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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8화


적지인살은 오채산을 빠져나와 백하로 치달렸다. 백하는 복우산에서 발원하여 남양을 거쳐 호광성으로 흘러든다.

‘도주하는 자는 숨는 게 상식이다. 숨을 것조차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 심리가 쫓기면 숨게 되어 있다.’

적지인살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신법을 전개했다.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상관없었다. 감시자의 눈길이 붙어 다니든 멀리 떨어져 있든 신경 쓰지 않았다.

‘주의를 집중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겉으로 환하게 드러나는 것과 안으로 꼭꼭 숨어 당황하게 만드는 것. 겉으로 드러났으니 안으로 숨는다.’

십망이 발동되면 구파일방은 중원 전역에 천라지망을 펼친다. 쫓는 자가 열 명이면 한 문파가 한 명을 맡는다 해도 전체가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문파에서 파견된 장로급 무인과 문도들만 움직인다. 다른 성에 거주하는 무인들은 비상사태에 대비해 그물의 한 코를 구축한다. 십망이 선포된 순간부터 구파일방은 시시각각 소식을 주고받는다. 전서구, 화연, 묵린탄 등 연락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총동원한 그들의 연락망은 세상 무엇보다도 빨라, 사천성에서 산동성에까지 중원을 동서로 횡단하여 전서가 도달하는 데 이틀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하남성에는 세 개 문파의 본산이 있다. 소림, 개방, 공동. 이들은 동원됐을 테고 한 군데는… 가장 가까운 무당이다. 틀림없어. 무당이 동원됐어.’

자신을 쫓는 문파는 개방이다. 오채산에서 그들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알아보았다. 의형들도 이미 자신들을 쫓는 문파 정도는 알아냈을 게다.

‘허점이 있어야 되는데 허점이 없어.’

적지인살은 신법을 전개해 치달리면서도 쉼 없이 십망에 대해서 생각했다. 적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은 공방 어느 쪽에서나 필수적인 요소다. 십망에는 허점이 없다. 구파일방에서 무려 십 년 동안이나 다듬고 다듬은 천라지망이다.

두 시진 만에 백하까지 달려온 적지인살은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강물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자네 손에 목숨이 달렸네.”

“쯧! 어쩌자고 구지신검을 죽였나. 자네의 적지도 발각되었다던데 좀 조심하지 않고. 하기는 구지신검이 그런 여유를 줬을 리 없지. 걱정 말게. 빠른 배로 준비해 놓지.”

“내 목숨뿐만이 아니네. 운이 닿으면 의형 중 한 분쯤은 목숨을 살릴 수 있어. 모두 자네 손에 달렸네.”

“걱정 말라니까. 자네 아니었으면 아직도 자식 놈 원수를 지켜보며 살고 있을 텐데.”

“고맙네.”

배는 없었다. 빠른 배는 고사하고 나룻배 한 척 없었다. 적지인살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황혼을 보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닭을 구워 먹고 있는 개방도들도.

‘짐작은 했지만… 모든 행동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인가. 구파일방을 잘 알고 자신을 잘 아는데 솟아날 구멍이 정녕 없단 말인가.

‘오늘 밤… 적어도 오늘 밤 안에는 모습을 감춰야 돼. 그래야 모든 시선이 내게 집중돼.’

적지인살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형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 주고 싶었다. 자신 하나 사라진다고 천라지망에 구멍이 뚫리지는 않겠지만 약간은 당황할 것이고, 그 약간의 당황이 어쩌면 의형들에게 힘을 실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개방은 나를 보고 있어. 거기에는 흔들림이 없다. 내가 숨고, 개방이 흔들리고, 다른 문파에 전달되고… 하루는 여유가 있어야 돼. 그러려면 오늘 밤밖에 시간이 없어.’

“사부님.”

옆구리에 매달려 있던 종리추가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

“저… 걷고 싶어요. 토할 것 같아요.”

“허!”

적지인살은 종리추를 내려놓았다. 종리추는 내려놓자마자 구역질을 해댔다. 종리추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땅밖에 없었으니 당연하다. 아마도 땅이 빙글빙글 돌았을 테지.

‘다음에는 혼혈을 짚어야겠어.’

한동안 속에 있는 것을 모두 토해낸 종리추는 시원한 표정이었지만 낯빛은 창백하리만치 핼쑥했다. 강변은 바닷가처럼 고운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졌다. 적지인살은 강변을 따라 산책이라도 나온 듯 천천히 걸었다. 종리추가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찍으며 뛰어놀아도 내버려 두었다. 개방의 눈은 보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 닭을 구워 먹던 개방도들이 아스라이 보일 무렵, 이번에는 구걸해온 동냥 밥을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한 무리의 거지 떼들이 나타났다.

퍼엉!

하늘로 폭죽이 쏘아졌다. 뒤쪽에 있던 개방도가 쏘아 올린 폭죽이었다. 개방도는 숨길 필요가 없다는 듯 공공연히 감시했다. 적지인살은 강변 한쪽 구석에 앉아 쉼 없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하지만 하늘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지는 해를 환송이라도 하는 듯이 휘영청 떠오른 달은 밝은 보름달이었다. 날씨도 맑아 하얀 달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적지인살은 제일 먼저 유영을 생각했다. 배를 탈 수 없으면 헤엄쳐 간다. 건너편에도 개방도가 있을 게 뻔하니 물살을 따라 흘러간다. 그러다 개방도가 보이지 않는 곳에 이르면 조심스럽게 올라온다. 그리고 변복을 한 후 사라진다.

‘풋! 그게 통한다면 개방이라 할 수 없지. 이제 갈 시간…?’

적지인살은 깜짝 놀랐다. 두 번째로 생각한 것, 야산으로 들어가 숨바꼭질을 할 시간이었다. 아무리 달빛이 밝고 개방의 눈이 사방을 훤히 밝히고 있다지만 야산을 타면 이목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삼십 하는 개방도들의 무공이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으니. 적지인살이 움직이기 위해 일어섰을 때, 그는 이미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십 장, 사십 장… 거리는 일정하지 않았지만 그를 중심으로 빙 둘러서 작은 모닥불이 일렁거렸다.

‘강으로 왔으니 강으로 들어가라는 것인가.’

적지인살은 움직일 곳이 없었다.

‘아직 하루 반이 남았어.’

“추야, 마을로 들어가자. 배를 채워야지.”

“네.”

종리추는 먹는다는 말에 환하게 웃었다.

모물촌은 가구 수가 백여 가구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다. 그들 중 절반은 백하에서 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고, 나머지 절반은 오가는 행인을 상대로 술도 팔고, 밥도 팔고, 여자도 팔았다. 나루터를 끼고 있는 마을이 으레 그렇듯이. 종리추는 밤이 깊었는데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뭘 먹을까?”

“소면요.”

묻기가 무섭게 대답이 튀어나왔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애였다.

“소면… 그래 소면 먹자.”

소면을 먹자던 말은 모물촌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바꿔야 했다. 모물촌에는 잔치가 있는 마을처럼 거지들이 득실거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매듭이 엮인 허리띠를 둘러맸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도 행상이 고작이었다. 편하게 자리를 잡고 먹을 수 있는 객잔이나 주루는 모두 문을 닫아걸었다. 밤이 늦었다지만 술장사는 이제부터 시작인데.

‘혼잡한 곳은 철저히 차단하는군.’

“소면은 나중에 먹고 우선 만두나 먹어야겠구나.”

적지인살은 만두 파는 행상에게 어른 주먹만한 만두 두 개를 샀다. 종리추는 맛있게 먹어댔다. 반면에 적지인살은 혀에 모래라도 낀 듯이 깔깔했다. 모든 계획이 사전에 차단되고 있다. 준비해 놓았던 것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개방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오채산 산마을에 준비해 놓았던 마차도 깨끗이 사라지고 없을 게다.

‘오늘 밤 안으로 흔적 없이 숨어야 하는데, 오늘 밤은커녕 내일도 숨지 못하겠군. 의형들도 같은 입장일 텐데…’

문득 적지인살은 맛있게 만두를 먹고 있는 종리추를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도주의 달인이 옆에 있었다. 종리추는 쫓던 살천문의 살혼부와 버금가는 살수 집단이다.

그들에게는 망혼대라고 불리는 죽음의 그림자들이 있다. 그들이 굶주린 이리 떼들처럼 목표를 물어뜯는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그들에게 찍히면 질리도록 끈질긴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러다 상처라도 입게 되면, 끝이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이리 떼의 공격을 막을 방도가 없어진다. 곰이 이리 떼에 물려 죽듯이… 발버둥 치다가 죽는다. 살천문은 청부를 어긴 적은 없지만 목표를 잃은 적은 있다. 그것도 꼬마 아이를.

적지인살은 반대로 생각해 보았다. 종리추가 원수라면? 살혼부에서 종리추를 죽여야 할 상황이었다면? 적지인살은 십 할 자신했다. 종리추 같은 꼬마를 죽이는 것은 신경 쓸 일도 아니었다. 살천문도 그렇게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결론은 어떤가. 그들은 망혼대를 풀었고, 자신과 무공이 비슷한 은형마인과 탈혼강추까지 나섰다. 그래도 꼬마 하나를 잡지 못했다. 살혼부에 비교하자면 이형, 삼형, 사형, 그리고 자신까지 나섰는데도 잡지 못한 것과 진배없다.

“시중 필요하지 않으세요? 먹여주시고 재워주시기만 하면 돼요. 시켜보면 아시겠지만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당시 적지인살은 태연한 종리추의 얼굴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신을 의탁하는 종리추의 얼굴 표정은 너무도 순진하고 착했다. ‘궁핍하게 자라왔구나!’ 하는 느낌은 들었지만 쫓긴다거나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절박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계시나?”

“아뇨. 모두 돌아가셨어요.”

“일가붙이는?”

“아무도 없어요.”

“나는 시종을 둘 형편이 아니란다.”

“사실은… 글을 배우고 싶어서 그래요. 저 같은 놈이 어디서 글을 배울 수 있어야죠. 시종으로 있다 보면 어깨 너머로 글을 익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것도 거절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 보기보단 일을 잘하거든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종리추요. 종리추예요.”

말하는 모양새가 영특하고 귀여웠다. 웬만해서는 거절하지 못할 조건을 내세웠고, 믿어도 좋다는 안심까지 붙어 넣었다. 종리추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종리추의 바람대로 시종으로 두면서 글이나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일이 터졌다. 구지신검을 죽이겠다는 대형의 결심은 단호했다. 앞날이 훤히 보이는데도 대가 한 푼 없이 죽이겠단다. 그럴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개인적인 원한.

적지인살은 종리추의 집에 두기가 무섭게 구지신검을 죽이는 일에 매달렸다. 구지신검의 성격, 습성, 기호품을 알아내고 무공의 정도를 파악했다. 암살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고, 장소까지 이끌어낼 유인책도 생각해야 했고… 할 일이 많았다. 살천문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그 끝이 종리추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구지신검을 죽인 다음이었다. 육체 공지장이 소고의 안위를 위해 제물로 바칠 아이들을 데려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살혼부의 후계자 소고. 소고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한다는 것이 대형의 생각이자 공동사부인 의제들의 생각이었다. 네 아이는 소고를 대신해 죽는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소고의 수하가 되어 살혼부를 이끌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심을 품은 아이들이 필요하다. 소고를 뒷받침해 단시일 내에 기반을 잡아줄 강력한 살수가 되기 위해서는.

종리추를 데려갈 때만 해도 ‘꼬마가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만 했지 살천문의 집요한 추적을 어떻게 피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청난 일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한 사건이었다.

“추아야, 살천문이 쫓는 걸 언제 알았니?”

“죽이기 전에요.”

종리추는 주먹만한 만두 한 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입맛을 쩍 다셨다. 적지인살은 자신이 먹던 만두 한 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는 입맛을 쩍 다셨다. 종리추는 쓰다 달다 말 한마디 없이 만두를 받아먹기 시작했다.

“황정이 살천문의 눈이었다는 걸 알고 죽였단 말이냐?”

“네. 소문이 났는걸요.”

소문이 났을 리 없다. ‘살천문의 눈’들은 살천문과 연계되어 있는 것을 극비리에 부친다. 죽이기 전에 알았다면 황정에 대해 조사해서 알아낸 것이리라.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못 믿어야 할지 모를 아이군.’

역시 마두 아니면 효웅이 될 상이었다.

“살천문이 뒤쫓을 걸 생각했을 텐데, 걱정은 되지 않았니?”

“사지무근.”

꼬마답지 않은 말이었다.

‘죽은 자는 근심이 없다. 죽을 각오를 했다는 말인데…’

적지인살은 종리추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소고의 대용물로는 더 이상 적당할 수 없어. 만약 살아남게 되더라도 무공을 가르쳐서는 안 돼. 이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아이야.’

속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런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다.

“날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도망쳤니?”

“히히, 무조건 도망치는 거죠. 뭐 도망치는 데 방법이 있나요?”

적지인살은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 구파일방의 천라지망은 적의 생각을 읽고, 모든 계획을 차단하는 데서 시작한다. 준비해 놨던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듯이. 움직이는 곳마다 지키고 서 있듯이.

‘무조건 도망친다. 그래.’

적지인살은 만두를 먹고 있는 종리추를 들어 옆구리에 꼈다. 그리고 신법을 전개해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적지인살은 곡예를 하다시피 방향을 틀며 신법을 전개해 개방도를 따돌렸다. 개방도는 넓게 포진했지만 이결제자로는 적지인살의 신법을 따라잡지 못했다. 넓은 간격을 이용해 서로 연락을 취하면 적지인살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종적을 놓칠 리 없지만 개방도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개방도가 보이지 않자 비로소 맑은 공기도 들이마실 기분이 되었다.

‘개방도가 아무리 많아도 중원 전체에 깔려 있을 수는 없겠지. 목이야. 목을 지키고 있어. 목을 피해 가야 해. 우선 방향을 바꿔야 해.’

개방도는 적지인살이 뛰쳐나간 방향을 알고 있다. 이미 전갈을 주고받아 하남성에 있는 전 문도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피곤했지만 쉬지 않았다. 피곤하다고, 개방도를 따돌렸다고 여기서 잠이 든다면 눈을 뜨자마자 들판에 빼곡이 늘어서 있는 거지 떼를 보게 될 터이다.

‘사람을 만나자면 안 돼. 그전에 할 일이 있지.’

적지인살은 불빛이 비치는 집을 살폈다. 시간이 자정에 이르러 불을 밝혀놓은 집은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찾지 못한 것도 아니다. 한밤중이라 옅은 불빛도 멀리까지 비쳤다. 적지인살은 불빛이 켜진 집으로 달려갔다.

“여보시오!”

어지간히도 가난한 집에서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여보시오! 여보시오! 문 좀 열어주시오!”

근 십여 번을 외친 끝에야 초로의 노파가 등잔을 들고 나타났다.

“뉘시오?”

“야밤에 미안하오만 밥 좀 얻어먹읍시다. 사례는 톡톡히 하겠소.”

노파는 의심쩍은 눈으로 적지인살을 뜯어보았다.

“나는 괜찮소만 이 아이가…”

적지인살은 종리추를 가리켰다. 종리추는 힘없이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모물촌인데 거기서 자시지…”

“모물촌까지 가기에는 너무 허기가 져서 그렇소. 부탁하오.”

적지인살은 노파의 쭈글쭈글한 손에 동전 두 냥을 쥐어주었다. 노파의 얼굴이 환해졌다.

“속을 든든히 채워둬라.”

적지인살은 당부할 필요도 없었다. 종리추는 나물뿐인 반찬을 맛있게 먹어댔다.

‘만두 두 개를 먹고도 또 먹다니. 이런 애가 어떻게 벽곡단만 먹고 버텼지?’

“사부님도 어서 드세요.”

“그래.”

“그런데 사부님, 모물촌은 비껴갈 거죠?”

‘허어!’

적지인살은 낯빛이 굳어질 뻔했다. 실제로 그는 모물촌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야지.”

적지인살은 노파의 귀가 활짝 열리는 것을 직감했다.

“배도 없는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할 수 없이 슬쩍해야겠네요?”

‘허! 이것 참…!’

이것도 맞는 말이다.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겠지만 나루터로 가서 배를 훔쳐 남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쳐 호광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종리추는 머릿속에 담긴 계획을 속속들이 말하고 있다.

“아! 배불러. 배 터지겠어요.”

종리추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이 아이를 만난 게 복인가 화인가?’

적지인살은 쉽게 구분하지 못했다. 그가 불 켜진 집을 찾아 밥을 얻어먹은 것은 계획을 누설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노파가 의심하지 않고 개방도가 의심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하나 그 ‘자연스럽게’가 힘들었다. 밥을 먹을 동안 계획을 누설해야겠는데 어디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했다. 그때 종리추가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 것이다.

“어떻게 알았니?”

다짜고짜 물었다.

“오선 길을 다시 가는 건 흔히들 쓰잖아요.”

“그게 아니라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 말이다.”

“밥을 먹을 이유가 없잖아요, 갈 길도 바쁜데. 밥을 먹자고 들어간 것은 할 말이 있다는 것이고, 할 말이란 거지들에게 소문이 들어가는 것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갈 길을 말해 주는 거요.”

‘애늙은이…’

적지인살은 그런 생각을 했다. 종리추는 애늙은이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생각났다. 적사, 적각녀, 야이간… 그들도 애늙은이일까?

‘다른 아이는 몰라도 야이간은 그럴 거야. 눈칫밥을 많이 먹은 아이들일수록 그렇지.’

눈칫밥은 적사나 적각녀도 남들 못지않다.

‘골치 아픈 아이들이군. 이들이 모두 살아서 소고의 수족이 된다면… 오늘 같은 일은 당하지 않을 텐데…’

“아까 흔히들 쓴다고 했는데 너도 써 봤니?”

“네. 살천문에 쫓길 때요.”

“살천문이 어떻게 행동하든?”

“제가 말한 대로 따라왔어요.”

그럴 것이다. 숨는 자는 어떤 경우든 자신의 향로를 밝히지 않는다. 향로를 누설했다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다. 말한 것과 반대 방향으로 가겠다는 것이 첫째다. 누구든 그렇게 받아들일 게다. 또 하나는 적이 미리 짐작하고 반대 방향으로 갈 때를 역이용하여 누설한 방향으로 간다. 가는 길은 두 군데뿐이나 생각은 얽히고설킨다. 한 번 생각하느냐, 두 번 생각하느냐, 세 번 생각하느냐… 한 번 생각하는 것과 세 번 생각하는 것은 같은 방향이되 의미는 상당히 다르다. 살천문 같으면 세 번쯤 생각했을 게다.

“그래서?”

호기심이 살며시 다가왔다.

“저는 배가 아니고 마차였는데, 탔죠 뭐.”

“타? 어떻게?”

“그냥 어자석에 앉았어요. 머리 풀고 여자애 옷 입고요.”

“허!”

적지인살은 탄식을 불어냈다. 보물을 숨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늘 보아오던 풍경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이 아이는… 지금이라도 칼만 쥐어주면 살수가 될 수 있어.’

적지인살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살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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