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24화 : 왜란종결자의 예언
왜란종결자의 예언
어두운 동굴………. 강효식에게 도력을 불어넣어 근근 히 그 목숨을이어가게 하던 흑호는 문득 요기를 고 개를 번쩍 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다가오고 있 었던 것이다. 그기운은 세 개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중 둘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나오고 있었다.
‘마수들이로구먼! 그런데 한 놈의 요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요상한 일이여. 대체 그 놈은 누구일까?’
흑호는 마수들이 주변에 있다고 생각하자 일족들과 호군의 처참한죽음이 생각나서 눈에 불똥이 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은동과강효식을 책임져야 하 는 처지라 감히 나설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흑호는 마수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급히 도력을 지 웠다.
그런데 도력을 몸에서 지우자, 강효식의 몸에 도력 을 불어넣어 줄수가 없었다. 흑호가 밀어넣어 주던 도력이 끊기자 강효식은 쿨럭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신음 소리를 내지 않는가?
‘아이구, 이거 야단이네. 도력을 안 넣으면 이 사람 이 죽을 거고 도력을 넣으면 마수들이 내 기척을 알 아차릴 텐데….’
흑호는 당황하여 몸둘 바를 몰랐다.
‘지금 내 몸 상태로 세 놈을 당해낼 재간도 없는……..’
들키면 셋이 죽고, 들키지 않으려면 하나가 죽는다는 생각이 잠시스쳤다. 흑호는 애써 그런 유혹을 떨쳐 버렸다.
‘제기럴. 아무리 그래도 은동이 아버지가 죽는 것을 빤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법. 나중에 은동이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여? 내가 어려운 지경에 처했 어도 끝까지 도와주는 게 진짜 도움을 준 것이다. 하물며 내 몸을 사린다면 뭔 도움을 준 거겠어?’
흑호는 마음을 굳게 다잡고 아직 한 번도 행해보지 않은 다른 수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까 마수들과 겨룰 때에는 허허벌판이고 인간들이 득시글거리고있었지만 여기는 흑호의 본거지인 숲 속이었다. 흑호는 커다란 두 손을 땅바닥에 대고 마 음속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풀들아, 나무들아, 바위들아, 숲의 모든 것들아. 내 말을 들어라.’
흑호는 조선땅 금수의 왕인 호군의 증손자였다. 따 라서 생계의 자연 속에 있는 생명력 있는 존재들에 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있었다. 단, 아직 정식으로 호군의 후계자가 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수법이 제대로 통용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다행히 흑호가 주문을 행하자 주변의 숲과 잔가지, 나무와바위들까지도 흑호의 기(氣)에 공명 (共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수들은 오히려 흑호가 뿜어내고 있는 기를 수상하게 느낀 듯, 흑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기 운이 느껴졌다.
흑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으나 흑호는 이래 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는 계속 힘 을 주었다. 그러자 주변의 숲과 나무들이 점차 공명 하는 기운이 퍼지더니 잔잔한 울림이 숲에 가득 차 기 시작했다.
예로부터 밤에 깊은 숲이나 산 속에 들어가면 길을 잃거나 혼란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숲이 마치 그 자 체가 생명체인 것처럼 바스락거리고, 산이 웅웅거리 는 산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은 크고 작은 수많은 생명력의 기가 합쳐 져 더해져서 생기는 것이다.
흑호 는 지금의 도력을 사용하여 수십배로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흑호는 마수들과 한 차례, 그것도 간접적으로 겨루 어본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미 단 한 번의 경험 으로 마수들에게는 생명력 자체가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저승사자들의 법기도 통하지 않던 풍생수가 자신이 날린 돌에 의해 밀려났던 일이 그 증거였다. 밖에서는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숲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울고 있었다. 그러한 현상은 깊은 밤중 에 사람들이 흔히들 경험하여 소름이 끼쳐 되돌아나 오는 경지를 훨씬 넘은 것이었다. 만약 사람이 그속 에 있었다면 혼이 빠져서 헤매이다가 죽었을지도 모 른다. 그런데도불구하고 세 놈이 점점 다가오는 것 을 느끼자 흑호는 전력을 다하여숲을 울렸다.
그러자 우르릉 하는 소리가 숲을 돌면서 온갖 크고 작은 짐승들마저 정신이 혼란해져서 날뛰기 시작했 다.
잠들었던 새들이 푸드덕거렸으며 토끼며 다람쥐 같 은 것들이 어지럽게 뛰어다녔다. 멧돼지는 날뛰다가 나무를 들이받았고 뱀들은 마치도랑처럼 떼를 지어 쉿쉿거리며 지나갔다.
숲이 일대 혼란을 일으키자 마수들 역시 혼란에 빠 졌으며 계속 돌아다니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그들 은 멈추어 서서 갈팡질팡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놈들, 숲 속에서는 내가 왕이여.’
흑호는 남몰래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귀를 곤두세 우고 주위의 소리를 들었다. 마수들은 아마도 갖가 지동물들이며 자연물들이 난리를쳐대는 속에 더 버 티기가 어려운 듯, 어디론가 멀리 가 버리는 것 같 았다. 그러나 여전히 한 놈은 남아서 계속 숲 속을 돌아다니는 기운이전해왔다.
그놈은 마수의 요기가 느껴지지 않는 유일한 놈이었 다. 흑호는 그놈이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증이 일었 다.
‘음….. 좌우간 한 놈뿐이니 정 들키면 사생결단을 내는 거지 뭐.’
한 놈 정도라면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여기는 자신이 가장자연력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숲 속이었 고, 아까 마수에게서 받은 상처는 유정이 모두 몰아 내준 뒤였다.
소서행장에게 받은 상처는 외상(外傷)이었고 그 상 처도 유정이 어느 정도 치료해 준 터라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강효식의 상세가 다시 악 화되는 것 같아 흑호는 서둘러서 강효식에게 다시 도력을 주입해 주었다.
‘그나저나 이미 밤이 깊어가는데 이놈의 저승사자는 어찌 아직도오지 않는 거여?’
흑호는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때 갑 자기 무엇인가가흑호가 있는 동굴 안으로 스윽 들어 서는 것이 느껴졌다. 흑호는 깜짝놀라 강효식에게서 멈칫 물러나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그곳에는 태을사자와 흡사한 모습의 검은 옷을 입은 존재가 서 있는 것이 아닌가! 태을사자와 같은 사계 의 존재가 틀림없었다. 그런데 태을사자가 갓에 도포 차림인데 반하여, 그 자는 머리에 건을 얹고 가 슴에 흉배(胸背, 조선 시대에 관직의 고하를 나타내 기 위하여 관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던수를 놓은 천. 조선 시대 때 임금은 오조룡, 신하는 그 품급에 따 라 각각 다른동물의 형상으로 수를 놓았다)를 달고 손에는 판관필을 들고 있었다. 그모양새로 보아 태 을사자보다는 상급의 존재인 것 같았다.
흑호는 저승사자말고 다른 사계의 존재를 본 적이 없었다. 죽어본일이 없었으니까. 그 자를 보자 흑호 는 마수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마음을 놓았으나 그래도 긴장을 풀지 않고 전심법으로 물었다.
“뉘시우?”
그러자 그 자도 전심법으로 대답했다.
“자네가 흑호인가? 태을사자를 도와주었다던?”
“그렇수만……”
“그렇군. 역시 용맹하게 생겼구먼. 호군이 돌아가신 일은 정말 안되었네.”
그러자 흑호는 놀랐다. 도대체 이 자는 누구이기에 호군의 일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그 자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동굴 안을 훑어보고 흑호를 바라보며말했다.
“나는 태을사자의 상관인 이판관이라 하네.”
그시각, 태을사자를 필두로 일행은 다시 부지런히 움직여서 아까뇌옥으로 들어왔던 그 부근으로 갔다. 태을사자는 묘진령을 찾아 꺼내었다. 묘진령은 아까 소맷자락이 뜯어졌을 때에도 용케 떨어지지 않고 있 었던 것이다.
묘진령을 흔들어 신호를 하려 할 때 은동이 말했다. “잠깐만요, 태을사자님. 저기 그냥 있는 신장들하고 저승사자들은어떻게 하죠?”
그러자 호유화가 킥킥거리며 말했다.
“아, 맞아. 전부 죽여 없애 버릴까?”
그러자 은동은 정색을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비록 우리를 잡아가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죽일 것까지야있나요?”
“하지만 나를 공격하고 내 머리칼을 그슬리게 만들 었잖아!”
“그러나 그건 할 수 없어서…”
은동은 말을 하려다가 꿀꺽 삼켜 버렸다. 지금에야 어떻든 신장들과 자신의 편인 태을사자가 힘을 합쳐서
편을 들어준 것과 다름없으니,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호유화는 다시 눈꼬리가 쭉 치켜올 라간 무서운 형상이 되었다. 은동이 보기에도 자못 무서워 보였다. 은동은 암암리에생각을 정리했다.
‘비록 호유화가 지금은 내 말을 잘 들어주지만 성격 이 이렇듯 변덕스러우니 언제 또 변할지 모르겠구 나. 조심해야겠다.’
생각을 거두고 은동은 못을 박듯이 말에 힘을 주었다.
“좌우간 해치지는 말아요.”
“뒤쫓아오면 귀찮잖아?”
“아무튼 그러지는 말라구요.”
은동이 말을 듣지 않자 호유화는 기분이 상했는지 씩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을사자는 개의치 않고 다시 묘진령을 흔들려고 했다. 문득 떠오르는 생 각에 손을 멈추었다.
조금 아까 들어와서 자신을 추적했던 명옥, 암류, 유진충, 고영충도 이 문으로 들어왔을 것이 아닌가? 그러면 십중팔구 그 귀졸 녀석도 태을사자가 죄인이 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알고 있다면 나를 순순히 나가게 해줄까? 으음, 걱정이로구나. 아니, 나가게 해주는 것이 문 제가 아니라 그 입구에 군대가 지키고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태을사자는 묘진령을 들고 울려야 하나 말아야 할지 한동안 고민에 잠겼다.
금옥이 묘진령을 든 태을사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며 태을사자에게말했다.
“태을사자님, 그것은 이판관의 신물이자 법기가 아 닌가요? 소리를들은 기억이 나요.”
“음? 그렇다. 이건 이판관의 신물이다. 그런데 왜?”
그러자 금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듣기로, 원주인이 소멸되면 법기도 사라진다 고 들었습니다만………….”
“그래. 법기는 원래 주인의 영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니 주인이 소멸되면 법기도 당연히…….”
거기까지 말하다가 태사자는 앗 하며 짧게 비명을 질렀다.
‘맞아. 아까 신장들과 암류, 명옥사자들은 분명 이 판관이 살해당하여 그 범인으로 나를 지목하여 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판관이 주었던 신물인 묘진령은 아직까지 도 멀쩡하게 태을사자의 손에 남아 있었다. 그렇다 면 그것으로 볼 때 이판관은 아직소멸되지 않고 있 는 것이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을사 자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잘되었구나. 나는 이제 오해를 풀고 누명을 벗을 수 있겠다. 이제는 사계의 추적도 없을 것이다.” 은동은 태을사자가 기뻐하는 것을 보고 되물었다.
“어째서 그렇지요?”
“보아라. 이판관의 신물인 묘진령이 아직도 멀쩡히 있지 않느냐?
그러니 이는 이판관이 죽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니라.”
그 이야기를 듣자 은동도 기뻤다. 이제 싸움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아하, 그러면 앞으로는 신장들이나 저승사자들이 뒤쫓지 않겠군요. 그러면 어서 명부로 돌아가 높은 분께 아뢰지요.”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리고 태을사자는 묘진령을 울렸다. 그러자 짤랑거 리는 맑은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러고 나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이상하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태을사 자는 다시 한 번 묘진령을 울려보았으나 여전히감감 무소식이었다.
태을사자가 걱정한 대로, 뇌옥 문을 관리하는 귀졸 녀석은 공포에질려 문을 굳게 봉하고 절대로 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명의신장과 두 명의 사자가 들어간 뒤에 종적이 없어지고 아까 들어간 태을사자 의 묘진령만 울리고 있으니 놈이 공포에 떤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좌우간 뇌옥의 문이 열릴 생각조차 하지 않자 태을사자는 발을 굴렀다.
“어허, 이것 큰일이로구나. 뇌옥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꼼짝없이 이곳에 갇힌 셈이 되지 않는가?”
은동이 울상을 지으며 되물었다.
“어떡하죠?”
“이미 생계 시간으로 밤이 되었을 텐데………. 조선군의 안위도 그렇고 네 몸도 위태할지 모른다. 이거 정말 야단났구나.”
그 말을 듣자 은동은 울먹거리며 애가 타서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쳤다. 금옥도 신립에게 변괴가 생길지 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몹시 초조한 빛을 띠었다. 옆에 있던 호유화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말했다.
“은동의 몸이 위태롭다고? 은동이는 이미 죽은 게 아니었니? 아까아니라고 듣긴 했지만 믿을 수 없는
데…”
태을사자가 대신 대답하였다.
“아니다. 은동이는 혼만 빠져나와서 나와 같이 오게 된 것이야. 은동이의 몸은 흑호라는 호랑이가 지키 고 있는데 그 사정은…… 이야기하자면 기니까 나중 에 하자.”
그 말을 듣고자 호유화는 눈을 치켜뜨더니 이죽거렸 다.
“그러한것이지. 조선군이 망하고아니고는 알 바아니 지만 은동이가 위험해지면 안 되지. 은동이의 안전 을 책임진다고맹세했는데 그러면 나는 면목이 없어. 은동아, 다른 길로 가자꾸나.”
호유화는 엉뚱하게 뒤로 돌아서 다른 방향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호유화를 불러세웠다.
“이것 보아라. 어디로 가는 것이냐?”
“여기서 나가려고.”
그러자 은동이 놀라 물었다.
“호유화님, 여기서 어떻게 나간단 말이에요? 천사백 년을 갇혀 있었다면서요?”
걸음을 멈추고 호유화는 화를 내며 은동에게 말했다.
“너 다시 한 번 말해봐! 갇혀 있었다구? 난 갇혀 있었던 게 아니야! 내가 자발적으로 들어와 있었던 거지! 똑바로 이야기하라구!”
“아… 예…”
은동이 겁을 먹고 주춤거리자 호유화는 순식간에 상 냥한 표정으로바꾸더니 말했다.
“내가 나가려고만 마음 먹으면 언제든 나갈 수 있었 어. 네가 나에게 금제를 했던 것도 다 하늘의 뜻. 그러니 내가 나가는 것도 하늘의뜻이야. 이 호유화 님이 어떤 분인데 어디에 가두어둔들 못 나가겠니? 잠자코 따라와.”
은동은 나갈 수 있다는 호유화의 말에는 기대가 되 었다. 하지만 호유화의 성격이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음을 상기하고서 호유화의 뒤를따랐다.
제아무리 그래도 태을사자와 금옥은 호유화가 마음 에 들지 않았지만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 서 호유화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그 둘은 아무 생각 없는 은동과는 달리 호유화에 대해 긴장을 풀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