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2화 : 금수의 우두머리
금수의 우두머리
시간은 지나 5월 2일. 고니시는 일착으로 한양에 입성하게 되었다. 한양은 거의 무인지경의 빈 성이 나 다름이 없었다. 그 전에 한강에 진을 친도원수 김명원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달아나 버리는 추 태를 보였다.
그 후 김명원은 다시 한양에 들어와 유도대장 이양 원과 합세하는 듯 하였으나 역시 도주해 버리고 만 다. 부산이나 동래에서의 혈전, 충주에서의 분전에 비하여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도주였다. 결국 고 니시는 한양에 일착으로 도착할 수 있었으며 가토는 그보다 늦게 한양에 입성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겐끼의 공로가 컸다. 겐끼가 한강 나룻터 의 배들을 모두 떠내려보낸 덕분에 가토의 진군이 이틀 이상 늦어졌던 것이다. 한양에 입성한 고니시는 일단 마음까지 느긋해졌다. 어찌되었건 고니시가 대공을 세운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다른 나라로 원 정을 떠난지 불과 한 달 만에 적의 수도를 점령한 것은 대단한 전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맨처 음 脩넘치던 고니시의 마음은 한 가지 소식을 접 하고 조금 가라앉았다. 그것은조선의 상감을 비롯한 신하들 거의 대부분이 이미 한양을 아낌없이 비우고 도주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고니시는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불쾌감을 느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어서 자기나라의 수도를 헌신짝 처럼 버리고 도망치다니. 항전조차 하지 않으니 부 끄럽지도 않은가? 부끄러워서 할복이라도하는 것이 마땅할 것을.’
그러나 고니시는 곧 낙관적으로 생각을 돌렸다. 아 마도 조만간 조선국왕은 항복할 것임이 틀림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성의 수비조차 하나도하지 않고 도망친 이상, 조선의 병력은 이미 모두 괴멸되었다 고 보는 것이 옳았고 그렇다면 더 버틸 수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원래 반전파에 가까운 고니시로서는 이 정도의 전과를 거둔 것을 다행으로 여 기며 행여 토요토미가 만족하여 마음을 돌리지는 않 을까 하는 기대도 걸게 되었다. 애당초 고니시는 조 선파병을 막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썼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었다. 더구나 당시 제일 큰 나라였던 명을 친 다는 것은 거의 과대망상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고 니시는 그러므로 이제 조선을 정벌하는일이 성공에 끝났으니 이쯤에서 핑계를 대어 우물쩡거리고 있으 면 조선국왕이 항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토요토 미로서도 결국은 회군하거나 조선을 다스리는데 분 주하여 전쟁을 끝나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 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맨처음 왜군은 도성 내에 진주하여 신이나서 궁궐 안에 자리를 잡고 숙 소를 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 중 하나(秀家 라 고 야사에 전함)가 종묘에 숙소를 정하였는데 밤중 에 신이 나타나병졸들 중 많은 수가 죽고 말았다. 이에 그는 겁에 질려 종묘를 불질러 태워 버리고 소 공주댁(小公: 태종의 사위 趙의 집이 있던 곳이어서 소공주댁이란 이름을 지녔으며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라 한다.)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에 나타났던 신이 바로 종묘의 토지신이었던 양척, 고벽수, 물물계 였던 것이다. 그들은 종묘가 불타자 탄식하였지만 종묘를 떠나지 않았다.
좌우간 그런 소식을 들은 고니시는 다시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래서그는 민심을 회유하고 불안을 해소 하기 위하여 군대를 도성 밖으로 옮겨서주둔하게 했 다. 고니시가 점령한 한양에는 이후 속속 다른 부대 들이 밀려들었다. 그 중 고니시의 바로 뒤를 이어 들어온 것이 가토였다. 고니시는원래 가토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고니시 가한강의 배를 떠내려보낸 사실을 가토는 어떻게 해 서인지 이미 눈치를 채고있었다. 물론 증거가 없으 니 대놓고 대들지는 못하였지만 말이다. 고니시와 가토는 비록 여러 무장들이 보는 앞이라 크게 다투 지는 못했지만 서로가 대단히 개인적인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가토에게서 고니시는 예전의 가토와 무언가 다른 점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예전의 가토는 비록 건방지고 교만하며 제 멋대로인 사람이 었지만 이렇게 음산한 기운은없었다. 그날 밤, 고니 시는 다시 겐끼를 불렀다. 겐끼는 말없이 흔적없이 고니시의 장막에 나타났다.
“겐끼. 듣거라. 본국에 다녀와야 하겠다. 할 수 있 겠느냐?”
고니시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토요토미는 도망병 이나 반란을 두려워하여 처음에 병력을 수송한 수송 선을 모두 본국으로 되돌려 보냈으며, 병사들은 이 유없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러나 겐끼는간단히 대답했다.
“물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려느냐?”
고니시의 말에 겐끼는 짧게 답했다. 여전히 까마귀 같은 그 웃음을 지으면서.
“조선인 도공(陶工)으로 변장하면 됩니다.”
그리고보니 왜군은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을 본국으 로 실어나르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도자기 기술자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왜국은 도자기 기술이 거의 불모나 다름 없어서 도자기들 하나하나 는 엄청난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왜국에는 다도(茶 道)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그에소용되는 다기(茶器) 중 어떤 것은 성 하나와도 바꾸지 않을만큼의 살인 적인 고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특히 토요토미의 주 군이었던 오다 노부나가는 그 다도에 집착적일만큼 의 관심을 보이고 수집하기를 즐겨했는데. 토요토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맨 처음 왜군의 일차 약탈대상이 된것은 바로 금은재보가 아니라 그릇 들 이었다. 일반 왜병들은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일 상적인 밥그릇이며 요강까지 모조리 수탈하였는데 그 양이천문학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밥그릇 하 나까지 모조리 빼앗아간다’고하여 조선인들의 크나 큰 반발심을 낳게 되는 원인도 되었다. 왜군들은 좌 우간 외면적으로는 민폐를 줄인다는 명분을 세우고 있었으나 밥그릇, 요강까지 빼앗아 가는 판에 무엇 을 안 빼앗아가겠는가 하는 것이 조선인들의생각이 었던 것이다. 그러나 왜군들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막힌 가치를 지녔다고 말로만 들은 질그릇들을 무더기로 보았으니 아무리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간장종지나막잔 따위가 ‘다기’로 둔갑하여 왜국의 높으신 분들이 간장종지를 놓고 둘러 앉아 엄숙히 차를 마시는 일도 당시에는 흔히 있었을 것이다. 그 리고일단 도자기들을 걷게 되자 왜군들은 그 도자기 를 직접 만드는 도공들을글자 그대로 ‘사냥’하기 시 작했다. 그때문에 이후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막대한 타격을 받게되고 왜국의 도자기 산업은 부흥하게 된 다. 좌우간 겐끼는 그러한 도공 중의 하나로 변장하 여 왜국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물론 도공들은 엄 중한 감시를 받을 터이지만 겐끼의 재주 정도면 그 런 감시쯤 따돌리기는 문제가 아니었다. 고니시는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