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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63화


남자 네 명, 여자 두 명, 그들은 다시 떠돌이가 되었다. 그중 이름도 모르는 여자는 몸만 따라올 뿐 정신은 마음 깊은 곳에 숨어 나오지 않았다. 종리추는 일행을 이끌고 양성 제일의 자린고비라 불리는 천 노인에게 갔다.

“잘 오셨습니다.”

천 노인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일가붙이 하나 없는 천 노인이다. 워낙 인심을 잃어 돈을 빌리는 사람 외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다. 유일하게 곁에 붙어 있는 호법 무인이 있지만, 이제 필요 없다는 말 한마디에 군소리 없이 돌아갔다. 도망자가 숨기에는 최적의 장소다.

“살천문 살수들이 쫓고 있어.”

“짐작했습니다.”

“살 만큼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에 당할 목숨이었다면 십팔만 냥이나 되는 거금을 모으지도 못했습니다.”

“소고에게 돌려줄 돈은?”

“돌려줬습니다. 소고는 여인 중에는 중원 제일의 부자입니다. 저 외에도 돈을 굴리던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살혼부 고수들은 살수 행각만 걸어왔지 호의호식한 사람이 없다. 그들의 그런 고생이 모두 소고에게 집약되었다.

“거주할 곳을 알아보겠습니다. 이곳은 너무 협소해서…”

협소하기는 정말 협소했다. 천 노인 혼자만 살던 집에 장장 여섯 명이나 섞여들었으니. 잘 자리는 어떻게 마련되었지만 남녀가 섞여 있으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퇴로는 세 군데, 전망이 확 트인 곳으로.”

“물론입니다.”

천 노인은 시원시원했다. 사람들은 천 노인 돈을 제일 빌리기 쉬운 돈이라고들 한다. 돈을 빌려준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빌리기도 어렵지만 빌려주기도 얼마나 어려운지. 돈이란 빌려준 순간부터 내 돈이 아니라고 보면 된다. 천 노인이 돈을 순순히 빌려준 것은 돈을 받아낼 방도가 있기도 했지만, 시원시원한 성격 탓도 컸다.

“불편하더라도 오늘만 참으십시오. 내일은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거처를 알아보러 갔던 천 노인은 낯선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키가 크고, 날씬하며, 얼굴 선이 뚜렷하다. 살결은 보드라워 만지면 뽀얀 살결이 묻어날 것 같다. 세상에 미인은 많지만 그녀처럼 한눈에 시선을 잡아끄는 미녀는 보기 힘들었다.

‘적각녀와 쌍벽을 이루는군. 뛰어난 미인이야.’

“이 늙은이가 유일하게 정을 주는 아이입니다.”

천 노인이 여자를 보는 눈은 손녀를 보는 듯 따스했다. 종리추의 눈가에 기이한 빛이 스쳐 갔다.

“소녀 단우금이라고 해요. 청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어요. 곤란하시다면 물러가죠.”

여인은 당당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또박또박 맺고 끊는 말솜씨가 보통 자신감을 가진 게 아니다.

“곤란해.”

종리추는 단번에 거절했다. 천 노인의 안색에 그늘이 졌지만 못 본 척했다.

“살수라고 들었는데 겁쟁이군요.”

“뭣이!”

우회가 발끈 격노했지만 종리추가 손을 들어 올리자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을 건가요?”

“소저가 이야기했지. 곤란하면 물러가겠다고. 난 곤란해.”

“소저라는 말을 하지 말든지, 반말을 하지 말든지…”

“귀찮은 계집을 데려왔군.”

천 노인의 안색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여인의 안색에도 시퍼런 노기가 어렸다. 그녀의 노기는 묘한 아픔을 가져온다. 너무 예쁜 여인이라서일까? 여인의 청은 무리한 것이라고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여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유회, 유구, 역석은 그렇게 생각했다. 벽리군은 같은 여자이지만, 종리추 앞에 절색의 미녀가 얹어주는 나타났지만 그녀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천 노인, 이게 거처를 얻어주는 대가라면 사양하지. 계집을 끌고 나가든가, 아니면 우리가 나가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 같은데?”

“음… 선택을 하시라면… 나가주시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척 호의적이던 천 노인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종리추에게 은자 구만 냥이라는 거액을 내놓았다. 끝내 거절해 물러가기는 했지만 그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 가운데 여인과 종리추 중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는 여인을 선택했다.

“이야기나 들어보지. 무슨 내용인가?”

종리추가 뚫어지게 여인을 쏘아보며 말했다. 천 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단우금은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종리추의 태도는 비굴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비굴하다. 종리추는 당장 갈 곳이 없다. 세상이 넓으니 갈 곳이 왜 없겠느냐마는 살천문의 암습을 벗어날 곳은 세상에서 단 한 군데도 없다. 도움이 없이는.

“보호해 줘야 할 사람이 있어.”

이번에는 단우금이 반말을 했다.

“…”

“당장 도망 다니기도 급한 사람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

“청부금은?”

“거처를 마련해 주는 것으로 충분한 줄 아는데?”

“후후후!”

종리추는 잘게 웃었다.

“유구.”

“옛!”

“여자를 업어라.”

“…?”

“가자.”

종리추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조금의 미련도 없는 단호한 태도였다. 단우금은 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었다. 종리추가 성큼성큼 걸어 막 문을 벗어나려 할 때 단우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밖에 살천문 고수들이 잔뜩 깔렸더군. 본문에서 파견된 일급 살수 여덟 명이지. 나가면 죽을 텐데?”

“…”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걷는 속도도 줄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 집을 나가고 있었다.

“죽여달라고 것도 아니고 단지 보호해 달라는 것뿐인데, 그것도 겁이 나나?”

“네 말대로 도망 다니기도 급한 사람에겐 너무 무리한 부탁이야. 겁도 나고, 세상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나 역시 죽는 건 겁이 나지.”

“나가면 당장 죽어.”

“후후후! 한 가지 알아둬야 할 것이 있어. 살수에게는 목숨이 없어. 겁이 난다고 했지? 후후! 그건 당신 입장이야. 당신은 죽는 게 겁나. 안 그런가? 그래서는 살수가 못 돼. 사무령은 더더욱 못 되고.”

“뭐, 뭣!”

여인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이 싸움은 내가 이긴 것 같군. 안 그런가, 소고?”

“소, 소고!”

“음…!”

유구, 유희, 역석은 다시 한 번 단우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소고에 대한 말은 뒤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녀가 바로 앞에 있다. 자신들은 주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주공은 바로 이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어, 어떻게… 알았지?”

소고 단우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난 네 이름이 우완금으로 알고 있는데, 단우금인가? 어느 게 진짜 이름이야?”

종리추는 소고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알았으면서도 반말인가?”

“소고의 신분으로 나타났으면 상전으로 모셨을 것이되, 넌 천 노인의 지인으로 나타났어. 네가 먼저 걸어온 싸움이야.”

“호호호! 좋아. 단우금, 내 이름은 단우금이야. 우씨 성은 버렸어.”

“우완금이든 단우금이든 상관없지. 나에게는 소고면 족하니까. 그건 그렇고… 적사가 그렇게 위험한가?”

“모르는 게 없군.”

“일파의 문주니까.”

“좋아, 졌어. 적사를 구해와야겠어.”

“구해주지.”

종리추의 대답은 간단했다.

“모두 여기 남아 있어. 천 노인이 거처를 마련해 줄 테니 편안히 쉬도록 해. 그동안 바빠서 쉬지도 못했잖아. 앞으로도 쉴 틈이 별로 없을 거야.”

“저희도 같이 가겠습니다.”

유구가 나섰다.

“부인이나 잘 보살펴.”

종리추는 태연하게 걸어나갔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났는지 뒤돌아보며 말했다.

“소고, 가진 재산이 모두 얼마나 되지?”

“…”

“돈이 많은 것은 알지만 돈은 물 쓰듯 쓰는 게 아냐. 그 돈을 모으려고 몇 사람이나 죽였는지 생각해. 문파를 만들어라? 하하하하!”

종리추는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나갔다.

‘알고 있었어. 모두 몰랐는데, 종리추만은 알고 있었어…’

소고는 전신에 맥이 쑥 빠지는 느낌이었다.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으리라 자신했는데 무림에 출도하자마자 강력한 적수를 만났으니. 그렇다. 종리추는 우호적인 적수였다.

소고는 사무령이 되는 길로 용인술을 생각했다. 살수들이 모두 사무령이 되고자 했으나 되지 못한 이유는 모두 초점을 무공에 잡았기 때문이다. 한 손으로는 열 손을 당하지 못한다. 무공이 아무리 뛰어나도 구파일방의 합공을 막을 수는 없다. 무공은 아니다. 아무리 강한 문파라도 구파일방이 십망을 펼치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린다.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라 해도 다른 문파의 연합 공격에는 무너질 수밖에 없으리라. 문파도 아니다.

소고는 혈암검귀의 혈뢰삼벽을 익혔지만 익히면 익힐수록 사무령이 될 자신이 없어졌다. 그때 결심했다. 문도의 수보다 절대 강자를 거느리는 쪽이 낫다고, 그쪽이 그나마 사무령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고. 다행히 삼이도에서 만난 적사, 야이간, 소여은은 그녀에게 희망을 주었다. 지금 당장은 그녀의 적수가 못 되지만 향후 십 년만 지나면 절대 강자의 반열에 당당히 오를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곁에 있으면 사무령을 꿈꿀 만하다.

‘용인술이야.’

사람은 그릇이다. 둥근 그릇도 있고 네모난 그릇도 있다. 둥근 그릇을 네모난 곳에 끼워 맞추려 했다가는 낭패만 본다. 딱 알맞은 곳에 알맞은 사람을 쓸 줄 알아야 한다. 삼이도를 다녀온 후 그녀는 확고하게 결심을 굳혔다. 소고는 한 명에 일만 냥씩 사만 냥을 투자할 계획이었다. 네 명이 그 돈으로 문파를 어떻게 창건하는가. 그 모습을 보면 성격을 물론이고 무공, 지략, 야망 등등 한 인물에 대한 모든 것이 밝혀진다. 수라를 부리려면 수하에 대해서 본인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속속들이 파악해 놔야 한다. 모두 파악되었다. 야이간의 성격, 능력, 적사의 모든 것, 소여은의 모든 것.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종리추만은 파악하기 힘들다. 오히려 종리추에게 자신이 읽힌 기분이다. 삼이도에서만 해도 별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역시 용이었어. 무공, 지략, 위엄,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어. 휴우!’

소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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