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14화 : 뇌옥 속의 호유화
뇌옥 속의 호유화
태을사자와 은동, 여인의 영은 그들의 뒤를 쫓는 자 들이 있다는 것은 전혀 모르는 채, 알 수 없는 혼돈 만이 지배하는 차원의 통로를 계속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으레 그러했지만, 특히 이번 뇌옥의 통로를 빠져나가는 것은 몹시 힘 에 겨웠다. 어지간한 태을사자로서도 상당한 고통을 받았고, 은동과 여인의 영은 거의 기절한 상태인 듯 했다.
이러한 공간 사이의 통로는 한 세계와 다른 차원을 지닌 또 다른세계를 연결하는 것이니만치, 그 중 어 느 한 세계에 속해 있는 자로서는 견디어 낼 수 없 을만치 이상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저승 내부의 번뇌연에 뛰어들 때에는 모든 것이 어 지럽게 휙휙 스쳐 지나가는 속도감 비슷한 기분을 주는 데 반해, 이번 뇌옥의 통로는매우 불쾌한 느낌 을 주었다.
물론 기분이었을 것이지만 그 통로는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그것도 몹시 기분 나쁜 부정형의 물체 같다 는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통로속을 빠져 지나갈 때 마다 그 통로는 점점 확대되어 가는 것 같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태을사자의 몸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몸을 지닌 생계의 존 재들은 이런 통로를 탈 수도 없을뿐더러, 타더라도 순식간에 온몸이 짓뭉개져 사라지거나 팍 퍼져서없 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육신이 없이 영체로만 이루어진 태을사자로서도 몸 근처에 다가오는 압박감과 불안한 기운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태을사자는 잠시 동안 정신을 잃고 통로 안을 표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표류하더라도 어차피 통 로의 반대쪽으로 이동되게 마련이었으니 걱정할 것 은 없었자.
한참 만에야 태을사자는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언제 다시 통로가 열린 것일까?’
사계의 저승사자인 태을사자가 정신을 잃는다 해서 땅에 엎어져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냥 둥둥 물 속 을 떠다니듯 허공에 떠 있다고나 할까.
태을사자는 정신을 추스리고 퍼뜩 신형을 수습했다.
‘혹여 잃어 버린 것은 없을까?’
이리저리 온몸을 살펴보았으나 다행히 모두 다 있었다. 여인의 영은 바로 근처 동의 영역시 조금 떨어진 곳에 축 처진 채 둥둥 떠 있었다.
두 영을 수습한 다음 태을사자는 혹시라도 놓친 물 건이 없나 살펴보았다. 묵학선과 백아검도 있었고 울달과 불솔이 변한 고리도 있었으며 두루말이 두 개, 그리고 그 이외에 저승사자들이 보통 가지고 다 니는 휴대품들이 다 있었다.
그 다음으로 주변을 돌아보다가 태을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어허하는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곳은 뇌옥의 안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와는 전혀 달랐다.
나지막한 언덕위에는 풀이 우거져 있었고,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저멀리 산에는 구름에 드리워져 있었으며 태을사자 가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아래 쪽에는 이십여 호 가량 되어 보이는 마을이 있었고전답도 보였다.
과수원인 듯해 보이는 나지막한 나무들도 보기좋게 늘어서 있었고뽕나무로 보이는 아름드리 나무들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었다. 정말 한적하고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이곳이 뇌옥이며 죄를 지은 영들이 벌을 받는 곳이라……………?
“허어, 좋은 곳이군.”
태을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잠시 고개 를 설레설레 저었다.
분명 귀졸의 이야기에 따르면, 뇌옥은 여느 짐승 몸 속의 소우주라하였다. 짐승의 몸 속이 어떻게 이러 한 모습이란 말인가?
‘아니, 어쩌면 가능한지도 모른다.’
태을사자는 얼른 생각을 고쳤다. 상상보다 훨씬 작 은 세계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저기 보이는 산 하나가 짐승 몸 속의 어느 한 부분 에 속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은 돌기 속의 또 다른 아주 작은 돌기일 수도있지를 않은가. 그렇 게 본다면…….
“아저씨는 누구시어요?”
느닷없이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와 태을사자는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그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듯이 아주 맑 고 티가 없었으며,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 같았다. 태을사자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조금 이상한 옷을 입은 조그마한계집아이 하나가 보였다. 태을사자는 어안이 벙벙하여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 여자아이를 응시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아이는 생긋 웃어 보였다. 느낌으로 는 대략 예닐곱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는데, 퍽 귀 여운 생김새이라 나이보다는 어려 보였다.
또한 몹시 귀티가 나고 피부가 백옥 같았으며 입술 은 연지를 칠한것처럼 붉었는데 눈매가 조금 치켜올 라가 조금은 매서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태을사자는 약간 조심스러운 마음이 일었다. 인간 세상에 자주 나가던 터라, 인간들이 자신을 알아보 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인 간 여자아이가 자신을 보고, 더군다나 말을 건 것에 본능적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곳은 인간 세상이 아니라지만 만의 하나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내가 보이느냐?”
태을사자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조심스레 묻자 여자아이가 다시한 번 생긋 웃었다.
“네에!”
“너는 누구냐? 그리고 여기는 어디지?”
태을사자는 내심 불안했으나 조금도 기죽지 않고 아 이에게 물었다.
“저는 승아(雅)라고 하옵니다. 그리고 여기는 뇌 옥이지요. 보아하니 사계의 사자님이신 것 같은 데…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뇌옥……. 그래, 여긴 분명 뇌옥이었다. 그런데 눈 앞에 보이는 이것은……?
“뇌옥이 어찌 이렇단 말인가?”
“쇤네는 잘 모르옵니다만, 뇌옥은 각각이 하나의 세상 아니옵니까? 사자님이 그런 것도 모르시어요?”
승아라고 자신을 밝힌 계집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태을사자는 요계집아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구나 싶 어 조금은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했지만 별 내색 않 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곳에 웬 마을이 있느냐?”
“모두 저승에서 죄를 지은 죄인들이 사는 마을입지요.”
“그러면 너도 죄를 지어 여기에 갇힌 것이란 말이 냐?”
“저야 그냥 죄인의 여식입지요. 부모의 죄가 물려진 것 아니겠사옵니까?”
계집아이는 움츠리는 기색도 없이 당돌하게 대답을 했다.
태을사자는 짧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 았다.
‘귀졸의 말에 따르면 이 뇌옥 안의 세상은 이 세상 을 이루는 짐승이 죽으면 함께 소멸된다고 하지 않 았던가?’
그리고 그 짐승은 생계에서 아주 흔하고도 천한 생명으로 윤회한다는 이야기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호유화에게 멸망하고 자주 고통을 주기 위하여 자주 일그러 몸에 배당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런 짐승의 몸 속에 이런 마을이 있고 어린 아이가 살고 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중대한 죄인을 다루는 혹독한 뇌옥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하찮은한 생명을 어찌 소중하게 다루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생게에서는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피를 흘리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으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잠긴 태을사자는 애써 생각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흑풍사자의 죽음 과 윤걸의 봉인을 본 뒤로는자신이 어딘가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일었다.
원래 생계에서의 죽음을 다루는 저승사자들은 생과 사에 대한 일체의 것에 따르는 감정이 없는 것이 정 상이었다. 그런 연유로 자신은지금 분명 점점 덜 떨 어진 저승사자로 변해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태을사자는 자신이 그리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아니다. 이 부끄럽다는 감정조차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감상에 젖고. 자 꾸 감정이 생겨가고…….’
그러는 사이에 승아는 정신을 잃고 있는 은동을 신 기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은동은 본디 매우 귀엽고 잘생긴 편이었는데 영혼만 빠져나온 상태가 되자 속 세의 때가 묻지 않아 더더욱 잘나 보였다.
승아는 은동을 자세히 이모저모 뜯어보더니 괜스레 킥킥 웃었다.
착잡한 심정이었던 태을사자는 킥킥거리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승아라는 계집아이가 웃고 있 는 것이 아닌가.
태을사자는 승아가 은동을 보고 웃은 것도 모르고, 자신의 멍한 모습을 보고 비웃은 것으로 오해하였 다. 그렇다고 별반 화가 나는 것은아니었지만 체면 이 구겨지는 것 같아서 짐짓 화난 척하며 말했다.
“아해야, 너는 무엇을 보고 웃는 게냐?”
“사자님께서는 그럼 무엇을 보시고 그렇게 멍하니 생각에 빠져 계십니까? 저는 이 꼬마를 보고 웃는데요?”
“그 꼬마가 왜?”
“아주 드물게 보이는 관상 같아서요.”
“관상? 어떤 관상인고?”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고, 엎드려 자다가도 다리가 부러지고, 될일도 안 되고 재수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그런 관상요.”
“허어…………….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그러자 승아는 조금 방정맞으면서도 귀엽게 혀를 날름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 죽어서 이 십팔 층 뇌옥까지 끌려왔지요.”
“원 참.”
태을사자가 보기에는 관상이 어쩌고 할 것도 없이 은동은 한낱 귀찮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그런데 가 만 보니 은동은 아직도 아까 자신의 소맷자락 속에 넣어두었던 화수대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화수대를 도로 회수하여 걸리적거리는 두루말이를 넣으려 하였으나 은동은 화수대를 꼭 쥐 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힘을 주어 은동 의 손가락을 풀기도 뭣해서 태을사자는 그냥 내버려 두며 말했다.
“그렇다면 너도 어린 나이에 뇌옥에 있으니 뒤로 자 빠져도 코가 깨지고, 엎드려 자다가도 다리가 부러 지고, 될 일도 안 되고 재수라고는지지리도 없는 그 런 관상이겠구나.”
그러자 승아는 갑자기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농담으 로 한 것이라면그냥 넘어갈 것이었으나, 태을사자는 농담을 할 줄 아는 성격이 아니었다. 단지 생각나는 대로 엄숙하게 말한 것 뿐이었다.
‘아니, 이런 어린 아이를 상대로 실없기 이를데 없 는 말을 내뱉다니?’
태을사자는 저으기 당황하여 다시 고쳐 말했다.
“내 너를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다. 어쩌다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구나. 화내지는 말거라.”
그러자 승아는 태을사자를 빤히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이의 얼굴에슬픔의 기색이 설핏 스쳤다.
“제가 불쌍하십니까?”
“무엇이 불쌍해?”
그러자 승아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조금 있으면 이 세계는 또 무너져 버린답니다. 그 럼 쇤네는 또 한없는 고통을 겪게 되겠지요. 사자님 께서는 우주가 무너지는 고통을아시는지요?”
“…….”
“그까짓 농지거리 좀 한들 어떻습니까? 하온데 사 자님께서 너무 정색을 하시기에… 그래서 쇤네를 불쌍하게 여기시는 거냐고 물어본것이옵니다.”
“불쌍하다면 불쌍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것이지. 어쨌거나 너는 왜 그리 말이 많으냐?”
“귀찮으시면 그만 두고 쇤네는 가겠습니다.”
“아니다, 잠깐 기다리거라. 내 물을 것이 있다.”
“뇌옥에 빠져서 허덕거리는 천한 것이 어찌 사자님의 질문에 대답할 만한 것을 알겠습니까?”
“허어, 거 참. 말 한 번 잘 하는구나.”
태을사자는 영악하게 말대답을 하는 승아가 결코 밉지는 않았다.
오히려 오래간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너는 내가 미운 게냐? 왜 자꾸 그러는 게야?”
“여느 사자님들 같으면 감정이 없으실 텐데… 어 찌 사자님은 다른 분들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사자님 맞으신지요?”
“맞다마다. 나는 태을이라고 한다. 내가 요즘 이상 한 일을 많이 당하여 조금 기분이 묘해서 그러니 이 상하게 생각말거라.”
아닌게 아니라 태을사자는 요즘 들어 자꾸 이상하게 감정이 생겨가는 것 같아서 의아하게 여기던 차였 다. 그런 참에 승아의 대꾸에 조금 찔끔하여 변명 비슷한 말을 했다. 그러자 승아가 갑자기 웃었다.
“왜 웃는 것이냐?”
“제가 불쌍하십니까? 불쌍하게 여기실 바에는 왜 이런 참혹한 벌을주시는지요? 그것이 말이 되지 않는 듯하여 웃어본 것이옵니다.호호………….”
순간 태을사자는 뭔가 묘한 것을 느꼈다. 승아가 마 지막에 내뱉은웃음소리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 성숙 한 여자에게서나 나올 성 싶은묘한 울림이었다. 순 간 태을사자는 벼락같이 소매에서 묵학선을 떨쳐들 면서 고함을 쳤다.
“어느 앞이라고 함부로 수작을 부리느냐! 네 정체 가 무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