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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49화


‘놀라운 무공이다!’

종리추는 큰 충격을 받았다. 무공이라면 누구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익혔다는 자만심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소고, 적사, 야이간, 소여은…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했다. 흰 천막의 장막을 걷기까지 얼마나 갈등했던가.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작심했으면서도 억울하다는 마음이 문득문득 고개를 쳐든 것은 잘못일까? 이들은 모두 큰 산이 되어가고 있다. 조금 더디고 빠른 느낌은 있지만 향후 십 년이 지나면 무림 일각을 차지하는 패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소고의 무공은 더욱 놀랍다. 소고는 이미 무형의 기를 싸움에 응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적사와 소여은은 알지 못할 힘에 진기가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태산처럼 거대한 위압감을 발휘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바다처럼 장대한 포용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무형의 기는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다. 똑같은 무공을 익혀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듯이 무형의 기 역시 사람마다 다른 색깔로 나타난다. 소고는 어떤 색깔을 지녔을까? 어쨌든 적사와 소여은은 무형의 기에 전신이 친친 옭아매여져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소고가 들고 있는 검에 현혹되어서는 안 돼. 소고를 이기기 위해서는… 전신을 옥죄어 매는 무형의 기부터 쳐 나가야 돼.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칠 수 없다. 그렇다면 나 역시 무형의 기로 맞서야 하는데… 내게 그런 능력이 있나?’

종리추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형의 기로 사람을 살상하는 것을 외기격인, 혹은 격공격인이라고 한다. 세상에 아무런 힘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그냥 쓰러지는 물체는 없다. 물체가 쓰러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힘을 가해줘야 한다. 삼사 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서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않고 쓰러뜨려야 한다면 도대체 얼마만한 힘을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 진기를 끌어올려 육신에, 혹은 병장기에 집중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사람을 살상할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채 외부로 방출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종리추는 시도해 본 적도 없고, 시도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극의 경지에 이르러 싸움이라는 자체가 필요하지 않은 절대고수나 가능한 무공이다. 소고도 외기격인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기를 방출해 냄으로써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의 정서는 희, 노, 우, 사, 비, 공, 경의 칠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적사나 소여은처럼 극심한 정신적 타격을 받으면 칠정에 변화가 생기고 음양이 무너지며 장부는 기혈의 조종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내상이다. 치료할 필요가 없을 만큼 미미하지만 분명히 내상은 내상이다. 정신적 자극이 노함에 미치면 토혈, 비혈을 하게 된다. 기쁨을 자극하면 기가 이완되어 집중력을 상실하게 된다. 슬픔을 자극하면 기가 소침하고, 공포를 자극하면 신기가 망실되어 대소변을 흘리게 되며 허리가 무력화된다. 소고는 내기를 방사하여 인체에 타격을 가하지는 못했지만 정신에 충격을 준 것만은 틀림없다. 적사는 어리석었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이 어리석었다. 우애 자극을 받아 싸움터에서 여인의 미모에 현혹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그래서는 싸움이 안 된다. 일심으로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산란해진 마음으로는 고도의 진기를 모을 수 없다. 그의 공세가 중도에 흩어진 것이 그 증거다. 소여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싸움도 시작하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선공을 받았다.

‘어떤 느낌이었을까? 내 감정을 타인이 건드리는 느낌이…’

종리추는 한 가지 사실만은 인정했다. 소고는 외기격인을 향해 한발 앞서 나가고 있다.

“드르렁! 푸우…!”

종리추의 코 고는 소리만이 흰 천막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였다. 소고, 야이간, 소여은, 적사… 모두들 한자리에 모여 앉았지만 깊은 상념에 잠겨 헤어 나오지 못했다. 소여은이나 적사로서는 자신들이 그렇게 간단히 무너질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두 사람은 침묵했다. 야이간 역시 소고와 같은 종류의 무공에는 상대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맛봤다. 그런 좌절감은 큰 충격이다. 직접 육장을 주고받으며 결전을 벌여 패한 것에 못지않은. 야이간은 연신 소여은을 흘끔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경시받는 인간이 여자에게 사족을 못 쓰는 인간이지.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여자에게 사족을 못 쓴다는 인상을 심어주면 존경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법.’

야이간은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또 소여은은 넋을 빼놓을 만큼 예뻤다.

‘가벼운 인간으로 보일 필요가 있어.’

하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습관적인 행동일 뿐.

“드르렁! 푸우…!”

야이간의 귓전에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종리추… 정말 잠이 든 건가? 아니지, 아무리 신경이 둔한 자라도 이런 순간에는 잠을 이룰 수 없어. 어쨌든 많이 컸다만 한 수 아래는 여전하군. 자는 척하는 것이라면 쓸데없는데 심기를 낭비하는 조잡한 수법이고, 정말 잠이 든 것이라면 신경이 우둔한 게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그런데 왜일까? 자꾸 종리추에게 신경 쓰이는 것은… 한 시진이라는 시간이 무심히 흘렀다. 드디어 소고가 입을 열었다.

‘야이간, 찻물을 데워.’

‘찻물? 하하! 이 야이간이 몸종 노릇이나 할 줄이야. 들어주지. 그런 걸 바란다면.’

“하하, 그러죠. 다구가…. 아! 저기 있군. 미리 신경을 썼어야 하는데 미안합니다. 적각녀에게 정신이 팔려서… 적각녀, 정말 아름다운 미녀가 됐소. 눈이 부셔요.”

“…”

소여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야이간이 불을 피워 찻물을 데우며 계속 주절댔다.

“적각녀, 아! 이제는 맨발이 아니니 적각녀라 부를 수도 없고.. 뭐 호칭이야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고… 그때 한 말이 아직도 유효한지 모르겠소?”

“…”

“난 기억력이 유난히 좋아서… 그때 뇌옥에서 몸뚱이가 탐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한 것 같은데.”

소여은의 눈동자에서 살광이 터져 나왔다.

“아, 아, 지금은 아니고. 옛정이 생각나서 농담 한마디 한 걸 가지고 그렇게 눈을 치켜뜨면 민망하잖소. 하하! 농담이 아니군. 그 말은 오히려 적각녀를 무시하는 말이 되지.”

야이간은 데워진 찻물을 찻잔에 따라 소고에게 공손히 두 손으로 바쳤다.

“고마워.”

“뭘요. 찻물이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찻물을 데워보질 않아서.”

“따른 김에 모두 따라줘.”

“…?”

‘이 여자는 정말…!’

야이간 역시 적사나 소여은이 했던 생각과 같은 생각을 하고야 말았다. 소고는 다짜고짜 반말을 해댄다. 아무리 수하라고 하지만 처음 본 사이고, 나이도 비슷하니 있을 수 없다. 소고는 더군다나 여자이지 않은가. 하지만 사근사근 속삭이는 듯한 음성을 듣고 있으면 기분 나쁘다는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녀가 죽으라고 하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여은은 탁탁 튀는 물고기처럼 싱싱하다. 반면에 소고는 아침 이슬을 함빡 머금은 청초롱처럼 청초하다.

“종리추도 깨우고.”

“…”

야이간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어이! 그만 일어나지.”

야이간은 잠자는 종리추의 허리께를 발로 토닥거렸다. 소고의 눈빛에 싸늘한 한광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소여은의 눈에서 비웃음이 번져 나왔다. 적사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야이간의 아무렇지도 않은 발길질 속에는 만 근의 거력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곧게 곧추세워진 발끝이 향하는 곳은 정확히 복애혈이다. 극심한 충격을 받으면 뱃속이 뒤틀리고 심할 경우에는 사망까지도 이른다. 모두 야이간의 발길질을 알아보았다. 야이간은 종리추를 시험하고 있다.

“아함!”

종리추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일어났다. 복애혈은 모기에게 물린 것처럼 간지럽다는 듯 쓱 문지르는 것으로 그쳤다.

‘역시 지렁이는 아니었어. 오숙이 거짓말을 했군. 왜 그랬을까?’

소고의 눈이 더욱 맑게 빛났다. 소여은은 야이간이 발길질을 함과 동시에 종리추의 양 발끝, 엄지발가락 옆에 있는 대도혈을 발가락으로 자극한 것이다. 대도혈은 복애혈의 운기회생혈이다.

‘오숙의 무공은 뇌인일지공. 정확히 전수받았어. 저런 자가 왜 싸워보지도 않고 수하가 되었지?’

소여은의 눈빛도 빛났다. 적사의 눈빛에는 놀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야이간의 발길에는 내공이 실렸고, 탄경을 사용했기 때문에 신음이라도 토해내야 옳다. 정면으로 가격당했으니. 적사 자신이라도 복애혈을 순순히 내주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사의 소감은 간단했다.

‘잠룡이군.’

‘이자, 무공이 상당해.’

누구누구 해도 제일 크게 놀란 사람은 야이간이었다. 발끝에 전해지는 탄력이라니… 철갑을 두드린 듯 단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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