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3권 – 10화 : 강효식의 결심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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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3권 – 10화 : 강효식의 결심


강효식의 결심

한편, 그때 표훈사에서는 막 은동은 눈을 뜨려고 하고 있었다. 특별히몸이 아픈 것은 아니었으되 정 신이 몽롱하고 기력이 없어 몸에 힘을 줄 수가 없었 다. 몽롱한 가운데에서 운동은 어머니 엄씨가 왜병 에게 코를 베이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동네사람 들이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보았고…. 아버 지 강효식이 마수에게 잡혀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도 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뒤섞여서 잘 분간되지 않는 한 무더기의 악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 정신이 드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리맡 쪽에서 울려 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은동의 의식은 다시 혼란 속으로 파묻히려 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은동아! 은동아!”

누군가의 손이 뺨을 가볍게 찰싹 찰싹 때렸다. 낭 떠러지에서 아래로빨려 드는 듯한 느낌이 다시 조금 원래대로 돌아왔다. 뺨이 조금씩 아파지기 시작했 다. 그러나 아직 눈을 뜨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조 금 굵은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어서 일어나라. 어서. 아버님이…”

그 순간 은동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눈도 떴다. 그때까지 려고 해도 일어날 수가 없었는데 아버지라는 말을 듣자자신도 모르 게 몸이 일어나지는 것이었다.

“아버님은요?”

“얘두. 죽은 것처럼 꼼짝도 안하다가 그 말 한마디 에… 너 정말 효자구나.”

호유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아이의 말투 를 흉내낸 목소리 그대로였다. 은동은 처음에는 좀 어벙벙한 기분이었으나 차차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와 있는거지?’

분명 자신은 홍두오공과 싸우던 와중에 정신을 잃 었는데, 지금 이곳은어느 조용하고 자못 정갈한 방 안 이었다. 은동의 곁에는 두 사람이 앉아있었는데 한 사람은 승아의 모습으로 둔갑한 호유화였고 다른 한 사람은지난번에 은동을 구해 주었던 무애였다. 둘의 뒤로는 호롱불이 너울너울그림자를 사방에 뿌 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둘은 애를 써도 일어나지 않 던은동이가 아버님이라는 말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자 놀란 듯 했다.

“네 효성이 지극하구나. 네 아버님은 건넌방에 누워계시다.”

“아버지가요?”

“그래. 좀 언짢으셔…”

호유화는 여전히 어린 계집아이의 말투로 이야기하 고 있었다. 은동은좀 어벙벙하기도 하여 자신의 눈 에 보이는 승아가 호유화가 정말 맞는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승아는 무애쪽을 한 번 눈짓을 해 보이고 눈을 끔벅했다. 아마도 무애는 아직 자신의 정체를 모 르니 가만 있으라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은동은 아버지의 소식에 애가 타는 판이라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무애가 말리려 했다.

“지금 막 정신을 차리고서 너무 무리하면 안된다. 천천히 일어나거라.”

그러면서 무애는 은동의 오른편 어깨를 잡았는데 놀랍게도 은동은 가볍게 무애의 손을 떨쳐 버리면서 일어났다.

“아니에요. 어서.. 어서 가 봐야 해요…”

무애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자신은 비록 유정만큼 수련을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정이었고 어느 정 도 기운이 있는 축에 속하는데 한낱 열살 밖에 되지 않은 은동이 자신의 손을 쉽게 밀쳐 버리고 일어나 다니. 더군다나 은동은 무애의 손을 억지로 떨쳐 버 린 것 같지도 않았으며 무슨검불을 털어버리는 것 처럼 손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무애는 놀라서 이번에는 일부러 은동의 손을 힘을 꽉 주어서 잡았다.

“어허. 조금 더 있으래두.”

“아니에요. 어서…”

은동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은동은 그냥 무애의 손에서 자기 손을 빼려고 팔을 당겼는데 그래도 덩 치가 꽤 큰 편인 무애가 자기 손을 따라 한편으로 나동그라진 것이다.

“어어… 스님. 아이고… 죄송해요. 죄송…”

은동은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고 무애로 몹시 놀란 얼굴이었다.

다만 승아의 모습을 한 호유화만 눈에 살짝 주름을 지우면서 웃을 수 있었다.

‘은동이가 홍두오공에게서 나온 인혼주의 기운을 모두 흡수한 것이 틀림 없구나. 이제 은동이는 인간 세상에서는 천하장사로 불릴만 하겠구나.’

전에 은동은 홍두오공의 이마에서 인혼주를 뽑다가 정신을 잃었고 그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지작을 하 지 못했다. 그러나 인혼주에는 당시 이십명의 인간의 혼령들이 들어 있었다. 그 힘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은동의 몸 안에 응축되게 된 것이며 그 때문에 은동은 며칠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인혼주에 들었던 혼령들은 모두 전장터에 나왔던 군 사들의 혼령이니 은동은 장정 스무명의 힘을 한 몸 에 갖게 된 것이다. 비록호유화나 흑호의 법력이 깃 든 힘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한 장정이 대략 백근 무게(60킬로그램, 쌀 한가마 정도)를 들 수 있다고 한다면 은동은 이천근을 들 수 있는 역사중의 역사 가 된 셈이다. 호유화는 까닭도 없이 그런사실이 기 쁘게 느껴졌다. 천성적으로 입이 가볍고 조잘거리기 좋아하는호유화는 은동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은동은 이제 영혼의 몸이 아니니 전심법을 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놀라지 않 으면 무애가 의심을 할까봐 호유화도 놀라는 척했 다.

“어머머.. 이제 보니 은동 오라버니는 정말 장사 네.”

“아니 나보고 오라버니라니 왜 그런 말씀을…”

은동은 엉겁결에 대답하려다가 승아가 무섭게 눈을 흘기자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다행히 무애는 그런 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허허.. 이거 놀랍구나. 너 언제 이리 기운이 세어졌느냐?”

“모.. 모릅니다.”

“너 언제 오래 묵은 산삼이나 영지버섯 같은 영약을 먹은 적이 있느냐?”

무애가 묻자 은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면 큰스님께서 산차를 한적이 있느냐?”

산차(山借)는 도가의 수련법으로 주로 외면적인 힘 을 얻는 비법 중의 하나이다. 차력(借力)과 비슷한 것인데 주로 산에 가서 주문을 외우고 수행을 하여 큰 힘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힘은 어느 정도 의 법력이 있고 정신수양이 된 다음에야 얻을 수 있 지, 무리하게 힘만을 얻으려 하다보면 몸과 마음을 모두 망치게 되는 술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좌우간 은동은 그런 것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으므로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무애도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말했다.

“허어… 정말 이런 기이한 일은 생전 처음 보는구 나. 너 한 번 저것을들어 보아라.”

무애는 방 한 켠에 놓인 커다란 바둑판을 가리켜 보였다. 바둑판은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고 사방이 한 자 반, 두께도 한자 가까이 되는 두툼한것이었 다. 무게도 꽤 나갈 것 같았다. 열 살 먹은 아이라 면 양손으로 잡기는 커녕 둘이 달라 붙어도 들기 어 려울 것이었다. 은동은 반신반의하며 양손으로 바둑 판을 들어올리려 했다. 그러자 무애는 말했다. 

“한 손으로 들어 보아라. 충분할 것이다.”

은동은 그러자 조금 긴장하여 조그마한 손에 힘을 잔뜩 주고 바둑판의모서리를 쥐었다. 그러자 우두둑 소리가 나면서 단단한 오동나무로 만든바둑판의 모 서리가 두부처럼 으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쿠…”

무애보다도 은동이 더더욱 놀란 듯 했다. 은동은 놀라서 완전히 으깨어진 바둑판 조각을 내던지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망가트릴 생각은 없었는데… 썩은나무인가 봐요.”

그러자 무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괜찮다. 괜찮아. 그러나 그건 바로 사흘 전에 벤 나무로 만든 거란다.

썩었을 리가 없어. 너 정말 무서운 역사(力士)가 되 었구나… 그것도 그토록 어린 나이에…”

“아닙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전 정말…” 은동이 펄쩍 뛰자 무애는 웃는 낯을 띄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다. 내 평생 본 사람들 중 가장 기운이 센 사람은 석저장군 김공 이시다. 그런데 김공도 네 나 이에 너만한 힘을 가지지는 못했을 것이야.”

무애는 중얼거리듯 말하다가 문 밖을 가리켰다. 

“저기 도량에 심어진 가지 부러진 소나무가 보이 지? 저것을 한 번 뽑아보아라.”

은동이 보니 그 나무는 두께가 어른 허벅지만한 굵은 나무였다. 아직잎이 파란 것이 죽지는 않았는데 가지 한 쪽이 크게 부러져서 좀 흉해 보이기는 했 다. 은동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가 어떻게 저걸 뽑나요? 안될 거에요.”

“한 번 해 보려무나.”

“그리고 왜 멀쩡히 있는 나무를 뽑나요? 나무를 뽑으면 죽을 것 아니겠어요?”

그러자 무애는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정말 자비심도 많구나. 나무까지 생각 해 주 다니! 나는 출가한몸이지만 너에게 배워야 겠구나. 그러나 염려 말거라. 저 나무는 가지가부러져서 도 량 안에 두기가 무엇하여 원래 밖에 옮겨 심으려 하 던 나무였단다. 네가 뽑으면 내 죽이지 않고 옮겨 심을 터이니 어서 해 보거라.”

은동은 무애가 권하자 신기하기도 하고 회기도 치 밀어서 마당으로 내려가 보았다. 밖에 나가니 그곳 은 어느 청량한 절의 도량이었다. 무애의모습을 보 고 여기가 아마도 절이겠거니 생각은 했었지만 사실 이었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라 사방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담 너머로 곳곳에 화톳불을 피운 듯 벌건 빛들이 비춰 보였다. 어쨌거나 은동은 나무로 가까 이 가서 나무를 꽉 얼싸 안았다. 그리고 위로 힘있 게 당기자 우지직우지직 하는소리가 났다. 몹시 힘 을 썼는데도 나무가 잘 뽑히지 않자 운동은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허이 하는 소리를 지르면서 용을 쓰 자 결국 나무는 뿌지직하는 소리를 내면서 뿌리채 뽑혀 올라왔다. 은동은 나무가 정말로 뽑히자놀랍기 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나무를 내려 놓고 무애 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당에는 승병으로 지원 하려 왔던 스님들이 몇몇 있었는데 조그마한 어린아 이가 굵은 나무를 뿌리채 뽑는 것을 보고 모두다 놀 라서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그러자 무애는 손뼉을 쳐가면서 크게 웃었다.

“장사일세! 장사!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무애는 기뻐하다가 입을 벌리고 섰는 스님들을 보 고 말했다.

“자네들도 잘 보았는지? 이 아이는 분명 대장감이 야! 아쉽게도 나이가너무 어리지만 몇 년만 더 지나면 나라의 기둥이 될거야. 기쁘구나 기뻐! 하하 하…”

무애가 기뻐하자 옆에서 승아도 맑은 소리로 킥킥 웃으며 몹시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은동은 나무 를 뽑고는 기뻤지만 승아의 얼굴을 보자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유화는 이런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데 자기 조그마한 힘 을 자랑한 것 같아 수치스럽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 문이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스님. 이런 조그마한 놈이 힘이 조금 있어서 무얼 하겠습니까? 부끄럽습니 다.”

그러자 무애는 더 크게 웃어대었다.

“그런 조그마한 놈이 힘이 조금도 아니고 엄청나게 있는데다가 겸손하기까지 하니, 정말 큰 인물이구 나. 허허허…”

그러다가 무애는 벌떡 일어나 아직까지 입을 벌리 고 있는 스님들에게말했다.

“자네들, 신기한 구경을 했으니 구경값으로 이나 무나 산에다 옮겨 심어주게나.”

“예? 우리는 지금…”

“어허. 나같으면 그런 구경을 했다면 열그루라도 쾌히 심을거야. 우물우물하지 말고 처리해 주게나. 허허..”

무애는 자비심도 많고 속이 깊으며 점잖았지만 퍽 익살 맞은 사람이기도 했다. 무애는 일어나 마당으 로 가서 은동이를 덤썩 안아 무등을 태우고말했다. “자. 그럼 아버님 계신 곳으로 가자꾸나. 아마 이 이야기를 들으면 아버님도 퍽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 보니 은동은 힘이 생긴것이 신기하여 잠시 아버지 생각을 잊고있었다. 역시 나이는 속일 수 없 는 것이다. 그러나 은동은 아버지 일을 잊은 것이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무애가 은동을 무등 태우고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 듯이 나가자 승아도 그 뒤를 쪼르르 따라 왔다. 길은 어두웠지만 절 내 에는 곳곳에 석등이 있고 불이 켜져 있어서 주변을 대강 알아볼 수 있었다. 무애는 신이 난 듯 덩실덩 실 장난치는 듯한 걸음걸이로 절안을 걸어갔다. 조금도 막힘이 없는 것을 보니 절 안의 지리에는 훤한 것같았다.

“괜찮아요. 내려 놓으세요. 걸어갈 수 있어요.”

“아니다 아니야. 내 너같은 소년영웅을 업어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러자 뒤에서 승아가 다시 킥킥 웃었다. 은동은 승아, 아니 호유화가비웃는 것 같아 부끄러워서 더 말하지 않고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여긴 어딘가요? 스님?”

“금강산 표훈사란다. 유정 큰스님이 계시는 곳이고 노스님 서산대사께서 계시는 곳이기도 하지.” 

“어.. 금강산…”

은동은 또 멍해졌다. 자신은 상주에서 무애에게 업 혀 하룻만에 충청도를 벗어났다가 다시 유정에게 안 겨 단숨에 충주까지 돌아갔었다. 그리고저승까지 갔 었고 오자마자 홍두오공과 대판 싸웠는데 지금 있는 곳은 또금강산이라니. 은동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 다. 그러나 무애는 마냥 좋은 듯했다.

“너는 사흘동안 정신을 잃고 혼절해 있었단다. 많이 걱정했는데, 이렇게 장사가 되다니. 허허.”

“누가 절 데리고 왔지요?”

“요 꼬마 낭자가 알려 주어서 찾았단다. 네 아버님 과 같이 만신창이가되어 산 속에 쓰러져 있는 것 을…”

무애는 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너, 금강산으로 오던 길이 아니었느냐? 충주에서 유정 스님과헤어진 다음 한나절만에 온 것 을 보면, 내 보기에는 어느 이인(異人)이 데리고 온 모양인데. 기억이 나지 않느냐?”

은동이 승아의 눈치를 보니 고개를 살짝 흔드는 것 이, 말하지 말라는것 같았다. 그래서 은동은 그냥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얼버무렸다.

“그런데 태을사자하고 흑호님은요?”

“태을사자? 흑호? 그게 누구지?”

그러자 은동은 갑자기 뒷덜미가 따끔한 것을 느꼈 다.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지만 다행히 소리는 지르지 않고 뒤를 돌아보니 뒤에서 승아가 머리털 한 올을 뻗쳐 은동을 꼬집은 것이다. 승아는 심각한 얼 굴로 손가락하나를 세워 입술에 대 보였다.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은동은 한순간꿈을 꾼 것이 아닌 가 생각했다가 승아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사실이었 구나하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호유화와 태 을사자, 흑호는 유정과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곽재 우, 김덕령, 처영 스님을 만난 것 외에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서산대사는 그러한 존재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범인이 알게 되면 이상한 소문이라 도 날까봐 다른 승려들에게는 그들의 존재를 비밀로 붙이기로 했다. 무애는 유정의 제자였으나 아직 법 력이 강한것은 아니라 유정도 무애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었고, 그래서 무애는 여전히 승아를 꼬마아가씨 로만 생각했던 것이고 태을사자나 흑호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승아로 변한 호유화가 은동이에게 눈을 흘기는 사이 무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말했 다.

“태을사자는 누구고, 흑호는 누구지? 혹시 너를 데려다 준 이인들이니?”

“아.. 글쎄요… 그건.. 꿈인지 생시인지… 좌우간 갑자기 생각나는이름이어서.. 저도 몰라요.”

은동은 총명하기는 했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거의 없어서 말하는 품이엉망진창이었다. 뒤에서 운동을 흘겨보는 승아의 눈은 이렇게 비꼬는 듯했다. 

‘말도 못하는데다가 더듬거리기까지 하니 없던 의 심도 들겠네. 원참.’

좌우간 한참을 걸어서 무애는 절의 뒷쪽에 위치한 듯한 어느 작은 건물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아마도 이 건물은 일종의 병원 구실을 하는 곳 같았다. 말 린 약재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고 약 다리는 냄새가 났다. 무애는은동을 내려 놓더니 여기에 서 있으라 는 듯한 손짓을 해 보였다. 은동은까닭을 몰랐고 아 버지가 보고 싶기는 했지만 일단 무애의 말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 기다렸다. 그러자 무애는 문 을 열고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무애는 곧바 로 문을 닫아 버려서 은동은 아버지의 얼굴조차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실까? 아버지가 위독하신가?”

은동이 의아하게 여기며 걱정을 하자 승아가 말했다.

“출혈이 좀 심했는데 이젠 괜찮아. 그것보다도 너 네 아버지는 살 의욕이 없는거야.”

“네?”

그러자 승아는 다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작게 말했다.

“난 여기서는 승아야. 네 같은 나이뻘인 승아. 제 발 좀 제대로 못하겠어?”

“아.. 응..그..그래?”

은동이 간신히 대답하자 승아는 다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너네 아버지는 싸움에 패하여 먼저 죽은 많은 동 료들과 모시던 장수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거야. 환 자가 살 의욕이 없으니 고치기 힘들다고약승(藥僧) 이 한숨 쉬는 것을 들었어. 그래서 무애 스님이 설 득하러 들어가신 거야.”

사실 지금 승아가 말하는 것 또한 열 살 짜리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수준이 높은 이야기였다. 호유화는 그럴듯하게 변장하여 말하고 싶었지만정말 열살짜리 의 수준으로 설명을 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은동은 그것도깨닫지 못했다. 좌우간 슬펐다. 갑자기 닭똥 같은 눈물이 은동의 눈에서 뚝뚝 떨어졌다. 승아도 은동이 슬퍼하는 것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 고안에서 무엇인가 소근소근하는 소리만 들리며 시 간이 조금 지나갔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애의 큰 소 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으시 오! 아드님 보기에부끄럽지도 않소?”

은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허락도 없이 문을 열 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초췌한 몰골의 강효식이 누운 채 무애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것이 보였다. 강효식은 며칠 사 이에 이십년 정도는 더 늙은 것처럼 보였으며 몰라 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아버님!”

은동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강효식은 참으려는 듯 몇 번 고개를 움찔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은.. 은동이냐? 무사했느냐?”

“아버지!”

은동은 다시 외치면서 강효식에게 매달렸다. 갑자 기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무애가 다시 강효식에게 무어라고 타이르는 것 같았으나 은동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쁘기 도 하고 또돌아가신 것이 틀림없는 어머님 생각에 슬프기도 하여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냥 부여안 고 엉엉 울 뿐이었다. 무애는 다시 잘 생각해 보라 는 말만남기고는 조용히 부자만을 남기고 밖으로 나 왔다. 승아로 둔갑해 있는 호유화는 그런 은동의 모 습을 갸웃거리면서 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울까? 아버지가 죽은 것도 아닌데. 하긴 그동 안 너무 고생을 해서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은 걸까?’ 

호유화는 환수 출신이라 육친의 정 같은 복잡한 감 정은 얼마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애가 자신을 바라보자 얼른 은동의 흉내를 내어 섧게 울었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무애는 측은한 듯 승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독거려 주었 다.

“그래그래. 울지 마라. 울지 마. 착하지? 자. 우린 잠시 자리를 피하자꾸나…”

그러나 호유화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냄새 한 번 퀴퀴하구나. 이 놈은 목욕을 며칠에 한 번 하는 거야? 조금 가까이 왔는데도 냄새가 풍 기니 원. 좌우간 재수 없어. 중놈이 머리를 쓰다듬게 내버려 두다니 내 팔자도 기구하구나. 예전 같았으 면 콱 물어 뜯어 버렸을텐데..’

호유화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말거나 방 안 에서는 급기야 강효식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부자지간의 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강효식은 사실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살 면목 이 없었으며 살고 싶은 낙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 다. 강효식의 부인 엄씨가 죽고 은동이 크게 다친 것은 작은 일이었다. 그보다도 강효식은 이제겼기 때 문에 죽으려 했던 것이다. 강효식은 충주에서 괴멸 된 신립의 부대가 한양까지에 남아 있는 마지막 정 규부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조선 은 끝났으며 말단이기는 하였으되 조정의 관료로써 녹을 먹던자신으로서는 나라가 망함과 동시에 자결 이라도 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미 두 번이나 목숨을 끊으려 했었으나 두 번 다 실패한 강효식으 로서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남은 그의 혈육인 은동 마저 도 그런 강효식의 마음을 되돌리게 하지는 못했었 다. 그러나 무애는 이제 조선은 망했다고 탄식하는 강효식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한양이 점령된다고 조선이 망하리라는 법이 어디 에 있소? 고려 때에몽고군이 쳐들어와 전국이 유린 되었어도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30년을항쟁하였 고 결국은 나라를 보존하였소. 모르기는 몰라도 지 금 어가는 몽진하여 북으로 향하였을 것이오. 그리 고 조선에는 우리 땅을 짓밟은 왜놈들과 맞서 싸우기를 원하는 민초가 얼마든지 남아 있소! 아직도 기회는 많이 남아 있소! 어째서 군인만이 전쟁을 한다고 생각하시오?”

[3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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