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72화
종리추가 알고 있는 신법 중 가장 빠른 것은 적지인살의 비호무영보다. 인간이 걷거나 달릴 때 땅에 접촉하는 부분은 발바닥이다. 발바닥에는 용천혈이 있다. 발바닥에 산재한 경혈 중 가장 중요한 혈 중에 하나다. 무림 대소문파 중 용천혈에 기인한 경신법을 구사하는 문파는 거의 절반을 넘어설 정도로 많다.
비호무영보 역시 용천혈에 근원을 두고 있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용천혈에 진기를 집중시킨다. 대지의 무한한 힘과 인간의 몸에서 뻗어 나온 힘이 부딪치면 탄성을 일으키고, 인간은 더욱 강한 추진력을 얻는다. 용천혈을 생각한다면 어느 문파나 비슷비슷한 무론이다. 두 가지 난관, 인지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발놀림과 진기의 집중을 어떤 식으로 조화시키느냐는 문제와 진기를 끊임없이 흘러나올 수 있도록 어떤 방식으로 흐름을 제어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수많은 경공신법이 탄생한다.
종리추는 비호무영보를 펼쳤다. 분운추월은 까마득히 멀어져 점으로 변하더니 모습을 감춰 버렸다.
‘비호무영보는 혈염옹에게서 흘러나왔다. 혈염무극신공을 바탕으로 두고 있어. 그럼 지금 나는 본신진기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이 하찮도 안 되는 진기를 쓰고 있을 뿐. 비호무영보는 빠름에 치중한 신법이라고 했지. 빠르다. 빠른 것에 진기를 아낄 필요는 없을 터.’
종리추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갔다. 하루 만에 삼백여 리를 주파한 분운추월이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나을 수도, 더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시진 정도면 온수산 정상에 도달하리라.
쒸이익! 쒜에엑….! 옆으로 나무가 흘러갔다. 나무가 흐르는 것인가, 몸이 흐르는 것인가. 스쳐 가는 바람이 귓불을 간질였다.
‘분운추월에게 쫓긴다면 비호무영보로는 어림도 없어.’
“비호무영보는 빠르기에 치중한 신법이다. 다른 신법들을 상대하려면 네가 창안해라.”
아버님의 말씀이 뇌리를 스쳐 갔다. 어렸을 적에 들은 말이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버님의 말씀은 현존하는 경공 중에 빠르기로는 분운추월을, 은밀하기로는 청성파의 암향표를, 허공에서는 곤륜파의 운룡대구식을 상대할 만한 경공이 없다는 뜻이다.
무공은 배워야 한다. 하지만 배운 무공으로 이길 수 없을 때는 창안해야 한다. 무당파의 이형환위와 소림사의 금강부동신법은 접전에서 상대하기가 가장 난해하다고 알려졌다. 그것은 곧 경신법의 정상에 섰다는 말과도 같다.
종리추는 분운추월을 만나러 가는 동안 줄곧 경신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분운추월을 이기려면 새로운 경신법이 있어야 돼. 비호무영보로는 다른 무인은 상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분운추월에게는 안 돼.’
그렇다고 경신법이 하루아침에 깨달아질 무공이던가. 어느 순간 종리추는 관도를 버리고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지름길을 택해 가로질러야 돼. 과연 얼마나 차이가 날까?’
종리추가 택한 길은 길이 아니었다. 산을 타고 호수를 가로지르고 어떤 때는 논둑길을 달려야 한다. 준비는 충분히 해뒀다. 서평에서부터 온수산 정상까지 이르는 모든 길을 뇌리 속에 새겨두었고, 길 아닌 곳을 달리다 길을 잃어버리는 위험을 없애기 위해 군데군데 표식도 해놨다. 종리추는 분운추월을 찾아올 적에 온수산 정상에서부터 서평까지 반대로 온 것이다.
준비해 둔 말이 보였다. 마부는 아침부터 말을 매어놓고 찬바람을 맞고 있다.
“이제 오셨…”
마부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
종리추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말등에 올라타 고삐를 잡아채고 있었다.
‘이제 곧 호수가 나타난다. 배를 타고 가로지르면 거리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어.’
종리추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멀리 하늘과 비슷한 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기군. 호수야.’
“끼럇! 끼럇!”
말채찍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호수에 도착해서도 숨 고를 시간이 없었다.
“빨리 노를 저어!”
유회는 오래전부터 배를 매어놓고 종리추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남만 세 사내 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크다. 덩치가 큰 만큼 힘도 장사다.
삐이걱, 삐이걱…!
처음에는 느리게 움직이던 배가 곧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종리추가 배에 오르기 전에 너무 멀리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염려스럽기도 했다. 그의 생각은 기우였다.
종리추는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말등에 두 발을 얹은 다음 힘차게 솟구쳤다.
“아!”
유회는 이순간 노를 젓는 것도 잊어버린 채 탄성을 토해냈다. 종리추는 한 마리 새였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나는, 허공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한 새였다. 제비가 수면을 스치며 날 듯 허공에서 두어 번 허리를 뒤틀던 종리추가 사뿐히 뱃전에 올라탔다.
히히힝…!
뒤늦게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호수가 있는 줄 알면서도 연신 휘둘러 대는 채찍질에 속도를 늦추지 않던 말이 호수에 빠지며 내지른 소리였다.
“최대한 빨리!”
유회는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반대쪽에서 종리추도 노를 저어댔다.
‘일 다경 갈 때보다 빨랐어. 좋아!’
종리추와 유회가 사력을 다해 노를 저은 덕분인지 분운추월을 찾아 갈 때보다 훨씬 빨리 도착했다.
“더 이상 볼일 없어. 바로 장원으로 돌아가도록 해!”
말을 마친 종리추는 배가 호변에 닿기도 전에 신형을 띄어 올렸다. 비호무영보가 다시 펼쳐졌다.
지금부터가 가장 큰 고비다. 산을 넘어가야 하는데 길이 없다. 또한 크고 작은 바위가 가득해 그냥 걷기도 힘든 바위산이다. 주민들은 호변에 있는 바위산을 백산이라고 부른다. 나무나 풀이 자라지 않고 온통 바위뿐인지라 사시사철 하얗게 빛나기 때문이다. 종리추는 바위산에서 하루를 꼬박 지새우며 길을 열어놓았다.
‘됐어. 저기군.’
바위산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까닭인지, 아니면 길을 여느라 바위산을 샅샅이 뒤진 덕분인지 백산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표식도 금방 찾아냈지만 굳이 표식이 없어도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쉬익!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달리는 비호처럼 비호무영보를 펼치는 종리추의 신형은 나는 화살보다도 빨랐다. 개천을 건너뛰고, 논둑길을 치닫고, 말을 타고, 말을 버리고 다시 비호무영보를 펼치고…. 종리추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온수산을 향해 치달았다. 드디어 온수산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시진 반.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 일 다경… 백 리를 두 시진 만에 주파한다 해도 내가 이긴다. 그보다 빠르면… 분운추월이야말로 당대제일의 경공 대가다.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온수산 정상까지 오르는 등산로는 모두 네 군데다. 그중에 종리추가 도착한 곳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지만 직선 거리로는 제일 짧은 곳이다. 봄을 맞아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벌써 꽃망울을 터뜨려 노랗고 빨간 꽃도 보이고… 주변 풍경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종리추의 눈에는 오직 정상밖에 보이지 않았다.
온수산 정상은 미끄럽기 이를 데 없는 모래로 뒤덮여 있다. 원래는 큰 바윗덩어리였으나 풍우에 시달려 작은 모래로 삭아버렸다. 범인들은 너무 미끄러워 오를 엄두도 내지 못한다. 간혹 몇몇 사람이 정상에 올라서려고 하지만 미끄러운 돌모래에 미끌어져 주르륵 밀려나곤 한다. 정상은 평평했지만 정복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휴우!”
종리추는 정상에 올라서며 큰 숨을 토해냈다. 서평에 가기 전 이미 올라와 봤던 정상이지만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내처 달려온 끝에 올라선 정상은 새로운 감회를 불러왔다.
상채 역시 서평에 못지않은 큰 도읍이다. 온수산 정상에서는 상채의 분주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 지는 저녁놀을 감상할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이겼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때,
“개뼈다귀, 이제야 도착한 게야?”
바로 옆, 움푹 패인 바위 속에서 분운추월이 징그럽게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렇게 빠를 수가!’
종리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도 졌으니 승복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빠를 수 있단 말인가.
분운추월 역시 놀랐다.
‘이렇게 빠르다니! 이놈은 혜미 선사나 추풍섬전보다도 빨라! 어떻게 이 어린 나이에… 이놈이 사오 년만 수련하면 나를 능가할지도 몰라. 중원에 이런 놈이 있었다니.’
분운추월은 자신이 이긴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은 중원제일의 경공 대가이지 않은가. 무공이라면 몰라도 경신법에서는 ‘중원제일’이라는 말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 어쩌면 그런 아집 때문에 무공 성취가 조금 떨어지는지도 모른다. 시간의 대부분을 경신법 수련에 쏟아 붓고 있으니.
그는 종리추가 잘 봐줘야 반 시진 정도 늦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것도 많이 봐줘서 그렇다. 소림의 혜미 선사와 점창파의 추풍섬전이 그 정도의 경신법을 지니고 있으니까.
그런데 간발의 차이로 정상에 올라서다니!
종리추는 털썩 주저앉아 산 아래를 훑어보았다.
‘틀렸군. 이렇게 빨리 끝나게 될 줄이야. 역시 도박이었나? 후후! 도박을 하지 말라던 어머님 말씀이 옳았군.’
종리추도 분운추월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될지 난감하기만 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마주 대고 앉아 저녁놀에 물든 상채를 바라보기만 했다.
분운추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견도장에 있는 건 어찌 알았나?”
적의가 한결 가신 음성이었다.
“중원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인데 살문 문주가 모른대서야 말이 됩니까?”
종리추의 음성도 한결 부드러웠다. 이제 종리추의 목숨은 분운추월에게 넘어갔다. 하나 그 때문은 아니다. 분운추월은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던 종리추에게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은인이었다.
“세상에 견도장이 하나둘인가?”
“살문 상판식에 참석했고 북쪽으로 올라갔다면 서평밖에 더 있습니까?”
“뛰어난 판단이군.”
“…”
“날 죽이러 오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죽이러 온 놈이면 눈빛부터가 달라. 아무리 배포가 큰 자라도 나 같은 자를 죽이려면 암습을 시도할 게야. 무엇 때문에 왔나?”
“….”
종리추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무림을 너무 가볍게 보았다.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공에서 이렇게 꺾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무인과 겨뤄 죽는 날은 일 대 일을 결전이 아니라 합공에 의한 경우뿐이라고 생각했다.
자만이요, 오산이다. 분운추월을 계략으로 옭아매 숨통을 틀어쥘 계획이었으나 모든 게 끝나 버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나 하찮은 계략인가. 죽이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세계에서 무공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잔재주 나부랭이나 펼쳤으니…
“비무에서 이겼으니 이제 네 목숨은 내 것. 살문주의 목숨이 내 것이니 살문은 개파하자마자 봉문하겠군. 무림 역사상 생명이 가장 짧은 문파가 되겠어.”
“…”
“하나만 묻지. 올겨울에 있었던 일련의 살인 사건들, 자네가 주도했나?”
종리추에 대한 호칭이 개뼈다귀에서 자네로 바뀌었다.
“…”
“살문을 일으킨 목적이 무엇인가?”
“….”
“내 생전에 살수 집단이 개파 선언을 하는 것은 처음 봤어. 들은 적도 없고. 어떤 미친놈인가 싶었지. 그래서 상판식 때 살짝 찾아가 본 거고. 흠! 여느 장원이나 다름없더군. 기관도 없고, 무인도 없고, 하다 못해 무림문파라면 있어야 할 연무장도 없었어. 그게 어디 문파인가? 장원이지. 겨울에 있었던 살인 사건만 아니라면 세상에 할 일 없는 놈도 많구나 하고 생각했겠지.”
“….”
“개파 선언을 한 무엇 때문인가?”
“….”
“벙어리가 되기로 작정한 겐가? 아까는 잘도 나불대더만.”
“말을 탔습니다. 구주에서. 옹호에서는 배를 탔고, 백산을 넘었습니다. 성안에서 준마를 탄 다음 여시에서부터 경신술을 펼쳤습니다. 길이 험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거리는 절반으로 줄였다고 생각하는데… 어디로 오셨습니까?”
분운추월은 새삼 종리추를 쳐다봤다. 그의 말대로라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했다. 부평초처럼 중원을 떠도는 사람인지라 개방도마저 쉽게 종적을 찾아내기 어려운 자신인데, 그는 서평 견도장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준비했다.
‘살수라 다르긴 다르군. 암습을 했다면 성공했을지도 모르겠군.’
“비슷한 길로 왔지. 노선이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얼추 비슷해. 경신법의 바탕이 뭔지 아나? 길을 많이 아는 거야. 그 다음은 아는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무공이지.”
종리추는 많은 것을 배웠다.
“무엇 때문에 찾아왔나? 목숨을 맡았지만 죽이지는 않을 테니 말해봐.”
분운추월은 종리추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가 겨울에 있었던 살인 사건의 주범이고 살수라면 어쩌면 죽여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죽이고 싶지 않았다.
“도와달라고 찾아왔습니다.”
“…?”
“십망에 대해서 압니다. 전 십망에 걸려들고 싶지 않습니다.”
“호오! 그래?”
“개방의 눈을 주십시오.”
“…”
“짐작하신 대로 살문은 살수 집단입니다. 또 청간에 적힌 대로 무모한 살생은 피하고자 합니다. 죽여야 될 자, 죽이지 않아야 될 자를 구분해야겠습니다.”
“네 이놈! 좋게 봐주려 했더니! 나보고 사람을 죽이는 일에 동조하라는 말이냐!”
분운추월은 격노하여 손을 치켜들었다. 진기가 가득 실린 일장에서 묵중한 경기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왔습니다. 개방 이장로의 목숨을 움켜쥐고 개방 방주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 응한다면 다행이고 응하지 않아도 손해 볼 건 없으니까요. 정당하게 비무를 위해서 움켜쥔 목숨인데 방주라 한들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뭐 뭣!”
“반년. 반년 동안만 정보를 달라고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 기간이면 충분하니까. 죽이지 않으신다 했으니 후의에 감사드리며 이만 물러갈까 합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종리추는 일어섰다. 정중한 포권지례. 그리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산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살수가 될 놈이 아냐. 저런 놈이 살수의 길을 걷다니… 휴우!’
분운추월은 살수를 경멸했다. 사도인, 마도인, 색마, 도둑… 그들보다도 훨씬 더 미워했다. 살수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으로. 종리추는 살수에 대한 편견을 어느 정도는 씻어주었다.
‘저놈은 살수 중의 살수가 될 놈이야. 후환을 없애려면 더 크기 전에 정리해야 돼.’
그는 알고 있다. 종리추같이 치밀한 놈은 여간해서는 꼬리를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고 있어야 돼. 눈을 크게 뜨고.’
그는 할 일이 생겼다. 하지만 방주에게 보고할 시기는 아니다. 하찮은 살수 문파 하나 가지고.
“중문에서 포목점을 하는 이원지라는 놈이 있는데 죽여주실 수 없는지…”
“명확히 말씀하세요. 살인 청부인가요?”
“예? 예, 살인 청부입니다요.”
평생 땅만 갈았을 순박한 중년인이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죽일 생각을 했지? 혹시 살천문에서? 아님 다른 문파에서? 안 돼, 이래서는.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야 돼.’
중년인이 청부금이라고 가져온 물건도 곤혹스럽다.
“절대로 망실해서는 안 된다는 유언이 있었습죠. 조상 대대로 물려 온 유물입니다. 돈이 없으니 이거라도…”
그런 말을 하며 내놓은 물건은 검으튀튀한 불상이었다. 황동으로 만든 듯한데 오랜 세월 동안 닦지를 않아 색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시중에 내다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으려나. 많이 받지는 못하리라.
“살인 청부라니 좀 당황스럽군요. 장주님도 살인 청부는 안 된다고 하시텐데. 어쨌든 지금 출타 중이시니 객방에서 쉬고 계세요. 늦어도 내일은 답을 주실 수 있을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중년인은 잔뜩 주눅 들어 왔다가 부드러운 응대에 기운이 난 듯했다.
‘어떻게 하지? 중문 이원지라… 그가 누군지 어떻게 알아, 하루만에. 휴우!’
종리추는 장원에 있지만 상의할 계제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해결할 방도가 있겠는가.
다음날 아침, 집무실로 들어선 벽리군은 탁자에 낯선 서신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누가 말도 없이 서신을?’
무심코 펼쳐 보던 벽리군은 깜짝 놀랐다.
청부자 왕독곤.
포목상 이원지에게 은자 석 냥을 받기로 하고 열네 살 먹은 딸을 첩으로 들여 보냄. 이원지는 동전 백 냥을 주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다섯 달이 지난 후 딸을 돌려보냄. 나이가 너무 어려 입궁이 어렵다는 게 이유.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간단한 서신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이 정도면 확실한데 청부금이 너무 형편없어.’
벽리군이 중년인이 준 불상과 서신을 들고 종리추를 찾았다.
“하하하하!”
종리추는 크게 대소했다.
“그분이 도와주시는군. 하하! 총관, 총관 뒤에 그림자가 붙었으니 안심해도 좋아. 서신을 보고 청부를 판가름해. 완전히 믿어도 돼. 그리고 이것, 은 세공품이군, 왕독곤이라는 사람, 조상의 유물을 한 번이라도 닦았으면 딸을 은자 석 냥에 팔아먹지는 않았을 텐데.”
종리추가 헝겊을 들어 불상을 닦아내자 얼마 안 있어 하얀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정말 은 세공품이었다. 세월의 흔적이 너무 많이 묻어 닦아내기가 쉽진 않았지만.
어쨌든 벽리군의 고민은 말끔히 해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