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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68화


‘이거 자칫하다가는 여기서 뼈를 묻겠군.’

야이간은 옷자락을 부욱 찢어 어깻죽지에서 팔꿈치까지 길게 찢어진 상처를 감싸 맸다. 곤륜파의 무공을 익히면서 곤륜파에서도 당당히 후기지수로 거론된 다음부터 살천문 정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십망이 펼쳐진 후 청해까지 도주하면서 겪었던 처절한 혈로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세상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았다. 살천문의 추적은 십망과 버금갈 만하다.

당시는 소천나찰이 싸웠고 자신은 방관자였지만 지금은 자신이 싸운다. 그래서 살천문의 공격이 한결 무겁게 느껴진다. 야이간은 검을 검집에 집어넣지도 못했다. 장검에 핏물이 엉켜 있지만 닦을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럴 틈도 없었다.

‘음… 살기. 지겹게 몰아치는군.’

야이간은 몸 상태를 점검했다. 종아리와 허벅지에 깊은 검상을 입어 신법을 펼치기가 자유롭지 않다. 특히 운룡대구식 같은 절정신법은 펼칠 여력이 부족하고 사용해 봤자 효과만 불러온다.

‘분광검법하고 육양수, 정 안 되면 투골환을 사용할 수밖에.’

야이간은 가슴을 더듬어 묵직한 전낭을 만졌다. 전낭에는 그가 뇌옥 같은 암굴에서 선택했던 병기가 들어 있다. 쇠구슬 백 개. 과거, 그는 이 투골환으로 청성파 도인 두 명을 살상했다. 기습 덕을 톡톡히 보았지만 투골환이 지닌 흉포함이 아니었다면 위기를 벗어나지 못했을 게다.

투골환은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둥그런 쇠구슬에 불과하지만 한 알 한 알마다 조그만 홈이 패여 있다. 던지기 직전에 그곳을 누르면 작은 침이 무려 백여 개나 튀어나오고, 적을 향해 날아가면서 사방으로 비산하게 된다. 침에는 해독약이 없다는 홍점사의 독이 묻어 있어 더욱 조심해야 한다. 작은 구슬에 그 많은 침을 어떻게 숨겼을까? 천하제일의 장인이라는 신수의 솜씨가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 투골환은 손에 닿는 쇠붙이마다 보옥으로 탈바꿈시킨다는 신수의 역작이었다. 투골환을 만지자 기운이 한결 괜찮아졌다.

‘살천문 놈들, 내 목숨을 가져가려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걸. 중원에 나오자마자 꼴사납게 됐군. 적사, 적각녀, 종리추. 좋다. 네놈들이 어부지리를 먹어라. 후후!’

그는 살아 돌아갈 생각을 버렸다. 살천문 살수들은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게다. 그리고 야이간에게는 그들의 습격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모두 다섯 놈이군. 오방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좁혀오고 있어. 천천히, 천천히. 풋! 마치 진법을 펼친 것 같군. 오방진. 하하!… 오방진? 오방협격술!’

야이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럴 리 없다고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면서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그들이… 그들이 여기까지 올 리가 없어!’

생각은 부정하고 있지만 행동은 그럴 수도 있다는 쪽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장검이 굴러 떨어지고 품속에 있던 투골환이 한 움큼이나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쪽 끝 사천성에는 혈살오괴라는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무인이면서도 무인과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유력 인사와 교분도 쌓지 않았다. 무림과는 철저히 등졌다.

“건드리지 마라. 건드리면 죽인다.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우리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언한 대로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는 상대가 하늘을 나는 천신이라 해도 반드시 응징했다. 반면에 건드리지만 않으면 눈앞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혈살오괴는 협공의 달인들이다. 처음에는 그저 우습게만 보았지만, 한 번 두 번 싸움이 거듭되면서 다섯 명의 합격술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많은 문파에서 오방협격술을 연구했다. 무림에 새로운 비기가 나타났으니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인 게다.

청성파에서도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진법의 대가인 영성도인은 탄식을 토해냈다.

“이건 대단하다! 가히 소림 십팔나한진과 어깨를 겨룰 만하다. 사상에서 오행으로, 오행에서 사상으로의 변화가 자유롭다. 사상이든 오행이든 원래가 하나였으니… 태일. 오방협격술에는 태일의 묘가 깃들어 있다. 차후 청성파 도인들은 혈살오괴를 각별히 주의하라.”

오방협격술이 무림일절로 공인되는 순간이었다.

‘혈살오괴.’

야이간은 사천성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있던 관계로 혈살오괴에 대한 풍문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무인과는 말도 나누지 않는 괴인들이 그 먼 사천성에서 하남까지… 더군다나 살천문의 주구가 되어…

어느 한 가지도 혈살오괴에 들어맞는 것은 없었지만 자꾸 혈살오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혈살오괴든 협살십괴든 내 목을 쉽게는 못 가져가지. 후후! 나를 사냥하시겠다? 그럼 나도 사냥을 시작해 볼까!’

야이간은 사냥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가 움직이면 알지 못할 기운도 움직였다. 오른쪽으로 일 보 움직이면 꼭 그만큼, 왼쪽으로 움직이면 움직이는 만큼 그들도 움직였다. 그러면서 거리는 점점 좁혀왔다.

‘나를 환히 보고 있어. 이거야 원, 그물에 갇힌 기분이니.’

그렇다고 낙담할 필요는 없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타격을 가해야 한다. 타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좁혀 와야 되고 진짜 싸움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떻게든 혈살오괴는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죽이기 위해서는.

‘내게도 기회가 있어.’

야이간은 투골환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가 바라던 기회가 왔다. 다섯 노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꼽추노인도 있고, 입이 한쪽으로 돌아간 언청이노인도 있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노인도 있다. 노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야이간을 중심으로 다섯 방위를 가로막은 채.

“큭큭큭…!”

야이간은 가늘게 웃었다. 노인들의 기도를 보니 혈살오괴가 틀림없다. 일 대 일로 승부를 겨뤄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고수들이다.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혈살오귀… 신세 참 처량하게 됐군. 그 나이에 살천문의 주구가 되어 나타나다니. 말년이 안 좋군.”

“큭큭큭! 괜찮아. 그래도 이 나이만큼 살았으니까. 이제 겨우 살 만하다 싶으니 무덤 속으로 들어가야 할 네놈보다는 낫지.”

꼽추노인이 음침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신 있나 본데,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 봐.”

“큭큭!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신수의 투골환인 것 같은데.. 어린 놈. 사천에는 암기의 명문인 당문이 있다는 걸 잊었나? 당문의 암기와 손을 섞어본 다음에 투골환을 자신하는 게 좋을걸?”

역시 혈살오귀다. 절대 그럴 리 없다던 생각이 사실로 드러났다. 더군다나 상대는 투골환까지 파악하고 있다.

‘기습의 묘는 사라졌어. 이들이 정말 투골환을 피해낼 자신이 있는겐가? 풋! 아무래도 상관없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야이간은 손가락 사이에 투골환을 끼었다. 한 손에 네 개씩, 양손에 여덟 개. 적어도 두 명은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오지 그래? 난 갈 길이 바빠서 냄새나는 늙은이들과 오래 입씨름할 겨를이 없어.”

“허허! 멀고도 험한 북망산천을 어찌 그리 서두를꼬. 하긴 발가벗은 계집애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가봐야겠지. 그래, 그만 가시게.”

손에 곡괭이를 잡으면 영락없이 농군으로 보일 노인이 편안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편안하지 않았다. 무척 빨랐다.

쉬익!

노인은 취리보를 밟는 것 같았는데 아니었다. 신형이 어느새 허공으로 솟구쳐 독수리처럼 날아들었다.

“북망산천은 먼저 가거라!”

쒜엑! 쒜에엑….!

야이간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투골환 네 개를 쏘아냈다. 상대는 허공에 있다. 운룡번신이라는 신법을 펼친다 해도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 극히 좁다.

노인은 운룡번신을 펼치지 않았다. 천근추 수법을 사용해서 뚝 떨어져 내렸다.

파라라라랑….!

투골환에서 비침이 쏟아져 나와 사방천지를 메워갔다. 노인의 반응은 더욱 빨랐다. 천근추를 사용해서 떨어져 내린다 싶었는데 어느새 회선각을 펼치며 이 장 뒤로 주르륵 물러섰다.

“여우 같은 늙은이!”

야이간은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뒤를 쫓았다. 일 대 일의 비무라면 당연한 행동이다. 다른 네 명의 노인들이 우두커니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으니 당연하다.

야이간이 걸려들었다고 느낀 것은 몸을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릭! 쉬이익…!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던 노인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뒤쪽에 있던 언청이노인은 지팡이로 다리를 쓸어왔다. 꼽추노인은 야이간의 앞을 가로막았고, 뒤로 물러섰던 노인은 다시 신형을 돌이켜 허공으로 치솟았다. 좌우측에 있던 노인 두 명은 어찌 된 일인지 공격에 가세하지 않고 한 명은 전면으로 다른 한 명은 배후로 돌아갔다.

혈살오귀가 자랑하는 오방협격술이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섯 방위를 놓치지 않는다. 그것은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기도 하고 용이하고 상대의 행동을 제약하는 효과도 있다.

‘아차!’

야이간은 몸을 피하려고 했으나 그전에 다리를 쳐오는 지팡이와 앞에서 가로막은 노인, 허공에서 이중으로 공격해 오는 노인의 공격을 해결해야 했다.

왼손에 들고 있던 투골환을 마저 날렸다. 아니, 날렸다고 생각했다.

푸욱! 따악…!

야이간은 동귀어진을 생각했으나 꼽추노인의 지팡이 검이 어깨 쇄골을 찔렀다. 뒤에서 쳐온 노인은 오른쪽 다리를 맹렬히 강타했다. 야이간은 털썩 무너졌다.

그는 무너지는 순간에도 자신의 패인을 냉철히 생각해 냈다. 첫째는 극심하게 쇠잔해진 기력 탓이다. 사실 그는 검을 들고 서 있을 힘조차 없었다. 둘째는 실전 경험 부족이다. 조금만 경험이 많았어도 노인의 유인책에 넘어가 투골환을 버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게다. 투골환을 정확히 알고 있는 능구렁이들이 쉽게 공격해 왔겠는가. 셋째는 병기를 너무 믿었다. 투골환을 너무 믿은 탓에 오방협격술을 가볍게 보는 우를 범했다. 그는 질 만한 요소를 너무 많이 가졌다.

“네놈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 같으니 내가 가져가지. 자신 있으면 찾아가. 물건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으면 임자가 아니지.”

꼽추노인이 품에서 투골환이 들어있는 전낭을 빼갔다.

“생각 같아서는 사지육신 중 하나쯤 자르고 싶다만, 문주께서 용서하라 하셨으니 그만 돌아간다. 살천문주가 아니었으면 네놈은 죽었어. 지금쯤 네놈이 좋아하는 북망산천에 가 있겠지.”

언청이노인이 비웃었다.

‘죽이지 않는단 말인가? 살문주? 살문주가 누구지?’

야이간은 주저앉은 채 멀뚱히 다섯 노인을 쳐다보기만 했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주께서는 그냥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네놈에게 투골환이 있는 걸 아는데 어찌 그냥 돌아가나? 고맙네. 아주 좋은 병기를 줬어. 이놈들이면 적어도 우리 목숨을 두 번은 구해줄 거야.”

혈살오괴는 야이간을 어린아이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나를 살려준다? 좋은 말이지. 네놈들은 실수한 거야.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야. 반드시!’

야이간은 이를 갈았다. 혈살오괴가 돌아간 후 장내에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여보시오!”

야이간은 목청을 높여 불렀지만 굳이 부를 필요도 없었다. 마부는 마차를 몰아 야이간이 주저앉은 곳으로 다가왔다. 그는 이런 상황을 예측했다는 듯 불문곡직 야이간을 들어 마차에 태웠다.

“낙양으로 갑시다. 좀 멀긴 하지만…”

“등봉으로 갑니다. 좀 멀긴 하지만.”

“등봉?”

“소고님이 부르셨습니다.”

야이간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심신이 피곤하다 못해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투지가 솟구쳤다. 소고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소고가 살문주인가?”

“가서 물어보시지요.”

마부는 냉담했다.

야이간이 등봉에 들어서는 데는 무려 보름이라는 기간이 걸렸다. 야이간이 저지른 일은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관원까지 살상했으니 신분만 드러나면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개방은 살천문의 행동에 관심을 보였다. 살천문에 혐의를 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쫓는 자가 누구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장원에서 죽은 여인들의 가족들이 살천문에 청부한 사실을 파악해 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야이간이 강호에 출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야이간은 강호에 나와 손속을 부딪친 적이 없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소고를 만난 일하고 장원을 세워 살천문을 끌어들인 것뿐이다.

하지만 그는 많은 흔적을 남겼다. 장원을 철통같은 요새로 만든 것이 가장 큰 흔적이다. 당연한 수순이지만 개방은 자금줄을 찾을 것이고, 기관의 달인을 수소문할 게다.

소고가 야이간을 버리지 않은 것은 너무 위험스러운 행동이었다.

야이간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소고와 마주 앉았다. 적사, 소여은은 각기 오른쪽과 왼쪽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냉담했다.

적사는 노골적으로 경멸의 빛을 띠고 얼굴을 맞댈 가치도 없다는 듯 찻잔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소여은은 더욱 냉담했다. 부드러울 때는 버들가지처럼 휘영청거리지만 얼굴을 굳히자 농담을 건네기가 어색할 만큼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계집이 정말 예쁘단 말야. 계집을 품어도 네 생각만 하면 흥이 가시곤 했지. 후후!’

야이간은 좌중의 싸늘한 분위기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법이다. 소고는 자신이 필요하니까 부른 것이다. 필요하지 않았다면… 진작 내쳤겠지. 그게 사람 사는 모양새이지 않은가.

소고가 입을 열었다.

“적사.”

“예.”

‘어? 저놈이 어쩐 일이지? 저렇게 고분고분할 놈이 아닌데? 무언가 있었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야이간은 완전히 수하가 듯 고개마저 숙여 보이는 적사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형편없이 당했어.”

“….”

“일만 냥도 값어치 없이 날렸고.”

“….”

“무엇보다 수하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행위는 경솔했어. 이급살 수밖에 되지 않아.”

“…”

적사는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저놈, 완전히 수하가 됐군. 소고… 재밌는 여잔데? 적사의 강철 같은 성격을 구부렸어. 내 생각이 맞았어. 문파를 창건하라 해놓고 자기는 뒷전에서 영향력을 장악하고 있었어. 적사가 제일 먼저 당한 것 같은데. 후후! 어디 보지, 내게는 무슨 수작을 벌이는지.’

야이간은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완전히 수하가 된 적사를 불러놓고 훈계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자신을 노린 수작으로만 비쳐졌다.

“적사, 이급살수다. 독자적인 행동은 일절 금한다. 거취, 행동 등등 모든 것을 조율받아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일 또한.”

“알겠습니다.”

소고는 행동을 완전히 구속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적사는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소여은.”

“예.”

소여은도 고분고분했다. 사적으로는 친자매 이상의 사이가 되었지만 소고의 집무실에서만은 공적인 자세로 대했다. 소고가 천의원 대청을 묵월광 집무실로 명명한 칠 주야 전부터.

“넌 정이 너무 많아.”

뜻밖이다. 소여은은 열 살배기 어린아이일 때도 사내의 양물을 물어 뜯은 독한 여자다. 성장기 또한 수적들 틈에서 보냈다. 무식하고 포악하기만 한 사내들 사이에서 당당히 한 인간으로 대접받기 위해 더욱 고된 훈련에 매진했다. 그런 그녀가 정이 많다?

“…”

소여은은 대답하지 못했다.

“성격이 극과 극을 달려. 그런 성격으로는 뛰어난 살수가 되지 못해. 비천살수 미안공자 숙부님께 실망했어. 지난 십 년 동안 고작 이 정도 밖에 키우지 못했다니.”

“….”

“살수는 무공이 능사가 아니야. 왜? 살수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야, 타고나는 것이지. 살수로 태어난 사람은 자신보다 훨씬 강한 사람도 죽일 수 있어. 하지만 너희들은 비슷한 사람에게도 쩔쩔매. 무공도 강하지 못하고 살수로 태어나지도 못했어.”

야이간은 분위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단순한 질책이 아닌데? 일의 성과를 분석하고 결정을 내리는 자리 같잖아?’

“소여은, 이급살수다. 앞으로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 터, 마음을 단단히 해라.”

“예.”

소여은도 적사처럼 얌전히 받아들였다.

“야이간!”

“…”

야이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말하시오’ 하고 말할 분위기는 아니고 그렇다고 ‘네’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야이간, 대답해!”

“…네.”

야이간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소고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다. 자칫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아름다운 음성에 혼이 빨려들 것 같다. 야이간이 아직도 파훼법을 생각해 내지 못한 이상한 무공에 기인한 힘일 게다.

“넌 돌아가.”

“…!”

“널 구해준 것은 소천나찰 숙부님의 안면을 생각해서야. 넌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야이간은 살천문 살수들에게 당한 상처가 갑자기 쑤셔온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닦달해라. 그래야 적당히 응수해 주지.’

“이건 충고인데, 돌아가는 길을 조심해. 살천문의 살수를 벗어나게 해주었지만 무림의 공분은 어쩔 수 없어. 널 데리고 있다가는 개파도 하기 전에 십망을 당할 거야. 아마도 개방이 네 뒤를 바짝 쫓고 있을 테니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이건 진짜잖아?’

야이간은 소고의 심중을 읽었다. 그녀는 진짜 내치고 있다. 적사와 소여은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야이간이 생각하기에는 어린아이 소꿉장난에 불과하다. 삼이도에서 세 사람의 무공을 봤지만 일신의 무명을 날리는 정도다. 그 정도의 무공으로 사무령을 꿈꾸다니.

야이간이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은자 일만 냥을 서슴없이 내주는 재력이다. 시험 삼아 내던진 돈이 그 정도면 얼마나 많은 돈을 지니고 있겠는가.

그는 갈등했다.

‘모욕을 참고 눌러 있어야 하나? 곤륜으로 돌아가서… 아니지, 곤륜에서 장문인 자리를 넘보려면 적어도 앞으로 사십 년은 기다려야 해. 소고가 가지고 있는 돈이면…’

무엇보다 도인 흉내나 내며 평생을 살기는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제 갓 여자 맛을 보기 시작했는데. 그는 소천나찰이 생각한 대로 곤륜파에서 두각을 나타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생각은 복잡했지만 정리는 빨랐다.

“용서해 주십시오. 조신해서 행동하겠습니다.”

“…”

소고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적사와 소여은도 침묵을 지켰다. 조용한 침묵이 대청을 스쳐갔다.

“야이간.”

“네.”

“넌 삼급살수야. 밑에서부터 올라와.”

“…”

“오늘 하루 결정할 시간을 주지. 떠날 때는 말없이 떠나도 좋아. 남겠다면 막내답게 행동해.”

“막내? 종리추는?”

“종리추는 특급살수야. 종리추를 만나면 나를 대하듯 대해.”

야이간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지?’

“야이간은 계륵이군요. 잡자니 망나니고 놓자니 아깝고.”

야이간이 물러간 후 소여은이 소고에게 말했다.

“백화현녀.”

소고는 소여은이 녹림도에게 얻은 무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예.”

“한 가지 잊고 있는 게 있어.”

“…?”

“야이간이 망나니라고 했지?”

“예.”

“망나니가 곤륜파에서 후기지수로 거명될 수 있다고 생각해?”

“….!”

“야이간은 치마를 두른 여자만 보면 침을 흘리는 망나니가 분명해. 하지만 그럴 때와 안 그럴 때를 알고 있어. 잊지 마. 야이간은 소천나찰 숙부님의 병법을 물려받았어.”

“….”

“야이간을 휘어잡기만 하면 큰 힘을 얻는 거야.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모르지만.”

소고, 적사, 소여은은 야이간이 떠난 문밖을 바라보았다. 마당에는 푸른빛의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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