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사신 – 50화


“모두들 십망은 들어봤을 거야. 사숙님들의 십년지약도.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만났지만…”

소고가 입을 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차만 홀짝거렸다.

“사부님은 내게 사무령을 원하셔. 살수들의 꿈이지.”

소고는 아직도 복면을 벗지 않았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은 우윳빛을 띤 아름다운 손과 부드러운 목덜미뿐이었다.

“난 사무령이 될 거야. 사부님의 바람이라기보다는 내 바람이니까. 알아들었니? 나 역시 살혼부에 어떤 힘이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살혼부의 힘을 얻지 못해도 사무령이 되기 위해 노력할 거야.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이 된 자는 많지만 사무령이 된 자는 아무도 없어. 단 한 명도. 난 그 한 명이 내가 되고 싶어.”

격렬한 말이지만 전혀 격렬하게 들리지 않았다. 소고의 말투는 조용조용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사무령은 살수에서 시작해야 돼. 살수의 전설이 사무령이니까. 난 살수야.”

“…”

“사부님이나 사숙님들께서는 너희들을 준비해 주셨지만 사실 난 필요 없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고, 그래야 돼. 사무령은 누가 주는 게 아니잖니. 혼자서 일궈 나가야 되는 거지.”

“…”

“여기 들어왔다고 수하가 될 필요는 없어.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 비무에서 이겼다고 부주가 되고, 졌다고 해서 수하가 되는 게 우습잖니?”

소고는 자신만만했다. 그녀는 사내도 지니지 못할 배포를 지녔다. 무공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이 없으면 나타낼 수 없는 행동이다.

“적사, 의사를 분명히 말해 줘.”

“…”

“가고 싶으면 가도 돼.”

“아까 비무 때… 사용한 무공이 무엇이오?”

적사의 음성에는 송곳이 들어 있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롭게 살 속을 파고들었다.

“혈뢰삼벽.”

“사공 같은데?”

소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무극이오?”

적사도 소여은과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소고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공도 아니고 무극에 이르지도 않았고… 기가 막히는군. 몰골에서는 무패로 소문난 내가 어린애 취급을 받다니.”

적사는 비원살수의 기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시도 때도 없이 살광을 토해내는 눈빛도 그렇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음성도 빼닮았다.

“좋아. 도와주겠소, 한 가지 약조만 한다면.”

“…?”

“내년 정월 초하루… 다시 한번 겨뤄봅시다.”

“좋아.”

소고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럼 적사는 남아서…”

“삼초유혼.”

적사가 소고의 말허리를 잘랐다.

“…?”

“몽골에서 얻은 무명이오.”

“… 무슨 말인 줄 알겠어. 삼초유혼이라 불러달라는 말. 하지만 우리는 다시 시작해야 해. 처음부터. 여기는 몽골이 아니니까. 삼초유혼이라는 무명을 듣고 싶으면 여기서도 그렇게 해야지.”

적사가 볼을 씰룩거렸다.

“동생, 동생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소고의 눈빛이 소여은에게 향했다.

‘어산적에게 돌아갈 수 있어. 동해를 휘저을 수 있어. 동해의 너른 바다가 모두 내 거야.’

“난 동생이 마음에 들어. 동생은… 너무 예뻐. 동생은 어때?”

“넌 너무 예뻐.”

“수, 수령님, 수령님은 사내만…”

“흐흐! 나라고 눈이 없는 줄 아니? 계집이 모두 너 같다면 공동파에서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거야. 하긴 거기 있어봤자 고리타분하지만. 자, 옷을 벗어봐.”

“사부님, 저는 제자예요.”

“그러니까 말을 잘 들어야지. 빨리 벗어.”

냄새나는 혓바닥이 입속을 파고들고, 두꺼비 등처럼 투박한 손이 육봉을 거머쥐고 농락해도 항거할 힘이 없었다. 온몸이 소름에 돋았다.

‘널 반드시 죽일 거야.’

속으로는 수천 번도 더 다짐했지만 다짐만으로는 이성을 잃어버린 거친 사내를 막아낼 수 없었다. 고의가 벗겨져 나가고 푸른 하늘 아래 알몸이 되었을 때는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 옛날, 노인의 깡마른 손이 전신을 더듬어올 때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노인은 힘이 없었다. 발악이라도 할 수 있었다. 녹림마왕은 무공으로 다져진 몸이다. 무공으로는 도저히 녹림마왕을 상대할 수 없다. 상대하여 거부한다 해도 무공을 계속 익힐 수가 없다. 사내의 양물이 느껴졌다.

‘안 돼! 이렇게 몸을 버릴 수는…! 풋! 이까짓 몸뚱이가 뭐라고… 그래, 마음대로 해라. 넌 내 손에 죽을 거야. 마음대로 해. 가져. 가져, 돼지 새끼야!’

녹림마왕은 그녀를 갖지 못했다. 남색에 길들여진 그의 양물이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진 채 일어서지 않았다.

‘넌 너무 예뻐.’

무수하게 들은 말이다. 그리고 그 말속에 들어 있는 끈끈한 음욕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내치고 눈빛에 혈기가 스며 있지 않은 자가 없었다. 녹림마왕, 부수령들, 이제 막 어산적에 발을 들여놓은 햇병아리까지도. 어산적 사내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충성하는 것도 ‘넌 너무 예뻐’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으리라.

“남을게, 언니. 좋아, 언니라고 부를게. 만약 사무령이 되지 못한다면 죽을 줄 알아.”

“그래.”

“어차피 죽겠지. 사무령이 되려면 반드시 구파일방과 부딪쳐야 될 테니까. 넓고 깊은 강이야. 그 강을 건너지 못하고 빠져 죽는다면… 내 손으로 언니의 목숨을 거둘 거야.”

“그래.”

소여은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매달렸다. 갑자기 천막 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하다. 옅은 불빛을 내비치고 있는 모닥불 정도로는 그녀의 웃음을 따라갈 수 없다. 단지 엷게 웃음을 지었을 뿐인데도.

“정말 아름답군.”

야이간이 넋 빠진 듯 중얼거렸다. 그는 소고의 부름에 따를 때 외에는 소여은의 얼굴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야이간은 소여은의 웃는 모습을 처음 봤고, 정말로 욕심이 치밀었다. 큰 야망을 품고 있지만 오늘 이 순간만은 소여은과 육체의 향연을 불사르고 싶었다. 그의 끈끈한 눈길을 의식했는지 소여은이 대뜸 말을 건네왔다.

“너! 나 갖고 싶어?”

옛날 말투였다.

“하하! 당연하지.”

야이간도 옛날 말투로 돌아갔다.

“갖고 싶으면 가져, 언제든지.”

“내가 아는 적각녀는 그 말 뒤에 무슨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아마 죽고 싶으면… 이라고 했지?”

“한 가지만 가져오면 돼.”

“…?”

“예쁜 보자기.”

“보자기? 보자기는 왜?”

“네 목을 담아야 할 것 아냐.”

“하하! 그 성미는 변하지 않았군. 살아서 팔팔 뛰니 보기 좋아. 좋아! 내 반드시 보자기를 준비하지. 이래 봬도 난 욕심나는 것을 놓쳐 본 적이 없거든.”

“미친놈.”

“기왕이면 듣는 사람 기분 좋게 서방님이라고 부르지 그래.”

“야이간.”

적사가 야이간과 소여은의 말다툼에 끼어들었다.

“…?”

“죽고 싶냐?”

적사도 옛날 말투였다.

“…!”

“죽고 싶냐?”

‘적사, 옛날의 내가 아니다. 네놈의 살기가 거세기는 하다만, 오 년을 넘기지 못할 테니 오늘은 내가 양보하지. 가만, 뭐야? 그럼 적사도 적각녀에게 반했다는 거야? 하기는 사내자식이라면 반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기분 좋군. 내 여자를 탐내는 자가 많으니. 암, 많을수록 좋지.’

“아니.”

야이간은 옛날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어쩔 거야?”

소고의 눈빛이 야이간에게 향했다. 야이간의 눈빛은 소여은에게 향했다.

‘계집 하나와 곤륜파라… 좋아, 오 년을 투자하지. 오 년 동안 적각녀 널 잡는다. 오 년이면 충분하지. 그리고 곤륜으로 돌아간다. 난 허황된 꿈에 같이 놀기 싫거든. 사무령? 하하! 아예 죽여달라고 떼를 쓰는 게 낫지.’

“욕심나는 미인이 있으니 차지해야겠어요. 누님! 전 걱정 마십쇼. 어느 놈이든 이름만 대면 당장 목을 쳐오겠습니다.”

야이간의 뱀같이 끈끈한 눈길은 다시 소여은에게 향했다.

“종리추, 넌 유일하게 수하가 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사람이야. 왜 그랬어?”

종리추는 당황했다. 이런 말투로 이렇게 질문하는 여인은 처음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누나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같고, 소고가 한눈에 반해 추파를 던져 온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었군, 적사와 소여은이 당한 게.’

종리추는 오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을 휘돌렸다. 오진기의 수련 방법을 터득한 다음부터 내공이 전보다 두세 배는 강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기가 끊이지 않고 휘돌았다. 사흘 밤낮을 수련해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런 진기가 의념이 이끄는 대로 전신을 가로로, 세로로 종횡무진했다. 정신이 맑아지며 세상의 모든 이치가 뚜렷이 보였다. 극히 잠깐이지만 소고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의 파장이 보이는 듯했다. 넓게 확산되어 흰 천막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기의 모습이.

“놔준다면… 나는 가겠소.”

소고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소여은, 적사, 야이간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이유를 물어도 돼?”

“난 살인이 싫으니까. 우린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그럼 무공을 배우지 말았어야지.”

야이간이 중간에 끼어들며 빈정거렸다.

“그럴 생각이오. 앞으로 농사나 지으며 살 생각이오. 모두 뜻한 바대로 잘되길 바라겠소.”

종리추는 홀가분했다. 평생 짊어지고 사야 할 업보를 단숨에 털어버린 기분이었다.

“아직 대답 안 했는데?”

“…?”

“왜 순순히 수하가 된다고 했지?”

“사부님이 시키셨으니까.”

“그것뿐이야?”

“…”

“무림에서 명성을 날린다거나 일파를 세우겠다거나… 그런 욕심은 없어?”

종리추는 일어섰다.

“이야기가 끝난 듯하니 난 그만…”

일어선다 해도 당장 갈 곳이 없다. 삼이도까지 데려다 준 노인은 모레나 되어야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사무령이 되기 위해 모인 사람들 틈에 끼어 있을 수는 없다. 배가 올 때까지 머물러도 뭐라고 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야 할 것 같다.

“아니,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

소고는 눈가에 떠오른 기광을 지우지 않았다.

“종리추, 수하가 된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냐. 누구의 입을 통했든 그 말은 내 귀에 들어왔고, 넌 내 수하야. 다른 사람들은 도전을 했지만 넌 포기했어. 앉아.”

종리추는 순순히 앉았다.

“순진한 거야, 바보야?”

야이간의 빈정거림이 눈을 감아버린 종리추의 귓가에 울렸다. 아침이 되어 제일 먼저 삼이도를 떠난 사람은 소고였다. 소고는 가장 늦게 도착해서 가장 일찍 떠났다. 그녀를 태우고 왔던 배는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삼이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늦지 마, 늦는 건 짜증나니까.”

“누님, 걱정 마십시오. 절대 늦지 않을 테니. 그런데 복면은 벗지 않을 겁니까? 누님도 적각녀에 못지않은 미녀라 들었습니다만.”

“야이간.”

“말씀하십시오.”

“올 때 선물을 가져와.”

“하하! 말씀만 하십시오. 어떤 선물을 원하십니까?”

“소림 장문인의 목.”

“…”

야이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선물을 가져오지 못하겠거든 말을 줄여.”

“하하! 한 방 얻어맞았습니다.”

야이간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소고가 떠난 후 가장 늦게까지 남아 소여은에게 치근거릴 것 같던 야이간이 예상외로 빨리 떠났다.

“난 배를 가져와서… 같이 갈 사람은 가지. 아무도 없나? 하하! 역시 난 찬밥이군. 그럼 나중에들 보자고.”

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야이간이 무섭게 컸군. 눈치만 보던 그 야이간이 아냐.”

소여은이 중얼거렸다. 적사는 점심이 넘어서야 떠났다. 그때까지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종리추도 소여은도… 서로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만 쳐다보았다.

“강안까지 태워줘.”

소여은의 말에 적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추, 넌 안 가?”

종리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일 노인이 배를 저어 올 것이다. 배를 가져온다고 약속했으니까.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