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왜란종결자 2권 – 25화


한편, 유정은 공손한 자세로 서산대사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종일 축지법을 사용하 여 거의 천리 길을 왕복하여 몹시몸이 피곤하였으나 상당히 긴장된 상태였다.

서산대사는 계속하여 <해동감결>과 유정이 은동에 게서 얻어온<녹도문해>를 뒤적였다. 이따끔씩 앞에 놓인 지필묵에 무엇인가를써내려 갔다. 그리고 길고 하얀 수염이 조금씩 떨리는 것으로 보아 크게 긴장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미 서산대사는 두 시각이 넘게 <해동감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서산대사도 녹도문을 해석할 줄은 몰랐다. 아마도 유정이 우연히 <녹도문해〉를 얻어오지 못했더라면 <해동감결>은 단지 그림의떡 으로 되었을 것이었다.

왜군이 충청도 북부까지 진군하여 길이 막힌 지금, 다시 해동밀교를 찾아가서 해석서를 얻어올 수도 없 었다. 더구나 해동밀교를 찾아갔던 무애의 말에 의하면 해동밀교에서는 <해동감결>을 번역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해동감결>에 해동밀교의 최후에 대해서 적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학식이 대단한 노승인 서산대사가 〈녹도문 해>를 가지고서도 <해동감결>을 풀어 적기란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해동감결>은천기를 기록한 책이 라 그 대부분이 파자破字, 글자의 자획을 나누거나 합하여 맞추는 방법)로 기록되어 범인(凡人)이 알기 어렵게 되어 있었기때문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 서산대사는 <해동감결>을 처음부 터 끝까지 다넘겼다. 그리고 잠시 책을 물끄러미 바 라보더니 다시 종이에 몇 글자를 적었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쉬면서 소매를 들어 이마에 송글송글 솟은 땀방울을 닦아내었다. 유정은 그 모습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떤 내용이 적혀 있사옵니까?”

유정의 물음에 서산대사는 나지막이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내 학식이 짧아 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원망스럽구나. 그러나 이 책은 정녕 놀라운 것 이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읽혀져서는 안 돼…………. 암, 절대로 안 돼…………….”

“그렇듯 놀라운 책이옵니까?”

유정이 눈을 크게 뜨며 묻자 서산대사는 조금 팔이 아픈 듯, 붓을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것을 읽으면 미래까지도 알 수 있을 것이야. 그 러나 천기를 거스르는 일이 될지도 모르지. 나는 지 금 이 책의 내용 중 지금의 난리에 관련된 것만을 골라내었다. 그 이외의 것은 읽어서도 아니 되고 발 설해서도 아니 될 것이야. 천기가 누설되는 것은 절 대 함부로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정은 서산대사의 말에 합장을 해보이며 말했다. 

“삼가,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러자 서산대사도 합장을 해보이더니 자신이 적은 종이를 유정에게 내밀었다.

“여기에는 대략 일천오백 수 정도의 시가 있는데 그 하나하나 천기를 간직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놀랍지 않은 내용이 없구나. 나는 그중 다섯 수 만을 골 라내었다. 지금의 난리와 직접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들은 내 옮겨 적지 않았느니라. 설혹 빠지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전부를 뒤적이는 것은 크게 천기를 누설하는 일이니, 어찌 그리할 수 있겠느냐? 너는 여기에 적힌 내용 이외에는 절대 다시 이 책을 보지 도말 것이며 아무도 이 책을 보게 해서도 안 되느니 라. 알겠느냐?”

유정은 떨리는 손으로 서산대사가 적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서산대사는 글을 다시 한문으로 번역하여 적었으나 한문은 시 형태로 되지않았으며 부분부분 은 언문으로 적혀 있었다.

아마도 녹도문은 조선의 고문자이니만큼 현재의 조 선말을 발음대로 적어야 하는 부분도 있기에 그렇게 적은 모양이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다섯 개의 문장이었는데 대략 바다 건너에서부터 장차 난리가 날 것인데 아무도 원하지 않는것이 다. 그러나 난리는 반드시 난다. 용이 난리를 일으키면 피가 갑자기 솟고 오래 끌지만, 이는 죽을 병은 아니다. 뱀이 난리를 일으키면피는 적게 흐르지 만 반드시 죽는 역병이 되리라.

“이것은 남…….”

“그래, 남사고(南師古)의 말과 유사한 글이로구나.” 

유정도 남사고에 대하여는 잘 알고 있었다. 남사고 는 울진 사람으로 대단히 유명한 역술가이자 점쟁이 였다. 그는 주역에 능통하고 학문이 깊어 미래를 예 언하기를 잘하였는데, 하나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그 예언의 능력을 발휘할 때는 하나도맞지 않았다.

그런데 남사고가 한 예언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 었다.

‘머지 않아 반드시 난리가 일어날 것인데 진년(辰 年)에 일어난다면 오히려 바로잡을 수 있거늘, 만약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바로잡지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용이 난리를 일으킨다는 말은 진년에 난 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뜻합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지금은 임진년이 아니냐? 이것을 볼 때에는남사고의 말과도 일치하며, 조선에 도 어느 정도의 희망이 있는 것 같구나.”

유정은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소문날 만큼 두뇌가 명 석하였다. 그러한 까닭에 그 단서를 잡자 그 글의 나머지 부분을 해독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피가 갑자기 솟는다는 것은 피해가 크다는 말이오, 오래 끈다는 것은 전쟁이 장기화된다는 소리일 것이 다. 그러나 죽을 병은 아니라 하였으니 조선의 국운 자체가 불안하지 않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사년에 전쟁이 벌어지면 피는 적게 흐르지만 역병이 된다고 한 말이 섬뜩하였다. 역병 은 돌림병으로 전염이 되는 병이라는 뜻과 같으니, 그 자신도 죽을 뿐더러 남도 죽이는 것을 뜻할수 있 다. 그렇다면 조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 들도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유정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에 식은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으나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음 글을 보았다.

– 이루어질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쓰면, 이루어질 것이이루어지지 않겠으나 결국에는 이루어 진다. 우주의 인과와 섭리는 무한하니 나온 곳으로 돌아가고 시작한 자가 끝을 낸다. 대란(大亂)을 막 기 위해 소란(小亂)이 이어지니 왜란(倭亂)도, 호란 (胡亂)도 그중의 하나……………. 무릇 생명 가진 것들이라면 그 고통이 끝이 없구나.

이 글에 대해서는 서산대사도 유정도 별다른 해석을 내릴 수가 없었다. 다만 ‘왜란’이라는 글자가 나와 서 서산대사는 해석한 듯한데 그뒤에 ‘호란’이라는 글자가 나온 것에 유정은 조금은 찔끔한 생각이 들 었다.

그러나 호(胡)는 북방 오랑캐인 거란과 여진을 말하 는 바, 그들은별반 강하지 못하고 세력도 미미한 미 개 부족이었다. 조선 변방에서는 그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지만 그렇게 큰 난리가 조만간 일어나리라고 는 유정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여진에 누 루하치라는걸출한 지도자가 나와 민족을 단합시키고 후에 청(淸)나라의 기초가되는 금(金)국을 건설하게 되어 결국 명을 무너트리고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던 것이다. 유정은 다음으로 넘어갔다.

– 죽지 않아야 할 자 셋이 죽고, 죽어야 할 자 셋 이 죽지 않아야만이 난리가 끝날 수 있다. 죽지도 않았고 살지도 않은 자 셋이, 죽지도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자 셋을 이겨야 난리가 끝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옵니까?”

“글쎄・・・……그것 또한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구나. 허나 앞의 두 개의 시 사이에 끼여 있는 것이라 분 명 왜란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적은 것이다. <해동감결>은 시기 순으로 글이 배열되어 있었으니까.”

유정은 또 다음의 구절로 눈을 돌렸다.

– 슬프도다, 슬프도다. 죽은 임금의 탄식이 하늘을 찌르고 바다의우두머리는 재가 되리라. 눈물이 비오 듯 쏟아지는데 산 임금은 북으로, 북으로 달리는구 나. 북(北)을 믿지 말고 남(南)에 속지 말라. 남에서 일어난 것은 남에서 풀으리라.

다른 구절보다 북과 남에 대한 구절이 유정의 눈길 을 끌었다. 특히산 임금이 북으로, 북으로 달린다는 구절이…

“이것은 혹시…..?”

“그래. 아마도 상감께서 북으로 피란하시는 것을 의 미한 것 같다.”

“상감께서 한양을 버린단 말이옵니까? 그러면 도읍을 왜군에게 내어준다는…”

유정은 놀라 소리쳤으나 서산대사는 침착했다.

“그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니라. 조정에 현명한 신하가 있으면 그리할 것이오, 보좌하는 신하가 명석하 지 못하면 일을 그르칠 것이야.”

“한양을 버리고 나라가 보존될 수 있겠사옵니까?”

유정은 아무래로 그 점이 석연치 않은 것 같았으나 서산대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마지막 글을 보아라. 뭔가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는 듯한데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느니.” 

그러나 유정은 이미 서산대사의 말을 듣고 있지 않 았다. 아까 참에흑호의 다리에 적힌 녹두문을 풀었 던 다섯 개의 글자가 크게 확대되어 유정의 시야를 어느덧 가득 메웠다. 우연히 보았던, 아니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기묘한 일치였다.

– 왜란종결자(倭亂終結者)는 신씨(申氏)가 아니 되 면 이씨(李氏)가되고, 이씨가 아니 되면 김씨(金氏) 가 된다. 신씨가 되면 금방 되찾고, 이씨가 되면 삼 백 년을 지키며, 김씨가 되면 반의 반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