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11화
지옥은 십팔층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층을 요즈음 볼수 있는 건물의 한 층으로 생각하여 서는 안 된다. 지옥의 각각의 층은공간적인 넓이로 따질 수 있는 크기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또한 각각의 층은 시간의 흐름도 달랐으며 그 넓이 도 자유로이 넓어졌다 줄어들었다 할 수 있는 공간 이었다. 지옥의 각층이 얼마만큼확장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자는 없었으나, 대략 그 높이는 칠십만리 (里)이상으로 늘어날 수 있었고 그 폭은 팔백만 리 이상으로도 늘어난 적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높이는 칠천만 리까지도 늘어날 수 있으며 폭은 육억 팔천만리 이상으로도 된다고 하 니, 사실상 공간적인 제약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리고 지옥의 각층마다에는 사천만 이상의 귀졸과 삼십억 마리이상의 괴수들이 존재했는데, 이들은 인간의 영혼을 벌하고 도망치지못하도록 관리하는 역 할을 주로 맡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이 윤회를 거치기 위해 벌을 받는 과정 은 혹독했다. 인간들의 영혼이 저승에 도달하면 선 악과 공업(功業)의 많고 적음을 가려, 벌을 받는 자 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그 전에 인간의 영혼은 세심천의 물을 마셔 전생의 모든 기억은 물론이요, 지옥에서 벌을 받은 것조차 잊도록 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지옥의 벌은 악의 요 소를 근본적으로 영혼의 잠재의식 속에서 제거하기 위하여 인간 세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 독한 양상을띄었다.
그러나 실제로 영혼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 세상에서 매우 강한 육체의 고통 이라 여겨지는 것들의 대부분은영혼에게는 커다란 고통이 되지 못한다. 가령, 팔을 잡아 뽑거나 혀를 잡아 빼는 등의 일은 인간 세상에서는 엄청나게 끔 찍한 악형이 되겠지만, 영혼들에게 있어서는 공간적으로 신체를 학대한다 해도 실상아무런 고통을 느끼 지 않았다.
그러한 연유로, 지옥의 영혼들은 그들이 영혼의 상 태임을 잘 알지못하도록 세심하게 조정을 받고 있었 다. 마치 살아 있을 때처럼 여기고,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환영을 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지옥의 고통은 그런 느낌으로 직접 전달되는 고통이라기보다는 끝없이 반복되는 데에 더 커다란 비중을 두고 있다.
지옥에서는 층수가 높아질수록, 그러니까 지하로 내 려갈수록(사실지하라는 개념도 애매하다. 지옥도 인 간계에서 보면 하늘 위에 있는것이나 같기 때문이 다) 인간의 영혼들이 겪는 시간대가 달라진다. 가장 위층은 생계(生界)의 백 배 정도로 시간이 느 리게 가게 할 수있으며, 그 다음 층은 천 배의 식으 로 시간이 느리게 가도록 할 수 있다. 그러니 지하 십팔층 지옥에서는 무려 일천조의 일만 느리게 가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죄없는 인간의 영혼은 처음의 사십구일 동안의 방황과 심판을 거치고 나서 한 시 간도 채 되지 않아서 윤회를 거쳐다시 태어난다. 그 와 반면 죄를 지어 벌을 받는 영혼이 겪는 고통의시 간은 수십억 년이 될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지옥의 내부는 절대적 기준이 되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그 안에 있는 영혼들은 바 로 그러한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벌을 받는 영혼들 이외의 귀졸이나 저승사자, 판관 등은지옥 내에서 자신의 시간대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하 는 것이 가능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에 잠깐 들어갔다가 나오니 시간 이 엄청나게 흘러서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는 전설이 라든가, 용궁에서 놀고 인간 세상으로 돌아왔더니 그 사이에 백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 버렸다는 이야 기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간에서의 시간대가 마음 대로 굴절되고조종이 되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듯 시간의 흐름을 선택하여 사용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영혼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을 주목적으 로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어느 귀졸이 인간의 영혼과 똑같은 사고 를 지니고 똑같은 속도로 이동한다고 해도 그 귀졸 이 1천 배 느린 시간의 흐름을 사용한다면 인간의 영혼의 일각(刻)은 귀졸의 일천 각이 된다.
그 귀졸은 인간의 영혼보다 1천 배 빨리 움직이고 1천 배 빨리 사고 하는 셈이 된다. 인간의 영혼이 뭔가 일을 꾸미고 수상한 행동을하면 그 귀졸은 즉 시 시간의 흐름을 보다 느리게 돌림으로써 그런 행 동을 얼마든지 제지할 수 있었다.
귀졸의 시간 흐름이 느려지면 인간 영혼의 움직임 또한 한없이 느려보일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전반 적으로 지옥의 시간 흐름은 한없이 느리지만, 벌을 받는 존재들에게 별개의 시간 흐름을 적용시키는것 도 가능했다.
그렇다면 호유화는 어떠한가? 호유화는 시간이 길 어지면 무슨 짓을 꾸밀지 모른다고 생각되어 바깥의 흐름을 그대로 적용시켜 천사백년 동안을 지옥 십팔층에 가두어 두었다고 하니, 그 내부의 존재들의시간 흐름으로 보면 수천억 년의 수천 배를 가두어둔 셈이 될 수도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을사자는 지옥 안을 일일이 관찰하면서 다 닐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지옥의 안에 처음 들어가 는 처지였으나 지옥 내에서의시간 흐름을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광대무변한 십팔층의 지옥을 모두 꿰 뚫고 가더라도 바깥의 시각으로는 몇 시간밖에 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 나 그런 시간마저도 아까웠다.
지금 호유화라는 환수를 잘 구슬려서 양광 아래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만 할 수 있다면 신립의 마음을 돌 이켜 탄금대에서의 진을 허물수도 있지 않을까 싶었 다. 그렇게 함으로써 천기를 거스르려는 마계의 음 모를 분쇄해야 한다는 조바심마저 일었다.
그러자면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아껴야 했다. 그 렇듯 마음이 급했기 때문에 태을사자는 지옥 내부 곳곳에 존재하는 연못들(그 연못들은 번뇌연처럼 주로 이동 통로로 사용되는 것들이었다)을 통과하여이 동을 계속했다.
덕분에 은동은 처참한 지옥의 모습을 보지 않고 무 사히 넘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여인의 영이 계속 흐느끼고 있는 것 같아일행은 별로 기분 이 좋지 않았다.
특히 은동은 그 여인이 가엾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그 여인에 대하여는 태을사자와 이판관이 나눈 대화를 얼핏 엿들은 것 외에는 아는 부분이 없 었다. 하지만 신립을 사모하는 여인의 정이 그토록 깊은 것에 대해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비록 남녀간의 일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 은동이었 지만, 은동은 자신의 힘이 닿는다면 그 여인을 도와 주어야 한다는 다짐마저 일었다.
그 여인을 귀찮게 여기는 태을사자 역시 이상하게도 그 여인을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감정이 메마른 저승사자의 몸이었다. 그 러나 지난번 풍생수와의 일전을 치른 흑풍사자의 소 멸을 눈앞에 보고, 또 윤걸의 영을 검에 봉인시켰던 충격에 때문인지 심적으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예전 같으면 영혼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들의 죄에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고만 생각했 다. 그런데 지금은 왠지 그런광경을 보기가 싫었다. 마음속에서부터 무언가 변동이 일어나 인간과 비슷 한 감정이 싹을틔우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전에 같았으면 그런 느낌을 받으면 화를 내고 감정이 상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별 느낌이 없는 것 또한 그 증거의 하나였다.
‘내게 지금 무슨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 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태을사자는 울달과 불솔과도 거의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계속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지옥의 아비규 환을 발 밑에 둔 채 지옥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는 뇌옥을 향하여 한없이 날아만 갔다.
이윽고 반양반음의 어둠침침한 느낌을 주는 텅빈 듯한 심연을 통과했다. 그리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듯한 텅 빈공간에 도달하자 울달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 다 왔다. 여… 여기가………… 지옥 맨・・・・…..밑・・・・・・ 밑바닥,십・・・・ 십팔층의 뇌… 뇌…… 뇌옥이다.”
태을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러 통로들을 통과하고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지옥의 각층을여행하여 이제서야 지옥 에서 가장 깊은 곳이라고 하는 십팔층 뇌옥에도달한 것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음울한 회색과 보라색이 뒤섞여 있는 듯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빛 아닌 빛으로 희읍 스름하게 사방이 에워싸여 있어, 이 안에서는 마치 시간이며 사고가 모두 정지되어 버린 것 같은느낌이 었다.
이미 그들이 통과한 길은 흔적조차 없어졌으니 닫힌 공간 안에 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곳이 뇌옥. 그 근방에는 어떠한 건축물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헌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
태을사자가 묻자 이번에는 불솔이 대답했다. 불솔은 울달처럼 말을더듬지는 않았지만 머리는 더 안 돌아
가는 편이었다.
“여기 있어.”
“여기 있다니?”
“없다구. 있다구.”
“그 무슨 말인가?”
불솔은 뭔가 설명하려는 듯했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모르는것 같았다. 그러자 울달이 다시 떠듬 거리며 보충 설명을 했다.
“이… 이.. 이 안에는 아무 것도 없…. 없단 소리야. 하..하… 하지만….. 기… 기… 기 다리면 올 거야.”
“누가 온단 말인가?”
“여… 여… 여기를 관리하는 귀……귀・・・・・・ 귀 졸.”
태을사자는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일었다. 뇌옥으로 직접 와본것이 처음이었는데, 바깥에서 듣던 뇌옥의 갖가지 무시무시한 소문에비해 막상 아무 것 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던 것이다.
“지옥 십팔층 뇌옥은 무수히 많은 죄 지은 영혼을 가두는 곳이라던데, 왜 이리 공허한가?”
“모…… 모…… 몰랐나?”
“무엇을 말인가?”
“뇌… 뇌.. 뇌옥은 과…… 과…… 관리하는 곳…이야. 여……… 여・・・・・・ 영혼을 두…… 두…… 두는 곳 이 아니라구.”
“음?”
의아해 하는 태을사자에게 울달은 떠듬거리며 자신 이 알고 있는것을 알려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지옥 십팔층의 뇌옥은 무수히 존재하는 뇌옥들 간의 연결 통로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로 내려올 정도 의 영혼이라면 상당히 업보가 많고 죄를 많이 지은 자들이다.
그들은 지옥에서처럼 집단으로 벌을 받지 않고 따로따로 별개의세계로 수용되는데, 이곳은 별개로 수용 되는 곳들을 연결하고 바꾸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 는 것이다. 그래서 뇌옥에는 실질적으로는 아무 것 도 없다는 말이었다.
태을사자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인지라 놀라서 되물었 다.
“수없이 많은 뇌옥이, 그것도 연결되어 있다니?”
태을사자는 뭐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은동이 발버 둥을 치며 필사적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입을 놀리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무서워 말거라.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래두!”
태을사자가 매정하게 나무랐다. 은동은 자기 속도 모르고 계속 답답하게 구는 태을사자가 야속하여 뾰 로통해졌다.
‘어휴, 답답해. 나는 당신을 도와주려고 한단 말이 에요. 그런데 나를 이렇듯 무시하다니. 두고 봐요, 당신이 죽든 말든 난 몰라요.’
은동은 화가 나서 입을 꾹 다물었다.
은동의 속내를 알 길 없는 태을사자는 은동이 잠잠해지자 자기 말을 들은 줄 알고 은동에게서 눈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불솔은 태을사자에게 중얼거렸 다.
“꺼내.”
“무엇을?”
“그거. 거 있잖아. 그거……”
태을사자는 불솔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 잠시 당혹 해 하다가 이판관이 건네준 묘진령이 생각이 나서 급히 꺼냈다. 그러자 불솔은 그묘진령을 받아 절굿 공이같이 굵은 손가락으로 쥐고 허공에 몇 번 흔들 었다.
그러자 맑은 음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잠시 후, 태을사자와 울달, 불솔 앞의 허공에서 회색의 둥근 형체가 쓰윽 나타났다. 분명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었는데 느닷없이 둥근 형체가 나타나자 태을사자는 조금 놀랐으나 울달과 불솔은 태연한 기색이었다. 잠시 후 그 구체가 열리고 그 안에서 까무잡잡한 생 김의 귀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마어마한 불 솔과 울달을 한 번 훑어보더니 약간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여긴 무슨 볼일로 왔소? 방금 명부 이판관의 묘진
령 소리가 들렸는데?”
그러자 울달이 나름대로는 점잔을 뺀다고 했지만 역 시 더듬거리는말투로 대답했다.
“뇌………… 뇌옥에 볼…… 볼일이 있어서… 와…………. 왔다.”
그 귀졸 녀석이 힝힝거리며 코웃음으로 대꾸했다. 울달의 말더듬증이 우습다는 듯이 보였다. 원래 귀 졸은 판관보다 한참 밑의 계급이었지만 이 놈은 상 당히 건방진 것 같았다. 사실 뇌옥을 관리할 정도라 면어깨에 힘을 줄 만한 직책이었다.
태을사자는 이런 시답지 모습을 영 못마땅하게 생각 하는 성격이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불호령을 내렸 을 터인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터져나오려던 호령을 그냥 꿀꺽 삼켰다.
“여기 뇌옥에? 별일 다 보겠군. 당신들은 보아 하 니 저승사자와 신장 같은데 당신들이 여기 무슨 일 로 왔단 말유? 얼씨구? 인간 영도두 명 있네?”
그러자 태을사자가 불솔에게 묘진령을 받아들고 울달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여기 뇌옥에 호유화라는 환수가 있지 않느냐?”
“환수? 환계의 짐승 말유?”
“그렇다. 아마 감금된 지는 생계 시간으로 천사백년 가량 될 것이야. 구미호라고 들었는데?”
“가만 계슈. 내가 일일이 어떻게 다 외운단 말유. 가만있자, 환수・・・・・・환수 구미호라…. 대략 그놈이 천사백년 전에 들어온 것이 확실하우?”
귀졸 녀석은 소매 속에서 그 안에 들어 있다고는 감 히 상상하기도힘든, 커다란 죽간(竹簡)을 꺼내 좌르 륵 폈다. 물론 이곳은 저승이라여기에서 사용되는 물건들은 부피나 무게에 아무런 제약이 없는 영체들 이었다.
그러나 주로 인간 세상만을 오가던 태을사자의 눈에 는 새삼 희한하게 보였다. 아마 인간의 눈으로 본다 면 태을사자가 소매 속에 묵학선을 비롯하여 장검인 백아검 등등의 법기를 넣고 다니는 것에 놀랄테지만…….
귀졸 녀석의 죽간은 아주 두께가 얇고 대나무라기보 다는 유리판같아 보였는데, 거의 한아름은 되어 보 였다. 거기에 깨알 같은 글씨가빽빽하게 박혀 있었 으니 몇천, 몇만 명의 죄인이 적혀 있는지 알 수없 을 정도였다.
‘그것을 뒤지려면 한참 걸리겠군.’
그러다 태사자의 생각과는 달리, 놈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숙달된 솜씨로 죽간을 주르르 풀어내리 며 구미호 호유화를 찾아냈다.
“아, 있구먼. 어이쿠, 이거 대단한 독종인데? 이런 독물을 왜 만나려 하슈?”
“찾았나?”
“있네그려. 어디 보자……, 빨리 가야 만날 수 있겠 수. 근데 왜 그러시유?”
“그것을 내어다 명부로 데려갈 일이 생겼네. 판관나리의 지시이니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이.”
“내어간다? 석방시키는 거유?”
“아니네.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걸세.”
그러자 귀졸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명령대 로 움직이는 존재일 뿐이었다. 자기보다 훨씬 계급 이 높은 판관의 신물이 있으니 무슨 일을 시키더라
도 따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근데 당신들 전부 가는 거유?”
“사실 인간 영은 여기 놓고 갔으면 하는데?”
“어이쿠, 그럴 수 없수. 이거 원. 이 인간 영들을 구미호에게 주려고가는 거유?”
그 말을 듣자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 었다. 그러자태을사자가 답답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사정이 있다네. 인간 영들은 내가 꼭 데리고 다녀 야 하는데, 그 환수를 반드시 만나야 하니 그게 힘 들지 않겠는가?”
그러자 귀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어깨를 움찔했다.
“안 되겠는데요? 지금 여기는 나 혼자뿐이라우. 그 러니 둘이나 되는 영을 달구 어찌 일을 본단 말 유?”
“그럼 내가 데리고 가야 한단 말인가?”
“어이쿠야, 원래 인간 영은 뇌옥에 못 들어가우.”
“몸에 지니고 가는 것은 어떤가?”
“에그. 여기서는 금제가 쳐져 있어서 어떤 영도 다른 영을 몸에 가두지 못하게 되어 있수. 안 그러면 누가 죄수를 쓱 빼내도 모르게요?”
그러자 태을사자가 역정을 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소리인가? 맡아주지 도 못하고, 데리고 가지도 못하고, 지니고 가지도 못하면? 대체 어쩌라는 게야?”
귀졸 녀석은 태을사자가 호통을 치자 조금 찔끔하며 목을 움츠렸다. 태을사자가 역정을 내자 영력이 치 솟는데, 그 기세가 대단했던 것이다. 이미 흑풍사자 의 법력이 합쳐져 태을사자의 영력은 보통 저승사자 의 갑절이 넘었다.
귀졸 녀석은 주눅이 든 듯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뭐, 내 알 바 아니오. 판관 나으리의 신물이 있으 니 내가 뭐랄 수있겠나요. 방법이 없구먼요. 내 눈 감아줄 테니 데리구 가슈. 아참, 뇌옥이 붕괴되고 바뀔 시간이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슈.”
뇌옥이 붕괴되고 바뀐다니,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 지만 일단 귀졸녀석이 서두르는 바람에 태을사자와 울달, 불솔은 은동과 여인의 영을 데리고 회색 구체 안으로 신형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