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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64화


종리추에게 여주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곳이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제일 먼저 기억된 것이 여주의 거리였다. 형과 동냥 그릇을 놓고 낄낄거리던 모습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머릿속에 틀어박힌 기억이다. 양부를 만난 곳도 여주다. 양부는 마음속에 있는 정을 겉으로 표시하는 분이 아니었다. 변검 수련을 게을리하면 종아리에서 피가 나오도록 때려댔지만 따뜻한 말은 별로 들은 기억이 없다. 지금은 사람들의 성격이 자지각색이란 것을 알게 되었으니 양부를 이해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주워온 자식이라 사소한 잘못도 크게 꾸지람받는 줄 알았다. 첫 살인을 한 곳도 여주다. 살인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단지 형을 죽인 자는 죽여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 여주로 다시 돌아왔다. 십 년 전에 살인을 하고 떠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십 년 만에 다시 여주 땅을 밟았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여주는 그대로였다. 기억난다. 형이 점소이로 일하던 주루… 그대로 있다. 살천문의 황정을 찔러 죽인 담벼락…

‘담은 없어졌군.’

담만 없어진 것이 아니라 허름한 저택 자체가 없어졌다. 그리고 큼지막한 장원이 들어섰다.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종리추에게는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종리추는 야산에 올랐다. 어렸을 적에 올랐던 야산이다. 이곳이 좋았던 것은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어서였다. 사람들이 차려놓은 제사 음식은 어린 두 형제에게 좋은 식량이었다. 여주가 환히 내려다보였다. 그때는 왜 이런 광경을 보지 못했을까. 그저 먹는 데 바빠서…

‘여기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여기서. 내 인생에 획을 그어놓은 이곳에서 새롭게 출발하는 거야.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지만.’

종리추는 어두워질 때까지 여주를 바라봤다.

“뭣! 적사가!”

종리추가 떨궈놓은 사람들을 데리고 천의원으로 돌아온 소고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랄 소식을 들었다. 적사에게 살천문 본문에서 파견된 일급 살수 여덟 명이 붙었다. 야이간 쪽은 사정이 조금 낫다. 그는 장원에 틀어박혀 있는 관계로 지부장을 비롯해 많은 살수들이 죽었지만 아직 살천문에서는 그의 얼굴을 모른다. 그는 여차하면 은자 일만 냥을 포기하고 몸을 빼내면 무사하다. 하나 적사의 사정이 급박했다. 이제 적사에게 남은 사람은 적사 본인과 몽고에서 데려온 수하 다섯 명이 고작이다. 적사가 일당백의 기개로 살수 세 명을 상대해도 몽고인 수하들은 일대일의 싸움을 벌여야 한다. 지부 일급 살수들은 몽고인 세 명과 목숨을 맞바꿨다. 본문 일급 살수들은 지부 살수들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다. 적어도 네 명 내지 다섯 명은 있어야 살수 한 명을 상대할 수 있다.

“종리추는?”

“행방이 묘연해.”

“뭐엇!”

살혼부가 소고에게 준 두 번째 힘, 그것은 정보였다.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정보는 세상 곳곳을 고루 밝혀준다. 살혼부의 자금을 돌리고 있는 전포들의 수는 상상 이상으로 많다. 그들은 하는 일이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 때때로 개방이나 하오문에서 잡아내지 못한 정보까지도 주워듣는다. 본인들조차 모르고 있겠지만 하남성에 거주하는 상인들 대부분이 살혼부의 정보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모두 귀에 들어오니까.

‘그들의 정보는 신빙성 있어. 적사는 위험에 처했고 종리추는 행방불명이야. 종리추의 지략이라면 빠져나오는 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소고는 난감했다. 일급 살수 여덟 명이 붙었다면 소고 자신이 가더라도 빠져나온다는 자신이 없다.

‘무모한 사람… 무모한 일은 저질렀어. 살천문에 살인 청부를 하다니. 아직 우리 존재가 발각되서는 안 되는데… 숙적이던 살혼부가 재건을 꿈꾼다고 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지금보다 더 지독하게 달려들겠지.’

소고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적사를 포기하든지, 살혼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조짐을 보이게 하든지.

‘적사의 무공은 패도적이야. 종리추도 뛰어나지만 무공에서는… 적사… 적사…’

“종리추의 수하들을 모이라고 해.”

소고는 결단을 내렸다.

“당신들이 나서줘야겠어요.”

유구, 유희, 역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알아요, 종리추의 명만 받는다는 것을. 하지만 우린 이제 모두 한 식구예요. 다른 때 같으면 부탁도 하지 않겠지만 미안하게도 그대들의 주공인 종리추가 행방불명이네요.”

“…”

세 사람은 역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철저한 믿음… 종리추는 어떻게 이런 마음을 심어줬지? 사람을 이렇게 만들기는 쉽지 않은데… 이들은 진심으로 따르고 있어.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기꺼이 내놓을 사람들이야.’

소고는 종리추가 부러웠지만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동생이 같이 갈 거예요.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부탁하지 않죠.”

“주공께서 말씀하셨소, 한 번이 두 번 된다고.”

“휴우! 알았어요. 가서 쉬세요.”

소고는 종리추의 수하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어. 내가 직접 움직여야지. 동생하고 둘이 가면… 그래, 시험해 보는 거야. 적사, 나, 동생… 진짜 싸움이군.’

소고는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놨던 결정을 선택했다.

“우우우! 우우우우! 우우…!”

종리추는 쥐를 불렀다. 세상에 쥐가 없는 곳은 없다. 인간보다도 훨씬 많고,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번식하고 있다. 먹이만 충분하다면 일 년이 못 돼 세상은 쥐로 뒤덮이리라.

찌찍! 찌지직…!

쥐들이 한 마리 두 마리 모습을 드러냈다. 천음산에서처럼 우르르 몰려나와 도망치지는 않았다. 녹요평에서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열심히 연구한 덕분에 쥐들의 습성, 신호도 한결 더 깊이 깨우치게 된 덕분이다.

“우우우! 우우! 우우우…!”

종리추는 한편으로는 괴성을 질러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딱! 따닥! 딱딱딱…!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고양이 울음소리와 흡사하게 울어대는 손가락 장단에 구멍에서 모습을 드러낸 쥐들은 우왕좌왕했다.

‘아직도 멀었군.’

종리추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쥐들을 움직여 나갔다. 한쪽에서는 불러내고, 다른 한쪽으로는 밀어내면서…

“저, 저게 뭐야?”

“쥐 같은데? 억! 정말 쥐네. 무슨 놈의 쥐가 이렇게 많아?”

수문 무인들은 발 밑을 기어 다니는 쥐 떼에 놀라 발을 떼어놓지도 못했다. 쥐들이 너무 많아 한 발이라도 잘못 떼어놓으면 꽉 밟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게 무슨 조화야? 쥐들이…!”

“말세인가? 허! 거참!”

하찮게 보아왔던 쥐들이지만 무더기로 모여 있으니 은근히 겁이 났다. 저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기라도 한다면, 몇 마리 정도야 죽일 수 있겠지만 저 많은 놈들을 어떻게… 수문 무인들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하지 못했다.

종리추는 담장을 넘어 정원 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때 같으면 순시를 돌아도 서너 번은 돌았겠지만 난데없는 쥐 떼들 덕분에 꼼짝을 못하고 있다. 쥐 떼는 또 다른 공훈도 세웠다.

암중에 숨어 있던 자들.

그들은 숨어 있던 자들.

그들은 목이며, 등이며… 마구 기어오르는 쥐 떼의 극성을 이기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종리추는 그런 무인들을 유유히 피해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내원 역시 쥐 떼의 극성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가는 소스라치게 놀라 다시 들어갔다.

‘반 시진밖에 시간이 없어.’

종리추는 급하게 신형을 날렸다. 쥐 떼는 오래 있지 않는다. 지금은 난데없는 이끌림에 충동되어 굴을 빠져나왔지만, 워낙 겁 많은 놈들이라 곧 제 굴을 찾아 기어 들어갈 것이다. 종리추는 불이 켜져 있는 곳과 꺼져 있는 곳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그중에 한 곳을 골라 신형을 날렸다. 나무에서 나무로, 나무에서 돌 석상 뒤로… 그의 신형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만 일어나시죠.”

“…”

“일어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셋을 세죠. 셋을 셀 동안 일어나지 않으면 그대로 영원히 잠들 겁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은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을 떴다.

“웬 놈이냐!”

“살혼부 살수입니다.”

“뭣!”

노인은 더 이상 누워 있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대단한 놈이군. 대단한 배짱이야. 살혼부는 살아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더니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군. 누군가. 자네 사부는?”

“적지인살이십니다.”

“그래? 청출어람이라더니, 놀랍군. 적지인살이 자네 같은 살수를 양성하다니. 그래, 적지인살이 살아났어. 십망을 벗어나서. 구파일방 이놈들, 또 거짓말을 했군. 적지인살은 무고한가?”

“예, 무사하십니다.”

종리추는 더할 나위 없이 공손했다. 그가 살문을 창건한 후 누구에게 존대를 써본 것도 처음이리라.

“여기는 무슨 볼일로?”

“협상을 하러 왔습니다.”

“협상?”

“네.”

“살혼부가 재건할 수 있도록 틈을 내주십시오.”

“자네는 뭘 주겠나?”

“문주님의 목숨입니다.”

“…”

“…”

백발이 가득한 노인, 하지만 불그레한 혈색 탓에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노인이었다. 그가 바로 살천문의 문주였다. 긴 침묵 끝에 살천문주가 입을 열었다.

“물어보지. 내 거처는 스무 군데가 넘어. 오늘 내가 여기서 자는 줄은 어떻게 알았는가?”

“문주님의 습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초저녁에 잠드셔서 축시 정에 일어나신다는 것까지. 취침을 방해드려서 죄송합니다.”

“…”

“문주님께는 고벽이 있습니다.”

“고벽이라… 뭔가?”

“한 달 중 나흘은 바로 이곳에서 지내신다는 겁니다. 그 나흘은 조금씩 바뀌는데 이십칠 일 주기로 바뀝니다.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아마도 넷째 마님의 역월에 관계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음…!”

살천문주는 신음했다. 죽이려는 상대가 어떤 습성을 지녔는지 파악하는 것은 살수의 기본이다. 하지만 눈앞의 청년처럼 소실의 역월까지 계산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이야말로 뛰어난 살수만이 지닐 수 있는 치밀함이다.

“한 달 중 나흘을 한곳에 머무신다는 것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다음은 초저녁에 불이 꺼진 방만 파악하면…”

“여기까지는 어떻게 들어왔나?”

“쥐를 이용했습니다.”

“쥐?”

“조잡스런 재주로 쥐를 조금 부릴 줄 압니다.”

“이놈이!”

살천문주의 눈에 살광이 떠올랐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자리에서 죽이든지, 아니면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든지. 살려주기에는 너무 뛰어난 놈이고, 죽이려니 자신이 없다. 죽일 자신이 없으면 이렇듯 태연히 말을 하고 있지도 않으리라. 이와 같은 놈이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죽음을 운운하며 협박하는 것은 치졸하다. 그때.

“문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밖에서 호법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아니다. 그 습관은 삼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그것 역시 고벽이지만 고칠 필요가 없을 만큼 그의 위치는 공고했다. 구파일방의 비위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으니 궁금했을 것이다.

‘수하를 들이면 이놈은 죽는다. 이놈의 무공은 어느 정도인가. 과연 어느 정도…’

“이놈들아! 쥐들이 찍찍거려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어서 쥐들이나 치워!”

“아! 예…”

호법이 길게 대답하고 물러갔다. 결국 살천문주는 죽이기를 포기했다. 너무도 태연한 신색, 침착함과 무공을 동시에 갖추지 않았다면 사지에서 이렇게 태연할 수 없다.

“살혼부가 재기할 수 있도록 틈을 내달라고 했는가?”

“네. 동시에 저희에게 내린 살명도 거둬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아직 자네 이름도 모르고 있었군.”

“종리추라 합니다.”

“종리추? 못 들어봤는데?”

“살문 문주입니다.”

“아!”

살천문주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자네가 그 유명한 살문 문주였군. 허허허! 감쪽같았어. 신속했고 빨랐어. 좋아. 살명을 거두지.”

“감사합니다. 적사에 대한 살명도 거둬주십시오.”

“적사? 여자 부의 그자 이름이 적사인가?”

“네, 조금 우둔한 방법을 택했습니다만 이렇게 싸울 뜻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자네와는 어떤 관계인가?”

“같이 일할 식솔입니다.”

“음…!”

살천문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놈은 단숨에 살혼부를 키울 놈이야. 금방 따라잡을 거야. 금방!’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당당하게 살문을 개파 선언해도 좋네. 하지만 내게 하나 더 줄 게 있어. 실질적으로 손에 잡히는 것이 있어야지.”

“말씀 주십시오.”

“자네의 목.”

“…”

“나를 위해서 한 번만 자네의 목을 걸어주게.”

“좋습니다. 언제든지 부르시면 목을 걸겠습니다. 살혼부에 위해를 가하는 일만 아니라면.”

“살혼부에 위해를 가하는 일만 아니라면… 어떤 일이든.”

“어떤 일이든.”

“언제든.”

“언제든지.”

“좋아, 협상은 성립됐네.”

종리추는 깊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들어갈 때는 숨어서 들어갔으나 나올 때는 당당히 걸어서 나왔다.

“살문 문주이시다. 정중히 영접해 드려라.”

살천문주의 한마디는 종리추로 하여금 일파의 지존 위치까지 끌어올려 주었다. 갑자기 양부가 그리워졌다. 양부가 아니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벌어질 수 없었다. 살천문주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종리추는 그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코앞에서, 살천문주의 코앞에서 변검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귀엽다고 머리까지 쓰다듬었지만… 그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

‘다행이야. 잘됐어.’

마음이 홀가분했다. 푸른 하늘만큼이나. 적사에 대한 추적이 중단되었다. 소고와 소여은은 싸울 필요도 없었다.

“살문 문주와 본 문 문주님의 협상을 맺었다. 우리는 당분간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너희가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는 한. 차후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살천문 일급 살수 여덟 명은 엄중히 경고했다.

‘이리로 온 것이 아냐. 살천문… 본문을 직접 쳤어. 아무도 파악해내지 못한 살천문주의 행적을 정확히 포착해 냈고…’

소고, 적사, 소여은은 착잡했다. 소고는 사무령에 도전해야 되고, 종리추를 비롯한 네 명을 수하로 받아들여야 하나 자꾸만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 언제나 종리추가 한발 앞서 달리고 있다. 자신에게는 막대한 자금과 정보가 있지만 그는 홀홀단신 맨몸으로. 적사는 더욱 비참했다. 몽고에서 데려온 수하가 단 한 명만 남았다. 하나같이 일당백의 용사들이었는데 한 명만 남고 열아홉 명이 낯선 이국땅에 몸을 뉘었다. 그는 소고에 이어 두 번째로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 소여은이 생각하는 답답함은 조금 달랐다. 중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다섯 명이 힘을 합쳐 문파를 이끌거나, 아니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 끝에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녀가 봐도 소고는 종리추에게 말리고 있다. 무공은 뛰어나지만. 무공도 모른다. 종리추는 그들 앞에서 무공을 펼쳐 보인 적이 없다. 소고가 장악력을 잃어간다는 뜻이다. 적사는 패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야이간은 혼자만의 놀이 속에 파묻혀 있다. 갈 길은 먼데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들이.

종리추는 천의원으로 돌아온 소고 일행을 정중히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말투도 완전히 바뀌었다.

“무슨 도깨비 장난이지?”

“…”

“뭐얏!”

소고는 괜히 신경질이 났다. 종리추가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유희!”

“옛!”

소고의 말은 듣지도 않던 유희가 단숨에 달려왔다.

“매화표를 꺼내라.”

유희가 살천문 개봉 지부 일급 살수인 청산신필을 죽인 매화표를 꺼냈다.

“넌 내가 모시는 주군을 모욕했다. 자상하라!”

“옛!”

유희는 서슴없이 매화표로 복부를 찔렀다. 유희의 배에서 붉은 피가 울컥울컥 새어 나왔다.

“유구!”

“옛!”

유구 역시 창날을 꺼내 복부에 찔러 넣었다. 역석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역석은 유구의 복부에 박힌 창날을 끄집어내 자신의 복부에 찔러 넣었다. 종리추는 깊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수하들의 잘못은 주인의 잘못,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재삼재사 주의시키겠습니다.”

말을 마친 종리추는 언제 꺼냈는지 비수를 꺼내 자신의 복부에 틀어박았다.

“다, 당신…”

종리추는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삼이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남아일언 중천금입니다. 살수일지라도.”

“어서… 어서… 상처나 치료해요.”

소고는 종리추를 의심할 수 없었다. 자상쯤이야 가식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마음만은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열린다.

‘내 사람이야. 나를 받들고 있어.’

소고는 마음이 벅찼다. 이토록 뿌듯한 마음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종리추… 재미있는 사람이군.’

소여은은 모든 걱정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종리추를 본 것은 두어 번에 불과하지만 이상하게도 종리추 곁에 있으면 든든했다. 누구한테서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내가 천하제일이라 생각했는데… 후후후! 우물 안 개구리였어!’

적사의 눈은 더욱 암울하게 젖어들었다. 그는 종리추에게서 몽고의 용사들이나 보여줄 수 있는 용기를 보았다. 자신을 숙일 수 있는 용기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용기이리라. 적사는 대도를 뽑아 팔목을 그었다.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소고… 종리추보다는 못하지만 나의 피도 붉소.”

적사는 그 말만을 남긴 채 휘적휘적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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