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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67화


소고는 침통했다. 소여은도 말을 잊었다. 장원에서 발견된 여인의 시신은 십여 구에 달한다. 그녀들의 죽음은 납치되는 순간부터 정해진 사실이었을지 모르지만 죽이는 방법이 악독했다. 야이간은 사혈을 베지 않았다. 혈도를 피하되 살아날 수 없는 깊이로 정교하게 장기를 베어냈다. 여인들은 즉시 죽지도 못하고 한참 동안을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었으리라.

이호의 죽음도 침통함에 일조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무인이 관원을 죽인 것은 서투른 행동이다. 이유는 알 만하다. 장원의 도면이 어떻게 살천부에 흘러 들어갔는지 파악하려고 했겠지. 이번에도 잔인한 손속이 문제다. 야이간은 이호뿐만이 아니라 이호의 아내와 다섯 자식을 모두 죽였다. 그중에는 태어난 지 두 돌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야이간은 살혼부를 알아요. 어음을 만 냥이나 전해주었으니 재화가 넉넉하다는 것도 알 거예요. 무엇보다 언니와 저, 적사, 종리추가 있다는 것을 알아요. 잔인하지만 거두든가, 아니면 죽여 버려야 해요.”

“동생은… 죽이고 싶겠지?”

“…..”

소여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자를 노리개쯤으로 아는 놈들은 모두 죽여야 돼.’

소여은의 눈에서 파란 독기가 일렁거렸다. 그녀의 살아온 삶은 육체를 노리는 사내들로부터 어떻게 몸을 지켜 내느냐 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위기도 있었다. 녹림마왕에게 걸려 알몸이 되었을 때는 마지막이구나 싶기도 했었다. 소여은은 소고의 명령대로 움직인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운 성품을 얻었지만 여인을 탐욕하는 자만은 용서할 수 없었다.

“거둬야겠어.”

소고의 말은 의외였다. 그녀 역시 죽이는 데 동의할 줄 알았건만.

“우리는 독한 사람이 필요해.”

“언니 뜻대로 하세요.”

“무엇보다 현판도 걸지 않았는데 내부 싸움부터 벌이면 안 돼. 정 지나치다 싶으면 내가 죽이지. 우선은 누가 좀 도와줘야겠는데…..”

야이간은 살천문에 쫓기는 중이었다. 장원을 빠져나오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관원들을 죽인 것이 화근이었다. 살천문은 꼬리를 잡았다. 지난 세월 동안 살혼부가 막대한 금력을 쌓았다면 살천문 역시 그렇다. 사람들 틈에 살혼부를 위해 목숨을 건 자들이 숨어 있다면 살천문 역시 그렇다. 살천문이 작심하고 달려들면 죽이지 못할 자는 없다. 정말 작심하고 달려든다면.

야이간의 실수라면 관원을 죽인 것보다 살천문을 너무 약 올렸다는 것이다. 야이간은 고슴도치처럼 가시 철갑 속에 틀어박혀 살천문 살수들을 유인했고 죽였다. 이제 그에게 가시 철갑이 벗겨졌다.

“누가 가는 게 좋을까?”

소고는 말을 하면서도 한 사람을 생각했다.

‘그는 중상이야. 미련한 사람. 꼭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정말 그랬을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그를 신뢰할 수 있었을까? 굳이 숨긴 것도 없지만 바보인 척 순순히 수하가 된 그를 가식 없이 쳐다볼 수 있었을까?

모두 실패했다. 소여은은 살수가 되었지만 문파를 창건하지는 못했다. 적사와 야이간은 살천문이란 커다란 적을 자극만 시켰다. 그는…해냈다. 싸움 한번 하지 않고 수하가 된 자가 시험 삼아 내던진 관문을 통과했다. 거금 일만 냥을 내던졌지만 성공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해냈다. 그녀가 준 일만 냥도 거절하고 무일푼, 맨 몸뚱이 하나로.

과연 ‘사부의 명은 천명’ 이란 말 한마디로 모든 의구심을 떨친 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냐, 넌 참 착한 놈이다’ 하고.

그는 그것까지 짐작하고 충성을 보였다.

‘둘 중 하나겠지. 진심이라면 날개를 얻은 것이고 가식이라면… 내가 먹히겠지.’

소고는 종리추를 떠올렸다. 곱상하게 생긴 얼굴, 악의 없는 표정, 하지만 냉정할 때는 얼음보다 냉정하고 몰아칠 때는 돌풍보다 거센 성격.

‘그가 가면 야이간은 살아날 수 있어. 하지만 상처가 너무 심해. 바보 같은 사람.’

소고는 종리추란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누가 가도 괜찮을 거예요.”

소여은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안 된다’ 는 생각을 했다. 살천문 살수들로부터 야이간을 구해내려면… 오직 한 사람만이 가능하다.

소여은, 그녀는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보았지만 자신은 살수에 불과하다. 화적 떼를 이끌고 무지막지한 살육전을 벌이라면 벌일 수 있지만, 화적 떼를 규합하여 문파로 형성시키라면 고개를 갸웃거려야 한다. 문파를 만든다는 것은 주변 문파들과의 이해 관계를 잘 조율해야 한다. 수적 떼를 이끌고 범선을 습격하듯이 문파를 이끌었다가는 집중 공격을 받게 된다. 수적 떼와 관군이 정면으로 부딪치는 격이다. 이해 관계와 전혀 상반되는 관군을 구워삶아서 공존을 하게 만든다? 관군조차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으로 몰아붙인다면 몰라도…

현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살수였다. 문파를 이끌기에는 무공도, 경험도, 모든 게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런 면에서는 야이간이나 적사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이 무공만으로 강호에 두각을 나타낼 수는 있다. 문파를 창건하고 문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수문이라면, 문파를 창건하는 순간부터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살수문이라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살수문주는 역전의 용장이나 어떤 난관이라도 가볍게 뚫고 나갈 수 있는 지장, 인덕으로 주위를 감화시킬 수 있는 덕장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소고는 능력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어떤지 모르지만 종리추는 가능성이 있다. 사무령이 문제가 아니라 문파를 창건하는 게 급선무다. 지금과 같은 경우에도 자신이나 적사가 간다면 싸움을 해야 한다. 그 이외에 다른 방도는 생각할 수 없다. 죽이고자 달려드는 사람들을 무슨 수로 떼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것도 무리다. 살천문에서는 일급 살수를 동원시켰고, 무공으로 맞선다면 자신과 적사가 야이간과 손을 잡고 상대해도 역부족이다. 그것은 적사의 경우에서 명확하게 드러났다. 야이간을 구하려면 싸워서는 안 된다. 싸우지 않고 구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한 사람, 종리추뿐이다. 소고와 소여은은 한동안 서로 마주 보기만 했다.

‘상처만 깊지 않아도….’

‘역시 그 사람뿐이야.’

다른 방도는 생각나지 않았다.


똑똑….!

소여은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차분한 여인의 음성이다. 소여은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중년 여인 벽리군이 몸을 일으키며 맞이했다. 소여은이 종리추의 방을 찾기는 처음이다. 그를 본 것도 어려서 암굴에서 본 것이 한 번, 삼이도에서 한 번, 그리고 그가 천의원에 들어올 적에 한 번, 소고를 맞을 적에 한 번… 모두 네 번밖에 되지 않는다.

“좀 어때?”

“주무시고 계세요.”

묻기는 종리추에게 물었는데 대답은 벽리군이 했다. 소여은은 눈빛을 반짝였다.

‘이 두 사람… 어떤 관계지?’

여인이 하오문의 향주였다는 것은 보고를 통해 알고 있다. 종리추가 하오문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는 것도. 종리추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숨김이 없었다. 천의원에 찾아온 첫날, 그는 벽리군에 대해서도 말했다.

“하오문의 향주였으나 지금은 오갈 데 없는 몸, 나 때문에 살천문으로부터 쫓기는 몸이 됐지. 뒤를 봐줄 작정이야.”

‘정말 그 정도 관계밖에 안 되나? 이 여자는 지극정성으로 병간호를 하고 있어. 눈도 제대로 붙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럴 수 없지.’

그러나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고 생각하기에는 나이 차가 너무 심했다. 물론 벽리군은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을 미녀다. 기녀답지 않게 화장이 옅고 옷차림도 검소하다. 또한 겉으로 나타나는 현숙함 뒤에는 사내를 빨아들일 것 같은 요사함이 숨겨져 있다. 사내들에게는 나이를 불문하고 매력적인 여자임에는 틀림없다.

주종 관계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곧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꼬박꼬박 상전 모시듯 존대를 쓰고 있는 점은 주종 같지만, 하오문이라는 문파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상전으로 모실 리 없다.

소여은은 이번에도 생각을 중단했다. 종리추와 벽리군의 관계에 대해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만 아파왔다.

“대낮부터 잠이라니 팔자가 편하군요.”

소여은은 빈정거리듯 말했다. 아무래도 둘 사이가 정상적인 사이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화화공자와 기녀가 만났을 때처럼 사랑도 없는 육체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처럼 비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빨리 회복되셔야 하니까요.”

‘물론 그렇겠지.’

“요즘은 운기만 하시면 바로 잠에 드세요.”

“우, 운기…?”

“네.”

“운기를 하면 잠에 든단 말예요?”

“네.”

“호호호!”

소여은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웃어 젖혔다. 내공을 갓 접한 사람들은 진기를 느낄 수 없다. 호흡을 가다듬고 진기의 흐름을 느끼라고 하지만 무슨 감각이라도 있어야 느끼지. 그래서 종종 운공을 하다 말고 졸음에 빠지곤 한다. 모두 진기를 느낄 수 없던 초심자 때의 일이다.

일단 진기를 느끼기 시작하면 심원한 매력에 이끌려 정신없이 빠져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진기를 느끼고 싶어 하루 온종일 운공조식을 할 때도 있다. 그렇다고 몸이 피곤하냐 하면 절대 아니다. 운공을 하면 할수록 몸이 가뿐해지고 날아갈 듯 상쾌해진다. 정신도 맑아진다.

운기를 하고 난 다음 곧바로 잠이 든다? 작심하고 잠을 청해도 그러기는 어렵다. 벽리군은 소여은이 웃을 줄 알았다는 듯 태연했다.

“좀 깨워줄래요? 할 말이 있으니까.”

벽리군은 깨울 생각을 하지 않고 탁자로 갔다.

‘이 여자는 정말 색기가 넘쳐흘러. 청루에서 배운 못된 짓이 몸에 배인 거야. 둘이 잘 만났군.’

벽리군의 걷는 모습에는 정숙함으로 가득했다. 어느 여염집 처자라 해도 벽리군처럼 단아하게 행동하지는 못할 게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허리를 비트는 모습 하며, 살며시 고갯짓을 하는 모습 등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사내를 유혹하는 몸짓이다.

벽리군은 그녀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탁자 위에 놓인 서신을 들고 걸어왔다.

“오늘쯤 오실 거라며 이걸 전해드리라더군요.”

“뭐라구요? 오늘쯤 올 거라고요?”

“예.”

소여은은 망연자실했다. 종리추는 방 안에만 있었다. 그런데 침상에 누워 강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하게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소고가 어떻게 움직일지까지도.

‘부처님 손바닥 안의 오공’ 이라 했던가. 소여은은 꼭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받으세요. 절대 개봉하지 말고 전하라는 당부가 계셨어요.”

소여은은 서신을 받아 들었다. 밀봉된 서신이었다. 수신자는 살천문주.

‘해결됐어. 간단하게. 절대 개봉하지 말고? 이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까?’

너무 쉽게 해결됐다. 종리추는 적사의 경우처럼 야이간도 손 하나 쓰지 않고 구할 방도를 건네주었다. 소여은의 손에 들린 서신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아무나 건네줄 수 있는 종이가 아니다. 그것은 살천문주와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의미하며 살천문주가 종리추를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했다는 말도 된다. 과거의 살혼부주 청면살수와 같은 위치다. 아니, 청면살수라 해도 살천문의 청부를 막을 수는 없다.

청면살수, 소고. 그들이 갖지 못한 힘을 종리추는 가지고 있다. 소여은은 잠들어 있는 종리추를 흘겨봤다.

아무리 봐도 알지 못할 사내였다. 흥미가 생기는 사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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