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95화
천장에서 거대한 거미줄이 펼쳐졌다. 살문 사살이 던져낸 그물망이 빠져나갈 공간을 주지 않고 사방에서 덮쳐왔다. 오방협객진의 달인이라는 혈살오괴는 살문 사살이 전개하는 그물망에는 대처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장소나 넓으면 모를까 움직일 공간이 한정된 집 안이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고 한낱 그물이다.
그들이 처음 겪어보는 공격이었으리라.
타앗! 혈살사괴는 살문 사살을 향해 투골환을 던졌다. 동시에 신형을 날려 그물을 발길로 걷어찼다. 약속이나 한 듯 일사불란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문 사살의 그물을 너무 몰랐다. 촤아악…!
그물은 거센 발길질에 밀려나는가 싶더니 곧바로 노인들을 휘감아 버렸다. 그물에 달려 있던 가시 같은 침들이 곧바로 순식간에 노인들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컥! 끄응…! 혈살사괴는 살문 사살의 그물 아래 무너졌다. 그 순간, 퍽! 파앗…! 헉! 크윽! 악!
살문 사살도 투골환을 벗어나지 못했다. 막 웃음을 흘리던 참이었다. 살문 사살은 득의의 미소가 입가에 걸린 채 비명을 질렀다.
아!
종리추는 망연자실했다. 막을 수 있는 죽음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서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그들은 종리추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렇기에 일조라도 하겠다고 그물을 펼쳐냈으리라.
종리추는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백전에는 필전이 있다. 허점을 발견했으면 즉시 공격하라는.
여러 가지가 살문 사살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후후후! 대단하군. 사천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혈살오괴가 이처럼 간단히 무너지다니.
살천문은 죽음을 애도할 시간조차도 주지 않았다. 종리추는 살문 사살에게서 눈을 거두고 문가를 바라봤다.
거의 같은 키에 같은 복색을 입은 사람들이 막 방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문주라는 지위가 높은 줄은 알지만 이렇게 만나 뵙기 힘들어서야 어디 청부를 하겠나.”
살천오살 중 한 명이 비아냥거렸다. 그들은 종리추의 목숨을 이미 장악하기라도 한 양 여유만만했다.
살천오살의 뒤를 이어 살천문 살수들이 속속 들어섰다. 그 수는 거의 스무 명에 가까웠다.
‘이들은 죽일 수 있다.’
종리추는 이쪽과 저쪽의 수를 비교했다. 이쪽은 여덟 명, 저쪽은 이십여 명. 이쪽에는 진무동을 제외해야 하니 일곱 명이다. 한 명이 세 명을 상대해야 한다. 그래도 승산이 있다. 이쪽은 숨어 있고 저쪽은 드러나 있으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 사람들은 뒤를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불부터 꺼야지 발등에 생길 흉터를 걱정을 한다면 미련하다는 말을 들을 게다.
종리추는 뒤를 걱정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으면 불을 정확히 끌 수 없다는 판단이다.
불은 모래로 끌 수도 있고 물로 끌 수도 있다.
‘살천문이 급습을 가해온 것은 뒤에서 구파일방이 받쳐주기 때문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전력을 모두 쏟아 부을 수 없어. 이건 싸움이 아니라 전쟁이니까.’
백수검이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쥐새끼들은 언제까지 숨어 있을 건가? 살문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됐냐? 문주는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데 수하라는 작자들은 꽁무니나 빼고 있으니 말야.”
이들을 죽이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구파일방이 뒤를 쫓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추적을 포기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방법이 있다면 오직 그것뿐이야.
무너진 전각에는 시신이 가득 쌓여 있다. 얼굴이 짓이겨지고 육신이 조각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도 상당수다. 채찍을 든 자, 철극을 든 자… 그들 중 몇 명은 살문 살수들로 오인받을 수 있다.
살문 살수들의 시신도 필요하다. 그래서 남았고, 남은 자들은 죽어야 한다. 살천문 살수에게 죽은 외장문도나 방금 전에 죽은 살문 사살은 살문이 몰살당한 증거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몇 명이면 된다. 몇 명만 살문 살수들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면 빠져나간 사람들의 안위는 보장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람은… 역시 살문주의 시신이지 않은가.
‘아직은 부족해. 그 정도로 살문이 재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문제는 나, 내가 죽어야 해.’
“듣자 하니 살문주의 무공이 신화경에 접어들었다는데 구경할 수 있냐? 아니면 목숨을 살려줄 테니까 순순히 오라를 받을 텐가?”
오라로 묶을 자들이 아니다.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살문주를 죽이려는 얕은 속셈이다.
스르릉…!
종리추도 검을 뽑았다. 일 년 전 유구가 습득해 온 보검이다.
적룡검에서 은은한 자광이 발산되었다. 날이 무뎌 날카로운 기운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저자들을 죽이지 않으면 피해가 커져.’
타앗!
생각이 굳히자 서슴없이 신형을 띄웠다.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터득한 심법이다. 발바닥 용천혈에서 진기가 튕기며 육신을 허공으로 밀어 올렸다. 검법은 무형초자의 천풍선법이다. 살혼부 부주였던 청면살수는 천풍신공만으로도 사무령이 될 수 있다고 믿을 만큼 강하기 이를 데 없는 무공이다. 종리추는 부채 대신 검으로 삼십육 초 천풍선법을 시전했다.
타앙!
검과 검이 부딪쳤다. 검 한 자루로 살천오살에 이른 청운검객은 종리추를 베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해 제일 먼저 검을 부딪쳤다.
검은 양날을 사용한다. 그렇기에 초식이 다양해진다. 검이 사양길에 접어든 것은 도가 나오면서부터다. 도는 한 날을 사용하며 강한 파괴력을 지닌다. 검과 도가 부딪쳤을 때 손해 보는 쪽은 검이 되기 십상이다. 양날을 사용하는 만큼 검신이 약해 두께가 두꺼운 도에 밀린다. 심할 경우에는 검이 부러지기도 한다.
전에도 중병기와 부딪칠 때는 극도의 조심성을 필요로 했지만 검에 필적할 만큼 다양한 초식을 구사하는 도가 활성화되면서부터는 급격히 자리를 내주고 있다.
쩌엉…!
검신이 부러졌다. 검과 검이 부딪쳤는데 한가운데가 뚝 부러져 버렸다.
억!
청운검객은 검신을 부러뜨리고 달려든 검날에 한쪽 팔과 가슴을 내주었다. 단 일 검 만에 살천오살 중 한 명을 베어버린 종리추는 금계독립의 자세를 취하더니 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적지인살의 무공인 혈영도법 제삼절 비응회선이다.
촤라락…!
회전하는 육신에 따라 자광이 위에서 아래로, 아래서 위로… 파랑처럼 물결쳤다.
타앗!
구중철검이 일검양단의 기세로 달려들었다.
타악!
저녁놀처럼 부드럽고 아름다운 자광이 날카로운 기운을 슬며시 밀어냈다. 적룡검의 검신으로 구중철검의 검신을 밀쳐낸 것이다.
날아오는 검을 맞받기는 쉽다. 하지만 검으로 검을 밀어내는 것은 지고한 경지다. 살검이 아니라 활검을 익힌 무인만이 전개할 수 있는 무공이다.
헛!
구중철검이 헛바람을 내질렀다.
적룡검은 구중철검을 밀어내고 빙글 돌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검날은 구중철검의 복부를 깊숙이 갈라 버렸다. 구중철검이 주춤 물러난 후 미처 검을 회수하기도 전,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무, 무서운 쾌검!”
백수검의 입에서 경악이 새어 나왔다. 그들은 숱한 살행을 했지만 지금과 같은 무공을 본 적이 없었다. 당연하다. 초절정고수들은 구파일방과 연관이 있고, 연관이 있는 자들은 아무리 청부금이 비싸더라도, 죽일 자신이 있어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특혜받은 사람들이니까.
종리추의 신형이 또 변했다. 이번엔 손과 발이 따로 놀았다.
손에 든 검이 동쪽을 찌르면 발뒤꿈치는 서쪽을 후려쳤다.
종리추가 초식을 전개하는 범위는 점점 넓어졌다.
일족일검의 거리란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상대의 몸통을 가격할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 반대로 한 발만 뒤로 물러서면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피할 수도 있는 거리다.
거리를 재는 데 중요한 것은 내 팔의 길이와 검의 길이다. 거기에 한 발자국을 더하면 일족즉검의 길이가 나온다.
종리추를 베기 위한 거리는 계산하기 난해하다. 그의 경우는 신장에 검의 길이를 더해야 한다.
살천문 살수들은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때,
크윽!
물러서는 자들 중 한 명이 정신이 바짝 들 정도로 큰 비명을 질렀다.
크윽!
그는 두 군데 상처를 입었다. 머리와 옆구리. 머리는 반쯤 갈라졌고 옆구리는 갈고리로 잡아 뜯은 듯했다.
쌍구광살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쌍구는 피와 내장 조각으로 번들거렸다.
크윽!
또 한 명이 짤막한 비명을 토해냈다. 쌍구광살에게 죽은 자와는 정 반대 방향이었다.
그는 허리를 비틀며 괴로워했는데, 뒤에서 어깨를 잡힌 그는 몹시 고통스러워했다.
그제야 살천문 살수들은 살문 역시 살수 집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천문은 무인들처럼 정공을 취했지만 살문은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다.
살수들에게 체면이란 사치다. 정정당당한 비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이대로 버티다간 몰살당해. 자신 없어. 저런 괴물은 암살로 해야지 무공으로는 안 돼.’
정공으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무공 차이가 워낙 크게 난다. 강아지 스무 마리가 호랑이에게 덤비는 꼴이다.
물러나!
백수검은 후퇴 명령을 내렸다.
쌍구광살은 살문 사살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다.
그만둬.
…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명심해 둬. 한순간 방심이 목숨을 잃는 거야. 살문 사살이 그랬어.
…
쌍구광살은 고개를 떨궜다.
‘아무리 그래도… 시신은 매장해 주지는 못해도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눈이라도 감겨줘야 하지 않은가.’
“뭐 하고 있나? 기회는 자주 오지 않아.”
종리추는 알지 못할 소리를 했다. 그 순간,
쉬익…!
서가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후사도가 번개같이 튀어나오며 바로 옆에 있는 병풍을 찔렀다.
와당탕…!
병풍이 거칠게 쓰러졌다. 그리고 병풍 뒤에서 신형이 솟구치더니 이 장 옆으로 내려섰다.
후사도는 기회를 잡았으나 병기가 너무 짧았다. 그의 병기가 창이었다면, 하다못해 검이었어도 병풍 뒤에 있는 자는 상처를 입었으리라.
쌍구광살의 눈이 부릅떠졌다.
“맙소사! 적이 바로 등 뒤에 있었어!”
그는 자신이 지옥 문전까지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종리추가 말하지 않았다면 후사도는 좀 더 기회를 기다렸을 게 분명하다. 후사도가 단병의 약점을 망각했을 리 없다.
그렇다. 지금은 죽은 자를 애도할 때가 아니다.
쌍구광살은 쌍구를 굳게 움켜잡고 병풍에서 튀어나온 사내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태연자약했다.
서른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젊은 나이지만 전신에는 당당함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살천문에 어찌 이런 자가 있단 말인가.’
쌍구광살은 강한 자를 찾아 떠돌던 낭인이었다. 종리추를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이 있다.
‘비겁한 놈들이 꼭꼭 숨어서 싸울 생각을 안 해.’
사내는 강자였다.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뒤에서 숨어서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 소인배도 아니었다.
쌍구광살은 투지가 끓어올랐다.
“소문은 들었지.”
종리추가 먼저 말을 꺼냈다.
…?
“구름 속에 노니는 용이여, 구름 밖으로 나오지 마라. 향기를 뿜어내는 귀신이여, 사천을 벗어나지 마라. 부동은 석상이니, 부처님도 기뻐하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것은 허공에 노니는 열여덟 마리 매라. 능공십팔응!”
종리추가 시조처럼 읊은 말에 쌍구광살은 경악했다. 운룡대구식, 암향표, 금강부동신법. 천하에 이름난 절기들을 과오하게 매도할 정도로 뛰어난 신법이다. 신법을 펼치면 실상을 분간하기 힘들고 유연성이 지극히 뛰어나 실전에서는 정의 금강부동신법과 더불어 동의 절정신법으로 꼽힌다.
능공십팔응은 사십여 년 전에 실전되었다. 그런 신법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무공만 놀라운 줄 알았더니 식견도 뛰어나군.”
낯선 자는 당당함이 지나쳐 거만했다.
“공동에 능공십팔응을 익힌 문도가 여섯 명이라고 들었다. 육천군이라고 불린다던데. 넌 몇 번째냐?”
이번에는 거만하던 사내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파무림인도 공동파에 육천군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육천군은 지옥에서 살았다. 공동파 다른 문도들처럼 밝은 태양을 보며 수련한 적은 거의 없다. 그들은 연공실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다. 그들은 능공십팔응을 완벽하게 재현할 책임이 있었고, 책임을 완수하지 못하면 바깥세상은 구경하지 않으리라 작심했다.
‘일개 살수가 대공동파에 육천군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니. 넌 반드시 죽어야 할 놈이군. 일개 살수 집단을 너무 과대평가한다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어. 이만한 대우를 받을 만해.’
무슨 대우?
내가 나설 만하다는 거겠지.
그런가?
그래.
지금 말뜻은 일 대 일 비무도 감수하겠다는 말이냐?
종리추의 어감은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사내는 비웃음을 떠올렸다.
“그렇…”
아니다!
사내의 말을 카랑카랑한 음성이 막았다. 기품 있는 노파가 사내의 말을 잘랐다. 대외산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비영파파였다.
사내는 볼멘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반박하지는 못했다.
젊은 놈이 유도 심문을 꽤 잘하는군.
과찬이야.
종리추는 머리가 희끗한 노파에게도 하대를 했다. 그건 그만의 자존심이었다. 최소한 적이라 간주되는 사람들에게는 조금치도 양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비영파파는 종리추의 전신을 훑어 내렸다.
‘죽이기는 아까운 놈.’
대선배 앞에서 이토록 무례하기도 드물다. 배분을 차지하고도 무공에 질려서라도 무례하지 못한다.
그녀는 분운추월이 왜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는지 이제야 알았다. 종리추는 정이 가는 사내이다. 살수만 아니라면… 그러나 살수이기에 더욱 미운 사내다.
“내가 누군지 알지?”
“육천군은 공동파의 후기지수, 육천군에게 일갈을 내지를 수 있는 고인이라면 비영파파겠군.”
아는군.
…
“넌 나와 겨뤄야겠어.”
뜻밖의 말이었다. 비영파파쯤 되는 사람은 여간해서는 손속을 나누지 않는다. 특히 종리추처럼 나이가 어린 사람과는. 이기면 본전이요, 지면 낯을 들지 못한다.
비영파파의 생각은 달랐다.
‘싸움이 있을 걸 미리 알았다는 것은 머리가 있다는 거지. 사람들을 하인들까지 모두 내보냈다는 것은 인의를 안다는 것이고, 전각을 폭파시켰다는 것은 결단이야. 살문을 포기한다는 거지. 이런 자는 강해.’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이었다.
문파를 창건한 사람은 목숨을 잃을지언정 전각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전각이 파괴된다면 공격하는 사람이 독심을 품었을 때뿐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사람 마음이 담겨 있다.
종리추는 제법 자리를 잡아가던 살문을 과감히 포기했다. 싸움이 있을 것을 알면서도 협상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분운추월과 안면이 있으니 구명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포기는 하되 죽겠다는 심산이다.
육천군은 실전 경험이 일천하다. 연공실에서 손에 사정을 두어 익힌 초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은 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 무공 차이가 워낙 크게 난다면 모를까 종리추 같은 자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공동파 장문인이 자랑스럽게 내놓은 육천군이지만 비영파파는 육천군 모두가 나선다 해도 종리추를 이길 것 같지 않았다.
“월영반이란 병기다. 좋은 경험이 될 거야. 밖으로 나가지.”
뭐라고?
종리추는 비영파파의 응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등을 환히 열어놓은 채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뒤에서 공격하든 말든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투였다.
밖으로 물러가 있던 백수검은 걸어 나오는 종리추의 뒤를 보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백수검의 동공은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만큼 크게 열렸다.
‘저, 저 노파는 비영파파!’
비영파파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하남무림에 없다. 노파이면서 주름살이 별로 없어 중년을 조금 넘을 것 같고, 입고 있는 옷도 단정하여 추레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에는 항상 부드러운 훈기가 돌고. 하지만 입은 거칠기가 짝이 없어서 말만 꺼냈다 하면 욕이다.
‘저, 저 노파가 언제…?’
백수검은 비영파파가 언제 나타났는지도 몰랐다. 숨어서 살천문과의 싸움을 모두 지켜봤다는 사실은 더욱더 몰랐다.
백수검은 뒤로 더 물러났다. 종리추와 친구라도 되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따라오는 비영파파의 모습에서 싸움을 읽은 탓이다.
종리추와 비영파파와의 결전. 덕분에 다른 싸움은 중지되었다.
“일군.”
네.
심술궂은 사람처럼 아랫볼이 축 늘어진 사내가 대답했다.
“내가 싸우는 동안 살문을 정리해.”
네.
“방심하지 말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비영파파와 육천군 중 맏이 일군은 종리추가 듣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그들은 정말 몰랐다, 등을 보이고 있던 종리추가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는 사실을. 그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자연의 소리를 높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파앗! 팍팍팍…!
비영파파의 월영반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원반의 개수는 분명 네 개이나 수십 개나 되는 듯 한 치도 틈을 주지 않았다.
원반은 종리추를 노리고 날아왔다가 빈 허공을 때리고는 돌아왔다. 회수가 가능한 원반이다. 허공을 나는 속도도 너무 빨라 느낌으로 피해야 한다.
원반이 파파의 손에서 세 개쯤 빠져나갔을 때 처음 던진 원반이 되돌아올 만큼 빨랐다.
쉭! 쉬쉭…!
월영반을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던져내는 비영파파의 무공도 놀랍지만 그것을 피하는 종리추의 신법도 탁월했다.
종리추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발바닥을 땅에 붙일 틈이 없었다. 땅바닥에 발끝이 닿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신형을 날려야만 했다.
이런 싸움은 신법이 뛰어도 결국은 비영파파의 승리로 돌아간다. 월영반을 날릴 때 소용되는 진기보다 신법을 전개하는 데 진기가 훨씬 막대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월영반과 같은 기형 병기를 꺼내면 속전속결로 끝내고자 달려든다. 그것 역시 중도에서 막히기는 매일반이지만 공격다운 공격 한번 못 해보고 죽도록 피하다 당하는 것보다는 한결 낫다.
종리추는 긴 싸움을 택했다.
피잉! 핑핑핑…!
반각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월영반이 허공을 나는 속도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종리추가 신형을 날리는 속도도 처음과 마찬가지였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소녀는 살문이 환히 보이는 나무에 앉아 비영파파와 종리추 간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솔직히 감탄했다.
적이 살문 문파의 수괴이기는 하지만 비영파파의 공격을 이토록 오랫동안 막아낸 사람은 없었다.
‘아름다워. 살문주가 월영반을 피하는 게 아니라 월영반이 살문주를 피해가는 것 같아.’
소녀는 실전을 처음 보았다. 비무는 숱하게 치렀지만 목숨을 걸고 싸우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싸우는 사람이 비영파파이고, 비영파파에 못지않은 무공을 지닌 사람이라 더욱 흥분되었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거야. 파파는 하루 종일 던질 수 있는 걸.’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호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한 열정으로 뜨거워졌다.
살문주라는, 살인을 밥 먹듯 하는 괴수라는 생각을 떠나 뛰어난 무인을 접한 무인의 열정이다.
종리추가 스무 살이라도 상관없고, 예순 살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이, 성별 모든 것에 관계없이 오로지 무공 하나만을 보는 지켜보는 무인의 관심이었다.
육천군은 당당하게 움직였다. 숨어 있는 곳에서 나와 암습을 할 테면 해보라는 듯 가슴을 활짝 열고 이곳저곳을 뒤졌다.
쉬익!
제일 먼저 공격을 시도한 사람은 역석이었다. 역석은 망설이지 않았다. 청석을 확 밀쳐냄과 동시에 하오문주에게서 종리추에게, 그리고 그에게 이어진 비류흔을 전개했다.
파앗! 팟팟팟팟…!
남만에 있을 때도 권투왕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손이 빨랐던 역석이다. 비류흔을 익히면서는 접근전에 훨씬 강해졌다.
중원 무인들은 단병을 사용하는 사람이 드물다. 몸이 바짝 붙어 있으면 두 공이 두세 배 높은 고수라도 상대할 자신이 생겼다.
짧은 비수가 허공에 아름다운 선을 그어냈다.
바깥과는 다르게 역석은 공격 일변도였고 육천군은 방어만 했다.
‘잘못됐다. 이자는 처음 만난 고수야!’
역석은 일이 틀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의 공격으로는 육천군의 털끝조차도 건드릴 수 없다. 상대는 너무 빠르고… 곤욕스럽게 만든다. 형체가 분명하지 않다. 술에 만취된 사람이 세상을 보듯 두 겹 세 겹으로 겹쳐 보인다. 그래서야 어떻게 찌르겠는가.
비무라면 귀신같은 놈이라고 웃고 말겠지만 목숨을 건 사투이니 비수를 거둘 수 없다.
역석은 그 와중에도 다른 살수들을 생각했다.
‘모두 나가! 이자는 암습이 통하지 않아!’
싸움 중에 정신을 분산한 것이 화근인가?
슈우웃…!
역석은 날카로운 경기를 느꼈을 때는 이미 때는 늦어 배가 화끈거렸다. 역석은 급사 맞은 개구리처럼 부들거렸다. 아랫배에서는 시뻘건 피가 꾸역꾸역 솟구쳐 나왔다.
‘쳇! 더럽게 빠르군.’
그가 육천군을 보았을 때 육천군은 두 번째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빠악…!
역석은 의식을 잃었다. 그의 머리는 길거리에 던져진 수박처럼 으깨졌다.
싸움은 곳곳에서 일어났다.
쌍구광살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아주 강한 무인을 만났다.
능공십팔응이라는 신법은 전설상의 이형환위와 비슷한 종류 같았다. 그의 쌍구는 허공만 후려쳤고 상대는 늘 그보다 한 걸음 멀리 떨어졌다.
‘잡을 방법이 있어. 있을 거야.’
지금처럼 살문 사살이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이 살아있었다면, 살문 사살의 그물이라면 능공십팔응을 멈추게 할 수 있었을 텐데.
쌍구광살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졌어.’
투지도 꺾였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관심이다. 대답 없는 물음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이 없다.
쌍구광살은 줄기차게 묻고 있지만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때 쌍구광살의 눈에 머리가 으깨져 쓰러지는 역석의 모습이 비쳤다.
‘이런 죽일 놈들! 좋아, 이럴 바엔 동귀어진. 좋아!’
쌍구광살은 공격을 중단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쌍구를 양 옆으로 활짝 벌리고 가슴은 드러냈다.
…
육천군이 의아한 기색이 보였다. 무슨 초식이냐고 묻는 듯했다.
쌍구광살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보였다. 죽이고 싶으면 죽여 보라는 도전적인 눈빛을 보냈다.
쉬익…!
육천군은 어김없이 공격했다.
‘가슴이 비었어. 쳐봐. 오냐, 쳐봐.’
촤아악…!
육천군의 손에서 은빛 광망이 튀어나왔다. 보기에는 짧은 단봉 같았다.
기형 병기군.
쌍구광살의 생각이 맞았다. 육천군의 신형이 팔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이르렀을 때 단봉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창날이 튀어나왔다.
푸욱!
창날은 어김없이 쌍구광살의 가슴팍에 파고들었다.
흐흐흐…!
쌍구광살은 웃었다. 쌍구가 움직여 육천군의 은빛 단봉을 꽉 움켜잡았다. 쌍구의 효능 중에 하나가 상대의 병기를 움켜잡는 것이지 않은가.
육천군의 입가에 비웃음이 흘렀다. 곧 죽을 놈이 무슨 발악이냐는 듯이.
쌍구광살은 단봉을 잡고 있는 쌍구를 놓아버리고 그 손으로 육천군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동시에 다른 손이 아래에서 위로 번개같이 치켜올랐다.
비무에서 지면 끝난다. 서로의 병기를 거두고 서로 무엇이 좋았고 나빴는지 이야기한다.
싸움은 목숨이 완전히 끊어질 때까지 방심하면 안 된다.
육천군의 몸이 꿈틀거렸다. 쌍구광살을 쳐다보는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낭심이 피로 물들었다. 혈선은 점점 위로 올라가 단전을 꿰뚫고 있었다.
아아악…!
커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육천군도 비명을 지르는군.’
쌍구광살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