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60화
소고는 편히 앉아 하남성 전도를 쳐다보았다.
“야이간은 여우 같은 자예요. 예봉을 피해 멀찌감치 안양에 터를 잡았어요.”
소고에게 보고를 하는 사람은… 아! 소여은이었다. 그녀가 정말 얄밉다는 듯 눈을 흘기며 안양성을 짚었다.
“방법도 치졸해요. 여자를 납치하다니. 하기야 옛날에도 여자를 간음하고 쫓겼으니까.”
“훗! 동생도 조심해야 할걸? 야이간이 점 찍은 것 같던데?”
“흥! 감히!”
소여은은 불쾌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 소여은이 소고를 다시 만난 것은 삼이도를 빠져나온 지 보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그녀는 홀홀 단신이었다. 중원은 넓고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녀가 갈 만한 곳,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난 다시 동해로 돌아간다. 그게 추태를 보이지 않는 유일한 길이겠지.”
미안공자는 동해로 돌아갔다. 삼이도를 향해 출발하기 직전에. 추태… 그녀는 사부의 마음을 안다. 잠이 깊이 들었을 무렵이면 남몰래 머리맡으로 다가와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길, 그것은 사부의 다정한 마음이 아니라 문 사내들과 똑같은 연심이었다.
‘제발… 제발 그래 주세요. 그냥 가세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영원히 사부님으로 기억할게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세요.’
미안공자는 소여은의 바램을 저버렸다. 그는 몇 걸음 옮긴 후 뒤를 돌아보았고, 약간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말릴 줄 알았는데 말리지 않는다는 눈빛… 삼이도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중원에 나오니 막막했다. 문파를 창건하라니, 그것은 살수문을… 솔직히 소여은은 자신 없었다. 다 같이 모여서 발버둥 쳐도 모자랄 판에 뿔뿔이 흩어져서 무얼 어쩌겠다는 것인가.
‘풋! 아직도 목숨에 미련이 남았군. 언제 죽을지 모를 처지에. 좋아, 하는 데까지 해보는 거야. 그런데 누굴 죽이지? 길 가는 사람에게 누구 죽이고 싶은 사람 있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녀는 곰곰이 생각하다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래, 날 청부하는 거야. 그렇게 쉬운 일을.’
때는 마침 흉년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다. 얌전히 농사만 짓던 사람도 낫이며 도끼를 들고 산속에 들어가 도적 떼가 되는 세상이다. 도적이라면 그녀보다 잘 아는 사람도 드물다. 녹림도와 해적은 다르지만 근본은 같다. 소여은은 장검을 숨겨놓고 맨몸으로 산을 타기 시작했다. 그녀가 원하던 사람들은 산을 얼마 오르지 않아서 만났다.
“호오! 아리따운 낭자가 이런 산중에는 웬일이신고?”
“와! 선녀다!”
“가만있어, 임마!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는 것 몰라?”
“와! 위든 아래든 빨리 잡아먹읍시다.”
소여은은 그들이 하는 짓을 생글생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쑥 물었다.
“돈 있어?”
순간 도적들의 낯빛이 굳어지는 듯하더니 이내 밝아졌다.
“창기냐?”
“꿀꺽! 괜찮아. 창기면 어때. 창기가 모두 너만 같으면 세상 사내들 결혼할 사내 하나도 없을 거다. 너 같은 여자는 창기가 아니라 창기 할미라도 괜찮아.”
“돈 얼마나 있는데?”
“흐흐흐! 그런 건 일이 끝난 다음에 셈하는 거고, 우리 운우지락부터 즐기자구.”
도적들은 마음놓고 다가왔다. 순간.
쉬익…!
소여은의 신형이 너무 쉽게 제압되었다. 도적은 목젖에 찰싹 달라붙은 예쁜 은장도를 내려다보며 실실 웃었다.
“이럴 필요 없잖아. 돈은 준다니까…”
“얼마나 있냐고 물었지?”
“여, 열 냥쯤 있어. 화대로는 충분하잖아.”
“너, 지금 나 죽이고 싶지?”
“무슨 말을… 괜찮아. 흐흐! 원래 표독스런 암코양이가 맛있는 법이거든. 흐흐흐… 자자, 이거 치우고… 응? 이거 치우고 우리 좋게 놀아보자. 이래 봬도 이 오라보니가 그거 하나는 끝내주거든.”
다른 도적들도 멀리 감치 물러서서 실실 웃으며 돌아가는 사정을 구경했다. 그들 네 명은 소여은이 어떤 수법으로 도적을 제압했는지 알지 못했다. 도적과 소여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던 탓이다. 그들은 그저 창기가 돈을 먼저 받기 위해서 칼을 꺼내 든 것으로 생각했다. 흉기치고는 너무 앙증맞은 칼이지 않은가. 이 세상에 저런 칼로 사람을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죽이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러니까 이거 치우… 억!”
도적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칼날이 볼에 기다란 상처를 만들어 놓았다. 상처가 보기보다 깊은지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엇! 저, 저!”
그때서야 일이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도적들이 우르르 달려들려 했지만 은장도는 그 도적의 목젖에 바짝 붙이고 있어 다가설 수 없었다.
“지금은 어때? 나 죽이고 싶어?”
“이, 이… 미, 미친년…”
“호호! 그래, 미친년이지?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냐.”
사악!
살을 저미는 섬뜩한 소리가 또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반대쪽 볼이었다. 먼저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천천히 그어 내렸기 때문에 고통이 한결 극심했다.
“크으으윽!”
“자, 말해 봐. 이래도 죽이고 싶지 않아?”
아무리 천하에 제일 가는 미인이라도 자신의 목숨보다 귀할까. 도적의 눈에서 분노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주, 죽고 싶지 않으면 이 칼 치우지 못해! 이거 치워! 치우기만 하면 살려줄 테니까 이거 치우고…”
“정말 사람 힘들게 하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뭔지 알잖아.”
소여은은 밝게 웃었다. 어산적에서 자란 그녀가 아닌가. 도적들의 성난 표정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주, 죽이고 싶어.”
소여은은 또 칼을 휘두를 기세였다. 도적은 황망히 말을 쏟아냈다.
“누가 날 죽일 수 있다면 죽여달라고 할 거야?”
“아, 아니, 죽이지 않을 테니 이 칼부터…”
쓰으윽…!
“아아아악…!”
도적은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목젖에 바짝 붙어 있던 은장도가 스르르 움직인다 싶더니 가슴살을 천천히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 고통은 볼에 빨갛게 달군 인두로 지지는 것에 못지않았다.
“주, 죽여, 죽여달라고 할 거야! 이제 그만…!”
“그래? 부탁은 그냥 하면 안 되지. 얼마 내놓을 건데?”
“여, 열 냥.”
도적은 두말하지 않고 품에서 전낭을 꺼내 통째로 건네주었다.
“제법 묵직한데? 얼마나 들었어?”
“서, 서른 냥.”
“근데 왜 열 냥이라고 그랬어? 우리 값을 올리자. 서른 냥 어때?”
도적은 뭐가 뭔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소여은이 시키는 대로 따라 했다.
“조, 좋아. 서른 냥.”
“좋아! 청부 접수. 근데 어떡하지? 청부받은 사람도 나고 죽일 사람도 나니.”
“…?”
도적은 ‘이 미친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미친년에게 걸려도 되게 걸렸다는 생각만 할 뿐.
“나중에 내 스스로 죽을게. 늙어 죽는 것도 괜찮겠지?”
도적은 그저 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부 완료! 돈은 벌었는데 어째 좀 싱겁다.”
말을 마친 소여은은 서슴없이 은장도를 치웠다. 그러자마자.
“이런 죽일 년이!”
도적의 분노가 폭발했다. 은장도에 베인 상처가 아파서 죽을 지경이지만 생글생글 웃으면서 은장도를 휘둘러 대는 계집을 가만 내버려 둘 순 없었다. 그러나.
“큭!”
도적의 눈꼬리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은장도는 명치 한가운데 틀어박혔다. 깊숙이… 그의 멀어져 가는 영혼 속으로 맑기 이를 데 없는 영롱한 옥음이 들렸다.
“왜 덤벼?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쯧!”
도적 중 한 명이 죽자 남은 도적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소여은이 공동파의 비전 신법을 펼치며 그들 중 한 명을 죽여 버리자 도적들의 거센 공격이 일시에 그쳐 버렸다. 나머지는 쉬웠다.
“나 죽이고 싶어?”
“예, 예.”
“누가 날 죽일 수 있다면 죽이라고 시킬 거야?”
“그, 그럼요.”
여기서는 액수가 각기 달랐다.
“꺼내줘.”
도적들은 병기를 제대로 다룰 줄도 몰랐다. 원래부터 도적질을 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도적질로 나선 사람들이다.
“어쩌지? 내가 나를…”
“괘, 괜찮습니다. 나중에 늙어서 죽어주십쇼.”
소여은의 이런 기행은 산에서 도적질을 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게 되었다. 세상에 참으로 이상한 게 말이라는 요물이다. 도적들은 서로 왕래가 없다. 산속에 숨어 살고, 길 가는 행인에게 푼돈을 뜯는 일이 고작이다. 행인에게 하는 말도 ‘가진 것 다 내놔’가 아니면 ‘등에 진 것 풀어놓고 썩 꺼져’가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입소문은 빨라서 하남성 전체로 퍼져 갔다.
“요즘 산에 이상한 여자가 있는 모양이야.”
“나도 들었어. 자신이 자신을 청부한다나? 그리고는 뭐, 늙어 죽을 때까지 기다리래요. 정말 돈을 뜯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그래도 여자가 대단하지 뭐. 도적들이 꼼짝 못하는 것 봐.”
“하늘을 붕붕 난다는데 그까짓 도적들이 무슨 수로 당해.”
소문은 한 입을 건널 때마다 살이 붙어 무인들도 상대하지 못할 엄청난 무공을 지녔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진짜 청부는 그때 나왔다. 도적들 틈에서.
“이게 도적질을 해서 모은 총재산입니다.”
도적이 내민 돈은 은자 열한 냥이었다.
“이걸 왜 내게 주는데?”
“소문을 들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녀님이시라고. 소문이 과장되었다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뵈니 조금도 과장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선녀님이십니다.”
“…”
“제가 왜 도적이 된 줄 아십니까? 저는 소작농입니다. 논을 소작했는데… 평년에는 쌀 스무 가마가 나왔죠. 그중에 지주 놈에게 절반을 떼어주고 절반 가지고 일 년을 살았습니다. 다른 지주들은 소작료로 삼 할 정도만 받는다는데 이놈은 어떻게 된 게… 휴우, 올해는 가뭄에다 장마에다 정신이 없었죠. 스무 가마는 고사하고 열 가마도 나오지 않았어요. 쌀 알맹이가 붙어 있어야 말이죠. 그런데 그놈이 그걸 몽땅 빼앗아가는 거예요. 소작료는 정해진 거라면서.”
“…”
“그놈을 죽여주십쇼.”
“열한 냥으로? 이걸로 사람을 죽여달라고?”
“더 벌어서…”
소여은은 열한 냥 중 한 냥만 받았다. 이들에게 은자 열 냥은 목숨보다 귀한 돈이다. 동전이라면 몰라도 은자인데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그 돈을 모두 내놓을까.
“나흘 안에 죽여줄게.”
그자는 정확히 나흘 만에 죽었다.
백화현녀
소여은이 얻은 별호다. 백 가지 꽃이 모양을 다퉈도 그녀보다 아름답지 않다는 극찬의 별호다. 백화현녀 소여은은 모두가 만나고 싶은 도적이 되었다.
“너, 나 죽이고 싶지?”
“그럼요.”
“청부할 거야?”
“당연히 해야죠.”
“얼마 줄 건데?”
“한 냥이요.”
“은자?”
“동전으로 봐줘요. 대신 닭을 훔쳐 왔는데 맛있는 진흙 닭을 만들어 드릴게요.”
“너, 지금 이게 청부야?”
“그럼요. 청부말고요.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여주시는 분인데 그깟 닭 한 마리 못 해 드려요?”
“야! 죽이고 싶은 사람도 나야. 나란 말야, 나.”
“히히히! 제 눈에는 죽여주시는 분으로만 보이는데요.”
“알았어. 닭 잡아봐.”
‘조금 친해진다 싶으면 수작을 부리겠지, 사내자식들이란…’
도적은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닭을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 봐도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같이 말을 나눈 것만으로도 뿌듯해했다. 처음에는 도적들 사이에서만 전해지던 소문이 어느새 민가에까지 퍼졌다. 기행을 벌이기는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 살수 행각을 한단 하여 의적녀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흉신악살처럼 사나운 도적도 그녀를 만나면 활짝 웃었다.
‘음심을 품지 않는 사람도 많아…’
소여은의 사내에 대한 편견은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아직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지만 순수한 마음이다 싶을 때는 마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때 소고에게서 전갈이 왔다.
“등봉 천의원으로 오시랍니다.”
소고는 복면을 벗은 상태였다. 이지적인 얼굴이다. 선이 뚜렷하고 맑았다. 피부는 매끄럽고 고왔다. 웃지 않고 눈빛에서 한광이 흘러 쉽게 근접할 수 없는 사람이란 인상을 주었지만, 그런 점이 그녀를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꿔주었다.
“언니는… 참 예쁘군요.”
“동생이 더 예뻐. 얼마나 예쁘면 백화현녀라고 불릴까?”
“놀리지 마세요.”
소소의 눈빛에 의아한 빛이 흘렀다. 소여은은 변했다. 도발적인 매력은 여전하지만 성품이 많이 부드러워졌다. 말투도 탁탁 끊어치는 말투에서 포근한 말투로 바뀌었다. 소고는 알지 못했다. 소여은이 도적들과 어울려 지낸 지난 몇 달이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오늘부터 동생은 나랑 같이 있어.”
“예?”
“여기서 야이간, 적사, 종리추가 무슨 짓을 하는지 보는 거야.”
그때부터 소고와 소여은은 같이 생활했다. 천약원이라는 의원에서.
“야이간은 언니가 준 만 냥으로 장원에 기관 장치를 했어요. 정말 영악한 자죠. 그런 장원에 숨어 있으니 살천문 일급 살수라도 함부로 뚫지 못하는 게 당연해요.”
“야이간은 살수에 뜻이 없어.”
“…?”
“살천문 창덕 지부를 쑥밭으로 만들어놨지만 청부를 받은 것은 없잖아? 동생보다도 못해. 동생은 그래도 한 백 냥은 벌었지?”
“정말 놀릴 거예요?”
“호호호! 안 그럴게. 살천문에 기관 장치 도면을 보내줘,”
“야이간이 움직일 수밖에 없겠군요.”
“움직이게 만들어야지.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으면 안 돼. 야이간은 그렇게 하고, 적사는?”
“적사는 상당히 곤란해요. 워낙 돌머리라…”
“…”
“몽고에서 데려온 수하가 딱 스무 명이에요. 그중에 열다섯 명이 죽었죠. 살천문 본문에서 일단혈 세 명만 파견해도 적사는 죽어요. 피할 사람도 아니고.”
“다들 내 뜻을 잘못 받아들였어. 그만큼 설명했으면 충분하다 싶었는데…”
“…”
“난 살겁을 저지르란 이야기가 아니었어. 문파를 세우라고 했지. 그건 세를 양성하란 소리지 싸우라는 이야기가 아니었어. 지금 살천문과 싸우면 죽을 수밖에 없어. 지금은 공존을 모색해야 돼. 휴우!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군. 동생, 적사를 불러들여. 그만하면 쓴맛을 톡톡히 봤을 테니… 한동안 숨겨놔야겠어. 살천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야이간은 고생 좀 시키고, 잔꾀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지.”
소고는 냉정했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거침없는 행동이다. 소고는 생각하는 법이 없다. 일이 터지면 무조건 부딪친다. 하지만 결과는 심사숙고한 것보다 훨씬 낫다. 상황 판단이 뛰어나다는 증거다.
‘공존…’
소여은은 종리추를 떠올렸다. 종리추는 단 한 번 살천문을 경악시킨 후 싸움을 중지해 버렸다. 싸움이 아니라 혈주 의식이란 걸 분명히 한 거다. 혈주 의식을 웃으며 받아들이든 영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서 치고 나오든 그건 살천문 몫이다. 종리추밖에 없다. 혈주 의식을 행한 사람은. 어쨌든 그날 이후 종리추는 살천문 사람은 단 한 명도 손대지 않았다.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 표시였다. 그는 후일 타협을 할 퇴로를 열어두고 있었다. 적사나 야이간처럼 살천문에 청부를 넣은 것도 아니다. 살수에게 청부는 자존심이다. 청부자가 누가 되었든 청부가 들어온 이상 결과를 맺어야 한다. 적사와 야이간은 살천문을 상대로 죽기 아니면 죽이기의 싸움을 벌인 것이다. 살천문은 적사와 야이간을 반드시 죽이려고 덤벼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종리추의 경우는 얼마나 클지 모르지만 어디 한번 해봐라 하고 대범하게 아량을 베풀 수도 있다.
‘모두 일개 살수밖에 안 돼, 나도, 적사도, 야이간도… 언니 뜻대로 움직여 주는 사람은 종리추밖에 없어. 그 겁쟁이가… 종리추가 마음을 바꾸면 언니는 절대 사무령이 못 돼. 그가 도와주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직 단정 내리기는 이르지만…’
소여은은 허여멀쑥한 종리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분명 미공자다.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이지만 얼굴 윤곽이며 칠흑처럼 검은 눈동자는 방심을 마구 빨아들인다. 그런데도 허여멀쑥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 것은 왜일까?
‘그를 잘못 봤기 때문이야. 무공도 변변치 않고 하는 행동도 미덥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숨기고 있었어, 진면목을, 종리추를 잡아야 돼.’
그때 소고가 말했다.
“종리추에게 다녀와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