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61화
천은탁은 쏟아져 들어오는 청부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일할 사람은 네 명뿐이다. 그런데 무슨 놈의 죽일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천은탁의 탁자에는 청부를 원하는 서신이 수북이 쌓였다. 족히 열댓 건은 되는 것 같았다.
“은자 이백 냥 이하는 받지 마.”
그런 명령을 하달한 지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물론 이 중에는 참고 넘어갈 일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꾹 눌러 참고 있는 것을 하오문도가 들쑤셔 놓으니 이판사판으로 청부를 한 것도 꽤 된다. 천은탁은 다시 향주들을 불러 모았다. 전서로 알릴 수도 있는 일이지만 종리추에 대한 일만은 보안을 위해 직접 하달하는 방식을 취했다.
“자, 다들 모였으니 시작하지. 이게 뭔지 아나?”
천은탁은 탁자에 수북이 쌓인 서신을 들어 올렸다.
“하하! 청부 건 아닙니까. 저도 이번에야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돈이 되는 장사는 역시….”
“닥쳐!”
천은탁이 여간해서는 내지 않는 성질을 냈다. 그는 솟구치는 노기를 추스르려는 듯 잠시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살수와 인연을 맺기는 했지만 우리 본연의 일은 아냐. 살수와 인연을 맺어서 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어.”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앞으로 청부는 받지 마. 들쑤시는 일도 그만두고, 어떻게 일을 이 지경으로 하는 거야! 이게 뭐야, 이게! 큰돈을 써가며 죽일 사람이 이렇게 많아? 사람 죽이는 일이 돈벌이야?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러다 개방이나 마교에서 눈치라도 채는 날에는….”
천은탁의 꾸지람은 호됐다.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안다. 마교나 개방에서 아는 날에는 죽음밖에 돌아올 게 없다는 것을. 사실 요즈음 청부를 구하느라 너무 바쁘게 뛰었다. 하오문에서 청부를 받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니.
“앞으로 살문에 관한 모든 활동을 중단해. 너무 노출됐어. 청부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살천문의 동정을 살피는 일도 그만둬.”
천은탁은 위기를 느낀 것이다.
“벽 향주.”
“예.”
“천화기루에서 살문을 빼.”
“예?”
“당분간은 살문과 완전히 두절해야 돼. 그게 우릴 위하는 길이고 살문을 위하는 길이야.”
“그렇다고 해도 살문을 뺄 것까지는….”
“부영이는 화화공자의 소실로 정가에는 연통을 넣어놨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형식으로 받아들일 거야. 그쪽 선은 더 이상 쓰지 못하겠어.”
“그럼 황고도?”
“황고는 안심해도 될 거야. 귀머거리에 장님이니 의심할 사람이 없지. 천화기루에서 보낸 세월도 적지 않고.”
“살문은 어디로…?”
“알아서 하라고 해. 우리는 모르는 게 좋아. 살문주는 쉽게 당할 삶이 아냐. 우리가 취하는 조치를 보면 말하지 않아도 움직일 사람이지. 때가 되면 살문에서 먼저 소식을 전해올 거야.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천은탁은 한심하다는 듯 향주들을 쳐다보았다.
“잘 명심해 둬. 지금부터 하는 말, 똑바로 새겨둬. 지금까지 청부를 가져온 자들… 물론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수하들이겠지. 미안하지만 인정을 두지 마. 잘 지켜봤다가 그림자가 따른다 싶으면 가차없이 죽여. 명심해 둬. 인정을 두면 죽어. 그림자가 붙은 자는 어차피 죽게 되어 있어. 돕는 셈치고 빨리 죽여. 만일….”
천은탁은 말을 끊고 향주들을 일일이 쳐다보았다.
“자네들에게 그림자가 붙으면… 난 자네들을 죽일 거야. 어차피 죽게 되어 있으니까. 그게 내가 사는 길이고.”
천은탁의 어조는 분명했다.
“너무 노출됐다 싶은 자는 지금 죽여도 좋아.”
죽여도 좋다는 말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미 그림자가 붙기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누군가? 개방인가, 마교인가 살천문인가?
“빨리들 돌아가서 행동해. 너무 노출된 자들은 죽이는 게 좋아. 되도록 빨리.”
세상이란 이런 것이다. 노출이 가장 심한 자는 살문을 위해서 부지런히 뛴 자다. 그것을 요구한 때도 있다. 그 결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다. 해줄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심하지 않은 죽음을 내리는 것과 남은 가족을 보살피는 정도. 향주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빨리 돌아가. 벽 향주는 나 좀 보고.”
향주들이 돌아가고 벽리군과 천은탁만 남았을 때. 천은탁은 서랍에서 조그만 목갑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이건….?”
“….”
천은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목갑은 뚜껑이 단단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그리고 옆면에 손가락 하나가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벽 향주,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벽리군은 사정을 알아차렸다.
“제가 가장 위험하군요.”
“….”
“이 안에 뭐가 들어 있죠?”
“칠보사.”
“칠보사… 일곱 걸음을 걷기 전에 죽는다는 바로 그 독사군요.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먹이를 안 줘도 십 일은 견딜 거네.”
‘십 일….’
벽리군은 십 일이란 말을 되뇌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십 일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것도 최장으로 그림자가 이미 붙었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말도 된다. 잔뜩 굶어 독이 오른 독사는 손가락을 집어넣자마자 덥석 깨물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일곱 걸음이면… 넉넉잡아 마음속으로 열만 세면 끝난다.
“그럼 이게 망주님과는 마지막이 되겠네요.”
“….”
“차기 향주는 내정하셨나요?”
“소월이 어떨까 싶은데.”
“잘 보셨어요. 소월이는 침착해서 잘 이끌 거예요.”
“내세에서… 벌주 석 잔을 마시리라.”
“괜찮아요. 이번 일은… 제가 살아오는 동안 가장 즐거웠던 일이었어요. 보람도 있었고.”
“….” “문주님을 꼭 복위시켜 드리세요.”
“그러겠소.”
벽리군은 ‘복위’라고 했다. 그럼 전대 하오문주는 죽지 않았다는 말인가. 천은탁은 벽리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봤다. 가녀린 그녀의 어깨가 더욱 쓸쓸해 보였다.
‘가장 즐거웠던 일이라… 미련한 사람… 어쩌자고 나이 어린 사람을 사랑했던가. 그것도 살수를….”
천은탁은 세상을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게 느껴졌다. 천화기루에 돌아온 벽리군은 제일 먼저 부영을 불렀다.
“넌 지금 바로 정가로 가거라.”
“정가요?”
“화화공자가 밉지는 않지?”
“….”
부영은 얌전히 볼을 붉혔다.
“비록 소실이지만, 그 집 사람이 되어서 한평생 편안히 살아라. 앞으로 하오문과 정기는 완전히 인연을 끊을 거야. 너도 정가로 들어가면 하오문을 잊어버려라.”
“언니! 무슨 일이 있는 거죠?”
“네 일이 너무 위험해서 그래. 정가와 인연을 끊으려는 것도 그렇고, 그 일은 이제 다른 사람이 맡을 거야. 아무런 일도 없으니까 마음 편히 먹고 들어가.”
벽리군은 꺼내놓았던 패물함을 건네줬다.
“예쁜 것들만 추려놨다. 요긴하게 쓰일 데가 있을 거야. 줄 것이라고는 이것밖에 없구나.”
“언니!”
“가거라.”
“오늘은….”
“아냐. 떠날 사람은 바로 떠나는 것이 좋아. 지금쯤 화화공자가 달려오고 있을 게다. 어머니 승낙이 떨어졌다면서. 오거든 바로 쫒아가도록 해.”
‘이별은 빠를수록 좋지.’
벽리군은 떠나 보낼 사람들을 모두 떠나 보낼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오늘 안에… 모두. 별채로 향하는 발걸음은 천 근처럼 무거웠다. 종리추 곁에서 시중을 들며 보냈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종리추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았다. 하다못해 수고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했고,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호호! 그래도 좋았어. 음… 뭐라고 말할까? 동생, 이제 그만 가야겠어. 아냐, 일문의 문주에게 동생이라니. 이제 그만 가 주셔야 겠어요. 아냐, 너무 정이 없어. 정? 호호호! 무슨 정이 있었다고.’
벽리군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별채로 들어서자 항상 돌계단에 반쯤 누워 양광을 쪼이던 유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 떠나야 하는데… 살행을 계속하고 있으니. 휴우!’
유희는 오늘 아침에 돌아왔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죽었거나 일이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벽리군은 돌계단을 올라 문으로 다가섰다. 문고리를 잡았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불길한 예감.
‘혹시!’
벽리군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없었다. 단정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어야 할 종리추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별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듯 차디찬 냉기가 뿜어져 나와 피부를 적셨다.
‘갔어. 벌써 떠났어.’
벽리군은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고 종리추가 앉았던 탁자로 걸어갔다. 방 안은 깨끗했다. 벼루며, 먹이며, 붓이며… 제자리에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금도 한 뼘 벽에 단정히 세워져 있고, 침상도 구김 하나 없이 곧게 펼쳐져 있다.
‘떠났어. 떠났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탁자에는 한지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힘있고 반듯한 종리추의 글씨.
필 보은
벽리군은 갑자기 설움이 울컥 솟구쳤다. 생각지도 않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종리추가 늘 앉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체취가 묻어 있는 한지를 들어 먹 냄새를 맡았다.
‘눈가 보은하래? 누가….?’
벽리군의 어깨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고, 곧 흐느낌이 되어 조용한 방안을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