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10화
“요케로(물러서라)!”
정신없이 왜병들을 겁주어 몰아붙이던 흑호의 귀에 갑자기 엄숙한왜국 말이 들려왔다. 어느 결엔가 흑 호 앞이 환하게 트였다. 왜병들이길을 비켜 선 것이 다.
흑호가 사나운 기세로 고개를 돌리자 자신에게 달려 들던 왜병들이주욱 길을 비켜 도열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끝에는아까의 그 장수가 철궁 한 벌을 들고 활을 먹이는 모습도 보였다. 바 로 고니시, 소서행장이었다.
‘왜장 녀석! 저 녀석을 묵사발로 만들어줄꺼나?’ 흑호는 커다란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 소리를 내고 눈에 기력을 모아 훨훨 타는 듯한 눈초리로 왜 장을 쏘아보았다. 여느 인간들 같으면 기겁을 했을 것이나, 고니시는 수만 군을 거느리고 많은 전투에 서 선봉에 설 만큼 담력과 기량이 있는 장수이라 흑호의 눈흘김에 겁먹지 않고 철궁에 천천히 화살을 메웠다.
흑호가 정말 사생결단을 하고 덤볐다면 고니시가 어 떻게 되었을지모르는 일이나 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도 못했다.
‘흐응, 아니여. 저자를 지금 해쳤다가는 부하들이 복수심에 그야말로 벌떼같이 몰려들 거여.’
만약 흑호가 그 뒤로 조선군이 의기충천하여 몰려오 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리고 이 자가 바로 현재 왜군의 총대장인 고니시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면 사정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신립과 조선군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고니시를 물어 죽였을지도 모르 지만 지금 흑호는 원통하게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 했다.
안 그래도 여러 명의 왜병을 해친 것 때문에 자신이 쌓아온 도력에금이 가는 후환이 없을까 하여 은근히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저 자와 맞서 싸 우느니 저 자가 일 대 일로 싸우려는 것을 빌미로몸 을 피할 궁리를 하였다.
일단 흑호는 이빨을 드러내면서 신중한 기세로 마치 왜장에게 달려들 틈을 노리는 것처럼 자세를 낮추었 다. 그러나 고니시는 조금의미동도 없이 점잖고 느 릿느릿한 자세로 화살을 활에 먹여가고 있었다. 흑 호는 내심 초조한 기분이 일었다.
‘침착한 놈이네. 역시 대장감이어서 그런지 보통 놈 하곤 다르구먼.’
흑호는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고 화살이 날아오는 방 향을 알아내기위해 눈을 부릅떴으나 고니시는 미동 도 하지 않았다.
그 화살을 겨누면서 고니시가 한양의 함락 여부를 마음속으로 점치고 있다는 것을 어찌 흑호가 알겠는가.
어느 쪽으로 화살 끝을 겨누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 지 않았다. 게다가 눈을 부릅뜨고 기운을 뿜어내었 지만 화살 끝에 맺힌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 아, 흑호는 화살을 피할 생각을 버렸다.
‘제기랄. 기왕 이렇게 된 것, 덜 치명적인 데에 맞 아주어야겠구먼.
좌우간 나중에 두고 보자.’
흑호는 속임수를 부리기로 마음을 다잡고 마치 고니 시의 기세에 눌려 덤벼드는 것처럼 길게 포효했다. 몸을 훌쩍 날리자, 순간 화살이맹렬한 속도로 쏘아 져 날아왔다.
처음에 예상하였던 것보다도 더 빠른 속도라 흑호는 급히 몸을 움츠렸으나 화살이 흑호의 왼쪽 어깨에 박히고 말았다.
보통 사냥꾼이 쏘는 화살 정도라면 팔백 년의 도를 쌓은 흑호에게약간 스치는 정도의 충격을 주지 못하 였을 것이겠지만 지금의 화살은생각보다도 충격이 심했다.
‘헉, 왜장 놈의 무예가 상당히 깊은 모양 이여. 좌우간 두고 보자구.’
투덜거리면서 상처에도 개의치 않고 달 려들던 자세그대로 허공에서 발을 박차고 왜장의 머 리 위에서 다시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커다란 대호가 화살을 맞고서도 자신의 머리 위에서 허공을 딛고도약을 하는 모습을 본 고니시 또한 크게 놀랐다. 그러니 그 졸개들은 오죽하랴. 왜병들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해 거의 넋이 나간 듯 흑호의유 연한 동작을 지켜보느라 무기를 휘두를 생각조차 하 지 못했다.
흑호는 공중에서 몸을 틀어 다시 왜병들의 장막 가 운데 한 지붕에발을 디디고는 다시 뛰어올랐다. 생 각보다 화살에 맞은 상처가 심한것 같아 마음먹은 대로 균형을 잡지 못해, 약간 자세가 흐트러져 주춤 거리면서 다시 방향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왜병들의 진지를 빠져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언뜻 보니 막 조선군 의 기마부대가 다시 왜병 진지를향해 돌입하여 왜병 들과 난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흑호는 방향을 그쪽으로 바꾸었다. 왜병들이 조선군 과 싸우는 데바빠 자신을 해치지는 않을 것 같아서 였다. 무심코 말 탄 한 장수의 얼굴이 눈에 띄였다.
‘으응……?’
그러다가 퍼뜩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짧은 순간이 었지만 눈이 밝은 흑호가 놓칠 리 없는 일이었다.
아까 보았던 아이의 얼굴과 묘하게닮은 얼굴이라니.
‘닮았어.’
흑호는 바로 강효식을 본 것이다.
강효식은 비록 요기와 맞서 싸우던 흑호에게 관심이 많았지만 지금은 왜병들과 전투하느라 흑호에게 눈 길을 줄 경황이 없었다. 그리고 흑호 역시 마찬가지 였다.
흑호는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몰아쉬고 세 개의 장 막 지붕을 디디며 허공을 날 듯이 도약하여 왜병의 진지를 빠져나갔다. 흑호가 디뎠던 장막들은 흑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흑호가 왜병 진지를 빠져나가 자마자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신기에 가까운 흑호의 몸놀림에 왜병들은 거의 넋이 나간 듯했다.
고니시조차도 자기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번째로 메우려던화살과 철궁을 들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흑호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살이 적중하였으니 한양은 점령될 것인가? 그러나 그 대호는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날 듯이 달아나 버렸어. 이것이 징조라면 무슨 징조란 말인가……………’
고니시는 잠시 망연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철궁을 휙 하고부장에게 던지듯 내밀었다. 그러자 부장은 깜짝 놀라 털썩 무릎을 꿇으며 철궁을 두 손 으로 공손히 받았다.
고니시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지금 호랑이 따위의 일에 신경 쓰다니, 자신이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조선군이 물밀듯이 몰려들어오는 상황이 아 닌가.
호랑이를 보낸 것이 조선군이든 우연이든 간에, 지 금 싸워야 할 상대는 신립 휘하의 조선군들이었다. “그깟 금수에 놀라지 말고 자리를 지켜라!”
고니시가 크게 소리를 치자 왜병들도 그제야 제정신 을 차린 듯, 와아 소리를 질렀다.
호랑이가 들이닥쳐 일부 진열이 흐트러지고 기세가 꺾였으나 대장인 고니시가 호랑이를 물리치자 사기 는 오히려 더 올랐다. 고니시는그 기세를 빌어 다시 한 번 크게 소리쳤다.
“상대는 조선군이다! 이번에야말로 전멸시켜 한 명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
“와아!”
왜병들은 기세 좋게 함성을 올리면서 저마다 창과 조총들을 집어들고 목책에 새까맣게 매달렸다.
왜병들의 사기가 회복된 줄도 모르는 조선군 또한 죽을 각오로 왜병들의 진지에 돌입하고 있었다. 신 립은 이일과 김여물 등과 함께 그선두에 서서 목소 리를 높여 군사들을 독려했다.
“적진을 돌파하라! 밀어붙여라!”
신립은 기마 부대로 왜병의 진을 돌파하게 한 후, 적을 포위하여대열을 흐트러뜨린 후 보병 부대로 하여금 진을 돌파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조선 군의 기마 부대가 밀집하여 왜병 진지의 돌파를 시 도하자 고니시도 그에 대응하여 조총수와 장창병을 그쪽으로 집결시켰다.
난전이 벌어지는 사이, 흑호는 상처입은 몸을 끌고 숲 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이미 많이 지쳤는데다 상처가 자꾸 쑤셔왔다. 특히 아까요기에 적중당했던 옆구리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그래도 마수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에 필사적으로내달렸다. 토둔술이나 목둔법을 써볼 까도 생각했지만 섣불리 도력을발휘할 수도 없는 노 릇이었다. 자칫하다가는 마수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엄청난 위험이 뒤따를지도 모른 다.
할 수 없이 피를 흘리며 뛸 수밖에 없었다. 흑호는 이를 악물었다.
아까 언뜻 보았던, 작고 추악하게 생긴 괴수가 자꾸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일족의 원수, 자신의 일족들 을 산 채로 찢어발긴 놈. 반드시 살아남아 복수를 하고 말리라. 반드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달리다가 갑자기 발이 휘청 꺾 이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앞이 잘 보 이지 않았다.
‘끄으응…….’
힘겹게 신음을 내뱉으면서 흑호는 자리에 풀썩 쓰러져 버렸다.
그때, 흑호의 희미한 영기를 느끼고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은동의 혼을 찾아 돌아다니던 유정이었다.
한편, 울달과 불솔, 은동과 이름조차 모르는 여인의 영을 대동한 태을사자 일행은 뇌옥으로 통하는 연못 인 무겁연으로 몸을 날려 지옥의중간을 통과하고 있 는 중이었다.
은동은 지옥을 직접 구경한다는 호기심에 마음이 들 떴지만 둘러볼틈이 나질 않았다. 태을사자가 조선군 이 괴멸되기 전에 어떻게든 호유화를 설득하여 수를 써보기 위하여 다른 곳을 들릴 여유도 없이 바쁘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은동은 그 와중에도 이판관의 일을 태을사자에게 이 야기해 보려고애를 썼지만 전심법을 쓸 줄 몰랐고, 더구나 울달의 옆구리에 끼여 있어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여느 어른의 옆구리 정도에 끼인 상태라면 팔이라도 놀릴 수 있을터였지만 울달은 워낙 덩치가 컸다. 팔뚝 또한 엄청나게 굵어서 팔을빼어 놀기는 커녕 아 예 옴짝달싹을 할 수 없었다.
은동은 울달의 팔에 끼어가는 동안 이판관이 무엇인 가 좋지 못한일을 꾸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계속 사로잡혀 있었다.
‘좋은 사람이었다면 자신의 부하인 노서기를 그런 식으로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태을사자를 이리로 내려가도록 종용한 것도 무슨 계책일지도 몰 라.’
그러한 생각을 하니 별안간 몸이 떨려왔다. 이렇게 하다가 태을사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은 어찌 되는가? 꼼짝 없이 죽은 사람이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버지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조선군도 속수무책으로 망해 버릴 것이 아닌가? 은동은 발버둥을 치려 했지만 아름드리 기둥만큼이 나 굵은 울달의팔뚝은 제아무리 용을 써도 꼼짝달싹 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사자는 은동이 무엇인가 할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는생각하지도 않았다. 은동이 붕어처럼 자꾸 입을 뻐끔거리는 것이 평생 처음보는 저승의 광경에 놀라서 그러려니 생각하며, 무관심하게뇌옥 을 향하여 계속 나아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