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사신 – 66화


쉭쉭쉭…!

검은 그림자들이 연이어 담장을 넘었다.

“불나방들이군.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달려드니…후후! 하기는 이게 살수들의 운명인지도 모르지. 죽을 것이 뻔한데도 담장을 넘어야만 하는 것.”

야이간이 희미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그가 위치한 삼층 전각은 장원의 중심부이다. 그는 그곳 삼층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필요도 없었고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다. 전각 삼층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한 달분의 식량, 술, 여자… 시중은 납치되어 온 여자들이 들었다.

그녀들의 남편이나 아비 되는 자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소리를 중얼댈 게다.

‘내 아내는 현숙한 여자요.’

‘내 딸은 정조가 뭔지를 아는 여자다. 몸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지금쯤은 죽어 있겠지. 반드시 시신이라도 찾아와야 한다. 억울한 원혼이라도 달래주려면.’

천만에! 그녀들은 색에 길들여진 색마에 불과할 뿐이다. 언제 어디서든 옷을 벗으라고 하면 서슴없이 벗어버릴 여자들이다. 현숙한 여자가, 정조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여자가.

“물 떠왔습니다.”

야이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여인이 쭈그리고 앉아 신발을 벗기고 미지근한 물로 발을 씻기기 시작했다.

평생 만두피나 주무르던 여자다. 잡아올 때만 해도 살결이 거칠었고 손은 투박했다. 머리 모양새도 엉망이어서 매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지금은 어떤가. 살결은 보드랍고, 머릿결은 윤기가 흐르며, 사내처럼 투박했던 손도 많이 다듬어지지 않았는가. 아마 제 남편이 보더라도 깜짝 놀랄 게다.

“핥아.”

여인은 명령대로 발을 핥았다.

“으음…!”

야이간은 전신이 나른해져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검은 그림자들은 걱정할 것이 없다. 그들은 곧 장원 곳곳에 설치한 기관 장치에 몸을 맡기게 될 터이다. 꼴에 살수랍시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겠지. 제놈들은 장엄한 죽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신을 똥통 속에 처박는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렇게 생각할까? 개, 돼지보다 못한 죽음을 맞으면서 장엄하다니. 하하!

야이간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은 채 발가락 구석구석을 누비는 혀의 감촉을 즐겼다.

‘가만?’

문득 야이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비명이 들리지 않는다 해도 기관조차 작동되지 않고 있다. 파공음 또한 들리지 않는다. 야이간은 신중하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흘려 넘기지 않는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목숨과 직결된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깨닫고 있다.

야이간은 즉시 몸을 일으켰다. 발을 핥고 있던 여인이 벌렁 뒤로 넘어지는 것도, 자신이 너무 급하게 일어서는 바람에 여인이 발 씻은 물을 뒤집어쓰고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동물적인 감각은 이미 발동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어! 위기야!’

야이간은 창가로 달려가 벽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살며시 고개만 내밀어 바깥 동정을 살폈다.

어둠에 싸인 장원은 고요했다. 곳곳에 밝혀진 화톳불이 장원 구석구석을 비치고 있지만 검은 그림자들의 모습은 땅속으로 꺼져 버린 듯 깨끗이 증발해 버렸다.

‘기관을 피했어. 기관 장치를 아는 자라면…’

야이간은 고개를 내둘렀다. 기관을 설치했던 자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의 시신 역시 똥통 깊숙이 가라앉아 있다. 세상에 기관 장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자신 혼자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야이간은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 자식들이!’

관원들이다. 장원 구석구석을 돌아본 사람은 그들밖에 없다. 고소가 접수되었다며 거만하게 들어선 작자들. 예상한 일이라 가볍게 흘려 버리지 않았던가. 예상한 일. 거기에 맹점이 숨어 있다. 대부분 어떤 일을 예상하면 대응책을 마련하고, 일이 생각한 대로 풀리면 잘됐다고 생각하며 잊어버린다. 그 속에 어떤 변수가 숨어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변수는 관원이다. 관원들 중에 기관진식에 해박한 자가 있었다. 또 그는 살천문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다.

사실을 추측해 내는 야이간은 오히려 냉정을 회복했다. 관원이 누구인지 생각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어떻게 난관을 빠져나가느냐가 중요하다.

상황은 긴급하다. 살천문 살수들은 기관진식을 뚫고 장원 깊숙이 침투하고 있다. 만약 그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는 날에는 처절한 추격전이 펼쳐질 것이고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문제는 시간이야.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 하는 건데… 완전히 알고 있다고 봐야겠지. 나를 누를 자를 보낼 것은 당연할 테고 내 경신술이라면 일 다경 정도인데… 곧 들이닥치겠군.’

시간 계산은 끝났다. 그는 곧바로 다른 생각을 이어갔다.

‘관원은 장원 구석구석을 뒤졌어. 모든 기관 장치가 들켰다고 봐야겠지. 도주로는…음! 도주로도 이미 끊겼다고 봐야겠고… 이럴 때 도주로로 들어서면 독 안에 든 쥐가 되고 말지. 그럼 어떻게? 날개가 있다면 하늘로 도망갈 텐데… 날개?’

야이간은 급히 다른 창문으로 뛰어가 슬며시 바깥을 살펴봤다. 가산이 있는 곳이다. 그곳 역시 기관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무들이 울창해서 몸을 숨길 곳도 많다. 날개가 있어 삼층 전각에서 날아갈 수 있다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더군다나 가산은 정문과는 반대에 위치해 있지 않은가.

야이간에게는 날개가 있다. 곤륜파의 운룡대구식은 삼층 전각쯤은 높이로 보지도 않는다. 발 디딜 공간이 두어 군데만 있다면 얼마든지 날아 내릴 수 있다.

‘치잇! 놈들은 나에 대해서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어.’

야이간은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알지 못할 살기를 느꼈다. 가산으로 도주하면 죽는다. 적들은 이미 가산 주변에 있는 기관 장치를 무력화시켰고 야이간이 뛰쳐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담장을 넘기 전에 가산 뒤쪽으로 해서 침입한 게 틀림없다. 기관 장치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다면 그쯤은 문제없을 테고.

야이간은 검을 뽑아 뒷정리를 시작했다.

쉬익!

“아악!”

제일 먼저 피를 뿌리며 쓰러진 여자는 남의 집 농사나 지어주느라 피골이 상접한 소작농의 마누라다.

‘아깝군! 이제야 피부가 조금 야들야들해졌는데.’

다른 여자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지를 상실한 여인들이지만 붉은 피를 보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낀 듯했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지. 반반한 얼굴로 사내나 잘 잡을 것이지… 내 원망은 마라. 어차피 돌아갈 곳도 없는 몸들이니 길거리에서 객사하는 것보다는 이게 나을 게다.”

쉬익! 쉬이익…!

“아악!”

“아아악…!”

여인들은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야이간이 휘두르는 칼날을 피하기에는 삶이 너무 고달팠는지도 모른다. 이지를 상실한 여인들은 단 한 명도 요행을 바라지 못했다.

‘후후! 비명 소리를 들었으니 굶주린 승냥이처럼 달려들겠군.’

야이간은 여인들의 죽음을 확인한 후 서가를 한쪽으로 밀어냈다.

스르릉…

서가가 움직이며 암동이 커다란 입을 드러냈다.

‘도주로. 여기까지 막았다면 난 죽는다. 하지만… 후후! 여기 알 리 없어.’

야이간은 망설이지 않고 암동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스르릉…!

서가가 다시 닫혔다. 그리고 눈 한 번 크게 끔벅일 사이를 두고 흑의를 입은 장정 십여 명이 들이닥쳤다. 푸른 빛이 넘실대는 장검을 들고.

야이간은 조심스럽게 암동을 걸었다. 암동은 삼층 전각에서 지하로 뚫려 있다. 지하는 미로다. 지도가 없으면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 미로를 수십 번도 더 와봤던 야이간 역시 지도를 보고 확인한 다음에야 발길을 떼어놓았다. 미로에 설치된 기관은 다른 곳과는 다르다.

야이간은 장원을 매입한 후 제일 먼저 미로부터 만들었다. 살혼부의 마지막 비처, 뇌옥 같은 암동을 떠올렸던 까닭이다. 소천나찰을 따라 암동을 나서면서 ‘이런 곳이면 세상에서 감쪽같이 숨을 수 있을 텐데’ 하고 감탄한 적이 있으니까. 미로를 만들었던 자들은 모두 미로에 갇혀 죽었다. 정확히 말하면 죽인 후에 가둬 버렸지만.

여인들을 납치한 후 성에 대해 길을 들인 곳도 미로다. 어떤 여인이든 간에 칠흑같이 어두운 미로에 가둬놓고 사흘 밤낮을 굶기면 거의 체념 상태가 되어버린다. 거기에 이지를 망각시키는 몽혼향까지 피워주면 백이면 백 고의를 끌어내린다.

야이간은 여인을 철저히 유린했다. 유린하는 정도가 워낙 심해서 정조를 지키지 못했다는 정도는 가벼운 이야기거리도 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들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홍루의 여인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성에 대해 둔감해졌다. 몽혼약과 어둠과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가 버물어져 빚어낸 결과다. 이런 곳에서 길들여진 여인들은 밝은 세상으로 끌어올려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본인 스스로 자신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라 생각할 정도이니 어떻게 도주를 생각할 것인가.

‘깨뜨리려면 철저하게. 겉만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알맹이까지 산산조각 내야 해. 인간성을 말살시켜 버리는 거지.’

야이간은 열 살 이후 꾹 눌러 참았던 성욕을 마음껏 발산했다. 평소의 지론이 옳다는 것도 증명해 냈다. 여인들은 도망갈 생각을 못했고, 동물처럼 학대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니까.

야이간은 미로를 설치한 다음 장원을 개축했고 또 다른 자들을 불러 기관을 설치했다. 관원들은 장원만 둘러보았을 뿐 미로는 발견하지 못했다. 발견했다면 갇혀 있던 여인들도 발견했을 텐데.

야이간은 한 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지도를 든 채 매 걸음걸음을 조심스럽게 떼어놓았다. 그 역시도 암동에 설치된 기관은 두려웠다.

“휴우! 만 냥짜리 장원이 날아갔군.”

눈 아래 만 냥짜리 장원이 굽어보인다.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만 냥이 비록 거금이기는 하지만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야망에 비한다면 티끌 같은 돈이다.

“어느 놈인지 알아내야겠지? 그놈이 살천문과 직통하는 놈이라면 상관없지만, 살천문이 하오문이나 개방 같은 곳에서 정보를 입수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지지. 행동이 거추장스러워져. 그래선 안되지. 하하!”

야이간은 여유 있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이호는 밤 근무를 마치고 아침이 훨씬 지난 시각에서야 집에 돌아왔다. 식솔들은 모두 깨어 있었다. 잘 먹지 못해 누렇게 뜬 얼굴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부수입을 고대하는 눈치였지만, 이호는 못 본 척하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식솔들의 얼굴에 실망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잠깐이다. 식솔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있는 것으로 오늘 하루를 버틸 것이다.

극심한 흉년은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이 있는 이호 가족에게도 어려운 시절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호의 마음도 메말랐다. 전 같으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악착같이 굴었겠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같은 악착스러움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그저 잘 견뎌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이호는 아무 생각 없이 옷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때,

“힘들게 찾았으니까 대답은 쉽게 해줘야겠어. 어디지?”

천장에서 처음 듣는 음성이 쏟아져 나왔다. 이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집에 낯선 자가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기는 충분했다. 황급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자 빙긋이 웃는 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대들보에 몸을 의지하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무척 편안해 보였다.

‘무림인이다! 무인이 왜…?’

“누구냐!”

이호는 짐짓 위엄 어린 음성으로 되물었다. 하찮은 군졸에 불과할망정 관원은 관원이지 않은가.

“시끄럽게 굴면 가족이 다치지. 조용하는 게 좋아.”

양상군자는 마치 제 집이라도 온 듯 태연했다.

‘무인이면 상대가 안 돼. 도대체 무인이 무슨 일로 내 집에…?’

이호는 말귀를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상군자가 물었다.

“어디냐?”

“뭐가 말이오?”

“네놈이 거래하는 곳. 살천문인가, 아니면 개방?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이, 이놈은!’

이호는 양상군자의 정체를 짐작해 냈다. 그의 장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실종된 여인들은 찾지 못했지만 깨끗이 청소된 장원에 사람 그림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괴기스럽기까지 하던 장원의 주인이다. 그때 그는 돌아서는 자신들에게 은자 열 냥씩을 건네주었다. 다시금 얼굴을 확인해보니 확실히 그때 그 대지주다.

‘수고한다면서 은자 열 냥을 건네주었지.’

그 돈은 이호 같은 사람에게는 워낙 큰돈이라 침상 바닥을 뜯고 숨겨두었다. 식솔들이 곤궁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내놔봤자 먹고 입는 데밖에 더 쓰겠는가.

이호는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장주님이셨군요. 이렇게 누추한 곳에는 웬일로… 살천문, 개방이라뇨? 저희가 아무리 미천하다 해도 살수 집안이나 거지 집단과 인연을 맺을 리가…”

“쉽게 말하지 않는군.”

이호는 비로소 상대가 호의로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인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지금까지는 두 명 남았어.”

“….”

“이제 곧 한 명 남게 되겠군.”

“무슨…?”

“말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흔한 협박이지.”

‘이자는… 죽이려고 왔어. 말해도 죽고 말하지 않아도 죽는다.’

이호는 대지주의 편안한 웃음 속에서 죽음을 읽었다. 대지주 말대로라면 장원을 찾아갔던 관원 다섯 명 중 이미 세 명이 죽었다. 어젯밤 모두 같이 야번을 섰으니 오늘 아침밖에 죽일 시간이 없는데… 죽였다. 그들은 죽으면서 한마디 했으리라. 기관진식에 관한 거라면 이호에게 물어보라고.

자신이라고 기관진식에 대해 알 턱이 없다. 장원에 기관 장치를 하러 들어간 자가 슬그머니 도면을 빼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알겠는가. 그 정도로 기관에 능통하면 진작 관원을 때려치우고 그쪽 계통의 일을 하고도 남았지.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은자나 써보고 죽는 건데. 멍청한 마누라는 침상 밑에 은자가 묻혀 있는 것도 모를 거야. 귀중한 돈이 흙이 되어 돌아가겠군.’

“거래하는 곳이 두 군데 있소.”

이호는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말이 통해서 좋군. 어디 어딘가?”

“첫 번째는… 염라대왕이지!”

이호가 느닷없이 소매를 떨쳐 냈다.

쒸이익…!

무수한 바늘이 천장으로 솟구쳤다. 그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두 번 겪었고 그때마다 비장의 한 수는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천장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대주주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호의 눈에는 귀신처럼 스르륵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무공을 모르는군. 그런 싸구려 수법으로는 내 목숨을 위협할 수 없지. 보아하니 그게 비장의 한 수 같은데, 힘 그만 빼고 말해 보지. 장원의 기관진식을 파악해서 어디에 팔아먹었나? 그리고… 보아하니 넌 무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했는데 기관진식은 어디서 배웠지?”

이호는 죽음을 각오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짐작은 했지만 무공으로써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어설프게 창질을 배운 자신이 어떻게 정통으로 무공을 익힌 무인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힘들게 하는군.”

대지주는 손을 쓰지 않았다. 아니, 손을 쓰기는 썼다. 경대 위에 놓여 있던 화병을 들어 거칠게 내던졌다.

짱그렁…!

화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자네는 혼자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어.”

그는 손에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휙! 딱! 쾅! 우당탕…!

“안 돼!”

“무슨 일이에요?”

이호가 대지주의 의도를 짐작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평소 멍청하다고 놀려대던 아내가 불쑥 방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평소에도 말조심을 했어야 하는 것을. 아내는 방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굳어졌다. 턱 밑에 바짝 대어진 검날이 아내를 석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말해 보지. 어디에 팔아먹었나?”

“개방이오.”

이호는 다급한 기색을 눈가에 떠올리며 급히 말했다.

“개방이라… 기관진식은 어떻게 알지?”

“장원에 기관 장치를 하러 들어갔다가 실종된 자 중에 정개라고 있는데, 정개가 도면을 빼줬소.”

“그래? 그럼 장원을 뒤질 때는 왜 가만있었지?”

“개방에서 건드리지 말라는 전갈이 있었소.”

‘소고였지. 소고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어. 날 죽일 수 있을진 몰라도 너 역시 죽어. 소고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이호는 살혼부의 간자였다. 죽은 정개도 살혼부의 간자다. 그들은 야이간이 살혼부 사람인 걸 알지 못했다. 소고가 야이간, 적사, 적각녀, 종리추를 거둔 사실은 극비리에 진행된 사실이라 연관된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평소처럼 특이한 사항을 접수하고 보고를 했을 뿐이다. 그 와중에 정개가 죽었고.

“정개… 기억나. 무식함을 드러내려고 턱수염을 기른 자지. 좋아, 네 말을 믿어주지.”

“이제 제 아내를…”

이호는 간자답게 야이간의 눈썰미를 읽어냈다. 야이간은 말의 진위를 판단하고 있다.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는 그 뒤다.

‘죽는 순간까지 조급해해야 해. 아내의 죽음을 걱정하는… 소고, 꼭 복수를…’

부욱!

이호는 아내의 목에서 새빨간 선혈이 치솟는 것을 보았다. 아내는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죽기 두렵다는 듯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죽었다.

‘믿었어! 이제 넌 죽을 거야!’

“야아앗…!”

이호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꼬리에 불붙은 멧돼지처럼.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