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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9화


적지인살은 모물촌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올 때는 아무 눈치도 보지 않았지만 갈 때는 극히 조심했다. 모물촌으로 가는 길목마다 개방도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아직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밤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종리추는 등에 업혀 편히 잠들었다. 여느 아이들 같으면 불안해서라도 잠을 잘 수 없으리라. 신경이 둔한 아이 같으면 벌써 잠이 들었을 테고. 종리추는 그렇지 않았다. 촌로의 집에 밥을 얻어먹으러 들어갈 때는 피곤한 기색을 보였지만 졸음이 눈에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세상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잠을 잘 시간과 깨어 있을 시간을 정확히 알고 있다.

‘이 아이가 소고의 수하가 된다면 정말 큰 힘이 된다. 하지만 소고를 누른다면….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직은 아이야. 좀 더 커봐야 알지.’

소고를 생각하자 마음이 포근해졌다. 소고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맑고, 총명하고, 자질도 빼어나서 어렵다는 무공을 술술 익혀 나갔다. 소고는 살인에 관한 한 귀신들이라는 살혼부 고수들을 감탄시켰다.

“귀재니 천재니 해도 소고만한 자질은 보지 못했네. 자네들 생각들은 어떤가?”

청면살수의 물음에 모두 환한 미소로 대답했다. 그때만은 살기로 뭉친 비원살수마저도 옅은 웃음을 토해냈다.

“이대로 십 년만 지나면 소고는 무적이 될 걸세. 내기할 사람은 해도 좋네.”

“대형, 무적으로 들어서려면 무공이…”

이형 소천나찰은 무형필살 삼십육초천풍선법으로는 무적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대형의 무공은 처절하다. 초식에 ‘필살’이라는 말이 들어갈 만큼 적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 여유 없는 초식이다. 강하면 부러진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 무적이 되기 위해서는 강유를 겸비한 무공을 익혀야 한다.

“하하! 준비해 놓은 게 있네. 그 점은 걱정하지 말게.”

대형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 무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천라지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보게 될지도 모른다. 훗날에… 소고가 제 이름을 찾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

적지인살은 나루터에 도착하자 잡생각을 떨쳐 버렸다. 모든 것은 후일이다. 당장은 천라지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다. 오채산을 벗어날 때만 해도 구파일방의 이목을 집중시키겠다는 건방진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생각이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흔히 보던 풍경과 동화…’

나루터는 올망졸망한 배들로 가득했다. 건너편을 오가는 나룻배부터 백하를 타고 호광성까지 가는 범선,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이삼 인용의 작은 배까지 얼핏 헤아려도 삼십 척은 족히 될 듯싶었다. 배를 훔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훔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훔치지 못할 것은 없지만 사방에 깔려 있는 거지들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루터에 눌러앉은 거지는 족히 이십여 명은 넘어 보였다.

‘배는 변하지 않는다. 사람이 변해야 돼.’

적지인살은 새벽이 올 때까지 생선을 파는 가판 수레 뒤에 숨어 있었다. 어부들은 부지런하다. 대부분 동이 트기 전에 나와 배를 띄운다.

‘자리를 옮겨야겠군.’

적지인살은 수레에서 나와 어부의 집인 듯한 초옥으로 숨어들었다. 이럴 때는 살업을 행했던 과거가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보든지 몸을 숨길 수 있는 곳부터 찾았고, 찾아냈다. 어부의 집은 담도 없이 사방이 환히 트였지만 적지인살의 눈에는 몸을 숨길 곳이 한눈에 들어왔다. 좀 지저분하지만 돼지우리처럼 좋은 곳도 없다. 돼지우리는 가릴 것이 거의 없어서 누구라도 들여다보기만 하면 낯선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저분하다는 특성상 들여다보는 사람이 드물다. 먹이를 주는 주인 말고는. 적지인살은 일단 돼지우리 지붕으로 올라가 주인이 먹이를 줄 때까지 기다렸다. 농부나 어부와 같은 사람들은 자신보다도 가축을 먼저 생각한다. 일어나면 가축 먹이부터 주고 난 다음에 밥을 먹는다. 생각대로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노인이 먹이를 들고 나타났다. 노인은 눈곱도 덜 뗀 눈으로 먹이를 주고는 닭장으로 몸을 돌렸다. 순간, 적지인살의 신형이 안개처럼 흐려진다 싶더니 돼지우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꿀꿀꿀…!

돼지들은 낯선 침입자가 있는데도 먹이를 먹기에 바빴다. 적지인살은 돼지우리 속에서 돼지 오물을 뒤집어쓴 채 나루터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세세히 살폈다. 간밤에 사라진다는 계획은 일단 성공했다. 개방도들의 날카롭게 곤두선 눈빛에서 개방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당황하고 있어. 모물촌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내지 못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겠지. 오늘밖에 시간이 없어. 내일이면… 공격이 시작돼.”

적지인살은 급한 마음을 추슬렀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해.’

나루터에 활로가 있다. 지금쯤 개방에서 노파에게 흘린 말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리라. 생각이 정리되면 곧바로 움직인다. 그리고 아마도 생각은 모물촌으로 움직였다는 쪽으로 정리될 게다.

기경춘은 작고 볼품없지만 눈썰미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보기만 해도 마음이 후덕한지 인색한지 알아차렸고, 덕분에 그의 동냥 그릇은 늘 넘쳐났다. 예리한 눈썰미는 무공에도 응용되었다. 본인 스스로는 무공을 익힐 자질이 부족한지 개방도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펼치는 타구십팔초도 제삼초 아구흘뇨까지밖에 못했다. 눈썰미가 발휘된 것은 무공을 보는 눈이었다. 몸으로 펼치지 못하면서 보는 눈은 있어서 초식을 보기만 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정확히 짚어냈다. 덕분에 타구십팔초조차 제대로 펼치지 못하면서 이결제자가 되는 영광을 누렸으니.

기경춘은 나루터를 벗어나는 최후 관문을 지켰다. 그는 예리한 눈썰미로 오가는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중년인. 그런 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는 무공을 익힌 무인인가 아닌가를 살폈고, 무공을 익혔다면 하늘이 내린 눈썰미를 벗어날 수 없다고 자부했다.

“저자!”

기경춘은 눈을 반짝 빛내면서 가판대에 널려 있는 생선을 구경하는 중년인을 지목했다. 범인들이 입는 평범한 옷을 입었다. 기도도 풍기지 않는다. 하지만 틀림없이 무인이다. 무인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습성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 하나가 보폭, 중년인은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걸었다. 개방도가 우르르 달려가 중년인의 주위를 에워쌌다. 아직 공격할 시간이 남아 있다. 해가 중천을 넘어서고도 반쯤 넘어갔을 때에나 공격할 수 있다.

“무슨 일이요?”

중년인은 거지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눈에 개방도임을 알아봤다는 듯이.

‘아냐. 무인은 맞는데 적지인살은 아냐. 기도가 달라.’

기경춘은 적지인살의 화상을 며칠 간이나 보고 또 보았다. 뇌리에 각인될 때까지. 화상에서 본 적지인살은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했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성격으로 검을 뽑기 전에는 무인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다. 기경춘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고, 아직까지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저자! 무인이야!’

기경춘은 또 한 사람을 보았다. 그는 선원이었다. 호광성까지 장삿길을 떠나는 범선에 물품을 실을 요량으로 제법 무거워 보이는 등짐을 짊어졌다.

‘저자야! 틀림없어!’

기경춘은 확신했다. 화상에서 봤을 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부드러우면서도 송곳처럼 날카로운 성격의 소유자. 기경춘은 개방도에게 살며시 고갯짓을 보냈다. 개방도가 선원 주위로 슬며시 모여들었다. 그들의 목적은 한 가지다. 상대가 적지인살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 적지인살이라고 확인되면 그냥 물러선다. 어차피 공격 시간은 남아 있으니. 기경춘은 최종 확인을 위해 자신이 직접 나섰다.

“이름이 뭐요?”

“왜, 왜들 이러나?”

상대는 의외로 뱃사람처럼 거칠었다.

거지들이 개방도라는 것을 알기에 억지로 분위기를 참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개방도만 아니라면 한주먹에 때려눕히겠다는 표정.

‘인피면구는 아냐.’

선원은 강바람에 그을려 검은 피부를 지녔다. 수염도 단정치 못하고 거칠게 삐죽삐죽 자랐다. 기경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도는 틀림없이 맞는데…’

무인이 자신도 모르게 표출하는 특징 중 또 하나는 방어 본능이다. 방어 본능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 진흙탕을 건널 때는 옷에 묻지 않도록 펄쩍 뛰고는 한다. 선원은 생선 파는 아낙이 대야에 담긴 물을 버릴 때 무인다운 반응을 보였다. 훌쩍 뛰지는 않았지만 살짝 몸을 틀어 물방울을 피해냈다. 전형적인 무인의 방어 본능이다. 그런데…

‘수염도 가짜가 아냐. 피부도… 잘못 짚었군. 아는데.. 부드러운 기도… 이건 선원이 가질 기도가 아닌데… 무인도 맞고…’

“헤헤, 존성대명을 여쭙고 싶어서.”

말은 여쭙지만 말투는 심문이었다.

“이, 이삼이라고 하네만…”

평범한 이름이었다. 뱃사람들 중에 이삼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만 추려도 모물촌에만 다섯 손가락은 넘어설 게다.

“어이! 이삼, 안 오고 뭘 해!”

앞서 갔던 뱃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응, 갈게. 개방 사람들이 말을 걸어와서…”

“빨리 와. 늦장 부릴 시간이 없어.”

“알았어!”

이삼은 기경춘을 쳐다보았다.

“가, 가시오.”

기경춘은 아무래도 그냥 보내기가 찜찜했지만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기경춘은 이삼이 등짐을 부리고 다시 내려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몇 번을 왕복하여 물건을 부렸다.

‘잘못 봤군.’

기경춘은 다시 나루터로 예리한 눈을 돌렸지만 무인다운 사람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수고했다. 남양까지만 입을 다물면 목숨은 보존했다.”

이삼의 음성은 부드럽고 자애로운 음성으로 변했다. 그때까지 등짐을 짊어지고 있던 선원은 눈짓으로 물었다. 이제 등짐을 내려놓아도 되겠냐고. 이삼이 고개를 끄덕이자 선원이 등짐을 내려놓았다. 등짐은 등에 닿는 부분이 네모나게 뚫려 있었다. 그리고 예리한 비수가 구멍을 통해 언뜻 모습을 보였다가는 사라졌다.

“남양까지는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예, 예.”

이삼은 행낭에서 벽곡단을 꺼내 등짐 안에 한 알을 넣어주고, 자신도 한 알을 씹어 먹었다.

“저.. 그런데 이삼은…?”

순간, 이삼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선원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와 함께. 이삼의 얼굴 가죽이 낯선 자의 얼굴에 씌워져 있으니 죽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천애유룡은 얼굴 가죽이 벗겨진 장한의 시신을 앞에 놓고 찌푸린 인상을 펴지 못했다.

“이삼이 분명하다고?”

“예. 틀림없이 적지인살이었습니다.”

기경춘 역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처음 직감이 맞았다. 그는 적지인살이었다. 그런데 표적을 눈앞에 두고도 표적임을 알아보지 못했다니. 살혼부의 면구술은 정말 뛰어나다. 기경춘은 감탄을 거듭했다. 비록 놓치기는 했지만 자신의 예리한 눈썰미조차 넘겨 버릴 정도로 뛰어난 면구술만큼은 칭찬받을 만하다.

‘다시 보면 절대 놓치지 않을 자신 있어.’

“범선이 어디로 간다고 했노?”

깡마르고 볼품없는 백발노인이 물었다.

“나, 남양이 제일 기착지입니다요.”

기경춘의 허리는 땅에 닿을 듯 굽어졌다. 기경춘에게 흑봉광괴는 하늘이었다. 하늘 앞에서 예리하다는 눈썰미가 녹슨 칼이 되어버렸다.

“강변을 봉쇄하고 분타 무인들을 총동원해 남양을 잡아놓으시게. 쾌속선 한 척을 내어주고.”

“쾌속선은…?”

“보통내기가 아냐. 내가 직접 가봐야겠어. 어떤 놈인지… 쯧! 제 목숨 살겠다고 애꿎은 목숨을 죽이다니. 이 사람에게 처자가 있는지 살펴보고 부양가족이 있다면 넉넉하게 살펴주시게.”

흑봉광괴는 자신이 직접 나선다고 공언했다. 공격할 시기도 거의 다 되었다. 흑봉광괴가 범선에 도착할 무렵이면 딱 적당한 시간이 될 게다.

천애유룡은 적지인살을 잡는 데 분타 이결제자들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본다면 무공 충하가 심하게 두드러지지만 개방에는 타구진이 있지 않은가. 평소 타구진에 심혈을 기울여 왔으니 이제 진가를 드러낼 때라고 생각했는데. 흑봉광괴의 말은 곧 천명.

“알겠습니다.”

천애유룡은 공손히 대답했다.

“자네들도 준비하고.”

흑봉광괴는 총타에서 같이 온 호법, 사결제자 다섯 명에게도 동행을 명했다. 적지인살을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니라 십망을 펼친 이상 빠져나가는 자가 없어야 된다는 부담이 그만큼 컸다.

천애유룡은 즉시 명을 내렸다. 개방 전 문도에게 전해지는 폭죽이 솟구치고, 구파에게 전해지는 밀라(암호)가 따로 전달되었다.

기경춘에게 돌아온 명령은 싱거웠다.

“너는 돌아가 분타를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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