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85화
‘너무 아름다워. 그런데 차가워.’
벽리군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종리추를 찾아온 미모의 여인은 너무 아름다웠다. 뭐랄까?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여인이라고 해야 할까? 여인은 그랬다.
여인은 소고라고 불린다. 종리추를 살수 세계에 발을 딛게 만들었고, 죽으라는 명령까지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여자다.
“문주님은 닷새 후에나 오실 거예요.”
“기다리지.”
여인은 건방지기까지 했다.
“저…”
“….?”
“적지인살께서 여기 와 계신데 만나보시겠어요?”
“숙부님이?”
“예.”
“안내해.”
소고는 마치 제 집에 온 듯 당당했다. 그런데도 벽리군은 싫은 기색조차 내비치지 못했다. 그녀는 종리추의 주인, 마음속 연인의 주인이다.
“네, 네가 소고냐?”
적지인살은 소고를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몰라보시겠어요? 저는 기억나는데.”
“너무 아름다워졌구나.”
‘네 할머니랑 어쩌면 이렇게 빼닮았니.’
적지인살은 하마터면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할 뻔했다.
대형 청면살수의 혼을 빼앗아가고, 십망을 받게 만들었으며, 살혼부 형제들을 쥐구멍에 숨게 만들었던 영영.
소고는 영영을 빼다 박았다.
아마도 대형은 소고의 어린 모습에서 영영의 그림자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소고만큼은 영영처럼 살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을지도 모르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무령이 되는 길밖에 없다고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너무 아름다운 여자는 너무 추한 여자처럼 세상을 살기가 쉽지 않다.
힘이 없으면서 아름다운 여자는 한순간 방심으로 타락한 인생을 보내기 십상이다.
영영이 그러지 않았던가.
“다치셨다고 들었는데 상처는 어떠세요?”
“허허! 괜찮아. 이제 늙어가는 몸인데 사지만 자유롭게 놀려도 괜찮지. 살수가 되어서 제 수명을 다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야.”
“그런데 이분들은?”
소고는 적지인살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아! 내가 소개를 잊었군. 이 사람이 내 안사람이야.”
“아! 배금향 숙모님?”
“반갑구나.”
배금향이 어색하게 말했다.
소고는 같은 여자마저도 질투가 날 만큼 아름답다.
아름다움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인데, 소고에게서는 건드릴 수 없는 벽이 느껴진다. 돈으로 유혹하려면 천하제일의 갑부는 되어야 할 것 같고, 무공으로 유혹하려면 거대 문파를 이끄는 영수가 되어야 할 것 같은 그런 여자다.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소고는 고개만 까딱했다.
“이분은 모진아라고…”
“주공의 노예요.”
모진아가 적지인살의 말을 가로챘다.
“주공? 노예?”
“종리추를 따르는 분이란다.”
소고는 이채를 띠었다. 궁금함을 자아내던 인물이다.
안으로 침잠된 기운. 무공이 절정에 이르러야 가능한 기세다. 이 정도의 무공을 지녔다면 적어도 일파의 장문인 정도는 될 텐데…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 주공? 노예? 종리추를 따르는 분?
모진아가 스스로 노예라고 밝힐 수 있는 것은 떳떳하다는 뜻이다.
종리추를 주공으로 모셔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무엇이 종리추를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었을까.
“이분은 홍리족 족장님이시네.”
두맥은 고개를 숙여 보였고, 소고는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소고에게 두맥은 신경 쓸 대상이 아니었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 나이가 든 여인은 소용이 되지 않는다.
소고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소용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였다.
“그리고 이 아이는…”
“아내예요.”
“….?”
“종리추가 제 상공 된다고요.”
소고는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녀 역시 관심의 대상이었다. 소여은이 함초롬한 백합이라면 이 여인은 활짝 핀 장미다.
거침이 없고 밝으며 귀엽다.
‘종리추에게 어울리는 여자군. 어쩐지 소여은에게 마음 뺏기지 않더라니…’
소고는 소여은이라는 말 대신 자신을 집어넣고 싶었다.
그녀 역시 여자다. 사내가 보내는 선망의 시선이 귀찮을 리 없다. 적사도 그런 눈빛을 보내왔다. 잘 간 칼날 같은 사내라 크게 표시하지는 않았지만 소고는 적사의 마음을 읽었다.
야이간에게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써먹을 수는 있되 가까이할 존재는 아니다.
그런 자에게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종리추는 예외다. 그는 소여은도 보았고 자신도 보았다. 그런데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벽리군 같은 천박한 여자에게나 자신감을 표시하는 그런 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멸시도 했다.
‘이런 여인이 옆에 있으니 눈을 돌릴 리 없지.’
소고는 어쩐지 가슴 한쪽이 텅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검극진천.”
“….”
“가능하겠소?”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어 물었다.
“죄과는?”
“살수는 청부받은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후후후!”
“사연은 말해 줄 수 없소.”
“그럼 돌아가.”
“….?”
“….”
“은자 일만 냥을 내겠소.”
큰 금액이다. 살수행을 하는 문파라면 어느 문파에서나 확 달려들 만큼 매력적인 금액이다.
종리추는 침묵을 풀지 않았다.
그는 대답을 기다렸다, 왜 검극진천을 죽이려고 하는지.
“살천문으로 갈 수도 있소.”
“가.”
“….!”
“난 이런 신경전은 딱 질색이야. 한마디만 하지. 말하기 싫으면 살천문으로 가. 살문에 맡기고 싶으면 이유를 말해.”
“…”
이번에는 영웅건을 두른 사내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휴우! 좋소. 검극진천은 비열한 인간이오.”
“….”
“검극진천과 아버님은 동문이오. 사형제 간이죠. 아버님이 사제셨소. 사문은 검안문이라고 송정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문파였소.”
청년은 목이 마른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유구가 차를 따라주자 그는 단숨에 들이켰다.
“검안문에는 두 가지 검공이 있는데 아버님이 익힌 검안검리와 검극진천이 익힌 검안검극이오. 두 검공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쌍벽을 이루었는데, 검극진천이 검안검리와 검안검극의 공통점을 찾아냈소. 두 검공은 원래 하나였는데 어떻게 해서인지 둘로 나뉜 것인데….”
검극진천의 무재는 뛰어나다. 아니, 굉장하다. 보통 뛰어나지 않고서는 사문의 무공이라도 연계를 찾아내기 힘들다.
“검극진천은 검안검리를 보고 싶어했는데 아버님이 거절하셨소. 그럴 리 없다시면서.”
“죽였나?”
“아! 살수는 쓰지 않고 비급만…”
“그대 아버지라는 사람, 대단히 옹졸한 사람이군.”
“….”
“그래서 검극진천을 죽이고 검안검리를 찾아달라?”
“검안검극까지요.”
종리추는 한참을 생각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다. 하기는 살수를 고용하는 인간들치고 마음에 드는 인간이 있을 리 없다.
“증거는?”
“…?”
“검안검리가 그대 아버지 소유였다는 증거.”
“그것까지는….”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는가?”
“돌아가셨소.”
사내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가 말한 모든 말이 거짓일 게다. 사내는 검극진천의 무공이 탐났을 테고, 어떻게 비급만 손에 넣으면 뛰어난 무공이 저절로 익혀지는 줄 알고 있을 게다.
“돌아가.”
“그럼 청부는?”
“살천문으로 가.”
사내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사내는 살천문도 다녀왔을 게다. 살천문도 검극진천은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겠지. 그는 정말 뛰어난 검수니까.
“사, 사정 이야기를 다 듣고…”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될 때 찾아와. 또 하나! 한 번만 더 엉터리 말을 늘어놓으면 널 죽여.”
사내는 황급히 물러갔다.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들어왔다.
“비성유검을 죽여주시오.”
“….”
종리추는 역시 말이 없었다.
“청부금은 얼마나?”
사내가 초조한 듯 물었다.
“얼마나 낼 수 있소?”
“천 냥이라면 어떻게…”
“좋아. 천 냥으로 하지. 청부금은 비성유검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살문으로 가져와.”
“얼마나 기다려야….?”
“삼 일 뒤에 가져와.”
사내가 가고 난 후 유구가 물었다.
“주공은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만 냥짜리는 거절하고 천 냥짜리를 받아들이고.”
“먼저 놈은 거짓말을 했어.”
“그건 저도 느꼈습니다만 살수가 아무나…”
“아무나 죽인다면 인간 백정이야.”
“그럼 나중에 온 자는… 그자에게는 사연도 물어보지 않으셨잖습니까?”
“사연은 모르지만 억울한 일을 당한 것만은 알지.”
“…..”
“비성유검이란 자는 죽어야 할 자가 틀림없어.”
“주공.”
“왜?”
“주공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없어. 난 내 느낌을 따라. 느낌은 항상 옳은 말만 하지. 왜인 줄 아는가? 정말 억울한 자는 하소연할 데가 없어. 하소연할 데라도 있으면 억울하다는 감정이 하늘에 닿지 않아. 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어.”
“……”
유구는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연은 필요 없어, 억울함이 사무치는 자에게는. 비성유검에 대해서 조사해. 명분도 찾아내고. 없으면 만들어. 잊지 마, 명분이 없는 살상은 살문을 멸문시킨다는 것.”
종리추의 가장 큰 좌우명은 일찍 탄생했다.
명분이 없는 살인은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