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3권 – 8화 : 경기감사 우장직령(京畿監司 雨裝直領)
경기감사 우장직령(京畿監司 雨裝直領)
고니시는 계속 몸이 좋지 않았다. 전에 정체모를 존재가 나타나 후지히데를 죽이고 자신을 협박했던 일 이후로 기운이 없고 온 곳이 쑤셔왔다. 군의를 불러 진맥도 해 보고 약도 몇 종류 먹어 보 았으나 전혀 효험이 없었다. 고니시는 밤만 되면 몹 시 괴로웠고 전의 그 존재가 다시 나타날까봐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러한 종류의 일에는 무력이 나 다른 힘이 쓸모 없는지라 고니시는 신앙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놓고 신앙심을 보일 수도 없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불교신앙이 배어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장으로써 마음 약한 것처럼 보이는 인상을 부하들에게 심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고니시는 장막안에 자그마 하게 성소를 차리고 밤 늦게까지 기도를 드리다가 간신히 잠에 들곤 했다.
그러나 고니시의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왜군은 승 승장구 진군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걸 리적거리는 조선군 부대들도 없었으며 왜군은 싸울 것도 없이 다만 주변 정황을 살피면서 나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주변의 상황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진군 하기만 하면 겁을 먹고뿔뿔이 달아났던 조선의 백성 들은 이제 하나둘씩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기시작했 다. 당시는 아직 의병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점은 아니었다. 의병도 군대이니 조직을 갖추려면 사람을 모아야 하고 무기를 구해야 하며 대오를 편성하고 장을 뽑아야 한다. 지금 왜군에게 직접 점령되지 않 은 조선땅에서는 산림에 묻혀 있던 뜻있는 사람들이 한참 의병을 조직하고 있는참이었다. 곽재우나 김덕령을 비롯하며 정기룡, 정문부, 유정, 조헌, 영규, 고경명, 홍계남 등등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단 김 덕령은 그의 매부였던 김응회와 함께 의병을 일으 킬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그의 노모가병중에 있어서 임진년에는 의병을 일으키지 못하게 된다. 좌우간 그러나아직 왜병에 정면으로 맞서 싸울만한 힘을 모 은 부대는 없었다. 그러나 서서히 무언가 거대한 힘 이 꿈틀거린다는 것은 고니시에게 직감으로 느껴져 왔다. 고니시는 불안했다.
‘잘 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인가 그 직감을 떠올 리게 한 것은 바로 병사들의 잦은 실종사건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는 병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곳은 낯선타국이니 탈영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선가에서 죽음을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누구 짓일까? 토민(土民)들의 소행일까?’
왜군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의병이라는 존재는 아직 염두에 두지 못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왜국에서는 오랜 전란이 계속되는 가운데에서도의병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있다면 싸움에서 패한 영주등을 습격하는 도적들이나 토비들이 있을 따름이었다.
‘자기 땅이 짓밟힌 것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것일 까? 그러나 충주 이후로는 조선백성들을 그다지 건 드린 적이 없지 않은가?’
일본의 전국시대의 전쟁에서는 비전투원에게는 직 접적인 피해를 주지않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비전투원을 부역이나 정보원으로 이용하 려는 술책에서였다. 더구나 풍신수길은 한반도 점령 이후에 조선민중을 이용하여 명을 치려는 계획을 가 지고 있었으므로 개전 당시부터비전투원에 대한 상 해는 금지되어 있었다. 그 금제 명령은 1592년 4 월 26일에 발령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제(禁制)
1. 난폭한 행위.
1. 방화, 사람을 사로잡는 행위.
1. 상놈, 농민들에 대한 부역, 기타 부당한 행위.
만일에 위반한 자가 있을 때는 엄벌에 처할 것이 다.
1592년 4월 26일 풍신수길
그리고 고니시도 부하들에게 쓸모 없이 백성들을 다치게 하지는 말라는 명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조금 달랐다. 군량미에 대해걱정하는 왜병의 입장으로서는 가는 곳마다 수탈을 감행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사람을 직접 해치지는 않는다 하 나, 사람을 인질로 잡아 식량과재물을 약탈하는 판 이었으니 조선백성들로서는 날강도를 만난 셈이었 다.
그러나 고니시조차 그 정도는 ‘승자의 당연한 권리’ 로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백성들의 목숨을 함부로 해치 지 않았으니 조선민중들은 자신에게 고맙다고 생각할 것이라는 착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니시는 특히 조선의 통치체제에 원한이 많 은 노비들이나 상민들을 앞잡이로 사용하였다. 그리 고 그것을 일종의 ‘신분상승’이라 말했다. 별 볼일 없는 노예 신세에서 승전군에 협력하는 입장이 되었 으니 영광이라 생각할 것이라고 마음대로 판단 내린 것이다. 물론 그런 자들도 있었으나 아무리 천대받 고 고생을 많이 한 노비나 상민들이라도 왜군을 좋 아하고 영광으로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 다. 좌우간 고니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런 사건들은 도적들이나 토비들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갑옷이나 무기라도 약탈하려는 것이리라. 좌우간 조심할 일이다.’
그때 고니시는 문득 아무도 없어야 될 장막 안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것을 보았다. 고니시는 소름이 쭉 끼쳐서 자신도 모르게 칼을 빼려 했다.
전날의 악몽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지 마시기를. 겐끼 올시다.”
“아. 너였구나.”
고니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겐끼의 까마귀 같 은 얼굴은 보기에좋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괴롭 히는 그 마귀가 아닌 것만으로도 지금은겐끼의 얼굴 이 천사같아 보였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겐끼의 목소리는 여전히 억양이 없는 듯 했지만 고 니시는 겐끼 놈이 속으로는 자신을 놀리는 것 같다 고 느꼈다. 장수가 되어서 그정도에 놀라서는 안되 는 일기는 했다. 그러나 자신의 경우는 정말 두려운 존재가 있지않는가? 그러나 그런 내용을 겐끼에게 이야기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과연 재주가 뛰어나구나. 언제 들어왔느냐?”
“조금 아까… 뭔가 깊은 생각을 하시는 듯 하여 방해를 하고 싶지 않사와.”
“알았다. 되었다.”
고니시는 칼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알아보라 한 것은 어떻게 되었느냐?”
그러자 겐끼는 짧게 대답했다.
“가토 님의 부대는 한강을 건너실 예정이라 합니다.”
겐끼의 말에 고니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바였다.
“그래. 한강… 가장 빠른 길로 가려는 것이구나.”
“예.”
겐끼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눈을 들어 고니시를 올려다 보았다.
“한강은 텅텅 비어 있습니다. 조선군 몇몇이 강을 지킨다고 말은 합니다만, 이미 모두 내빼버린 듯 합 니다.”
고니시는 실망했다. 최소한 조선군이 이틀 정도만 버텨 준다면 가토는자신보다 한양에 늦게 당도하게 되리라. 그러나 조선군이 모두 도망쳐 버렸다면 가 토가 자신보다 빨리 갈지도 모른다.
“그러하냐?”
말하자 겐끼는 고니시가 실망하는 듯한 얼굴을 짓는 것을 보고 씨익웃었다.
“가토님은 금방 강을 건너시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배가 없습니다.”
“배가? 강에 배가 없단 말이냐?”
“전에는 그래도 몇 척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한 척 도 없습니다. 모두떠내려갔으니 흘러흘러 나중에는 바다에라도 흘러 들겠지요.”
눈치를 보니 겐끼란 놈과 수하의 이가 패들이 나룻 배를 모두 떠내려가게 만든 모양이었다. 배가 없다 면 나무를 해서 뗏목이라도 만들어야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고 그러려면 시간은 많이 지체될 것이다. 실제로 고니시가 한강의 거룻배를 떠내려보내서 가 토의 진군을 지연시킨 일은 역사에도남게 되었다. 이는 후에 가토와 고니시의 사이를 더욱 더 좋지 않 게 만든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고니시는 기분이 좋아졌다.
“잘했다. 겐끼. 아주 잘했다.”
그러자 겐끼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니시는 품을 뒤져서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꺼내어 겐끼에게 던져 주었다. 이가의 패들은 재물로 항상 보수를 주 어야 한다. 그러나 녀석은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면 서 날렵한동작으로 주머니를 받아 넣었다.
“아주 잘했다. 그런데, 또 다른 일은 어찌 되었느냐?”
“가토 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것이다. 말해 보아라.”
그러자 겐끼는 갑자기 음성을 낮추었다.
“겉으로 볼 때에는 이상한 점이 없습니다. 하오나…”
그리고 겐끼는 더더욱 음성을 낮추었다. 거의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야기를 말이냐? 누구와 말이냐?”
고니시는 물으면서 다시 품을 더듬어 또 하나의 주 머니를 겐끼에게 던져 주었다. 아까 너무 보수를 일 찍 준 것이다. 이 자들은 재주는 좋지만금전에 대해 서만은 염치도 인정도 없다. 겐끼는 마치 새끼새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 삼키듯 주머니를 낼름 넣고 나서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자세히 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그 안에는 아무도없었는데도 그 쪽의 목소리는 들렸 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데도?”
고니시는 등골이 쭈뻣해짐을 느꼈다. 지난번에 자 신이 들었던 그 공포의 목소리. 그것이 가토에게도 나타났단 말일까?
“정말 아무도 없었느냐?”
고니시는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물었다. 그러자 겐 끼는 분명히 말했다.
“누가 있었다면 제가 당연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겐끼는 이가 패 들 중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가진 자라 들었다. 최고의 닌자가 없다면 없는 것이다. 고니시는 한숨을 쉬었 다.
“그 자는 누구더냐?”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으음….가토 님께서는 가끔 바람(風)님이라 하곤 하더군요.”
“바람이라…?”
고니시는 미간을 찌푸렸다. 몸이 떨려왔다. 하지만 지금 겐끼 앞에서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아 간신히 참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별 다른 이야기는… 예정대로 잘 하고 있다는 이 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저러나 정말 이상한 일. 가토님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다니…”
겐끼는 아직도 가토가 혼자 중얼거린 것으로만 생 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알고 있는 편 이 오히려 나을지 몰랐다. 그러나 고니시는한가지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겐끼가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닌자라고 하더라도 상대가 초자연적인 존재라면 겐끼가 숨어 있는 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는 생각이 든 것이다. 혹시나 겐끼도 후지히데처럼 돌변하는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자 고니시는 마음속이 뜨끔해졌다.
“그런데 정말 별 일은 없었느냐?”
“없었습니다. 그 후에 가토님은 술을 드시고 주무셨고, 저는 조용히빠져 나왔습니다.”
고니시는 장막 안의 등불을 조금 더 환하게 밝혔 다. 그리고 겐끼의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니 겐끼의 검은 야행복 자락 밑으로 흰 옷자락이 보였다. 그런 데 그 옷자락에 검은 얼룩 같은 것이 보였다. 고니 시는 겐끼에게물었다.
“그런데 네 야행복 속에 입은 것은 무엇이냐?”
그러자 겐끼는 피식 웃었다.
“전에 고니시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고 승의 부적이라도 지니고 가라고요.”
“그래서?”
“이 안에 입은 옷은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원래 나무묘법연화경으로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행하던 불교의 법문)의 법문을 전부 써넣은 옷입니다. 유명 한 대사님이 써주신 것이지요. 헤헤. 이것을 입고 있으면 위험한 일에서도 신불(神佛)의 보호를 받을 것 같기에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다른 닌자들은 저를 가끔 비웃습니다만. 헤헤. 저는 고니시님이 알았습니다.”
아시고 지난번에 그런 말씀을 하신 줄
겐끼는 뻐드렁니를 드러내며 결코 귀엽다고는 할 수 없는 얼굴로 웃었다. 이 놈은 틀림없이 고니시가 지난 번에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시행했다는 것을 보 이려고 옷자락을 보이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 나 고니시는그제서야 겐끼가 무사했던 이유를 알았 다. 그 풍 뭐라는 마귀가 겐끼를 알아보지 못한 까 닭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고 니시는다시 품을 뒤져 이번에는 지금 한토막을 꺼냈 다. 원래 겐끼에게 주기로 한주머니는 모두 주고 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고니시는 겐끼에게 금을 던지 면서 말했다.
“잘했다. 겐끼. 앞의 두 가지 일도 잘 했지만 그것 이 더 잘한 일이구나. 너는 운이 따르는 녀석이다. 알겠느냐?”
그러나 겐끼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니시를 바라보았다. 고니시는 짧게 말했다.
“어쨌거나 좋다. 앞으로는 어디를 가건, 무슨 일을 하건 그 옷을 절대벗지 마라. 명령이다. 알겠느냐?”
겐끼도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닌자다. 되묻지 않고 대답했다.
“예.”
그리고 고니시는 겐끼를 물러가게 했다. 마음이 몹 시 뒤숭숭했다.
‘그때의 목소리가 한 말이 틀림이 없다. 가토가 무 식한 놈이지만 혼자아무도 없는데서 중얼거릴 정신빠진놈은 아니지. 틀림없이 그 목소리, 그것이 가토에게도 찾아갔으리라. 아 니, 관백님이나 단죠쮸(노부나가)에게도갔을지 모른 다. 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일본국 전체가 전부 그 목소리에 의해 움직여왔다는 말인 가?’
그리고 고니시는 속옷을 꺼내어 성모경과 기도문을 속옷에 급하게 쓰기 시작했다. 자신도 겐끼의 방법 을 흉내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