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53화
종리추는 주루에서 밤을 꼬박 밝혔다. 사람들은 돌아갔고, 주루 주인은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아댔다. 무릎을 꿇고 앉은 사내들은 오만 가지 인상을 써댔다. 다리가 저리다 못해 마비되는 듯했다. 몸을 움직여 보지만 더 고통스러울 뿐이다. 다리를 펴면 괜찮겠는데 몽둥이를 든 사내의 눈빛이 무서워 그럴 수도 없다. 거기에 추위와 배고픔과 졸음까지 쏟아진다.
“음! 으음…!”
“끄응…”
사내들은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이 앓는 소리만 냈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새벽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와 함께 찾아왔다. 안개가 자주 끼는 지역이 아닌데 무슨 놈의 바람이 불었는지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세상을 짙은 운무로 가려 버렸다. 유구, 유회, 역석 또한 고역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유구는 문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고, 역석은 창문틀에 몸을 기댄 채 안개에 싸인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유구는 오른손에 몽둥이를 든 채 팔짱을 끼고 사내들을 노려본다. 그들은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긴긴 밤을 그렇게 지새웠다. 종리추는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천천히 마신다고는 하지만 쉬지 않고 마셔댔으니 주량이 센 사람이라도 나가떨어질 만한데 그는 취한 모습조차 비치지 않았다.
사악… 삭…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솟구칠 무렵 옷이 땅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으면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을 소리였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한 세상에서는 신경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삭, 사악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소리의 주인공은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사십 대 중년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여인이 주루 앞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들어가도 되나요?”
꾀꼬리가 우짖는 듯 영롱한 음성이다. 유회는 맞은편 문기둥에 걸친 한쪽 발을 치우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으면 다쳐요.”
여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유회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성질이 폭발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켜라.”
종리추가 노인이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짧게 말했다.
“인사하죠. 하오문 개봉 가문을 맡고 있는 벽리군이에요.”
종리추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원하시는 것이 뭔지 알고 싶군요.”
벽리군은 묘한 매력을 풍겼다. 보들보들한 피부와 농염한 자태는 강하게 사내를 빨아당겼다. 또한 단아한 얼굴, 조리 있는 말솜씨는 사내로 하여금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요부와 현부의 양면성을 가진 벽리군이다.
“…”
종리추는 노인 때와 마찬가지로 술만 마셨다. 벽리군의 얼굴에 시선을 못 박아둔 채.
“…”
벽리군은 노인처럼 말이 많지 않았다. 간단한 질문을 던지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종리추는 술잔에 담긴 술을 한입에 털어 넣고 벽리군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벽리군이 받아 들자 맑은 주향이 풍기는 백주를 하나 가득 따라주었다. 벽리군도 독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다음 옷소매로 입술이 닿은 부분을 깨끗이 닦은 후 술잔을 내밀었다. 종리추가 받아 들자 얌전히 두 손으로 술을 따랐다. 술잔이 오고 갔다. 밤새도록 술을 마신 종리추와 젊은 날을 주향에 파묻혀 지낸 벽리군, 그러나 취기는 벽리군이 먼저 느낀 듯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다. 종리추가 다시 술잔을 건넸다. 그는 단 한 번도 벽리군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도, 술잔을 건넬 때도, 술을 따라줄 때도, 벽리군이 술을 마실 때도. 벽리군은 간혹 시선을 돌렸다. 종리추의 무표정하고 따가운 시선을 맞받지 못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벽리군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태연함을 잃어갔다. 종리추가 다시 술잔을 건넸다.
“이젠… 못 받겠어요. 대단하군요.”
“…”
종리추는 팔을 거두지 않았다. 술잔을 내밀고 벽리군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다. 그냥 쳐다보기만 했다. 무표정하게. 벽리군은 종리추가 하류 잡배가 아니란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무인들은 하오문을 멸시한다. 생업이란 것이 천박한 것이며, 하오문도 중 거의 절반은 남의 등이나 쳐먹는 사람들인 까닭이다. 무공도 변변치 못하다. 문파를 사랑하는 마음도 빈약하고 능력만 있으면 하극상도 서슴지 않는 풍조도 문제다. 정도 문파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오죽하면 하오문도는 무인으로도 간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하류 잡배들에게는 하오문의 존재가 거대한 산이 된다. 결속이 강하고, 세력이 넓으며, 사람을 죽이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철벽이 된다. 무림 문파가 경멸하는 하오문이 하류 잡배들에게는 반대로 인식되고 있으니… 당연히 하류 잡배들은 하오문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얌전한 고양이가 된다. 힘이 있어도 힘없는 자에게 두들겨 맞는다. 억울해도 억울하다는 소리를 못 한다. 상대가 하오문도라면. 종리추는 저잣거리의 조그만 이권이나 차지하겠다고 폭력을 휘두르는 무뢰배가 아니다. 벽리군은 무인과 마주 앉았다는 것을 실감했다.
“…”
말을 해야 하는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벽리군은 술잔을 받아 들었다.
“백주는 잘 마시지 않을 텐데?”
종리추의 음성은 예상외로 상냥했다. 하지만 그런 음성이 벽리군을 더욱 힘들게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였기에 자신 없는 자의 음성이 부드러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가끔은… 마시죠.”
“어떨 때?”
“속상할 때요.”
종리추는 이제 스물을 넘긴 지 몇 해 되지 않았다. 얼굴에서도 깊지 않은 연륜이 확연히 드러났다. 여인은 마흔을 넘겼다. 세상에 존재하는 궂은일이라면 한번씩은 겪어봤다. 그런데도 여인은 종리추의 하대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종리추의 기도가 여인으로 하여금 운신의 폭을 줄여 버렸다. 한편 종리추로서는 하대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모진아가 노예를 자처하고 하대를 강요하면서부터 길들여진 습관이 있어서이다. 유구, 유회, 역석도 하대를 할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 하대를 하게끔 만들었다. 그들 스스로.
‘배금향을 아는가?’
종리추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하오문 기문이라면 어머니가 몸담았던 곳이다. 십 년 세월이 지나 많은 사람이 바뀌었겠지만, 같은 향주이니 이름만 들어도 알지 모른다. 종리추는 무표정한 얼굴과는 다르게 여인에게서 친근감을 느꼈다.
“저자의 신분은?”
손가락으로 한쪽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가리켰다.
“배문 향주예요.”
“배수?”
“예.”
“배문 향주가 죽었으면 그대 역시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배문과 기문은 달라요. 배문은 배수로 향주를 선출하지만 기문은 무공으로 선출해요.”
“그럼 저자는 배수 짓을 잘했겠군.”
“신의 솜씨였죠.”
벽리군은 이야기를 나누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공포감도 사라졌다.
“내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물었나?”
“…”
벽리군의 편안함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긴장했다.
“기문에서 무전취식하고 싶은데 좋은 방을 내줘.”
“…”
“대답을 해야지.”
“좋아요.”
벽리군은 위압감을 느꼈다. 싫다고 해도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기문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억지로 막으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내들과 같이 모두 굴복시키면서. 더러는 죽이기도 할 것이고…
“오늘 밤까지…”
“…?”
“망주에게 연락해. 하오문 다섯 향주와 함께 들르라고.”
“그런…”
“오늘 밤까지야.”
“…”
“장소는 향주가 소개하는 기루로 하지. 준비 좀 해주고.”
종리추는 자신이 마치 기루를 운영하는 것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안 하면 어떻게 할 거죠?”
“하는 게 좋아.”
“…”
“백주도 좋지만 난… 혈주를 마시고 싶으니까.”
“혀, 혈주!”
벽리군은 술이 확 깼다. 살수에게도 미신은 있다. 돈을 받고 살행을 나선 자는 처음으로 죽인 자의 피를 마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황량한 들판에서 까마귀 밥이 되고 만다. 피를 마신 살수들 중 상당수가 제 수명을 다하진 못했지만 혈주에 대한 미신은 꾸준하게 이어져 오고 있다. 혈주… 그것은 살수가 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는 살수가 되려고 한다. 살천문이 버티고 있는데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그것도 하오문을 끌어들이면서.
‘이건 내 선을 벗어났어.’
벽리군은 기루를 제공하겠다고 말한 것조차도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망주가 원망스러웠다. 아니, 이미 죽어버린 배문 향주가 더 원망스러웠다. 그가 일만 잘했어도 기루를 내어주는 일따윈 없었을 텐데. 천화기루의 별채는 아무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룻밤을 즐기기 위해서는 은자 쉰 냥을 지불해야 하는 호화스러운 곳이다. 그것도 공식적으로 지불하는 것만. 기녀들의 손에 쥐어주는 은자까지 계산한다면 아무리 못해도 예순 냥은 있어야 한다.
“세상에!”
유회는 별채에 들어서자 감탄부터 터뜨렸다. 그가 보아왔던 방이라는 것은 객잔이 고작이다. 별채는 객잔에 비해 다섯 배는 더 넓은 것 같았다. 안에서 병장기를 들고 무공 수련을 해도 될 만큼 넓다. 그렇게 넓은 방이 진귀한 집기들로 가득하다. 하나같이 고급스럽고 화려스러운 가구들이다.
“아무 곳에나 배 깔고 누워도 잠이 솔솔 오겠는데?”
“며칠 동안 일어나지도 못할 거야.”
종리추는 밝게 웃었다. 종리추도 이렇게 호화스러운 곳은 처음이었다. 아니, 기루라는 곳을 들어와 보기도 처음이었다. 별채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났다. 향기로우면서도 고소한… 그렇게 진하지도 않고 은은한… 여인들이 얼굴에 바르는 지분 냄새였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사향 냄새였다.
“자, 그만 떠들고 잠이나 자둬. 이따 저녁에는 바쁠 테니까.”
“주공께서는…”
“오전 동안 자. 오후에는 내가 잘 테니까.”
유구, 유회, 역석은 사양하지 않았다. 유회가 제일 먼저 침상으로 달려들었지만 침상을 차지한 사람은 역석이었다.
“하하! 실례.”
“끄응!”
암연족과 홍리족은 서로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유구, 유회와 역석은 잘 어울렸다. 종리추를 따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유회는 커다란 덩치를 바닥에 뉘였다. 그리고 곧바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