부족 최고의 무공인 축혼팔도를 익혔다고 한다. 그것은 적사가 내만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대로 눌러앉으면 몽골고원을 놓고 패권을 다투는 전혀 색다른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왕이 되느냐, 족장이 되느냐 하는. 비원살수… 소천나찰… 그들은 너무 강하게들 키웠다. 강하게 키우는 것은 상관없지만 아이들의 입지를 너무 크게 넓혀 놓았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을 게다. 무공이 약한, 세력이 없는 살수의 종말을 뼈저리게 겪었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한 자로 양성하는 데만 급급했으리라.’
“적사가 죽이고자 한다면 예전의 살혼부쯤은 감쪽같이 지워 버릴 수 있어. 장담하는데 이건 한 올의 과정도 없어. 화산파의 매화검수들도 적사를 조심해야 할 거야.”
비원살수가 끈끈한 살기를 토해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그는 살기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게 흠이지 현실을 파악하는 감각은 무척 뛰어나다. 모두 짙은 피 냄새를 맡았다.
‘종리추 역시 마찬가지. 죽이고자 한다면… 우리가 예전의 무공을 잃지 않았어도 상대할 수 없어.’
직접 시험까지 해봤다. 자신이 당했고 모진아가 당했다. 유구와 유회는 그렇다 쳐도 모진아는 자신보다 뛰어난 고수다. 살혼부 모두가 함께 움직였던 구지신검의 살수를 맡겨도 해낼 것 같다. 종리추라면. 적지인살은 자신도 모르게 섬뜩한 충격을 받을 때마다 종리추와 비교했다.
“적시는… 중원에 왔습니까?”
공지장이 물었다. 비원살수가 왔으니 그도 왔으리라. 비원살수가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으니 적사도 살검을 갈고 있으리라. 공지장이 묻는 의미는 소고의 수하가 되는 데 지장이 없겠냐는 뜻이다.
“적사도 화산파에 원한을 갖고 있지. 매화검수는 어린아이에게조차 검을 들이댔다. 정수리부터 미간까지… 일직선으로… 죽이려고 했던 거지. 그 아이도 알아.”
“중원에 왔습니까?”
공지장이 다시 물었다.
“…”
비원살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화산파에 원한은 있지만 소고의 수하까지는… 얼굴에 드러난 번민의 흔적만으로도 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난 항주로 갔죠.”
미안공자는 역시 항주였다.
“세상 인심이라는 것이 쫓기는 팔자가 되니까… 문화를 아는 사람이나 미개인이나 똑같더군. 모두 현상금에 눈들이 어두워져서…”
미안공자는 아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였다. 친구를 죽이고 동생을 죽이고… 현상금에 눈이 먼 자들을 죽이면서 달아나야 했다. 아는 사람이라고 찾아간 것이 잘못이었다.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어려웠을 때 손을 내밀어주는 형제가 있는가 하면 냉정하게 등을 돌리는 형제가 있다. 잘 먹고 잘 살 때는 그렇게도 화목하던 형제들이 어려워지면 싹 돌아선다. 세상은 비정하다. 더럽고 추잡한 꼴을 보지 않으려면 어려워져서는 안 된다. 쫓겨서는 더더욱 안 된다. 미안공자는 형제 복이 없다. 인복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까?
“결국… 어산열도로 가서 어산적에 몸을 의탁했죠.”
소천나찰이 답답한 듯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살수일망정 미안공자는 풍도를 지켰다. 살수도 깨끗했고 목표 이외에는 건드리지 않았다. 어산적은 사납기로 소문난 해적이다. 중원에 녹림이 있다면 동해에는 어산적이 있다. 그들은 물건만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람 목숨까지 거둔다. 절대 살려두는 법이 없다. 당연히 당하는 쪽에서는 필사적으로 항전하지만 어산적은 오히려 그런 점을 즐긴다. 하남성 사람들조차 미개인이라고 부르는 미안공자가 그들 틈에 섞여 살았으니 얼마나 마음의 고통이 심했을까.
“어산적이 그렇게 행패를 부리는데도 수군은 손을 쓰지 못했어요. 왜 그런 줄 압니까? 어산적이 물길을 잘 아는 것도 한몫을 했지만, 어산적 수령의 무공이 소제도 넘볼 수 없을 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 그럴 수가!”
“어떻게 일개 해적의 무공이!”
이거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녹림이나 해적의 무리란 것이 요즘처럼 극심한 흉년이 들 경우 먹고살기 힘들어서 모인 사람들의 집단에 불과하다. 그들 중 더러는 해적을 하다가 죽고, 또 더러는 흉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만 해적질에 맛이 들려 남는 자들도 있다. 어산적 남은 자들이 모인 무리다. 물길을 잘 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이 무인도 넘보지 못할 만큼 강한 무공을 지녔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자, 자네는 뭣을 했는가?”
소천나찰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산적에 몸을 의탁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수령을 죽이고 어산적을 이끌었다는 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 말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지 않은가.
“어산적에는 소두목이 일곱 명 있습니다.”
“그럼 자네는…?”
“소두목이었습니다.”
서로들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렇게 기가 막힌 일이 있을 수가!
“수, 수령은 도,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명유마괴.”
“며, 명유…!”
“녹림마왕! 음… 그렇군. 녹림마왕이 중원에서 밀려나 어산적 해적을 이끌고 있었군.”
소천나찰도, 다른 사람들도 비로소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마왕은 공동파의 기명 제자다. 후기지수 가운데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 공동파의 장래를 짊어진 청년 협객으로 촉망받았었다. 그는 여인에게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천하 절색의 미녀가 눈앞에 있어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런 점이 그를 더욱 협객다운 협객으로 비추게 만들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그의 남색 행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공동파에서는 문파의 체면을 생각해 종신 폐관 수련을 명령했지만 녹림마왕은 듣지 않았다. 그는 공동산에서 벗어나 녹림으로 숨어들었고, 장강수로십팔채를 하나로 일통시켰다. 녹림 사상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장강을 거점으로 각기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노략질을 일삼던 수적들이 거대한 하나의 세력으로 뭉쳤다. 도적들의 수령은 채주가 되었고 녹림마왕은 총채주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녹림마왕, 혹은 명유마괴로 불리게 된다. 장강수로십팔채는 당연하지만 중원무림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뒤늦게 총채주가 공동파 출신으로 파문당한 자임이 밝혀지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장강수로십팔채는 결성된 지 일 년 만에 와해되었다. 소문에는 녹림마왕 역시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어산적 수령이 명유마괴인 것을 알게 되자 망설일 필요가 없었죠. 무당 말코도사들에게 쫓겨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익혀봤자 이런 꼴이 될 무공을 뭐 하러 전수합니까.”
‘무당!’
적지인살은 멍해졌다. 개방에 쫓긴 다음 당연히 무당파가 나섰어야 한다. 지리적인 여건상 적지인살이 가는 길목에는 무당파가 자리했다. 하지만 그때 무당파는 미안공자를 쫓고 있었다.
‘어쩐지… 추적을 너무 쉽게 뿌리쳤다 했는데, 역시 십망에 구멍이 뚫려 있었어.’
“적각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요. 저는 그 아이에게 소여은이란 이름을 지어주었어요. 천하제일미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주고 싶어서, 앞으로도 적각녀는 없습니다. 소여은이에요. 천하제일미녀이자 천하제일살수죠. 여자는 몰라도 사내라면… 알면서도 죽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미안공자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사형…! 저, 적각녀를 사랑하고 있어! 도대체 어떻게 키웠기에… 사십 년… 사십 년 나이 차를 넘어서 사랑하고 있어. 이런 일이… 세상에 이런 일이…’
그 어떤 여인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던 미안공자다. 세상의 여인들을 마음껏 희롱하면서도 버릴 때는 냉정하게 버렸던 미안공자. 그가 사랑에 빠졌다. 좌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미안공자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소여은이라는 적각녀에 대해 호기심이 치밀었다. 도대체 어떻게 성장했기에. 미안공자는 애잔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여은이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죠. 겨우 독심술 정도…”
미안공자는 ‘겨우 독심술’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의 전부였다. 그가 여인들을 마음껏 희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빼어난 용모 때문이 아니었다. 여인의 마음을 읽고 화응해 주었기 때문이다. 여인이 그의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면 아무리 목석 같은 사내라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미인계를 펼친다면, 빼어난 미모까지 겸비했다면 더더욱.
“여은이는… 녹림마왕의 모든 무공을 이어받았어요. 녹림마왕은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지만…”
미안공자는 갑자기 말끝을 흐렸다. 흉한 몰골이기는 하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예전의 아름다웠던 미안공자의 본바탕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녹림마왕이 관심을 가진 사람은 미안공자였다. 어쩌면… 미안공자는 녹림마왕과 동침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녹림마왕이 관심 없는 여자에게, 소여은에게 무공을 전수했다면 그만한 대가를 받았을 테니까.
“녹림마왕의 무공은 모두 공동파의 진산비기, 여은이는 공동파의 무공을 정통으로 익혔어요. 야이간이 곤륜 무공을 익혔고, 적사가 축혼팔도를 익혔다지만 여은이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겁니다.”
모두들 침묵했다. 사실이 아닐지라도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해 줌으로써 미안공자의 지난 세월을 감쌀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어떻게… 녹림마왕의 손을 벗어났는가?”
소천나찰은 그 말밖에 묻지 못했다.
“…”
“…”
한참 만에야 미안공자가 입을 열었다.
“후후, 죽였죠.”
“여은이가 죽였는가?”
“…”
미안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형님이 죽였어, 형님이… 지난 십 년 세월… 형님에게는 억겁이었겠구려.’
적지인살의 머릿속에 남색을 당하는 미안공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다른 의형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하! 어쩌다가 살혼부 살수들이 이런 모습이 되었는가. 마지막에는 녹림마왕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모습이 보였다. 생생하게. 사람을 암습하는 데는 가장 깨끗한 솜씨를 지녔지만 녹림마왕만은 편히 죽지 못했으리라.
“흠! 오형께서는 어떻습니까? 종리추란 아이… 뛰어난 아이였죠?”
좌중 분위기가 기묘하게 흐르자 공지장이 화제를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