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3권 – 1화 : 마계의 목소리
1. 마계의 목소리.
하루 종일 지속된 싸움으로 고니시는 몹시 지쳐 있 었다. 육신만 지친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몹시 피곤했다. 비록 조선군 칠천 명 이상을 전멸시킨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대승이라고는 했지 만 왜군의 피해도 만만치는 않았다. 이 싸움에서만 천 명 정도의 인명 손실을 입었으며 그보다도 타격 이 큰 것은 화약이 거의 다 떨어진 것이다. 조총을 앞세워 승승장구로 진격해 온 왜군에게 화약이 소모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진격할 수 없다는 것이나 마 찬가지였다. 고니시는 부장들과 작전회의를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이제 도성인 한양까지는 얼 마 남지도 않았고 더 이상 앞을 가로막을 조선군도 없을 것이니 여기서부터는 천천히 진격하여 보급을 받고 휴식을 취하면서 올라가 단번에 한양을 점령하 자는 것이었다. 예전같으면 진격속도를 늦추자는 말 같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고니시에게는 같이 선봉장으로 임명된 가토에게 공을 빼앗길까 두 려운 마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토군 또한 자신과 입장이 별로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비록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세우비에 옷 젖는다는 식으로 싸울때마다 약간씩 소모되는 병력 은 어느새 무시할 수 없는 숫자가 되고 있었다. 애 당초 왜국을 출발할 때 고니시의 병력은 비전투원을 제외하고 일만 팔천 이백명이었다. 그런데 연전연승에도 불과하고 이미 이천여명이 죽거나 다쳐서 전투 불능상태에 빠져 있었다.
가토는 고니시보다 약간 많은 이만팔백명의 전투원 을 거느리고 출발했는바, 그의 사정도 그리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가토도 청주에서일단 보급 을 받은 다음에 북상하지 않을까? 더구나 거리상으 로 볼 때 가토는 자신보다 더 긴 거리를 행군하여야 한양으로 입성할 수 있을 것이었다.
고니시의 부장과 참모들은 그러한 사실을 고니시에 게 납득시킨 다음에야일단 진군속도를 늦추는데 동 의를 얻을 수 있었다. 회의를 끝내고 부장들이 나가 자 피곤한 허리를 주무르며 고니시는 속으로 중얼거 렸다.
‘가토.. 자기 힘만 믿고 날뛰는 천방지축.’
고니시와 가토 사이에는 상당한 알력이 있었다. 가 토는 풍신수길의 먼친척 출신 (풍신수길의 어머니의 사촌 여동생의 아들)인데 풍신수길의 부하가 된 뒤 구마모도(熊本)성의 성주가 되었다. 그런데 고니시 는 구마모도 성과 인접한 우도(土)성의 성주였는데 당시 전국시대에 인전관계에있던 영주들이 대개 그러했듯이 이해관계에 얽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더구나 가토는 평소 호탕하고도 방약무인한 성격이 라 고니시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으며 자주 고니시를 비웃기까지 했다. 고니시는 상인가문 출신이었으며 정통의 무인 집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토는 ‘ 그 자는 창칼도쓸 줄 모른다’며 자주 말했던 것이 다. 그때문에 고니시는 비록 겉으로는내색하지 않았 으나 속으로는 무척 비위가 상해 있었다. 거기다가 고니시는 이번 전쟁을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다른 영주들도 대동소이한입장이었는데 가토만은 토 요토미가 ‘전쟁이 끝나면 중국의 20개주를 주겠다’ 는 약속을 떠벌이고 다니며 혼자 좋아 했기 때문에 식견이 있는 고니시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더구나 가토는 전쟁과 별로 상관이 없는 불국사를 온통 불질러 버리고 좋아했다고 한다. 비록 고니시 는 카톨릭신자였지만 그러한 만행에 가까운 무교양 한 행동은 좋게 보이지 않았다.
‘부하들의 고통이나 전쟁의 참혹함은 안중에도 없이, 혼자 얻을 이익만을 생각하는 무식한 자.’
이것이 고니시의 가토에 대한 평가였다. 그런데 토 요토미는 말도 안되는 공동선봉을 가토와 함께 맡으 라는 명령을 내렸다. 둘 간의 경쟁심을 부추기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밀리면 왜국내에 서의 입지도가토보다 약해지게 될 것 이었다. 그런 판이니 무엇보다도 가토에게 밀려서는 안된다는 것 이 고니시의 생각이었다.
고니시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 바깥에 서는 승전을 자축하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 었다. 먹고 마시고 노는 모양이었다. 군량문제를 생 각하고 저것을 말릴까 고니시는 잠시 번민했지만 곧 생각을 바꾸어 그냥 놓아두기로 마음 먹었다. 전쟁 이 시작되기 전, 토요토미는 ‘조선은 곡식이 흔한 나라이니 군량은 자체조달하라’고 했었으나 실제 사 정은그렇지 못한 것 같았다. 때는 봄이라 바야흐로 곡식이 귀해질 때였고 한참논일을 해야 하는 와중에 전쟁이 났으니 천재라기보다는 인재로 농사가 제대 로 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판에 최고 권력자 토요토미가군량을 자체조달하라는 명을 내렸다니… 뒤에 분명 무슨 일이 벌어져도벌어질 것이라 고니시는 혼자 생각하며 마음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비록진격속도가 예상보다도 훨씬 빨라 아직 까지는 군량이 모자라는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 러고 있는데 부하이자 시동인 후지히데(英)가 조 촐한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대장님. 보잘 것 없습니다만 이것을.”
“오오. 후지히데인가?”
고니시는 반가와했다. 이 후지히데라는 시동은 고 니시가 상당히 아끼는 소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반 가왔다. 고니시는 먼 조선 땅까지 종군하면서도 후 지히데를 항상 곁에 두고 있었다.
후지히데는 아케치 (明知)씨이다. 아케치 가문에서도 과거 이름이 높았던 아케치 미쓰히 데(明知秀)의 동생뻘인 측근이었던 야헤이지 미쓰 하루의 가까운 일가가 된다. 이 아케치 미쓰히데란 인물은 왜국의 역사상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본을 통일하기 직전에 있던 정복자 오다 노 부나가의 가장 신뢰받는 신하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천하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던 때 혼노오사에 머물고 있던 노부나가를 습격하여 암살하고 말았다. 어째서 미쓰히데가 노부나가를 해쳤는지 정확한 이유는 아 무도 알지못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역사의 미스테 리로 남아 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거의 인간으로 서는 불가능해 보일 정도의 많은 재능과 지식을 지 닌천재 중의 천재였다. 전략, 전술은 말할 것도 없 는 명장이었고 고금의 예법과 전례에 밝은 학식있는 교양인이기도 했으며 건축, 토목에도 남다른조예가 있어서 노부나가의 성을 직접 설계하고 쌓았다. 그 런가하면 검술및 무예에도 뛰어났고 시, 연가에도 발군이었으며 총포를 다루는 사격술은 일본에서 제 일 간다고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한 능력을 인정 받아 노부나가 휘하에서 히데요시(당시에는 도오기 찌로오 라 불렸다.)와 앞뒤를다투는 대출세를 한 입 지전적인 인물인 미쓰히데가 어째서 노부나가를 살해 하였는가.
미쓰히데가 없었다면 현재의 히데요시 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은, 미쓰히 데가 노부나가를 살해한 후의 행동이었다. 그때 전 병력을 휘몰아 전력을 다하여 히데요시와 자웅을 결 했더라면 승패는 어찌될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미쓰히데는 교오토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소중한 군 자금과 금은 등을 군비에 충당하지 않고 절 등에 아 낌없이 시주했다. 그리고 막상 히데요시와의 싸움에 있어서도 그때까지의 전술역량은 어디로 갔는지 모 를 정도로 완전히 지리멸렬한 지휘를 하다가 단 한 번 싸움에 괴멸되어 죽음을 당한다. 비록 죽음을 당 했지만 미쓰히데의 고난은 그 한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미쓰히데는 ‘당시 모시고 있던 주군에게 모 반을 일으킨 자’로 악명을 떨치게되었고 아케치 씨 는 그 자체가 거의 몰락해 버렸다. 그 먼 친척들조 차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부끄러워 했으며 이것이 후의 메이지 유신 때까지 이어졌으니 대단한 수모를 당한 것이다. 야헤이지 미쓰하루는 그러한 미쓰히데 를 형님이라 부르면서 곁에서 모셔오던 미쓰히데 제 일의 측근인데 후지히데는 그 이후 일가가 몰락하여 유랑하여 우도성에 이르른 것을 고니시가 불쌍하게 여겨 거두어준 것이다. 그런데 후지히데는 미남, 미 녀가 많기로 소문난 아케치 가문의 피를 이은 때문 인지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빨랐으며 매우 인물이 준 수하였다. 아케치 가문의 대표자격이었던 미쓰히데 는미노의 도기 미나모도씨 출신으로 장군도 될 수 있는 명문의 후예였다. 그렇다면 후지히데도 그 핏 줄과 어느정도는 닿아있으니 결국 명문이라 할 수있 었다. 상인 출신으로 자신의 출신에 대해 약간의 부 담을 가지고 있는 고니시는 그러한 후지히데가 마음 에 들었다. 그래서 고니시는 종이나 다름없던 후지 히데를 귀여워 하고 아끼게 되어서 결국 자신의 시 동으로 삼기까지에 이르른 것이다.
고니시는 후지히데가 권해준 술잔을 받아 기분 좋게 들이켰다. 피로가다소 풀리는 것 같았다.
“고맙구나. 후지히데. 맛이 좋다.”
“감사합니다.”
“아주 좋은 맛이구나. 피곤이 다 풀리는 것 같다.”
“피곤하셨습니까?”
후지히데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고니시는 웃었다.
“그래. 피곤했다. 저렇게 끈질긴 병사들이라니.”
“그래도 대승을 거두시지 않았습니까? 연전연승. 전과가 대단하온데.”
고니시는 다시 한 잔을 따르게 하여 받아들며 웃었 다. 고니시는 후지히데의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 전쟁으로 화제가 이어지 면 자신이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측근이라고는 하나 부하를 불안하게 만든다는 것은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아라.”
“다른 이야기라 하시면?”
“그냥 아무 이야기나 말이다. 옛날 이야기라도 좋 다.”
“이렇게 어린 저에게 옛날 이야기를 말하시라니요.”
후지히데는 말했으나 당황한 기색은 없어 보였다.
고니시는 그냥 재미삼아 기분좋게 술을 마시면서 후지히데에게 계속 이야기를 하라고 시켰다.
그러자 후지히데는 한참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대장님도 알고 계실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만.”
그러면서 후지히데는 가나가자끼의 퇴각전 이야기 를 했다.
일본 당시의 왜국에서는 자신들의 나라를 가리 켜 일본이라고 칭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조선이나 명 등의 다른 나라에서는 보통 왜라고 불렀다.) 통 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허수아비 장군 (** 일본에서의 장군이란 직위는 일반 군대의 대장 이 아니라 천하 무장들의 최고 우두머리를 뜻하며 최고 권력자를 의미했다. 장군은 실질적 통치기구인 막부를 세울 수 있었지만 이미 전국시대에는 장군은 이름뿐인 존재가 되어허명만을 지니고 있었다.) 요 시아끼를 끼고 교토를 점령한 직후의 일이었다. 장 군 요시아끼는 자신에게 허명만을 주고 실질적 권력 을 주지 않는 노부나가에게 불만을 품고 각지의 군웅들을 들쑤셔서 반 노부나가 동맹을 결성하게 했 다.
그 중 교토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영주가 아사꾸라 씨인데 노부나가는아사꾸라씨를 공격하여 가나가자 끼 성을 빼앗았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노부나가는 뜻하지 않은 배신을 당한다. 이는 그와 사돈간이며 동맹관계이기도 한 북 오오미 (** 노부나가의 근거 지는 남 오오미였다.)의 영주 아사이 나가마사가 노 부나가의 기대를 깨고 배신하여 노부나가 군의 후미 를막아 포위하려 한 것이다. 이에 노부나가는 접전 을 피해 급히 교토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제까지 밀리던 아사꾸라 군이 급히 추격해 왔다. 결국지금 은 간빠꾸(關白)이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 당시 에는 도오기찌로오라고 불리웠으며 성도 기노시다 라고 하는, 노부나가 휘하의 한 대장이었다.)가 그 뒤를 엄호할 것을 자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의 길이나 다름 없었다. 그의 수백에 불과한 부대를 추적하는 것은 만여명을 헤아리는아사꾸라의 대군이었다. 결국 시간을 끌어 아군이 가급적 멀리 가당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좌우간 자신이 바둑 에서 사석(石)같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히데요시 는 가나가자끼 성에서 농성을 결의했다.
이때 그곳을 지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아케치 미 쓰히데가 이것을 보고안스러이 여겼다. 특히 미가와 의 영주이며 노부나가의 유일한 동맹자인이에야스가 주장하여 미쓰히데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와 같이 후미를 방어하기로 했다. 미쓰히데는 당시 일본 제 일의 재능인이자 발군의 전략가였고 히데요시도 노 부나가 휘하에서 가장 능력있는 전투부대장이었다. 이에야스 또한 뛰어난 전략가로서 노부나가 사후의 통일전쟁에서 히데요시조차 이기지 못하여 결국은 좋은 조건으로 화평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실력자였 다. 셋은 갖은 지혜를 짜내어 이 가나가자끼에서 거 의 불가능에 가깝던 철수 작전을 결국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 내용은 히데요시 휘하에있는 고니시 로서도 여러번 들은 이야기 였다. 실제로 히데요시 는 후에 천하를 잡고 이에야스와 화평을 한 후 이에 야스를 상경시켜 주종관계를 맺은후 이에야스의 손 을 잡고 ‘옛날 가나가자끼의 퇴각전 때, 도쿠가와 공의도움을 받아 구사(九死)에 일생(一生)을 얻었소 이다. 그때의 일은 꿈 속에서라도 잊지 않고 있다 오.’라 말했다 한다. 그러나 지금 후지히데가 들려 주는 것은 당시에도 미쓰히데의 부대장이었던 야헤 이지가 본 당시의 이야기로,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본 것이었다. 주로 미쓰히데의 관점에서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인물됨과 능력을 평가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고니시도 재미있게 들었다. 비록 현재의 실 존인물들인 히데요시나 이에야스등이 나오는 이야기 였지만 고니시에게는 옛날 이야기 같아서 재미있었 다.
후지히데도 고니시가 재미있게 듣자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했다. 후지히데는 아무래도 미쓰히데의 부 하였던 야헤이지 에게서 나온, 집에서 전해지는 이 야기를 들은 터라 미쓰히데의 재능은 몹시도 빛나는 것처럼 들렸다. 비록 야헤이지는 미쓰히데가 망할 때 운명을 같이 했으니 직접 만날기회는 없었을 것이지만.
‘이야기는 여러번 들었었지만, 그 정도로 뛰어난 사나이였던가.’
고니시가 은근히 생각할 정도로 후지히데는 미쓰히 데의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사실 미쓰히데는 ‘주군을 시해한 자’ 라는 오명 때문에 충직한 성격의 고니시는 그의 이름은 평상시에는 입에 올리지조차 않았다. 그러나후지히 데는 어린 아이이기도 하여 별 생각 없이 그냥 이야 기를 계속 듣고있었다. 술잔도 연신 비웠고 그때마 다 후지히데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고잔을 따랐다. 어느 덧 이야기는 가나가자끼에서의 철수를 거의 마 쳐가는대목에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간빠꾸님 (히데요시를 지칭함)께서는 쥬 베에(미쓰히데) 공과 이에야스 공과 함께 번갈아 가 며 후미를 맡으셔서 일 정 후퇴할때마다한 번씩 번 갈아 교전을 하셨습니다. 쥬베에 공은 총의 명인이 어서 퇴각을하는 도중에도 부하가 총을 장전하여 건 네면 즉시 사격하여 달려드는 아사꾸라의 기마무사를 쏘셨는데 한 번도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합니다. 이에야스 공께서도 역시 직접 총을 잡으시고 사격하 시었으며 이에 아사꾸라 군은 후미를 달려 덮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 조금씩 꽁무니를 빼며 따라가 는 시늉만을 하였다고 합니다.”
대강 이야기를 듣고 고니시는 웃으며 후지히데에게 말했다.
“그런데 묻겠다.”
“예.”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나가자끼에서의 퇴각 의 일전. 누구의 행동이 가장 본받을 만 하다고 여 기느냐?”
후지히데는 고니시의 말을 잘 알아듣는 것 같지 않 았다.
“예? 세분다 용명을 날리셨으며 훌륭히 싸우 셨…”
“그것 말고 말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군의 퇴각을 엄호할 결심을 하신 간빠꾸 님의 충(忠)이 냐, 그러한 처지에 있는 간빠꾸님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싸워줄 결심을 하신 이에야스 공의 신(信)이 냐, 자신과 경쟁관계에 있는 간빠꾸님을 흔쾌히 목 숨을 걸고 도와준 미쓰히데 공의 의(義)냐? 어떤 것 이 가장 훌륭하다고 여기느냐?”
후지히데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긴, 후지히데는 이 제 갓 열네살이 된다. 그만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어리다. 고니시는 자신이 대신 대답을 했다.
“나는 이에야스 공의 신(信)이 가장 내리기 어려운 결단이었다고 믿는다.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 데도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 범상한 일이 아니야.”
“그렇습니까?”
후지히데는 이상하게도 볼 멘 듯한 소리를 했다. 뭔 가 불만스러운 것 같았다. 고니시는 이 꼬마도 나름 대로는 다른 소견을 가지고 있구나 싶어 웃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말씀드리기 황공하옵지만…”
후지히데는 예의 미쓰히데의 행동이야 말로 정말 높이 살 것이라고 말했다. 간빠꾸님은 후일의 공업을 높이기 위해 그랬다고도 말 할 수 있다.
이에야스도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자신은 신의를 목 숨보다 중요시한다’는것을 보이기 이해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미쓰히데는 어떠한가? 당시미쓰히데는 노부나가의 가중에서 거의 유랑인의 신분으로 들어 와 급진적인 신분상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는 미 쓰히데의 재능 덕분이었다. 당시노부나가의 가중(家 中)에는 그보다 높은 가신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렇 게급격히 신분상승을 이룬 자는 당시의 도오기찌로 오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따지면 경쟁자이다. 그런 데 그러한 경쟁관계에 있는 자를 목숨을 걸고돕는 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라고 후지히데는 상당히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고니시는 후지히데 가 나름대로 총명하다고는 생각했으나지나치게 이해 관계로만 생각하는 후지히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고니시는 후지히데의 말을 잘랐다.
“미쓰히데는 간빠꾸님과 같은 전우였다. 전장에서 같이 싸우는 동지의입장이었을 뿐. 그때까지만해도 경쟁관계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것은 후일 두 사람이 싸우게 된 것을 알고 나서 덧붙인 결과론일 것이다.”
“아닙니다. 미쓰히데 공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합니다. 도오기찌로오는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다. 오다 가중에서 만이 아니라 전 일본에서도그를 능가할 자는 단죠쮸공(노부나가를 말함) 밖에는 없을 것이다 라고요.”
“말이 지나치다. 후지히데.”
아무리 과거의 이야기라고는 하나 지금 현재의 최고 권력자를 도오기찌로오라는 옛 이름으로 부를 수는 없었다. 비록 후지히데의 실언이겠지만경우에 따라 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후지히 데는 다소흥분했는지 계속 이야기를 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간빠꾸님의 무서운 능력을 말 하고 싶어서…”
“무서운 능력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그런데 갑자기 후지히데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목소리가 음산하게 변하 기 시작했다.
“그대는… 위대해 지고… 싶지 않은가? 고니시..”
“무엇하는 것이냐? 후지히데!”
고니시는 몹시 놀라서 일갈했다. 그러나 후지히데는 이미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눈은 희게 뒤집혀 져 있었으며 얼굴빛은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으로 질 려 있었다. 무엇에 홀린 것 같았다. 고니시는 경악 하여 술상을박차고 일어나 칼을 손에 잡았다. 그러 나 후지히데는 그런 고니시를 무섭기 짝이 없는 흰 눈, 동자가 보이지 않는 흰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했 다.
“그대에게 능력을 줄 수도 있다…. 노부나가에게 도… 히데요시에게도 주었던 그 능력을….”
“닥쳐랏! 더 이상 지껄이면 목을 치겠다!”
고니시는 자신이 애용하는 검을 뽑으려 했으나 놀랍 게도 검은 칼집에꽉 들어 박힌 듯, 뽑혀지지 않았 다. 그리고 그 순간, 불이 꺼진 것이 아니었는데도 막사 안은 새까만 암흑 속에 싸이고 말았다. 고니시는 비록 담이큰 사람이었으나 너무나도 놀라 바깥의 호위병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질러 도 아무도 들어오는 자가 없었다. 캄캄한 속에서 등 잔의불도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후지히데의 무섭게 변한 창백한 얼굴만 너무도뚜렷이 보였다. 그것은 정말로 소름끼치는 광경이었다.
“약속하라… 전쟁을 계속하고… 끝없이 살육할 것 을… 너에게 약속하겠다. 권세와 명예와 승리를 보 장하겠다….”
“다..닥쳐라!”
고니시는 너무도 놀라 옷이 축축하게 젖었으나 정신 을 굳게 가지려고애를 썼다. 칼이 뽑혀지지 않자 다 음에 생각난 것은 기도문이었다. 고니시는 당시 일 본에 전파되고 있던 천주교의 신자이기도 했다. 오 다 노부나가는 당시 일본에서 퇴폐적으로 흐르고 있 던 불교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불교를 탄압하고 당 시 들어오고 있던 천주교에 비교적 온건한 자세를 취했다. 일본의 정신적 본산으로 일컬어지던 히에이 산(山)의 엔랴구지(延曆寺)를 불태우고 모든 승려들을 학살한 노부나가는 실증주의자로 무신론자라 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천주교에 대 해서는 방임해두는자세를 취했는데 이것은 교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무기 무역에 대한 희망에서 였다. 천주교를 전파하는 서방의 국가들에게서 총포의 기 술을 습득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통일전을 치를 생각 을 한 노부나가였으니 천주교를금할 수는 없었던 것 이다. 그런고로 천주교는 상류층에까지 전도되어 당 시 상당수의 영주들도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그 중 고니시는 더더욱 독실한 신자에 속했다. 무언가 정상적이 아닌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니시는 서둘러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후지히데의 목소리가 아닌, 거친 목소리가 다시 울려왔다.
“싫으냐? 가토도 이미 약속하였다. 너의 힘으로는 저항 할 수 없다. 절대로… 절대로…”
그러나 고니시는 식은 땀을 흠뻑 흘리면서 계속 기 도문을 외웠다. 이때만큼 필사적으로 기도를 올렸던 적은 아직 없을 정도였다. 주변은 갑자기써늘해지고 기분나쁜 음습한 냉기가 몸 주변을 가득 채웠다. 말 할 수 없이추워졌는데도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흘렀 다. 고니시는 굳게 감은 눈꺼풀에더욱 힘을 주었다.
“아니면… 죽는다!”
다시 무서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러나 고니시는 죽음을 두려워할 사람은 아니었다. 무인인 이상, 언 제 어디서나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늘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살아왔던 고니시이다. 정통 무인이 아니라 상인 출신으로, 활에는 능하지만 검이나 창을 남만 큼 다루지 못한 반쪽 무인이었지만 그때문에 적어도 무 인 의 더 비장하게 가지려 했던고니시였다. 그 기개 앞 에 흑호조차 한 풀 꺾였을 정도였다.
“사악한 사탄은 물러가라!”
목소리는 집요하게 파고 들었으나 고니시는 계속 굽 히지 않았다. 마음을 꺾는 것이야말로 위험하다고 고니시는 생각하고 있었다. 설사 이 자리에서 몸이 가루가 될 지언정 절대 사탄의 사악한 말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맹세하고 있었다.
‘사탄이 틀림없다. 주여.. 저를 구하소서!’
얼마를 그러고 있었을까? 이윽고 멀어져 가는 목소 리가 들려왔다.
“계속 우리를 거부한다면 너는 결국은 패배하고 적 의 손에 치욕스럽게목이 잘려 참수될 것이다. 생각 을 바꾸어라. 기다려 주마. 언제든지 좋다…. 언제 든지..”
기도의 효험인지 고니시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랬던 것인지 어느덧 주위를 가득 채웠 던 냉기가 어느덧 가시는 것을 고니시는 느꼈다. 고 니시는 성호를 긋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눈을 뜨 자 여전히 등잔불이 너울거리고 있는 막사 안의 모 습이 보였다. 막사 안은 조금도 변한것이 없었고 아 까의 어두움은 꿈 속의 일만 같았다. 그러나 꿈이 아닌 것이, 고니시의 발치에는 후지히데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자 신의 발치에는 칼이 칼집에서 뽑히지 않은 채 떨어 져 있었다. 고니시는 서서히 몸을 굽혀 칼을 집어들고 반쯤 뽑아 보았다.
칼날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스르륵 뽑혔다. 고니시 는 방금 자신이 겪은 일을 믿을 수 없었다. 몸은 땀 으로 흠뻑 젖어 있었으며 서 있는 것조차 힘들지경 으로 기운이 없었다. 갑자기 건강하던 몸에서 생명 의 기운이 왈칵 빠져 나간 것 같았다. 고니시는 서 서히 자리에 앉으며 후지히데를 손으로 슬쩍 건드려 보았다. 후지히데는 어느새 숨이 끊어져 차디찬 시 체가 되어 있었다. 고니시는 한숨을 내쉬고는 나직 하게 말했다.
“밖에 누구 없는가?”
그러자 즉각 두 사람의 호위병이 기운차게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은 장막 안에서 후지 히데가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니시는 조용히 말했다.
“밖에서 무슨 소리를 듣지 못했느냐?”
고니시는 말을 하면서 호위병 가가에몬의 눈을 똑바 로 쳐다 보았다. 가가에몬의 눈을 맑고 기운에 차 있었다. 전혀 경계를 게을리 했다거나 한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없었습니다. 그런데… 후지히데는..?”
“내 가거라. 갑자기 혼절하여 숨이 끊어졌다.”
“어떻게…”
“나도 모르겠다.”
고니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대 장으로서 부하들에게헛소리처럼 들리는 말을 할 수 는 없었기 때문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가가에몬은 고니시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랐다. 갑자기 고니시 는 십년은 더늙어 보이는 것 같았고 원기가 빠져나 간 늙은이 처럼 보였다. 고니시의 나이는 당시 겨우 설흔 다섯이었는데도 말이다. 가가에몬이 주섬주섬 하며다른 호위병과 함께 후지히데의 시체를 수습하 여 밖으로 나가자 고니시는털썩 주저 앉아 이마를 양 손으로 감싸 쥐었다. 도저히 자신에게 일어난일, 그리고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힘은 아니었다. 훨씬 사악하고도 강한, 어둠 의 힘이었다. 바로 사탄이라고 고니시는믿었다. 그 힘은 분명 실존하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할 수가없었다. 그러나 더 기막힌 일을 고니시는 얼핏 들었다.
‘단조쮸님 (노부나가)도… 간빠꾸(히데요시를 지칭 함)님도… 가토마저도 모두 그 힘에게 굴복했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
하지만 고니시는 몸을 떨었다. 믿지 못할 헛소리라 애써 자위하려 했으나 의심이 계속 들었다. 그리고 보면 이번 전쟁은 백해무익한 것이었고 아무도 찬성 하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수없이 살육 하라고 자신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것은 과연 그 어두운 힘과 관련이 있단 말인가? 아까 후지히데는 이상한 말을 했다. 미쓰히데의 말 을전한 것이라고는 했지만 히데요시는 무서운 능력 을 지니고 있다고. 그것이 혹 그 목소리와 연관되었 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자신은 도대체어찌 해야 하는 것인가? 히데요시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으며 이제 전쟁을시작한 이상 퇴군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후지히데를 아무런 흔적도 없이 손쉽게 자신의 눈 앞에서 죽였다. 거역하면 자신도 그 꼴이 될지 몰랐다. 아니,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서 대패하여 처참하게 죽게 될 것이라고 목소 리는 말했다. 그러면 부하들까지 몰살당하고 일가가 망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목소리에 영합하는 것은 고니시의 신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주여. 힘을 주소 서…’
고니시는 몸을 떨면서 기도했다. 그러면서 고니시는 기회가 닿는대로가토를 만나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목소리는 분명 가토도 자신에게 약속했다 고 했다. 그렇다면 가토에게서 어떤 수상쩍은 점이 발견될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