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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2권 – 12화


겉에서 보기에는 좁아 보였는데, 그 구체의 내부는 십여 간은 족히되어 보일 정도로 광활했다. 그들이 들어서자 구체가 다시 닫혀 버렸다. 귀졸 녀석은 이 리저리 허공을 만지듯 영기를 쏟으며 분주하게 움직 이기 시작했다.

“뭐하는 겐가?”

“그 여우 있는 뇌옥의 입구를 열려는 거유.”

“헌데 뇌옥이 붕괴되고 바뀐다니, 그건 또 무슨 말 이지?”

태을사자가 못내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그러자 귀 졸 녀석은 여전히 말처럼 힝힝거리며 웃는 소리를 내면서 쉬지도 않고 손을 잽싸게놀리며 대답했다.

“좀 있으면 그 여우가 갇혀 있는 세상이 망한단 말 유. 죽는 거지.”

“세상이 망하고 죽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 71-?”

그러자 귀졸 녀석은 잠시 눈길을 돌려 태을사자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히히, 사자 나으리는 뇌옥엔 처음 와보시는구려.”

“그렇네. 생계와의 왕래가 나의 주된 일이라 예까지 와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네.”

“그렇구먼요. 뇌옥은 보통 감옥이 아니우. 뇌옥 하나하나가 생계의 짐승들이란 말유.”

“짐승?”

“그렇수다. 죄가 많은 놈들은 언제 도망갈지 모르 니, 그 크기가 수억분의 일로 줄여서 짐승 몸 속으 로 들여보내는 거유. 짐승의 몸 하나가 닫힌 세상 하나라고 볼 수 있수. 그게 바로 뇌옥의 특징이라우.”

“허어……………”

태을사자는 저으기 놀랐다. 생계의 짐승 하나하나가 뇌옥의 구실하다니. 비록 생계에 왕래를 자주 했 던 태사자였지만, 그 이야기는이번에 처음 듣는 것이라 호기심이 솟았다.

“영혼이야 크기나 무게에 좌우되지 않으니 작게 되 어 갇히는 일도있을 법하겠네만, 왜 짐승 속에 가두 는 것이지?”

“벌을 주는 거유, 히히히…………. 그렇게 해서 세상에 서 가장 큰 고통을 겪는 거유.”

“어떤 고통?”

“히힝, 자기가 있는 세상이 모조리 망한다고 생각해 보슈. 짐승의몸에 들어간 영혼은 말유, 그 짐승이 생계에서 죽고 몸이 썩으면 그영혼으로 봐서는 세상 이 모조리 망하는 거라우. 히히히………… 그러니그보다 큰 고통이 어디 있겠수?”

“흐흠…….”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이 아주 미세하게 축소되어 한짐승의 몸으로 들어가 갇히게 되면 그 짐승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고독에 시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 짐승이 죽으면 세상의 종말을 맛보아야 한다는 것이 지옥 십팔층 가장 밑바닥에 있는 뇌옥 의 정체였던 것이다.

그것은 육신에 가해지는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훨씬 능가하는고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 면 인간계에서 죄를 많이 지은 자는 동물로 환생한 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 다. 그리고 이 뇌옥에서의 형벌은 단순히 짐승으로 태어나 잡혀 먹히거나 죽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형벌 을 의미했다.

더군다나 뇌옥에서 시간의 흐름을 마음대로 조절하 기까지 하니…. 수만 년의 세월을 고독하게 지내 다가 혼자서 우주의 종말을맞이하는가 하면 몸소 버 티어내고 그것을 또 반복하는 형벌이라니…………. 

‘아무도 없이 이 광활한 우주에 혼자 존재하다가 그 우주의 소멸을몇 번이나 보고 부대끼는 것보다 더 커다란 고통이 있을까?’

그 생각을 하니 태을사자는 약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은동은 처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금 지나자 그 말뜻을 깨닫고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면 그 짐승이 죽으면 형은 끝나는 겐가?”

“바뀌고, 또 바뀌고……………. 히히히………… 그야 정해진 형기가 1년이다, 2년이다는 식으로 있지만, 그놈들에 게는 그게 천만 년도 되고 10억년도 되니 한없이 되풀이되는 걸로 느껴지는 법이유. 물론 죄를 치르 고 나간 놈도 있긴 하지만……………. 놈들의 시간으로는 수천억 년 동안 수만 번씩 죄를 받은 놈들두 있수. 여기까지 오고 나면 완전히 성격이바뀐다오. 대부분 은 죄를 지을 엄두도 못 내는 성격이 되고 말우.”

“거의가 다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가?”

“나간 놈은 다 참회하오. 참회 안한 놈은 못 나가거 든? 히히・・・・ 참회할 때까지 시간을 자꾸 늘리면 그만이라우.”

“호유화라는 그 구미호는 어떤가? 아는 바가 있는 가?”

“난 잘 모르우. 적혀 있기로는 아주 독종이라 하우. 그러니 이미 수천 번은 고통을 겪었을 거유.”

“어째서 그러한가? 호유화는 도력이 높아 혹시라도 탈출할까 봐서생계의 시간을 그대로 가게 두었다고 하던데? 그러니 수억 년이 아니라 단지 천사백 년 동안 갇혀 있었을 것 아닌가?”

“어라, 그러네 정말. 가만 있어 보슈. 좀 보구.” 

태을사자의 말을 듣자 귀졸은 호기심이 생기는지 다 시 그 죽간 뭉치를 꺼내어 한 곳을 짚었다. 그러자 하나의 막대로 된 죽간이 다시주르르 여러 개로 나 뉘어지며 다시 그 위에 글자를 그려냈다. 참으로신 기한 물건이었다. 놈은 한동안 그것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흐히, 그 물건은 워낙 독종이었던 것 같우. 여기도 기록이 없구려.

좌우간 시간은 그대로 두었다고 하우. 하지만 뭐도 력을 키워 빠져나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뇌옥이 뭔지 모르는 명부 나으리들이그냥 지레짐작 했겠지.”

“어째서?”

“그 영혼의 시간은 그대로 두고 그걸 생명이 짧은 버러지 같은 것에 넣어둬 보슈, 히히히. 그럼 앞에 서 말한 세상 종말을 짧으면 며칠, 길어야 한두 달에 한 번은 겪어야 하는 거 아니우? 아마 지금쯤은 거 의 미쳐 버렸을 거유.”

“긴 시간 동안 종말을 걱정하며 지내는 편이 더 큰 고통일 터인데왜 그리 한 것인가?”

“허허, 이 양반. 시간이 길면 생각하고 대비할 여유 나 있게? 정신없이 고통만 겪게 되어 보슈. 어디 제 정신이나 있겠수? 사실 참회를 시키려면 그렇게 해 서는 안 되지만, 그 물건은 생계나 높은 쪽의 영혼 이아니라 환계의 천한 것이라 그렇게 중벌을 내린 것 같수.”

생각해 보니 귀졸의 말이 옳았다. 기나긴 시간을 홀 로 있는 고독도견디기 어려울 터, 며칠에 한 번씩 스스로가 속해 있는 전 우주의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은 더더욱 버티기 힘든 일일지도 몰랐다.

태을사자는 은근히 호유화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스 쳤다. 그리고 지성의 심판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판관의 말에 의하면 호유화는 시투력주라는 구슬을 훔친 죄밖에는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토록 엄청난  벌을 받고 있다니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혹시 호유화가 감금당하 고 난 뒤 더 포악해진 것은 아닐까? 호유화가 만약 자신의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포악하여 금제를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걱정 이 스멀거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태을사자와 귀졸 녀석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울달 과 불솔은 그들의 이야기에 끼여들지 않고 둘이 머 리를 맞대고서 뭔가 상의하고있었다. 말을 거의 하 지 못할 정도의 머리밖에 없는 불솔이나 말을 하기 는 하되 더듬거리는 울달로서는 그들의 이야기에 끼 여들 처지도 아니었지만……

은동은 그냥 주변 정황에 놀라 입을 반쯤 벌리고 있 었고, 여인은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우는 데 지치 거나 싫증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는 사이 귀졸 녀석이 다시 분주히 손을 놀리자, 귀졸과 태을사자 사이에 다시 둥근 구멍이 나타났다.

“됐수. 이리 들어가면 되우. 단 서둘러 나오슈. 세 상 망하는 구경을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우.”

태을사자가 막 그 구멍으로 신형을 옮기려는 순간, 울달이 태을사자를 잡았다.

“가… 가만…. 그…… 여…… 여우를 데려가려면 보통 방법으로는 아………… 안 돼.”

무슨 소리인가 싶어 태을사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 자네들이 호위하면 되지 않는가?”

“그….. 그런데 판관님이 우리에게 방법을…….” 

불솔이 뭐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으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자 울달이 다시 떠듬거리며 말을 이어갔 다. 은동은 놀랍기도 하고 긴장이 되어 그 말에 귀 를 귀울였다.

“아…… 아니, 우…… 우린 문지기니… 원・・…..원래 그………… 금제의 재… 재주가 이………… 있어….하… 하지만….. 그…… 그 정도로대…………… 대단한 요물이라면………바… 방심하면 안 돼. 최・・・・・ 최고의 술…… 술수를 부리는 수밖에…………….”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우…… 우리 둘이 벼……….. 변신하겠다. 고…… 고리로 변해 그…………금제를 가하지.”

“금제를? 아니, 고리로 변신하다니 그 무슨……?” 

“이…… 일이 성사되는 날 파・・・・・・ 판관님이 우…… 우릴 다시 원래모습으로 돌려보내실 거야. 고… 고리가 되거든 나중에 그….. 그걸 놈의 모…… 목 에 채워. 그래서 말만 하면 돼.”

“어떻게 목에 채우는가?”

“고………… 고리를 공중에 던………… 던지면서 놈을・・・・・・ 손・・・・・・ 손가락으로 가・・・・・・ 가리키고 금제복마(禁制 伏魔), 그………… 금제복마라고 세…. 세번 외쳐.” 

“그러면?”

“우…… 우리는 이제 의… 의식이 없어져. 금・・・・・・ 금제를 가한자의 말을 듣는 법∙∙∙∙∙∙ 법기로 변…변하는 거야. 조・・・・・・ 조이라면 조・・・・・・조이고 느・・・・・・느슨해지라면 느…… 느슨해지고…………….”

울달은 그 말만 남기고는 별안간 팔을 한 데 모으며 기합성을 질렀고 불솔도 울달과 동시에 같은 행동을 했다.

“자… 잠깐!”

태을사자는 놀라서 뭐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그 거 대하던 둘의 몸이 비비 꼬이며 작게 뭉쳐져 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덜컥 소리가 나며둘의 모습이 사라 지고 태을사자의 손에 각기 한 뼘 정도가 되어 서로 이어져 있는 얇은 반원형의 쇠고리 조각 두 개가 떨 어졌다.

태을사자는 그것이 울달과 불솔이 변신한 고리라는 것은 알았지만,자신과는 상의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변신해 버려 놀라움을 감추지못했다. 두 장한(壯漢) 이 사라져 손에 쥐어지는 물건으로 변해 버리자태

사자는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허어, 이런…….”

그러자 귀졸 녀석이 아는 체를 했다.

“난 그 둘이 신장인 줄 알았더니 문지기였구먼 그래. 문지기들은그렇게 자물쇠나 고리 같은 것으로 변할 줄 안다우. 놀라긴 뭘 놀라우? 나도 아는 걸 사자 나으리는…… 히힉.”

태을사자는 귀졸 녀석이 빈정대자 조금 마음이 상했 지만 내색은하지 않았다. 그저 망연하게 한 쌍의 고 리를 들여다볼 따름이었다.

“나중에 판관 나으리가 도로 변하게 해줄 수 있을 거유. 아, 좌우간어서 가요. 괜스레 세상 망하는 꼴 을 보려고 그러우? 그리고 나두 바쁘단 말유.”

귀졸 녀석의 재촉에 태을사자는 할 수 없이 울달과 불솔의 변신인고리를 손에 꼭 쥐었다. 일이 이 지경 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이 귀찮은 두 영을 자기가 데리고 다녀야 했다.

태을사자가 머뭇머뭇하자 귀졸 녀석은 바쁘다고 다 시 재촉을 하며여인의 영을 먼저 밀어냈다. 그러자 태을사자도 놀라 은동의 손을 잡아끌며 구멍으로 나 갔다. 나서자마자 귀졸에게 뭐라 한마디 해주려는찰 나 아무 것도 없는 듯한 텅 빈 공간이 눈앞에 나타 났다. 마치 번뇌연이나 무겁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흡사했다.

귀졸 녀석은 구멍 닫을 차비를 하며 지껄여댔다.

“내 한시진 후에 오겠수. 이 안엔 연락할 전혀 방법 이 없으니 늦지마시우.”

태을사자는 은동과 여인의 영을 흡물공으로 공중에 서 손을 대지않고 바로잡으며 외쳤다.

“늦어지면 어찌하는가?”

“그러게 늦지 마시래두. 한시진 내로 오는 것이 원 래 정해진 법이우. 늦어지면 알아서 하슈.”

“아니, 이놈! 어떻게…”

태을사자는 화가나서 호통을 치려 했으나 놈은 어느새 빠끔히 뚫렸던 구멍을 닫아 버렸다. 태을 사자는 화도 나고 어이도 없어 말을 채잇지 못했다. 내일 돌아가는 것은 말도 되지 않으니, 이제 한 시 진 내로 호유화를어떻게든 설복하여 금제를 가해서 돌아가야 한다. 그러는 와중에도셋은 기이한 공간 사이를 끝없이 떨어져 내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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