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4화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야사를 살펴보면 실 지로 아무런 도력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귀신이 나 금수가 굴복하고 죽어야 할 경우에서목숨을 살려 주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가깝게는 이항복이 김여물을구하려 했을 때도 그러했다고 했다. 그 원 귀는 김여물의 집안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인인 이항복이 김여물을 감싸고 같이 죽 을결의를 보이자 끝내 김여물을 해치지 못했다. 이 는 이항복이 장래 큰 일을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항복은 둘이 관찰해 보건대 학식은 밝았으나도력 은 거의 없었다. 그의 호 중 하나가 청정산인 인 것 으로 보아 약간의도가공부를 한 일이 있었던 것은 같으나 실제의 도력은 없었다. 그런 이항복에게 원 귀가 굴복했다는 것은 다른 이유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꼭이항복이 아니고서라도 그러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전해지고 있었다.
흑호는 그러한 이야기들을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 다.
“그런 인간을 해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한 거유. 좀 기분나쁘긴하지만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는 인간 이 가장 번성하고 강하우. 그러므로 그런인간들 중 에서 또 미래에 할 일이 정해진 중요한 인간이라면 그를 해치는것이 또한 천기를 어기는 것이 되는 거 겠지. 그래서 그를 해칠 수 없는 거유.”
“흠… 그렇다면 마수들도 천기를 직접적으로는 어 길 수 없어서 그러한 간접적인 ?법을 쓴다는 말인 가?”
“그럴지도 모르우.”
“허나 전에 자네가 왜병들의 진지에 뛰어 들었을 때 마수들은 왜병들을 마구 살상하면서 자네를 쫓았 다면서?”
“그런 왜병들이야 천기에 영향 줄만큼 큰 인물 들 이겠수? 호랑이들도그런 놈은 잡아 먹어두 뒷 탈이 없수.”
태을사자는 그 말을 듣자 뭔가 느낌이 왔다.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말이네, 사람을 해칠 수 있는 금수나 귀 신들은 어느정도 천기를 읽어낼 수 있게 된단 말인 가?”
“모두가 천기를 읽는 것은 아니우. 그 인물의 상(相)을 보고 알아내는거지.”
“상을 본다?”
“상이라 하여 관상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우. 다 만 그런 것이 있수. 그건 같은 생계 내에서 부대끼는 존재들만 알아 볼 수 있는 거지. 무슨 예감 같은 거라 할 수 있수.” “그렇다면 호군은 그런 상을 보시는데 능통한 분이 셨나보군.”
“그렇수. 우리 조부는 조선 천지의 금수를 통솔하는 분이우. 그분이그런 것을 모르시면 누가 아셨겠 수? 물론 호유화처럼 오래 후의 일은 모르우. 한 십 년이나 이십년 정도 짚어낼 수 있을까?”
듣고 보니 그럴 법했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했다면 호군이 어찌 죽기직전에 왜란종결자 대한 글자를 남겨 두었겠는가?
“그러면 자네는?”
“나는 그냥 도만 닦았지, 그런 것과는 관련이 없 수. 못 배웠으니까.”
“헌데 호군께서는 그러면 누구에게 그런 수를 배우 셨나?”
“선인에게 배운다우. 증성악신인(甑城岳神人)에게 서 말이우.”
“선인? 그러면 일종의 신(神)인가?”
“사자는 팔선(八仙)에 대해 모르시우?”
그러면서 흑호는 팔선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이 팔선은 고려때까지 숭앙되어 오던 여덟 신령이었다.
가장유명한 것이 송악산의 8선궁이었다. 8선 은 호국백두악태백선인(護國白頭嶽太白仙人), 용위 악지통존자圍嶽之通尊者), 월성천선(月城天仙), 구려평양선인(駒麗平壤仙人), 구려목멱선인(驅麗木 覓仙人), 송악진주거사(松嶽震主居士), 증성악신인 (甑城岳神人), 두악천녀(頭嶽天女)의 여덟이었다. 태 을사자로서는 그 팔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태 을사자는 사계의 존재였지만 그들 팔선들은 아마도 생계에서 곧바로 성계나 광계로 올라가는 반신적인 존재들인 것 같았다.
“금수들의 일을 관장하려고 해도 어느 정도의 도를 알아야 하는 거유. 특히 금수들은 인간과 싸우는 경우가 많은데, 잘못 하여 중요한 인간을 죽여 천기를 거스르게 할 수는 없는 일이지. 그러니 금수들을 통제하는 의미에서라 도 그런 것을 우두머리는 알아야 하우. 더구나 금수 들의 우두머리는 그냥 금수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도깨비나 일부 신령들도 그 밑에 둔다우.”
그래서 호군은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수하 하나를 북악산 도깨비라 하여 이항복에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인물이 예기치 못한 화를당할 고비 에서 현몽(夢)이나 계시(啓示)로써 그 화를 피하 게 하는 것도그 우두머리의 임무였다. 거기까지 듣 자 태을사자는 점점 가슴이 뛰어 올랐다. 이 얼마나 멍청한 친구란 말인가! 그렇게 중요한 일을 알고 있으면서 이제까지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니! 호유화의 시투력주 또한 그리 신통한 역할을 못하고 있는 판인데 말이다. 이것을 이용한다면 모든 문제 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태을사자는 흥분하여 흑호가 팔선에 대해 더 길게 이야기하려는 것을 도중에서 잘랐다.
“잠깐만 기다리게. 중요한 이야기가 있네.”
“뭐유?”
“지금 자네, 조선 땅 금수의 우두머리가 되면 증성악신인이 천기를 어느정도 짚을 능력을 내린다고 했 지?”
“그렇수.”
“뭐가 그렇수인가! 그러면 아주 일이 쉬워지는 것 아닌가?”
“일이 쉬워지다니? 어떻게 말유?”
“허허 답답한 사람. 지금 조선 땅에서 영통한 금수 들은 마수들의 습격을 받아서 모두 죽었다고 했 지?”
“그렇수.”
“그리고 호군은 자네의 조부이시지?”
“그렇수.”
“그러면 이제 조선 금수의 우두머리는 누가 되어야 하겠는가? 자네가아니겠는가?”
“아…”
흑호는 갑자기 탄성을 질렀다. 생각해 보니 그러했 다. 흑호의 도력은금수들 중에서도 일단 발군이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지금 조선땅의 도력높은 짐승 들은 모두 참화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면 그들의 우 두머리는 흑호밖에 될 자가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내가.. 나는 둔하고 쓸모 없는 놈이라서…”
“아니네.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일일세. 마수들이 어 찌하여 영통한 조선의 금수들을 하나씩 해쳤겠는 가? 만약 그들이 모두 살아 있다면 지금 우리는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마수들의 활동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네. 그래서 마수들이 금수들을 해 친 것만은 분명하네. 그리고 그놈들의 뜻대로. 지금 조선 땅에는 영통한 존재들이 없어져서 마수들이 활 개를 치고다니지 않는가? 하지만 조선 땅의 영통한 존재들이 그리 적지는 않을 것이네. 일대일로 본다 면 마수의 상대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도깨비 나 신령들을 모은다면 큰 힘이 될 수 잇을 것이야! 더구나 천기를 짚어내는 능력이 금수의 우두머리에 게 주어진다면, 자네가 직접 왜란종결자가 누구인지 도 알아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흑호의 눈이 점점 커졌다. 만약 자신이 호군의 뒤 를 이어 우두머리가되기만 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쉽 게 풀리게 되는 것은 분명했다. 태을사자는 더 기운 이 나서 말했다.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가? 어떤 길을 밟아야 하는가?”
“일단은 금수들의 뜻을 모아야 하우.”
“허나 지금은 그런 금수조차 남지 않았어. 그것은 생략해도 될 것일세. 그 다음은?”
“그런 다음 백.. 백두산 천지에서… 삼칠일간 치성을 드리면 신인이하강하시우…. 그때 품(品)을 올리 고 임명을 받는 거유.”
“신인이 하강한다? 그럼 직접 고할 수도 있는가?” “팔선녀(八仙女)와 팔신장(八神將)이 신인을 모시 고 직접 하강한다들었수…”
“팔선녀! 팔신장!”
태을사자는 또 한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이 신인이 라는 존재는 신장이나 선녀를 대동한다 하였으니 분명 생계보다 높은 곳의 존재임이 틀림 없었다. 그렇 다면 성계나 광계의 존재일 것이다. 사계에서 누명 을 써서 사계에 일을 알릴 수 없는 태을사자로서는 이 것이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다.
광계나 성계에서 생계에 연을 맺는 자에게 이 난리 의 진상을 고한다면 크나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아닌가! 하다못해 그 신인이 대동한 신장 여덟명만 두고 가더라도 자신이나 흑호의 전력은 몇 배로 불 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훌륭한 방법이 있었는데 왜 여태껏 자기들만 고생을 했단 말인가 생각하자 태을사자는 기분이 좋졌고 저절로 껄껄 웃음이 나왔 다. 태을사자는 잘 웃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때야 말로 흡족하여 크게 웃었다. 흑호가 이 일을 무난히 해내기만 한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다. “좋네. 일각도 지체할 수 없네. 자네는 지금 곧 백 두산에 올라 치성을드리기 시작하게.”
“그럼 여기 일은 어떡하우? 이항복, 이덕형의 일 은?”
“그건 내가 맡겠네. 좌우간 삼칠일이라… 스물하루 날이로군. 좀 길기는 하지만 별 수가 없는 일이 지.”
갑자기 태을사자의 마음이 어두워졌다. 조선이 과 연 21일을 버텨낼 수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지 한 달도 안되었는 데 벌써 조선 땅의 반이 점령당했다. 하물며 조선군 의 정예들은 거의 전멸되어 흩어졌으니 앞으로 왜군 의 진군은 더더욱 빨라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조선 사람의 영혼이 마수들에게 빨려 들어갈지도 모르고…
“만약 말이우. 이항복이 왜란종결자인지 이덕형이 왜란종결자인지 밝혀지지도 않고 이덕형이 명나라로 가게되면 어떻게 할 거유? 몸을 둘로 나눌 수는 없 지 않수?”
“그때는 호유화가 있네. 호유화를 불러 대신하게 하면 되니 자네는 그일에만 중시하게나.”
사실 마수들이 자신의 예상을 깨고 무더기로 덮쳐 온다면 자신이나 호유화로는 무엇도 할 수 없을 것 이다. 하지만 태을사자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나 흑호, 호유화의 힘은 한계가 있는 것이었 다.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까지는 해 보아야 했다. 결국 태을사자가 상감의 주변을 돌보 기로 하고 흑호는 백두산으로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