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2권 – 9화 : 금제의 고리
금제의 고리
그 시간, 어느 커다란 나무 밑에 은동을 눕혀 놓고 있던 유정은 몹시 초조했다.
처음에는 은동이 그저 정신을 잃고 있는 것이라 생 각했거늘, 막상데려와서 보니 정신을 잃은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의식이 없고 동공이 벌어지고 몸을 건드려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혼이 빠져나간듯 했다.유정은 은동을 구하려고 자신의 몸 속에 있는 법력
을 아낌없이 추궁과혈의 수법으로 밀어넣어 주었으 나 은동의 몸은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유정은 생각다 못해 밀교의 법술을 사용하여 급히 식지 끝을 깨물고 피로 은동의 이마에 부적을 그리 는 활인귀술(活人鬼術)까지도 해보았지만 꿈쩍도 하 지 않았다.
‘허허, 이렇다면 잠시 놀라 혼이 빠져나간 것이 아 니로구나. 무엇인가에 의해 혼이 빠져나가 멀고도 먼 곳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비록 법력이 높은 유정이었으나, 저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빠져나간 혼을 되돌아오게 할 수는 없는 법.
‘어허. 어쩌다 이리 되었을까?’
유정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괴변이 일어난 까닭을 알 수가없었다.
‘벼랑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혼이 빠져나간 것이 아닐 터, 무슨 연유로 은동의 혼이 빠져나간 것인가?
혹여・・・・ 어떤 요물이 그 근처에있다가 이 아이의 혼을 빼내간 것은 아닌가?’
지금은 싸움이 한참에 올라 있었고 보나마나 조선군 이 패주할 것을 알고 있는 유정은 차마 그 참상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대로은동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록 몸의 상처가 얕지는 않았지만 불자로서의 자비 심을 발휘하여은동을 다시 옆구리에 끼고 아까 왜병 과 겨루었던 산비탈로 달려가기시작했다.
금색과 은색, 그리고 검은 색과 붉은 색이 현란한 갑옷을 입은, 패신분이 높아 보이는 왜군 장수가 나 타났다. 유난히 금속성 색깔이나현란한 원색을 보는 것을 싫어하던 흑호는 머리가 지끈거려 미칠 지경이 었다.
그러나 이것이 어인 일인가? 흑호의 기세에 눌려 있던 왜병들이 갑자기 생기를 되찾아 ‘와’ 하며 용 감무쌍해 지는 것이 아닌가.왜군의 진지 안에서 잠시 숨을 몰아쉬던 흑호는 이제는 그 처지완연히 뒤바뀌게 되었 다. 왜병들을 헤치고 진지에서 빠져나가기는커녕 오 히려 집단적으로 창을 들고 설치는 왜병들에게 계속 몰려 안쪽으로 밀리고 있었다.
흑호의 주위에 몰려드는 왜병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 만 갔다. 그 덕에 흑호를 괴롭히던 마수들을 따돌리 는데에 도움을 준 것이 그나마다행이랄까.
제아무리 마수들이라도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있는 왜병 진지에서마구잡이로 영력을 휘두르지 못했으 며, 더구나 수많은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양기에 당할 수 없어 더 이상은 추격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두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양기라면 마수들은 아무 런 느낌도 없을 테이었지만 그 수가 수만에 이르니 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싸움을앞두고 전의에 불타 는 병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 뛰어드는 것이라면조금 은 상황이 달라질 터였다.
‘흐음, 그려. 제아무리 마계에서 온 마수들일지라도 그다지 기분이좋을 리 없을 것이여.’
흑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화등잔만한 눈을 번 뜩이면서 왜병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실상은 비슷했지만 약간 차 이가 있었다.
그곳에서 마수들이 흑호를 쫓느라 마구 요력(妖力) 을 휘둘렀다면 아까처럼 몇몇 왜병이 맞아죽는 정도 가 아니라 수많은 왜병이 살상당하게될 상황이 벌어 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은 마수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마수들은 왜병들의 승리를 조장하고 있었다. 그런 터에 왜병들에게타격을 주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 지 못하다고 판단한 것은 뻔한 일.
게다가 흑호는 저승사자들이 풍생수와 싸울 때에 직 접 개입하지 않아서 마수들이 그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저 숨어 있던 도력높은 짐승 정도로 여겨 집요하게 추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아무리 도력 높은 짐승이라고는 하나 왜병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뛰어들었으니 금방 인간들에게 잡힐 것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작용하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