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9화
흑호는 있는 힘을 다하여 달리고 있었다.
토둔법을 쓰다가 이젠 목둔법으로 바꾸어 바람처럼 달려갔다.
조선의 구석구석마다 이미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금강산의 널신 말고도 지리산, 설악산 등지의 영물 들이 모두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산신들은 아직 그 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어떤 산들에서는 그 곳을 지키는 산신들마저 아예 없어진 곳도 있었다. 흑호는 그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홀로 틀어박힌 채 도를 닦아 인간으로 환생하려던 흑호였다. 그러다가 괴이하게 틀어지는 기운이 흑호 로 하여금 밖으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조선 땅에 난리가 났음을 확인하고 동굴로 돌아왔을 때, 흑호는 잔혹하게 찢겨진 널신의 주검을 목격했 다. 비통에 절어 포효를 지르는순간, 마지막 생명을 끌어모은 널신의 당부를 들었다.
호군을 찾아가야 한다. 이 땅 모든 영물들의 우두머 리, 그리고 자신의 증조부인 호군을 찾아가야 한다.
널신은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누가 이참혹한 사태를 빚어냈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어쨌든 영물 중의 영물인 호군을 한시 바삐 찾아가 야 했다.
물론 호군은 흑호가 도행(道行)을 파기하고 온 것을 꾸짖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군은 알고 있으리라. 지금 흑호가 도를 닦는 것보다더 급한 일이 조선 천 지에 벌어지고 있음을……
흑호는 확신했다. 조선 팔도 전체의 금수들의 왕인 호군을 만나면뭔가 일이 풀리리라 굳게 믿었다. 흑호는 백두 영봉을 향해 젖먹는 힘까지 다 짜내 달 리고 있었다.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조선의 아름다 운 절경들은 눈에 들어오지도않았다.그곳까지는 오 백리가 넘는 먼 길이다.그러나 하루 남짓이면 도달 할 수 있으리라. 그러면 모든 일의 전모를 알 수 있 을 것이다.
흑호는 다시 한 번 포효를 내지르며, 앞으로 내딛는 발길에 속도를더하기 시작했다.
신립의 과거생계의 밤 시간은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낮 동안에는 활동할 수가 없어서 생계의 밤이 오기 를 기다리고 있는 태을과 흑풍, 그리고 근위무사 윤 걸은 명부의 뒷뜰에 위치한 저승사자들의 휴식장소 인 유휴원(遊休院)안의 한 방에 말 없이 서 있었 다.
태을사자는 자비원을 나올 때부터 줄곧 그 정체 불 명의 괴수에 대해 골똘이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리고 흑풍사자는 곁눈질로 윤걸의 모습을 훑어보 고 있는 중이었다.
윤걸의 용모는 근위무사여서인지 보통 사자들과 달 랐다. 그는 금빛과 은빛이 섞여서 빛나는 번쩍이는 비늘 갑주를 입고, 한 손에는 흰색으로 된 검집과 칼자루가 달린 본국검 한 자루를 꼭 쥐고 있었다.검 집의 한쪽 구석에는 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듯했 는데, 앞의 한 글자는 보이지 않고 뒤의 ‘아’자 한 글자만이 보였다. 윤걸은 입을굳게 다물고 한참 동안을 아까의 자세 그대로 묵직하게 서 있었다.
흑풍사자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근위직에 오르신 지는 오래되시었소?”
“조금 되었소이다.”
무척이나 딱딱한 말투였다. 흑풍사자는 약간 무안해졌지만 다시 입을 열었다.
“무예가 대단한 듯하오.”
“조금 아오.”
말투만 들어도 딱딱하고 재미라고는 조금도 없을 듯 한 전형적인무인이었다. 그러나 저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 태을사자에게 말을 걸자니 좀 그렇고, 가만히 있자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흑풍사자는 아무나 대고라도 이야기를 나누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이번에는 은근히 화제를 바꾸어 말을 건네었 다.
“그 검・・・・・・ 아주 좋아 보이는구려.”
원래 자식 칭찬하는 것을 싫어하는 부모가 없고 예 쁘다는데 싫어할 여자가 없듯이, 전형적인 무인이라 면 자기가 지니고 있는 무기를칭찬하는데 싫어할 리 가 없다. 역시 흑풍사자의 짐작은 맞았다. 딱딱하게 굴던 윤걸은 그제서야 슬그머니 미소를 띠면서 칼을 약간 들어보였다.
비로소 흑풍사자는 그 검에 새겨진 이름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그 검의 이름은 ‘백아(白)’였다.
“이름도 매우 좋소이다. 유래가 있는 보검인 듯하 오.”
흑풍사자의 말에, 윤걸은 씨익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유래가 깊은 물건이오. 내 직위는 비록 근위무사에 지니지 않지만이 검은 다르오.”
“어떻게 다르다는 것이오?”
“사자께서도 법기를 지니고 계시지요?”
“그렇소이다. 내 법기는 척(尺)이라오. 이름을 ‘취루(醉漏)’라고 하지요.”
“그러하군요. 그 취루척은 사계의 물건이니 영기로 뭉쳐져 만들어진 법기겠지요?”
“물론이오.”
“저쪽에 계신 태을사자께서 지니고 계신 법기도 비슷하겠지요?”
“그렇소이다. 태을사자의 법기는 ‘묵학선(默鶴扇)’ 이라는 부채입니다.”
“이 백아검은 영기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 아니 영기로 만들어지지 않은 물건이 어찌 사 계에 있을 수 있소?”
“이야기를 하자면 깁니다. 좌우간 이 검은 조금 특 별한 것이지요. 생계에서의 긴 인연이 있던 검이랍니 다.”
“생계의 것이라니 더더욱 놀랍구려. 생계의 물(物) 이 어찌 영으로만 이루어진 사계에 올 수 있다는 말 씀이오?”
“물론 생계의 것 그대로는 아니지요. 그에 대해서는 내 차차 알려드리리다.”
그때 계속 딴 생각만 하고 있는 줄 알았던 태을사자 가 불쑥 끼여들었다.
“대단히 좋구려, 윤 무사. 제게 그 검을 좀 견식시 켜 주실 수는 없겠소이까?”
흑풍사자는 다른 생각에만 골똘히 빠져 있는 줄 알 았던 태을사자가 느닷없이 말을 하자 조금 놀랐다.
원래 태을사자는 이상할 만큼 생각이 많고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많은 동료인데, 그런 그가 평상시의신 중한 태도와는 달리 불쑥 끼여든 것이 조금 의외라 는 생각이 들어서였다.하지만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윤걸은 선뜻 백아검을 들어 태을사자에게 건넸다. 태을사자는 잠시 검을 양 손으로 받쳐들고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조심스러운 손놀림으로 아주 느리게 칼 을 검집에서 뽑아 보였다.
역시 백아라는 이름에 걸맞게 희게 빛나는 검날은 섬뜩하다 못 해아름답게까지 보였다.
그런데 태을사자가 서서히 검을 뽑아드는 모습을 보 던 윤걸의 표정은 조금씩 침중해지더니 급기야는 놀 라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태을사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하루 종일 걸릴 것처럼, 눈에 띄지않을 만큼 아주 느린 속도로 칼을 거의 다 뽑았다가 탁 하고는 순식간에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러고는 윤 걸에게 다시 칼을 건네주었다.
“아주 좋은 검이오. 생명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서 더더욱 좋소이다.살인(人)이 아니라 활인(活人)까지도 할 수 있는 드문 검이구려.”
윤걸은 멍한 표정으로 칼을 받아드는 것도 잊어버린 듯 태을사자의 손을 보고 있다가, 역시 멍한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칼을 받아 들었다. 그러더니 놀라운 기색으로 한마디 했다.
“저승사자 중에 그대 같은 분이 있는 줄은 몰랐구 려! 오늘 내 크게눈을 넓혔소이다.”
하지만 태을사자는 미소를 지은 채 고개만 한 번 끄 덕였다. 그런그의 얼굴에서는 지금껏 드리워져 있던 어두움이 가시고, 잠시나마무슨 구원이라도 만난 것 처럼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뭐가 뭔지 알 길이 없 어 어리둥절해진 흑풍사자는 윤걸만 들을 수 있게 조그만 소리로 마음을 전했다.
“무엇을 보고 그리 놀라셨소이까?”
윤걸은 여전히 감탄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하 다가, 역시 흑풍에게만 들리도록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였다.
“쾌검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오히려 찾아보기 쉽지 만, 만검(慢劍)을할 줄 아는 검의 달인을 보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라오. 그런데 내오늘 그런 분을 보았소이다그려.”
“우리는 저승사자요. 구태여 검을 휘둘러 싸울 필요 는 없소.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고 싸워 주는 법기를 지니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검술을 사용하겠소?”
“하긴 그렇소이다. 그건 그렇고……… 태을사자도 살 아 생전에 사람이었을 터인데, 혹 그의 전력에 대해 서 아는 것이라도 있소이까?”
“그거야 모르지요. 생전의 기억을 가지고서야 어찌 저승사자의 직분을 수행할 수 있겠소? 모두가 세심 천(川)의 물을 마시고 생전의 기억을 잊게 된다 오. 그러니 나의 전력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의 전력을 알 수 있겠소이까. 만의 하나 안다고 해도 서로 물어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렇겠지요………. 좌우간 대단하오. 태을사자가 미 소를 띤 의미를이제야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겠소이 다. 심계가 깊어도 대단히 깊은 분이오.”
“무슨 말이오?”
“법기가 비록 그 자체로 좋다고는 하지만, 법기의 운용은 정신의도력(道力)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오. 즉, 자신보다 도력이 높은 상대에게는 아무리 좋은 법기를 사용한다고 해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말 이지요. 그렇지 않소이까?”
“그야 물론이오. 그러나 생계에서는…………….”
“내 듣기로 지난번 그 괴수는 두 분의 법기의 합공 을 받고도 무사히 도망쳤다고 하는데, 맞소이까?”
“그렇소이다. 잡을 수도 있었는데… 분한 일이 오.”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그 괴수가 비록 도망을 쳤 다고는 하나, 두분의 합공을 버텨낸 것은 사실이 아 니겠소? 그 괴수의 도력이 두 분개개인의 도력보다 높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겠소이까? 내 말은 두 분의 실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니 이해해 주 시구려.”
“그도 그렇구려. 아니, 그 말이 맞소이다.”
“그렇다면 생계에서 만약 그놈을 다시 만나더라도 일대일로 겨루어서는 그놈을 당해내지 못할게 아니겠소이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소이다. 우리는 같이 다니기로 되어있으니 말이오.”
“실제의 일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것이오. 법기 를 사용하는 겨룸에서는 결코 도력의 높낮이를 벗어 난 결과 나오지 않소. 그러나생계의 무술이나 무 기를 이용하는 싸움은 종종 그렇지 않은 결과가나오 기도 하지요.”
“그렇군요……. 허면……?”
“바로 그것이외다. 태을사자는 아마도 최악의 경우 까지 생각을 하는 모양이오. 그럴 경우, 이 백아검 이 있으면 한 번 해 볼 수 있다는생각으로 얼굴 빛 을 밝게 편 것일 게요.”
“하지만 그건 너무 비관적인 생각이 아니겠소? 둘 의 합공도 이기지못하는데 셋의 합공을 어찌 괴수가 버텨내겠소?”
“그야 모르는 일이지요. 어쨌든 나는 태을사자의 견 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오. 싸움이라는 것은 뚜껑을 열 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예측할수 없는 것이오. 만의 하나, 십만의 하나를 모두 계산해서 대비하고또 대비해도 충분히 조심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요. 물론 방금 내가 한추측이 틀린 것이라면 모르되, 맞는다 면 저 태을사자는 정말 대단한분이오. 깊은 심계와 생계에서의 무술 실력까지 그대로 지니고 있으니 말 이오.”
그 말을 끝으로, 윤걸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 겨 들었다.
흑풍사자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놀랍기도 하고, 평 상시 그저 생각이 조금 깊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태을사자가 새삼스럽게 느껴져,눈을 크게 뜨고 태을 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여전히 깊은 생각에 빠진 채 조 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