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13화
유정과 흑호
유정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호랑이 몸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영기로 볼 때, 일전에 금강산에 서 만났던 바로 그 호랑이임이 분명했다.
‘이 호랑이가 어찌하여 이곳에 와 있을꼬? 그리고 어째서 상처를 입었을까? 지금 처리할 일도 많은 판 에 호랑이까지 돌봐주어야 하는것은 아닌지 모르겠 군.’
유정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불도를 닦고 있는 몸으 로 상처입은 중생을 그냥 두고 가는 것 또한 마음에 걸렸다.
유정은 흑호에게로 다가가 어깻죽지에 박힌 화살촉 을 뽑았다. 그러자 흑호가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 이런!’
유정은 그 화살촉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화살촉은 왜국의 것이었으며, ‘行長(행장)’이라는 글씨가 씌 여 있는 것으로 보아 고니시가 쏜것이 틀림없었다.
‘소서행장이 호랑이에게 활을 쏘는 일도 있을 법하 겠지만, 전쟁이한참인 이곳에서 어찌 호랑이에게 활 을 쏠 여유가 있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유정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호랑이는 영물이었으니 틀림없이 소서행장에게 뛰어들어 그를격살하려다가 실패한 것 같구나. 그렇 다면 이 또한 조선 강산의 백성이니, 갸륵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재라 선재…’
유정은 호랑이를 구해주려는 생각으로 호랑이의 몸 을 끌었으나 워낙 덩치가 크고 무거워 쉽게 끌리지 않았다. 법력으로 간신히 끌 수있을 정도였고 들거 나 멜 수는 없었다. 황소보다 두 배는 됨직한 덩치 였기 때문이다.
유정이 아무리 공력이 높아도 은동의 몸에다가 이 대호까지 끌고산길을 멀리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저만치 산비탈에 조그마한 동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유정은 급히 그리로 흑호와 은동을 끌고 갔다. 그런 데 가다가 뭔가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와 걸 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마도 은동의 몸에 서 빠진 듯 싶은 책이 한 권 떨어져 있었다.
‘웬 책인가?’
유정은 그 책을 집어들었다. 책장에 써 있는 제목을 보는 순간 눈이휘둥그레졌다.
아까 무애에게서 받았던 <해동감결>이 조선의 옛 글자인 녹도문(鹿圖文)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은동이가몸에 지니고 있던 책 제목이 바로 <녹도문해(鹿圖文解)>가 아닌가? ‘어허! 이런이런. 이렇게 공교로울 데가 있나? 노 스님께서도 그 글자를 잘 해석하실 수 있을지 걱정 하셨는데, 이 책이 있다면 문제가 될것이 없겠군.’ 유정은 신립이 기왕에 패전할 것이 확실한 이상, 이 곳에 지체하기보다는 어서 서산대사에게 돌아가{해 동감결을 해석하여 천기를 맞추어 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조그마한 체구의 은동이라면 몰라도 흑호를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정은 잠시 고민 하다가 흑호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응급처치를 하기 시작했다.
화살이 박혔던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았으나 흑호의 옆구리에 기묘한 내상(內傷)이 있었다. 그곳에서 이 상한 느낌의 기운이 흘러나와예사롭지가 않았다. 그 기운이 자못 흉악하여 이대로 둔다면 흑호의몸을 크 게 다치게 할 것 같았다.
유정은 눈을 감고 불문의 법력을 써서 그 흉악한 기 운을 흑호의 몸밖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흑호의 몸에 법력을 넣어주다가마침내 요기를 제거 하는 데 성공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요기 가 지독하여 몰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다음 화살에 맞은 왼쪽 어깨를 처매주려고 흑호 의 다리를 들어보다가 유정은 묘한 것을 발견했다. 대호의 왼쪽 앞다리에 무엇인가로 각인된 글자라니? 유정은 그 모습을 보며 신기함을 금할 수가 없 었다.
‘중종 때 벌레가 나뭇잎을 파먹은 곳에 글자가 새겨 져 한 선비가역모에 몰려 죽었던 일은 있었지만, 호 랑이의 다리에 글자가 새겨진것은 생전 처음 보는구 나.’
그랬다. 중종 때, 조선에 훈구대신을 몰아내고 일대 개혁을 실시하려던 젊은 천재 정암 조광조(趙光祖) 가 역모에 몰려 죽은 사건이 있었다. 이상정치를 구 현하려던 조광조는 간신배들에게 미움을 샀다.
그들은 ‘조씨가 왕이 된다(走肖爲王)’라는 글씨를 대궐 후원 나뭇잎에다가 꿀로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음모를 꾸몄다.
그 일을 신의 계시 같은 것으로 생각한 왕은 조광조 를 미워하게 되어, 마침내는 역적으로 몰아 기묘사 화가 일어났다.
아무튼 호랑이의 다리에 글자가 있다는 것은 유정으 로서도 처음보는 터라 그 글씨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글은 다름아닌 녹도문이 아닌가.
유정은 비록 녹도문을 읽을 줄 몰랐으나 지금 은동 의 품 안에서 나온 <녹도문해>가 있었다. 우선 흑 호의 왼쪽 어깨의 상처에 늘 가지고다니던 금창약 (칼이나 창 등 쇠날이 있는 무기로 다쳤을 때 바르 는 고약)을바른 후 승복 자락으로 처매준 뒤, 흑호 다리에 써 있던 글자를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옮겨 그렸다. 그리고 <녹도문해> 책을 펴서 그 글자를 맞추어 해독해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호기심이 일어 견딜 수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태을사자를 뇌옥으로 보내준 귀졸은 계속 기 분이 좋아 연신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평소에 귀졸들 보기를 발끝의 때만큼도 생각하지 않 던 저승사자나으리를 뇌옥 공간에다 내팽개쳤으니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처럼 속이 시원했다. 애 가 타서 쩔쩔 매게 만든 연후에나 꺼내 주려는심산 이었다.
나중에 받을 역정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또 그때였다. 설마 명을 받아 죄수를 압송해 가는 사자가 자신에게 화풀이를할까 하는 배짱도 어 느 정도 작용하고 있었다.
그 귀졸에게 헐레벌떡 다른 두 명의 저승사자와 신 장 두 명이 달려온 것은 그로부터 이각(刻)정도 뒤의 일이었다.
사계의 저승사자나 신장이 뇌옥을 직접 찾는 일은 거의 없던 일인데 이렇듯 얼마되지 않는 시간 사이 에 여러 명이 드나들다니? 귀졸녀석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급수가 낮은 놈이라 군말없이 앞 으로 나섰다.
“어인 일이슈?”
“이곳을 조금 전에 태을사자라는 자와 울달, 불솔이 라는 두 명의거한이 통과해 갔겠다?”
다짜고짜 명령조로 나오는 저승사자의 태도에 귀졸 은 조금 기분이상했으나 역시 그놈의 계급이 원수인 지라 대답을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귀졸은 그 나마 반항심으로 삐딱하게 대답하는 것으로 응했다.
“좀 다른뎁쇼?”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거한은 변신하여 무슨 쇠고리가 됩니다. 그리고 두 인간의 영을달고 가던데요?”
“인간의 영? 아니 난데없이 무슨 인간의 영을 달고 간단 말이냐?”
“사자님두 모르시는데 내가 알겄수?”
“네 이놈!”
저승사자 하나가 호통을 치며 을러대자 조용히 뒤에 서 있던 신장이 말렸다.
“가만가만, 차근차근 물어봅시다. 어떤 인간의 영이 냐?”
“하나는 아이인데 입을 꾹 다물고 있구, 다른 하나는 여인인데 질질 짜고만 있더구먼요.”
“거짓이 아니다?”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한단 말유?”
그러자 또 다른 저승사자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암류, 아무래도 이상하이. 그 자가 무엇 때문에 인 간의 영을 달고갔을까?”
“모르겠소이다. 태을은 아닌 것 같은데……”
사자들과 신장들은 잠시 자기들끼리 뭐라고 이야기 를 주고받더니다시 물었다.
“그 사자의 이름을 들었느냐? 아니면 뭐 특이한 점이라도?”
“태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판관의 신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들여보내 줬지유.”
“허어, 판관의 신물이라니. 누구의 신물이었는가?”
“사계 명부 이판관의 신물인 묘진령이우.”
그러자 그들 뒤에 있던 신장 하나가 자신의 법기인 길다란 화극화가 난 듯 다른 손에 거칠게 옮겨 잡 으며 발을 굴렀다.
“저런! 놈들이 틀림없소이다!”
귀졸 녀석은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넷은 살기등등하게 영력을 몰아넣은 서슬퍼런 법기 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어구야, 뭔가 급변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귀졸은 두려움이 일었지만 녀석의 두뇌는 그 이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놈들이 뇌옥 어디로 갔는가? 어서 그리로 안내 해라!”
“가만가만….. 우선 신물을 보여주슈. 사자나 신장 은 여기를 그냥은 못 지나갑니다. 최소 판관급 이상 의 신물을 보여야만………….”
“허, 그놈 꽤 귀찮게 구는구나!”
느닷없이 다른 저승사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무언 가를 홱 꺼내보였다. 그것을 보고 귀졸은 그만 얼굴 이 퍼렇게 질려서 다리에 힘이풀렸다. 아마 귀졸이 영혼이 아니라 무게가 있는 생계의 존재였으면필경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그 저승사자가 꺼내든 것은 판관의 신물이 아니라 저승에서 거의최고급의 권위를 지닌 신물인 염왕령 (閻王)이었다! 그 염왕령은 염왕의 직접 명령을 하 달받은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신표로서, 보통의 귀졸 로서는 평생 한 번 구경해볼까 말까 하는 엄중한내 용을 지닌 신물이었다. 귀졸 녀석은 염왕령을 보더 니 갑자기 말을더듬기 시작했다.
“아… 아이고.. 도…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 세 놈은 저승의 판관을 해치고 신물을 탈취하여 뇌옥에 갇혀있는 환수를 탈출시키려고 한 혐의를 받 고 있다. 그러니 어서 속히 그놈들이 간 곳을 대지 못할까?”
귀졸 녀석은 놀라 까무러치듯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 다. 그들의 이야기는 다름이 아니라, 태을사자는 두 문지기와 공모하여 이판관을살해(소멸시킨 것을 의 미)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죄악이 들끓는 생계에서의 인간이라면 모를까, 어찌 사계에서 이런일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그…… 그들은…… 환…… 환수 호유화를……석방 한다고 갔습니다요.”
“환수? 그게 무엇인가?”
“구미호입니다. 천오백년 동안 갇혀 지내는 독종인데…………….”
“구미호? 그럼 환계의 요물이란 말이냐? 어찌 그런 것을…….”
그러자 화극을 빼들고 있던 신장 외에 장창을 들고 있던 신장이 다른 자들보다는 한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면 놈들은 환수를 탈옥시키기 위해 이판관을 해치고 묘진령을 탈취했는지도 모르겠군요. 그런데 왜 환수 따위를 탈출시키려 했을까요?”
“모를 일이군. 고작 그까짓 것을 위해?”
“어쩌면 놈들은…………… 환계나 유계의 첩자일는지 …….”
그러자 화극을 지닌 신장은 그 겉모습답게 무척이나 성질 급한 듯한 말투로 외쳤다.
“아니, 사계에 어찌 그런 것들이 들어와서 관직을 받고 있을 수 있단 말이오?”
“그러나 지금 사계는 유계의 대군이 침입하려고 하 여 난리가 나지않았소? 그러니 있을 수 있는 일 아 닙니까?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아직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잖소? 이 일도 전쟁의 일환일지도 모 르지요. 그리고 그 호유화라고 했던가? 그 구미호는 이 전쟁에 뭔가 중요한 열쇠가 되는 요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저승사자 하나가 신장의 말을 중단시켰다.
“좌우간 이렇게 지체할 수는 없네. 따라가 보게나.”
그러자 귀졸이 고개와 손을 동시에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안 됩니다, 나으리들! 지금 그들이 들어간 지 삼 사각이나 지났습니다. 얼마 안있으면 나와야 할 시 간이에요. 늦으면 그 안에서 경을치릅니다. 세상이 뒤집히는..”
그러자 화극을 든 신장이 벌컥 신경질을 냈다.
“세상은 이미 뒤집혔다! 잔말 말고 어서 문을 열지 못할까!”
그러자 귀졸은 더 이상 아무 말하지 못하고 서둘러 서 호유화가 갇혀 있는 뇌옥에의 통로를 열 수밖에 없었다.
저승사자와 신장들은 재빨리 그 통로 안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러면서 저승사자 하나가 중얼거리는 소리 를 귀졸은 똑똑히 들었다.
“생포할까? 추궁한 후 그냥 격살하여야 할까?”
귀졸이 알기로 사계도 유계와 대전이 벌어지기 직전 인 위기상황인데, 이제는 저승사자의 반란에다가 사 계의 존재들끼리 서로 해치는일까지 일어나고 있다니…….
비록 계급낮고 힘없는 귀졸이지만 눈앞이 캄캄해지 는 것 같았다.
아까 신장의 말대로 세상은 이미 뒤집혔는지도 몰랐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