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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48화


적사는 도를 꺼내 마른 헝겊으로 닦았다. 월광에 어우러진 도에서 심장을 얼릴 듯한 도기가 풀풀 피어났다.

“…”

그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는지 쉬지 않는지… 그는 고요했다.

철썩! 처얼썩…!

잠잠할 것 같던 두 눈이 부릅떠진 것은 그때였다. 어둠을 헤치고 배 한 척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어미들이 고기나 잡는 허름한 배를 이용했다. 이번에 오는 자도 강심으로 나오기에는 위태해 보이는 낡은 배를 이용하고 있다. 적사의 눈길은 뱃전에 서 있는 자를 향했다.

“소… 고…!”

신음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소여은은 편하게 누워 전신을 이완시켰다. 그녀가 녹림마왕에게 무공을 배우고 해적질을 하는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힘이란 쓸 때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일 때…’

그녀의 지난 세월은 사람을 죽일 때 외에는 긴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세월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긴장은 나를 노출시킬 뿐이다. 단 한 번이면 족해. 한 번만 긴장하면… 죽일 때…’

철썩! 철썩..!

뱃전에 서 있는 모습이 유난히 뚜렷하게 보였다. 하얀 무복을 입고 있어 숨기려고 해도 숨을 수 없는 차림새였다.

‘소고… 숨을 필요가 없다는 거지. 살수로 겨룬다 했는데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배짱. 좋아, 죽여주지.’

소여은은 하얗게 웃었다.

야이간은 잡초 사이에 몸을 숨기고 움직이지 않았다.

‘미련 곰탱아. 이런 싸움은 강하다고 이기는 것이 아냐. 더군다나 넌 네가 생각한 것처럼 강하지도 않아. 일 대 일로 싸운다면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지 몰라도 둘이 손을 잡는다면 넌 죽어. 알아, 이 곰탱아? 죽을 수도 있는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처럼 미련스런 짓은 없는 거야.’

야이간은 적사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축혼팔도에 대해서는 들어봤다. 한때는 몽고를 지배했던 내만족의 무공으로 공격이 시작되면 피를 보기 전에는 거둬지지 않는다는 죽음의 도공이다. 오죽하면 이름이 축혼팔도이겠는가. 문제는 축혼팔도를 적사 같은 미련 곰탱이가 익혔다는 것이다. 강한 나무는 부러진다. 강한 바람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굳건하면 된다고는 하지만 모르는 소리, 무림이 어떤 곳인가? 초일류 고수만 추려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곰탱이… 내 장담하지. 여기선 살아 나갈지 모르지만 넌 오 년을 넘기지 못해. 오 년을 넘기면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지.’

야이간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채 소여은의 기척을 탐지하기에 부심했다. 그때, 소리가 들려왔다.

철썩! 처얼썩…!

‘응? 곰탱이가 또 있네?’

야이간은 웃음이 실실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삼이도에 올 때만 해도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너무 싱겁지 않은가.

‘소여은, 그 계집만 찾아내면 되는데…’

야이간은 소고에게서 눈을 떼고 소여은의 행방을 탐지했다. 모습을 드러낸 자, 그는 이미 적이 아니었다. 죽이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걸어 다니는 시신에 불과했다.

적사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숨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강바람이 매서웠고, 싸우기 전에 몸이 어는 것을 방지하고자 구덩이 속에 들어가 있었을 뿐이다. 적사의 눈길이 흰 천막으로 향했다.

‘사부님은 가장 경계해야 할 자로 종리추를 꼽았다. 하지만 놈은… 싸우지도 않고 소고의 수족이 되어 버렸어. 죽는 게 두려웠거나 무공에 자신이 없다는 말. 쓸개 빠진 놈.’

적사는 월광에 반짝반짝 빛나는 대도를 축 늘어뜨린 채 성큼성큼 걸었다. 소고가 모래사장에 발을 내딛는 모습이 보였다.

“…”

“…”

소고와 적사는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첫 대면. 적사는 무표정한 얼굴에 눈빛만 살아서 움직였다. 육 척 장신에 근육으로 뭉쳐진 체구, 이목구비가 선명하면서도 각이 진 얼굴, 불길처럼 쏘아져 나오는 눈빛. 강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도를 들고 있지 않아도, 살기를 쏘아내지 않아도 웬만한 사내들은 시비를 걸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위풍당당했다. 다듬지 않아 거칠게 자란 수염은 그를 더욱 사납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반면 소고의 몸매는 여리게 보일 만큼 날씬했다. 무복을 입고 있지만 아름다운 육체의 곡선은 숨길 수 없었다. 옷을 벗어던지고 나신이 된다면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몸이 드러날 것 같은 몸매였다. 복면을 하고 있지만 영롱하게 반짝이는 눈빛도 숨기지 못했다. 투지도, 적의도 담겨 있지 않은 청초하면서도 맑은 눈빛이다.

‘이런 여자를 상대하려고…’

적사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소고는 이상하게도 보호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도를 들고 공격하면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 것만 같다. 소고의 티 없는 맑은 눈빛이 그렇다.

“가, 다른 놈들을 먼저 상대해 봐.”

적사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스물둘이지? 아니, 새해를 맞았으니 스물셋이겠군. 난 스물다섯이야. 말 좀 올릴래?”

소고는 대뜸 하대로 시작했다.

‘뭐 이런 여자가…’

적사는 멍하니 소고를 바라보다 상대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려 버렸다. 순간.

페에엑…!

등 뒤에서 이상한 기음이 터져 나왔다.

‘암습까지! 죽이지 않으려 했건만!’

적사의 반응은 매우 신속하고 빨랐다. 그는 등을 돌림과 동시에 대도를 전개했다.

퀘에엑…!

대도에서 거석도 잘라 버릴 것 같은 경기가 일어났다. 허공을 가르는 도는 분명 하나인데 수십 명이 일시에 쳐낸 것처럼 거센 경풍이 일었다.

타앙!

검과 도가 중간에 부딪치며 맑은 울림을 토해냈다.

“어차피 내 수하가 될 사람인데 다치면 안 되지. 살살하겠어.”

여인의 눈빛이 살랑 물결쳤다.

‘뭐 이런 여자가…’

적사는 자신이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여인은 그가 늘 보아오던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몽고의 여인들은 사내 뺨치도록 억세다. 사내가 방목을 하고 여인이 요리를 하지만, 필요하면 여인도 일손을 돕는다. 말도 잘 타고 사슴도 잘 잡는다. 그녀들 중에도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여인은 있다. 미모가 뛰어나도록 빼어난 여인도 있다. 하지만 이 여자처럼 지독하지는 않다. 소고는, 이 여자는 축혼팔도 중 일도를 막아낸 사실조차도 잊게 만든다. 얄밉게 말하고 있지만 전혀 얄밉지가 않다. 귀엽다는 느낌이 옮을까? 감싸 안아주고 싶다는 표현이 옳을까.

‘사공이다! 지독한 사공이야!’

적사는 진기를 끌어올려 마음을 진정시켰다. 소고는 물론 아름답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호리호리한 몸이며 맑은 눈망울, 깨끗한 손만 보고도 알 수 있다. 하나, 그 정도에 미혹되어 도결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다면 죽어도 진작 죽었다. 그 정도에 불과했다면 중원에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초원 한구석에 백골이 되어 나뒹굴고 있으리라.

‘정신을 제압하고 있어!’

적사의 손목에 굵은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얼굴도 붉어졌고 이마에는 땀방울까지 흘렀다. 소고는 난생처음 접하는 강적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한다. 다시 한 번 조금 전과 같이 방심하면 큰 곤욕을 치를 것이다.

“차앗!”

적사는 필생의 대적을 대한다는 심정으로 전신 진기를 모두 모아 도에 밀집했다. 그리고 번개처럼 축혼팔도를 전개했다.

페에엑! 쒜엑…!

적사는 성난 들소였다. 소고의 가녀린 몸둥이가 가랑잎처럼 팔랑거렸다. 무지막지하게 돌진해 오는 들소의 뿔에 받혀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구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너무 심해.’

적사는 자신도 모르게 진기를 회수했다.

그는 조금 전 소고가 축혼팔도 중 일도를 막은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의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은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소고가 되었을 거라는, 관심도 없는 무공을 익히느라 모진 고생을 했을 거라는 동정이었다. 세상에는 하고 싶지 않아도 등을 떠밀려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모두들 열 살 안팎에 살혼부 고수들의 눈에 띄어 지금까지 지내왔으나… 소고 역시 그렇지 않았겠는가. 단지 자신들은 무공이 좋아 열심히 익혔지만, 소고는 어쩔 수 없이 익혔고, 무공을 배웠던 것처럼 등을 떠밀려 삼이도까지 오게 되었다. 불쌍한 여인이다. 죽일 필요는 없다. 단지 검만 떨구고 물러서게 하면 된다. 검만 떨구고. 처음 적사의 도공은 회색 빛으로 물든 성난 바다였다. 그러나 지금은 잔물결만 찰랑이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순간.

쒜에엑…!

한 자루의 시퍼런 장검이 힘을 잃은 축혼팔도의 틈바귀를 파고들며 요악한 웃음을 토해냈다.

사라라라랑…!

“헉!”

적사는 헛바람을 토해냈다.

‘물러서야 해. 또 걸렸어!’

하지만 요악한 검날은 그가 물러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사내라면 깨끗이 승복해.”

소고의 맑은 눈이 애원을 하는 듯 물기를 머금었다.

“이, 이런!”

적사는 탄식을 토해냈다. 시퍼런 장검이 목젖을 겨누고 있다. 소고가 조금만 더 힘을 가했더라면 목이 꿰뚫렸을 것이다.

“그만 승복해.”

“졌소.”

적사는 승복했다.

“그럼 수하가 되어야지?”

심신이 동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음성에서 촉촉한 물기가 묻어난다.

‘부탁이에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저는 당신처럼 든든한 사람이 필요해요. 무림이란 곳으로 뛰어들어야 하는데 불안해서 견딜 수 없어요.’

촉촉한 음성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요상한 말을 했다.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향기로운 물기를 물고 귓전에 속삭였다.

‘사공이야! 요술이야! 흐흐, 요술이면 어떻고 사공이면 어떠랴. 진 것은… 나는 졌어.’

적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하가 되겠소.”

‘둘 중에 하나다. 무극에 도달했거나 사공을 익혔어.’

소여은은 적사가 패하는 것을 보았다. 곁에서 보기에는 너무 싱거웠다. 적사는 축혼팔도를 전개하지도 못했고 자신의 강력한 기운을 쏟아내지도 못했다. 도를 쳐 나가다가는 진기를 빼버리고, 다시 전신 진기를 쏟아붓는가 싶더니 어느새 물러서 버렸다. 적사는 내만족 족장의 은덕을 입은 사람이다. 몽고에 머무른다면 족장의 위치도 넘볼 수 있다. 혈통이 달라 족장은 되지 못한다 해도 대초원에서 축혼팔도를 절정으로 익힌 적사를 무시할 자는 없으리라. 그런 그가 중원으로 들어왔다. 사무령? 좋은 말이다. 사무령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사무령은 혼자만 되는 것이 아니니까. 종국에 가서 사무령끼리 선후 다툼만 벌이면 된다. 중원무림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데 무엇을 염려하랴. 하지만 구파일방의 한마디에 허겁지겁 십망을 받은 살혼부에 사무령을 만들어줄 만한 힘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나 무당파에서도 사무령은 꿈도 꾸지 못하는데 일개 살혼부에 그런 거력이 어디 있으랴. 그런 힘이 있다면 청면살수가 사무령이 되었겠지. 적사가 중원에 들어선 것은 사부의 평생 소원을 들어주기나 하자는 심산이었으리라. 오랜만에 중원도 들러보고 소고라는 계집도 만나보고… 몽고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절대 사정을 봐줘서는 안 되는 싸움이다. 그런데 졌다. 힘없이, 정말 싱겁게… 소여은은 무극을 생각했다.

-무검이나 유검이다. 유살이나 무살이다. 살은 없고 조화만 있다. 무검이나 유검이다. 검을 들지 않았으나 검을 든 것과 진배없다. 유살이나 무살이다. 사람을 죽였으나 죽은 사람이 없다. 육신은 죽이지 않고 마음을 죽였다는 말이다. 투지를 죽였다는 말이다. 살은 없고 조화만 있다. 싸울 필요조차 없다. 모두들 싸울 마음이 없으니 모두 고개를 숙인다.

소림사에 무학을 전파한 달마대사, 무당파를 창건한 장삼봉 조사 등등 장구한 무림 역사상 무극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공을 익혔다는 말이 된다. 영뢰삼벽이라 했는데… 혈뢰삼벽이 사공이었던가? 좌우지간 적사는 지닌 바 능력을 최대한 펼치지 못했다. 아니, 반의반도 펼치지 못했다.

‘사공이라 한들 암습에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겠지.’

소여은은 뱀이 기어가듯 바위 그늘을 골라 천천히 다가갔다. 삼이도에는 그녀 말고도 야이간이 있다. 그녀는 야이간이 먼저 공격해 주기를 바랐다. 싸움이란 적게 할수록 좋다. 완벽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면 공격하지 않는 것이 좋고, 상대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자를 만나면 물러서는 것이 좋다. 그녀 역시 어산적이 기다린다. 녹림마왕이 암살당한 후 어산적은 지리멸렬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만만했다. 동해로 돌아가기만 하면 어산적을 다시 규합하여 무궁한 대해를 누릴 자신이 있었다. 무림에는 뜻이 없다. 바다를 보며 마음껏 노략질하며 사는 삶이 좋다. 소고는 반드시 꺾어야 할 여자다. 그래야 동해로 돌아가 어산적을 만날 수 있다.

‘빌어먹을 자식, 먼저 움직이지 않겠다 이거지.’

한참을 기다려도 야이간은 공격하지 않았다. 적사는 흰 천막으로 들어갔고, 소고는 싸움에는 관심 없는 듯 검은 강물만 바라보고 있다. 등을 돌린 채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웬만해서는 무시당했다는 느낌이 들 터인데도 야이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능구렁이 같은 자식, 십 년이 지나더니 더 능구렁이가 되었어. 좋아. 난 어차피 저 계집만 꺾으면 되니까.’

공동파의 무공 중 뛰어난 것은 역시 복마검법이다. 복마검법은 공동파에 갓 입문한 제자들부터 장문인까지 고루 익힌다. 갓 입문한 제자가 검을 하사받아 제일 먼저 배우는 무공이 복마검법이며, 장문인이 사파 마두를 상대로 펼치는 절정 무공도 복마검법이다. 복마검법은 수련 정도에 따라서 절정 무공도 될 수 있고 삼류 무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스르릉-

소여은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제야 솜털까지 팽팽히 곤두서는 긴장감이 몰려왔다. 지금까지는 이완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사람을 칠 순간이다. 당연히 긴장해야 한다.

슈우욱!

소여은은 검을 찔러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뻗은 암검이었다.

“앗!”

소여은은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방비 상태로 고개를 돌린 소고, 애원하는 듯 물기에 젖은 눈망울, 암습을 할 수 있느냐는 듯 질책까지 담긴 눈길… 투지를 빼앗아 버린다.

‘역시 사공이야! 놀라워. 이래서 적사가 당했어.’

소여은은 흐트러지는 진기를 간신히 가다듬었다. 같은 여자이지만 소고의 눈길은 정말 매혹적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향기도 풋풋하고 달콤했다. 소고는 호기심을 느끼고 말을 걸 여자이지 검을 맞댈 여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그녀의 무공인 것을.

‘흥! 어림없어! 몸에 대한 의식을 없앤다! 망형!’

복마검법의 ‘복마’는 만마를 제압한다는 뜻이 있다. 검로가 깨끗하면서도 빠르고 변화를 종잡을 수 없어 귀신이라 해도 빠져나가지 못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쒸이익-

전력을 다한 일검이 소고에게 쏘아졌다.

창! 창! 창!

연거푸 검과 검이 부딪치며 빨간 불꽃을 튕겨냈다. 소고가 느닷없이 몸을 빼 뒤로 물러서며 말을 꺼냈다.

“동생은 정말 예쁘네. 사숙께서 동생을 뭐라고 소개했는지 알아? 천하제일미녀랬어. 사내라면 알면서도 웃으며 죽음을 받을 수 있는 여자라고. 내가 사내였다면 동생에게 반했을 거야. 정말. 동생이 죽이려고 한다면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여자가 지금…’

소여은은 진탕되는 심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자신과 싸워야 했다. 소고의 말 속에는 진정이 담겨 있다. 그녀는 정말 놀란 듯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싸우고 싶지 않다. 검을 놓고 정답게 정담을 나누고 싶다.

‘도, 도대체 이게 무슨 사술…’

소여은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찝찔한 핏물이 혀를 적신다.

“동생, 난 사무령이 될 수 있어. 도와주지 않을래?”

‘난 바다가 좋아. 흩어진 여산적이 어디 있는지 알아. 그들을 모으면 바다의 왕이 되는 거야. 난 해적이야! 명에 대한 의식을 없앤다. 망명!’

‘차앗!’

소여은의 머릿속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육신을 잊었으니 죽음이 두렵지 않고, 목숨이 없으니 죽을 게 무엇이겠는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몸도 마음도 무아지경에 이르러 절대 무심무욕의 상태로 검을 쳐내는 것, 복마검법의 절대 사초였다.

쩌엉…!

검과 검이 부딪쳤는데 철판끼리 부딪친 듯한 소리가 퍼져 나왔다.

“동생, 진심이야. 이러지 말고 도와줘.”

소여은은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복마검법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녀의 경지가 무심무욕, 무아지경에 이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절대 사초를 펼치기 이전에 이미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평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완벽히 평정되어야 펼칠 수 있는 무공을 펼쳤으니 제 위력이 나올 리 없다. 절대 무심의 평정 상태에서 복마검법을 펼쳤다면 소고인들 이렇게 쉽게 막을 수는 없었으리라.

“졌… 어요.”

소여은은 더 이상 싸워봤자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번 겪어봤으니 다음에는 당하지 않도록 파해법을 연구하겠지만 지금은 졌다.

“동생, 진심이었어.”

“…?”

“동생은 정말 예뻐. 눈빛 하나만으로도 사내를 뇌살시킬 수 있는 여자가 있다면 바로 동생이야. 이건 진심이야.”

소여은은 혼란스러웠다. 소고는 어디까지가 요술이고 어디부터가 진심인가.

‘다음에… 다음에는 꼭 이길 수 있어. 이런 요사한 술법은 반드시 깨지게 되어 있어. 그때가 되면 비참하다 못해 처참해질 거야.’

소여은은 소고를 힐끔 쳐다본 후 흰 천막으로 향했다.

“거 찬바닥에 오래 누워 있었더니 허리가 다 아프네. 누님이 소고시죠? 사부님께 귀가 따갑도록 말씀 들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야이간이 잡초 더미에서 몸을 일으키며 반색했다.

“야이간? 아님 종리추?”

“제가 바로 야이간입니다. 종리추란 자는 벌써 천막 안으로 들어갔죠. 아마 제 기억으로는 제일 먼저 들어간 것 같은데…”

“천막 안으로? 벌써?”

“처음부터 수하가 되겠다고 자처한 자 아닙니까? 그놈은 오자마자 들어갔어요.”

소고와 야이간은 거의 동시에 사부로부터 들은 말을 떠올렸다.

“종리추는 소고의 수하가 되는 것도 동의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너도 싸우겠다고 한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싸울 의사가 없는 것 같고… 싸울 건가?”

‘싸우다니, 난 그렇게 무모한 놈이 아니오. 당신의 사공을 봤으니 파해법을 생각할 동안까지는 몸을 사려야겠지. 소고… 당신은 적사보다도 명줄이 짧을 것 같구만. 적사는 무공이라도 강하지, 당신은… 위력을 발휘할 때는 엄청나게 강해 보여도 깨지기 시작하면 삼류 무인한테도 형편없이 깨지는 것이 당신 같은 사공이지. 후후!’

“전혀! 싸울 생각이 싹 가셨습니다. 때를 잘 파악하는 자가 준걸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제가 준걸인 모양입니다.”

야이간은 변죽이 좋았다. 야이간은 육각 방망이를 앞에서 본 얼굴 형이다. 이마가 좁고, 광대뼈가 나왔고, 턱이 좁다, 그러면서도 각이 졌다. 눈은 가늘고 코가 크며 입술이 두툼하다. 냉철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손에 넣는 집요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게 얼굴에 잘 드러나 있다.

“좋아. 그럼 천막 안으로 들어가지.”

‘어쩐지 손 한번 못 써보고 푹푹 나가떨어지더라니… 싸우지 않기를 잘했어. 음성에 요기가 섞여 있어. 단지 목소리만 듣고도 마음이 이렇게 진탕되니. 후후! 얼굴도 예쁘면 좋으련만.’

“제가 앞장서죠.”

야이간은 앞장서서 흰 천막의 장막을 걷었다. 적사는 한쪽 귀퉁이에 웅크리고 앉아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 옛날 뇌옥에 있을 때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소여은도 옛날과 같은 모습이다. 천막 한 귀퉁이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다. 졸린 듯 반쯤 눈을 감고.

‘저, 저, 저게 적각녀! 음… 천하제일미녀라기에 허풍도 심하다 생각했는데… 예뻐졌군. 미인이야.’

소여은의 모습은 한눈에 반하기에 충분했다. 오뚝한 코, 붉고 두툼해 꽉 깨물어주고 싶은 입술, 이지적으로 부드럽게 휘어진 눈썹…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봐도 예뻤고, 전체적으로 스쳐 보기만 해도 예뻤다. 활달하면서도 사나워 보이고, 사내를 유혹하는 듯한 도발적인 면까지 고루 갖춘 보기 드문 미녀다.

‘중원에 들어오자마자 선물을 받았군. 좋아, 넌 내가 차지하지.’

야이간은 소여은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여자를 좋아하는 야이간이 보아왔던 숱한 여인들 중 가장 예뻤다. 한편, 소고는 종리추를 보고 있었다.

“드르렁! 쿨…!”

종리추는 코까지 골아대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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