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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62화


부영과 화화공자는 신혼을 맞았다. 소실로 들어오는 몸인지라 혼례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기녀로 일생을 마감할 줄 알았는데, 한 지아비를 섬기고 평생을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영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잘 왔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지?”

여장부라는 시어머니는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이제는 평생 같이 사는 거야.”

“네.”

“부영인 이제 내 여자야.”

“네.”

화화공자도 했던 소리를 하고 또 했다. 그들은 일 때문에 만났으나 진실로 사랑했다.

“안아보고 싶어. 오래전부터 안아보고 싶었어.”

“…”

부영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상했다. 사내라면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속속들이 알고 있건만, 합궁을 치른 사내만도 백 명이 넘어서건만… 처음처럼 부끄러웠다. 화화공자는 부영을 살며시 끌어당겨 껴안았다.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조심스런 행동이었다. 부영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앞으로 내가 보살펴 줄게. 이제 기루에는 가지도 않을 거야. 화화공자라는 말 정말 듣기 싫었어. 부영, 떨지 마. 언제든 옆에 있어줄게.”

“저, 저…”

“이제 보니 부영도 상당히 겁쟁이네. 혼인하는 게 그렇게 두려워?”

“그게 아니라… 저, 저…”

화화공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부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부영은 새파랗게 질려 덜덜 떨어댔다.

“어디 아픈 거야?”

“저, 저기…”

화화공자는 부영이 쳐다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의 입에서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천화기루에 있는 놈들은 모두 몇 놈이냐?”

너무 깡말라 입고 있는 옷이 헐렁해 보이는 사내가 나직하게 물었다. 그의 음성은 유부에서 들어오는 듯 살기로 가득해 듣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했다.

“모, 몰라요. 저희들은 그런 건…”

“네놈이지. 그 정도는 알고 있어.”

“그, 그런데 왜 저희들에게…”

“한 번만 더 시치미를 떼면 죽인다.”

깡마른 사내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죽이고도 남을 자였다.

‘부영은 죽기로 작정했구나. 부영이 그런데 내가… 사내대장부가.’

화화공자는 손을 내밀어 부영의 손을 움켜쥐었다. 부영이 마주 잡아왔다. 힘주어.

“그놈들의 이름, 나이, 성격, 무공… 아는 것이 있으면 모두 말해.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한 치라도 다르면 더 듣지 않겠다. 바로 죽을 거야.”

화화공자는 다시 한 번 부영을 쳐다봤다. 부영이 싱긋 웃었다. 화화공자도 웃었다.

“제일 무공이 강한 자는 염라대왕이라고 하는데, 나이는 천 살도 더 된 것 같소. 너무 나이가 많아서 알 수 없으… 악!”

말을 잇던 화화공자는 짧은 단발마를 내질렀다. 그의 목이 허공에 붕 떠서 방 한 귀퉁이에 나뒹굴었다. 목을 잃은 동체에서는 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쳐 부영의 얼굴과 옷을 흠뻑 적셨다.

“죽기 싫으면 바른말을 하라고 했는데. 쯧! 그대 이름이 부영이지? 부영, 어디 한번 말해 봐.”

부영은 목 잃은 화화공자의 육신을 껴안았다. 그리고 실성한 듯 중얼거렸다.

“그자의 이름은 염라대왕이 아니에요.”

“뭐냐?”

“옥황상제예요. 죽음의 마왕이 아니에… 아악!”

부영의 목도 허공에 띄어졌다. 이번에는 부영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화화공자의 육신을 적셨다. 그들은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죽어서야 한몸이 되었다.

벽리군은 목함을 앞에 놓고 멍하니 앉아 하늘하늘 흔들리는 촛불만 바라보았다. 촛불의 모습에서 종리추의 얼굴이 살아났다.

‘됐어. 이제… 무엇을 더 바라겠다고. 호호! 계집애가 욕심도 많아 가지고는. 벽리군, 벽리군! 네 나이가 도대체 몇인 줄이나 알아? 욕심 부릴 걸 부려라. 이 정도면 주책도 상주책이지.’

비로소 마음이 조금 홀가분해졌다. 벽리군은 종리추가 마지막으로 남겨놓고 간 서신을 고이 접어 품속에 찔러 넣었다. 죽어도 그의 마지막 숨결만은 간직한 채 떠나고 싶었다. 스스로 주책이라고 했지만 그가 그리워지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애잔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벽리군은 마지막으로 찻잔에 차를 따랐다. 바로 종리추가 즐겨 사용하던 그 찻잔이다. 단지 둥그런 찻잔일 뿐이고 문양도 없지만, 그녀는 종리추가 어느 쪽에 입을 대고 차를 마시는지도 알고 있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떡차가 있었어!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지?’

하얀 백자로 차를 마시다 보니 이제야 생각이 났다. 종리추에게 떡차를 달여주지 못했다. 잎차만 다려줬다. 왜 그런 실수를 했을까.

“잎차를 달이면 녹색이 되죠. 그래서 백자를 사용해요. 잔이 눈처럼 희면 찻빛이 백록색을 띠거든요. 떡차는 찻물이 담황색이에요. 그럼 무슨 잔이 어울리겠어요? 참고로 형주산 다기는 백색이고, 월주와 악주산은 청색이에요. 수주산은 황색이고, 홍주산은 갈색이죠. 몰라요? 호호! 말해 줬잖아요. 떡차는 찻물이 담황색이라고. 담황색과 청색이 어울리면 백록색이 돼요. 그래서 떡차의 다기는 월주와 악주 것을 최고로 쳐요.”

적어도 반나절 동안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있었다. 벽리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반쯤 남은 찻물이 백록색을 띤 채 찰랑거렸다.

‘이제는…’

목함을 끌어와 구멍을 찾았다. 시커먼 구멍 안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칠보사란 놈이 꽈리를 틀고 앉아 있을 것이다. 새끼손가락을 슬며시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쉬익!

부드러운 바람이 분다 싶었는데. 어느새 그녀의 손에서 목함이 빠져나갔다. 벽리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누, 누구세요!”

너무 깡말라 뼈마디가 드러나 보이는 사내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매달았다.

“죽을려고 작정했나? 후후! 그만큼 알고 있는 게 많다는 이야기지. 어디로 갔나?”

“뭐가요?”

“별채에 있던 작자들.”

“거기 있지 않아요?”

“후후!”

사내는 품에서 유지로 둘둘 만 것을 꺼내 벽리군 앞에 내던졌다.

“이게 뭐죠?”

“풀어보면 알겠지.”

벽리군은 유지를 풀었다. 그리고.

“악!”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유지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지에는 각기 다른 크기의 손가락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임자가 누군지는 짐작하겠지?”

‘망주 말이 맞았어. 너무 늦었어. 이들이 바짝 따라붙고 있었어. 살천문 살수들이. 화화공자와 부영이는 아는 것이 없고… 나만 죽으면 끝이군.’

벽리군은 놀랄 때와는 달리 담담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난 알 것은 알고 모를 것은 모르지. 내가 아는 것 중에 하나가 넌 별채에 있던 작자들이 누군지 잘 안다는 거야. 아!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좋아. 옛말에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했지? 그럴 기회를 주지. 말하지 않아도 좋고 해도 좋아. 말하면 천화기루 기녀들이 살고, 하지 않으면 죽어.”

벽리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록 신분은 기녀일망정 벽리군에게는 친자매나 다름없는 여인들이다. 하나같이 기구한 사연을 가지지 않은 여인이 없고, 앞으로도 편히 살 가망이 없는 아이들이다.

“무식하군요.”

“…?”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에요.”

깡마른 사내는 벽리군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겠군.”

“그래요.”

“그래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어쩔 텐가?”

“없어요.”

“난 있어!”

쉬익!

사내의 신법은 그야말로 유령 같았다. 눈앞에서 흐물거린다 싶었는데 벽리군의 등 뒤로 돌아와 목을 움켜잡았다.

‘부돌혈! 실신시키려고 해. 고문을 하려고.’

목을 잡은 사내의 손가락은 정확히 부돌혈을 짚었다. 벽리군은 등 뒤에 있는 사내가 보지 못하도록 혀를 약간 내밀었다. 그녀도 무공을 익히고 있지만 사내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수족을 움직여 공격하려 들었다가는 자살할 기회마저도 놓쳐 버린다.

‘혀를 깨물고 죽으면 되지.’

그녀는 혀를 깨물지 못했다. 부돌혈이 쇠꼬챙이에 찔린 듯 아파왔고, 정신을 잃어버렸다. 사내도 벽리군을 데려가지 못했다.

“연약한 여자에게 무슨 짓인가. 사내가 그렇게 할 짓이 없던가?”

사내는 느닷없이 들린 소리에 흠칫했다. 그렇게도 신경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는데 적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니.

“웬 놈이냐?”

사내는 애송이에 불과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자 긴장을 풀었다.

“나를 찾지 않았나?”

‘그럼, 이놈이? 개방 지부장이, 일급 살수들이 겨우 이런 애송이에게 당했단 말이야?’

사내는 다시 긴장했다. 눈앞에 나타난 청년이 상대가 안 될 것은 분명하지만 그대로 개방 지부장과 일급 살수들이 당했다면 한 가지 재주쯤은 가지고 있는 놈이리라. 그는 종리추에게서 단지 미약한 진기만을 읽어냈다. 내공을 익힌 자는 알게 모르게 진기를 뿜어낸다. 그건 숨길 수도 없다. 자연히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숨기겠는가. 하물며 전문적으로 암습만을 노려온 살수들은 상대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는 감각이 탁월하다. 사내의 감각은 청년의 내공이 미약하다고 말한다.

“네놈이 별채에 있던 놈이냐?”

“그것도 모르고 죽이려 왔나?”

“으음…!”

사내는 신음했다. 정말이었다. 이런 애송이에게 개방 지부가 풍비박산났다.

‘죽여야 할 놈이면 죽여야지.’

사내는 청년의 허점을 노렸다. 청년은 허점이 너무 많았다.

‘이거 기본 공이나 제대로 익힌 놈인가? 이렇게 허점이 많아서야… 방자가 있군. 이놈 혼자서는 개방 지부를 건드릴 수 없어. 누군가 도와주는 놈이 있는데…’

사내는 내공을 모아 청력에 집중했다.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왔다. 술 마시는 소리, 지분거리는 소리, 발자국 소리, 술잔을 내려놓는 소리… 그중에 주목할 만한 소리는 없었다.

‘방자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없군. 네놈 불행이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개방 지부를 박살 내니까 무서운 게 없어진 모양이군.’

쉬익!

사내는 즉시 움직였다. 벽리군을 잡았을 때와 같은 신법으로 청년의 우측을 파고들었다. 그때, 사내의 흉백을 떨리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종보에 환술을 가미했군. 좋은 신법이야. 덕분에 하나 또 배웠어.”

‘아차! 이자는 고수야!’

사내의 느낌은 빨랐지만 상대는 이미 공격을 해오던 차였다.

쉬익!

청년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빠름도 느껴지지 않았고 강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척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실상은 너무 빨라 손이 다가온다 싶은 순간 그의 이마에는 장인이 찍히고 있었다.

빠악!

각목으로 바위를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뒤로 두어 걸음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정신없이 휘청거리면서, 그는 기둥에 등을 기댄 다음에야 중심을 잡고 섰다.

“마, 말도 안 돼. 진기가… 미약… 욱!”

사내는 현기증이 치밀었다. 세상이 노랗게 변하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너무 빨리 돌아 초점을 맞출 수가 없었다. 뱃멀미를 하는 듯 속이 울렁거리더니 뜨거운 것이 울컥 하고 솟구쳤다. 사내는 기둥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주저앉았다. 이미 절명한 것이다.

종리추도 사내가 마지막으로 말한 뜻을 알고 있다. 오신기가 하단전으로 집중되면서 증세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겉에서 보기에는 진기가 미약하게 보인다는 것. 살수로서는 적을 방심시킬 수 있으니 더욱 좋은 현상이지 않은가. 방금 전에 사내가 당했듯이. 하단전이 너무 넓고 커서 밖으로 빠져나갈 진기가 없다. 세상 모든 이치가 차면 넘치게 되어 있다. 하단전을 채우지 못하니 넘치지 않는 것뿐이다. 그만큼 나아가야 할 길이 멀고도 멀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다. 녹요평에서 모진아와 겨룰 때만 해도 지금보다는 진기가 거세 보였다. 하단전에 단구를 만들지 않고 집중만 시켰기 때문이다. 강물도 넓은 들판에서는 막힘없이 흐른다. 같은 양의 강물이라도 구덩이가 나타나면 일단 구덩이부터 채우고 흐른다. 한정된 양이라면 전과 후가 분명히 달라야 한다. 그와 같은 이치다. 하단전이란 그릇은 넓힐수록 커져서 밑 빠진 독처럼 진기를 빨아들였다. 그릇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는 억지로 쌓아두었지만 그릇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진기가 알아서 그릇 속으로 들어갔다. 단전의 다섯 자리로. 사내는 그릇을 몰랐던 게 분명하다. 무인들 중 의외로 많은 사람이 그릇을 깨닫지 못한다. 거의 대부분이 억지로 단전을 연마하려고 할 뿐 자연스럽게 쌓는 방법을 모른다. 살수 행각을 하면서 느낀 것이다.

종리추는 벽리군에게 다가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있는 합곡혈을 강하게 눌렀다. 부돌혈에 충격을 받았을 때 풀어주는 회생혈이다.

“음…!”

합곡혈을 다섯 번쯤 눌렀을 때 벽리군이 눈을 떴다.

“아!”

그녀는 탄성을 토해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향주는 미련한 사람이야, 살수가 따라붙는 것도 모르고 태연히 지냈으니. 부영은 왜 화화공자에게 보냈어? 그건 생각하지 못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둘 다 죽지 않을 수 있었는데.”

“제 잘못이에요, 제 잘못이에요.”

벽리군은 끊임없이 말하며 오열했다. 종리추가 자지 않았다. 옆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그것이 한없이… 한없이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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