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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4권 – 66화


‘어허, 이덕형이 혼자 온 것도 다 이런 계략이 있었 기 때문인가? 가만…… 만약 조선군이 우리가 도하 하는 중에 기습을 가한다면….?’

겐소는 화가 나서 이덕형을 보며 소리쳤다.

“도대체 이 무슨 계략이오? 강 건너에 군사를 매복 시켜 두었나 본데……………. 우리가 그런 것에 꿈쩍이나 할 듯 싶으오?”

이덕형은 겐소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고, 더군 다나 갈대밭을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불화살을 보지 도 못했다. 이덕형은 단순히 겐소가 아까 이판사판으로 공갈을 친 자신의 공성계(空城計)에 걸려든 줄 알고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 보시려오?”

“화평교섭을 한다고 하면서 군사를 매복시키다니! 이렇게 나온다면당신을 그냥 보내줄 수 없소!”

그래도 이덕형은 태연하게 웃었다. 보통 배짱이 아 니었다.

‘그러면 이덕형은 우리를 방심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온 것이란말인가? 아니다. 이덕형은 상당한 고 관인데…………. 이게 도대체 어찌 된일이란 말인가?’ 

겐소는 갑자기 당한 의외의 사태에 놀라 고민하기 시작했다. 갈대밭에는 정말 수많은 조선군이 숨어 있는 것일까? 혹시나 자신이 잘못본 것은 아닐까? 겐소는 다시 갈대밭으로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정 말갈대밭에 누군가가 있는지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 다.

단 한 번의,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공격 한 방에 계두사가 소멸되어 버리자 나머지 두 놈의 마수들은 몹시 놀라는 듯했다. 그들 중다리 하나에 말 머리가 달린 놈은 기( )라는 놈이었는데 이놈은 곧 외발을 껑충거리면서 보이지 않는 엄청난 기운을 입 으로 내뿜었다. 흑호는 그 기운을 볼 수 있어서 금 방 피했지만, 은동은 볼 수 없어서 멍하니 있을 뿐 이었다. 흑호는 하는 수 없이 땅을 쳤다.

“영발석투!”

그러자 갯가의 둥근 돌들이 우르르 솟아올라 은동의 앞을 막았고기가 뿜어낸 기운이 그 돌들에 부딪쳐 옆으로 흩어졌다. 은동도 그 기운에 밀려 돌에 부딪 쳐 갈대밭을 헤치며 주욱 미끄러져 곧 처박혔다. 둥근 자갈들은 매우 단단했는데도 기가 뿜어낸 기운 에 휘말려 탕탕 소리를 내며 깨어져 버렸는데 그 소 리가 무척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겐소의 귀에는 그 요란한 소리가 북소리처럼 울렸 다. 더구나 갈대밭 한쪽이 주욱 미끄러져 나가는 것 이, 적어도 수십 명의 병사들이 숲을 헤치며 진군하 는 것처럼 보였다.

‘총부대가 진을 이루는가 보구나! 이건 무슨 뜻일 까? 협박을 하는것일까?’

이번에는 이덕형의 귀에도 그 소리가 들렸다. 자갈 들이 깨져 나가는 소리는 아닌게 아니라 북소리와 비슷했다. 이덕형도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공교롭 게도 은동이 기의 기운에 밀려 갈대밭이 좍 헤쳐지 는모습은 이덕형이 보기에도 사람들 여럿이 갈대를 헤치고 도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은동이 밀려나는 속도가 아주 빨라서 삽시간에 수십 장이나 밀려나갔 으니, 사람 혼자서 그렇듯 갈대밭을 헤쳤다고는 그 누구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덕형은 궁 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도대체 누가 있어서 저기에 진을 치는 것일까? 의 병들인가? 좌우간하늘이 돕는구나. 이 기회에 왜병 들이 겁을 먹고 물러가게 해야겠다!’


은동은 한참을 밀려나다가 갈대밭 속의 진창에 처박 혀 엉망이 된몸을 다시 일으켰다. 비록 마수나 흑호 보다는 못해도 인간으로서는 유래가 드물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몸을 건사하는 정도는쉬웠다. 은동은 얼른 일어나 다시 유화궁에 화살을 메기 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기가 다시 한 번 기운을 뿜어냈 다. 흑호가 앞을막아서려 했으나 이번에는 해골바가 지만 남은 시백귀 (屍魄鬼)가 흑호앞을 막아섰다. 흑 호는 놈의 기운이 낯설지 않음을 느꼈다. 그놈은 바 로 금강산에서 치성을 드 적에 시백인들과 백골귀 들을 보내 흑호를습격했던 바로 그 주술을 부린 놈 이었다! 흑호는 화가 치밀어 올라 은동의 일도 잠 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더러운 눔!’

기가 다시 기운을 뿜어내는데 이번에는 은동도 뭔가 무서운 예감이느껴져 본능적으로 비추무나리가 일러 준 술법을 썼다. 비추무나리의이름을 마음속으로 불 러보았다.

‘비추무나리!’

그러자 은동의 몸 주위에 크게 장막 같은 것이 생겨 났다. 기가 발출한 기운이 삽시간에 그 막에 흡수되면서 깊은 바다에 모래가 들어가듯흔적도 없이 사라 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기는 질려 버린 것 같았다. 은동은 비록 평범한 인간 아이의 모습이었지만 법력 이 엄청나게 강한것으로 믿은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사실 은동 자신이 더 놀랐다. 비추무나리의 술법이 이렇게까지 강력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은동은 다시 유화궁을 들면서 술법 을 쓰려 했으나 어느틈에 기는 저만치 달아나 버리 고 있었다.

‘어라? 내가 무서워서 도망을 가네?’

기가 동료인 시백귀를 버려두고 도망치자 시백귀도 놀란 듯했다.

오랜만에 야성이 폭발한 흑호는 시백귀에게 달려들 었다. 그러자 시백귀는 곧 이상한 기운을 전신에서 내뿜었다. 강렬하거나 무슨 힘이 담긴 기운이라기보 다는, 악취와 같은 기분 나쁜 기운이었다. 흑호가 시백귀를 막 잡을 찰나, 그 기분 나쁜 기운 때문에 잠시 멈칫했다. 그 틈을 타 시백귀는 달아나 버렸 다. 흑호는 시백귀를 뒤쫓으려 했지만 갑자기 흑호의 앞을 막아서는 것들이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수십 마리의 백골귀와 시백인들이 흑호 주위를 둘러 싸는 것이 아닌가.

‘제기럴, 귀찮게스리! 하지만 놈도 대단하구먼. 이 렇게 잠깐 사이에부하들을 불러내다니!’

흑호는 지난번에 시백인과 백골귀와 겨루어 본 경험 이 있었다. 이번에는 시백귀가 단지 달아날 시간을 벌려고 급히 놈들을 소환한 것이기 때문에 그 수도 수십 마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놈들은 마수와 달라 서 형체도 지니고 있었고 물리력도 행사했다. 은동 이 놈들의 흉칙한모습을 보고 날라 유화궁을 쏠까 하는데 흑호가 전심법으로 말했다.

이놈들은 별것 아니니 술법을 낭비하지 말어! 흑 호는 닥치는 대로 놈들의 몸을 두들겨 부수기 시작 했다. 은동은놈들이 몹시 더럽고 흉측하여 속이 메 스꺼웠으나 흑호의 말대로 술법을 아껴두며 유화궁 으로 놈들을 마구 후려갈겼다. 유화궁은 철궁이었으 며, 호유화가 법력을 넣어준 무기였기 때문에 유화 궁의 자루에 맞은백골귀들이 퍽퍽 부서져 버렸다.

신이 난 은동은 다시 전에 얻었던 윤걸의 법기인 육척홍창까지도 휘두르면서 놈들을 때려 부수었다.


‘갈대밭에 틀림없이 조선군이 매복해 있구나. 이제 그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겐소는 아연 긴장했다. 갈대밭 속에서 진을 이루는 듯하더니 이제는 사람의 형체가 수십 명 이상이나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거리가 멀었고 갈대밭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으 나, 사람들의 형체인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것들은 사실은 마수가 불러낸 시백인와 백골귀들이었다.) 더구나 자신들은 지금 강을 건너려다가 화평교섭을 한다고멈추어 서 있었으니 사격목표로는 안성맞춤이 었다. 게다가 배가 모자라 뗏목을 타고 있으니 숨거 나 막을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대밭에서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 었다. 겐소는 불문에 몸을 담고 있는지라 마수의 기 운을 아주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그것이 마수의 기운이라는 것은 모르고,다만 적병인 조선군의 기운이 무척 강하다고만 생각했다.

‘안 되겠다. 일단은 물러나야겠구나! 역시 이덕형은 보통 인물이 아니구나. 저 건너에 제갈공명이 만든 석병팔진(八陣)이라도 놓아둔 것인가? 이렇게 기운이 괴이할 수가 있나. 좌우간 나가서는 안 된 다. 계략인지도 모르지만 일단은 너무 위험하다.’

겐소는 마음속으로 작정하고 이덕형에게 말했다. 

“좋소. 화평을 맺거나 항복은 못한다 하더라도, 일 단 우리는 군사를강 건너로 후퇴시키겠소. 그러니 피차 회담중에 싸움은 그만둡시다.”

이덕형도 특별히 준비가 있었던 것이 아닌데, 겐소 가 자진하여 군사를 강 건너로 도로 물리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이덕형은 못박아두 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천우신조로 은동과 마수들의 싸움이 오히려 조선국왕을 구한 것은 이덕형도 물론 몰랐다. 누가 그랬는지 궁금하여 이덕형도 그 생각 에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지만, 표정하나 변하지 않 고 태연하게 말한 것이다.

“나도 굳이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소이다. 싸우시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피차 피해가 없는 편이 좋지 않겠소이까?”

겐소는 전쟁 전부터 이덕형의 인품과 지략이 헤아릴 수 없이 높다고 감탄하곤 했는데, 이덕형의 태도를 보자 마음을 굳혔다. 분명 이덕형이 자신들을 궤멸 시킬 수도 있거나, 최소한 큰 타격이라도 줄 수 있 는 진법을 펼쳐 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은 조선측이아무런 대비도 없는 줄 알고 그냥 뱃놀이하는 기분으로 강을 건너는도중이었으니 긴장 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니시의 명령은 조선국왕 을 항복하라고 권유하거나 안 되면 잡아오라는 것이 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덕형의 태도를 보니 조선국왕은 절대 항복할 것 같지도 않 았으며, 행여 이덕형의 말대로 조선국왕이 의주로 이미 피난을 갔다면 적은 군사로 이덕형이 준비한 진법과 맞서 싸우고싶지 않았다.

“좋습니다. 우리도 굳이 더 전진하지는 않겠소이다. 그러나 본대가도달한다면 진격을 계속할 것이오.”

이덕형은 여유있는 태도로 말했다. 물론 등줄기에서 는 아까부터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피차 섬기는 임금이 다르고 나라의 목적이 다르니 이 마당에서 영원히 화평을 논하지는 못하겠지요. 허나 나와 대사와는 이미 안면이 있던 처지 아니오? 더구나 회담을 하면서 싸우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일 이 아니겠소?”

저으기 당황한 겐소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조선은 동방예의지국이라 하 였으니 우리도예를 지키겠소이다. 좌우간 화평은 없 었던 것으로 하고, 나중에 다시의논하기로 합시다. 우리는 군사를 물릴 것이니, 조선도 군사를 물려 무익한 싸움을 피하는 것이 좋겠소이다.”

“좋소. 그러면 나는 저쪽으로 가겠소. 저곳의 지휘 관은 내 말이 아니면 듣지 않을 것이니, 내가 꼭 군 사를 물리도록 하겠소. 그러니 대사께서도 그리 하 도록 하십시다.”

이덕형은 감쪽같이 왜군의 선발대를 진격 못하게 막 은 것과 동시에자신의 몸 마저도 안전하게 빠져 나 오는 데까지 기지를 발휘한 것이다. 그러나 겐소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합장을 해보였다.

“좋습니다. 나무묘법연화경……..”

이덕형은 배를 돌려 갈대밭으로 들어갔다. 의병장이 건 누구건, 좌우간 적을 화살 한 대 쏘지 않고 왜병 을 물러나게 했으니 너무나 고마워서였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흑호와 은동이 시백인과 백골귀들을 모 두물리치고 떠나간 뒤였다. 은동이 기의 공격을 맞 고 상처가 덧나 피를흘리기 시작하여 흑호도 놀라 급히 은동을 안고 전라도로 날아가 버린것이다. 그러니 이덕형이 아무리 뒤져보아도 갈대밭 안에는 수십 명은커녕 단 한 사람도 발견할 수 없을 수밖……

‘이것이 대체 어찌된 일인가? 정녕 하늘의 도우심으 로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이덕형은 의문만 가득 안은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 다. 누구에게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훗 날 이덕형은 대동강변에서 단신으로시간을 끌어 몽 진하는 어가를 보호한 공적으로 말미암아 선조의 절 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며 크나큰 치하를 받게 된다. 한편 그날 밤, 대동강을 일단 도로 건넜던 겐소와 야나가와도 조선군이 정말 다 물러갔는지 미심쩍은 마음에 다시 척후병을 보내어 갈대밭을 조사하게 하 였다. 그러나 그 갈대밭에는 아무도 없었고, 누가 있던 흔적마저도 없었다. 그것을 보고 두 사람은 ‘ 이번 조선군의 부대는정녕 진퇴가 자유롭고 움직이 는 것을 귀신도 모르게 하니, 정예 중의정예부대였 음이 틀림없다. 근왕병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진법 을 사용하여 요기까지 스미게 할 정도였으니 공격을 받았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모른다. 싸우지 않아서 큰 다행이었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은동은 흑호의 품에 안겨 날듯이 달려가면서 비로소 긴장이풀리자 상처가 쑤시고 맥이 빠졌다. 

“두 마리는…………. 놓쳤죠?”

“그려. 허나 염려 말어. 다 잡고 말 테니깐. 더구나 한 놈은 네가 박살 내버리지 않았어? 호유화랑 모 두 난리를 치고서도 둘밖에 못 잡았었는데 말여. 마 수는 모두 열두 마리뿐이었는데, 네가 하나를 잡았 으니 열한 마리만 남은 셈이여. 좌우간 상처가 나을 때까지 너무 무리하진 말라구. 제기럴, 호유화는 괜 찮은가? 근데 너마저도 다 낫지 않다니원…….” 

그러자 운동은 흑호의 따뜻한 마음에 감격하여 눈물 을 글썽였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보다 호유화를 걱정해 주는 것이 더욱 고마웠고, 호유화를 생각하니 다시 눈물 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자 흑호가웃으며 말했다. 

“아직 멀었어. 아직 난리가 끝나지도 않었구. 할 일이 많다구……. 그러니 힘을 내어. 알았지?”

은동은 눈물을 거두고 억지로 웃는 낯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은동이 묻자 흑호는 예의 그 조금은 흉악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디긴, 왜란종결자가 있는 곳이지!”

“왜란종결자!”

“우리는 왜란종결자하고 말을 할 수 없어. 그러니 네가 해주어야 한다구. 우리하구 같이 왜란종결자를 돕구 보호하는 거여. 그러면 천기가 바로잡히구 난 리도 끝날 거여. 이 지긋지긋한 난리가 말여……”

“야……!”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드디 어 그 불세출의영웅, 왜란종결자를 만나게 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의 옆에 계속 머물러 있게 되는 것 이 아닌가! 비록 흑호가 왜란종결자가 누구인지, 어 디로 가는 것인지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좌우간 은동은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편 겐끼는 어두운 해변의 언덕배기를 피를 흘리며 달음질 치고있었다. 무서움이 없는 일급의 인자 겐 끼로서도 지금만은 두려움을 감출 수 없었다. 본토 에 돌아와서 이런 일이 생길줄은 꿈에도 생각하지못 했다. 두 명의 동생, 덴구와 기노시다야마는 이미 죽음을 당했다. 그것도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보이 지 않는 상대에 의해서….

‘알려야 한다. 이 사실을… 이 사실을..!’

겐끼는 품 안에 들어 있는 두루말이의 질감을 때때 로 확인하면서입술을 깨물었다. 고니시의 말은 사실 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 보이지않는 요괴, 마물!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비밀은…

겐끼는 두 동생의 참혹한 죽음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다시 한 번 자신을 가다듬었다.

‘센노 리규(利休)의 문서… 이것을 반드시 고니시 님께 전해야 한다! 이 전쟁은 미친 짓이다!’ 

겐끼는 고니시에게서 정체모를 마물이 일본의 최고 집권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리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 아케치가문과 오다 가의 내력을 캐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겐끼는 두 동 생인 덴구와 기노시다야마에게 두갈래로 나누어 각 각 아케치 가와 오다가의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으나 그쪽에는 별 다른 것이 나오지 않았다. 허나 겐끼 자신은 히데요시의 주변을 탐문하던 중 거의 우연한 기회에 엄청난 문서를 발견하고 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센노 리규의 문서였다.

센노 리규는 오다 노부나가의 다도 선생이었으며 히 데요시의 다도선생이기도 한 귀인(貴人)이었다. 2대 를 이어 최고 실권자의 스승이었던 만큼 몹시 영향 력이 큰 자문이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데 1591년 2월 28일, 히데요시는 센노 리규와 다실(茶室)에서 밀담을 나눈 뒤 돌연 센노 리규에게 자결을 명했고 센노 리규는 명을 따라 자결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겐끼는 우연히 그 센노 리규의 집을 수색하다가 센노 리규가 감추어 놓은 밀서를 발견한 것이다. 센노 리규가 죽음을 당해야 만 했던 이유도 이해가 갔다. 거기에는실로 엄청난 내용이 씌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대로라면 이 난리 는 그야말로 미친 짓에 불과했다. 이것은 전쟁이라 고도 할 수 없었다. 오로지 살육을 위한 미친 짓이 었다. 절대로 막아야 하고 중단시켜야만 하는 미친 짓….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그러한 사실을 알아 내자마자 겐끼 일행을 덮쳤다. 상대는 사람이 아니 었다. 분명 사람은 아니었다. 그누구도 인간이라면 평생동안 혹독하게 단련을 거듭한 인자의 시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적은 소리도 없었고 기 척도 없었다. 일본 본토는 모두 전쟁을 위한 병참 기지화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겐끼와 형제들 은 모두 갑옷을 입은 병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 러나그 존재 앞에서는 갑옷도 소용이 없었다. 순식 간에 붉은 빛이 번쩍하자 덴구의 목이 날아가고 몸 뚱이는 핏물이 되어 녹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기노시다야마의 몸은 보이지 않는 육중한 무 게에 짓눌려 머리부터 짜부려져 터져 나가면서 땅에 쳐박혀 삼켜져 버렸다. 그러나 그붉은 빛은 기이하 게도 자신의 몸에는 닿았다가도 튕겨나가 버렸다. 그래서 겐끼는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겐끼는 자신이 속옷에 써 넣어 입고있는 묘법연화경의 법문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법문이 씌여진 옷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던 다리 아랫부분에는 상처를 입었던 것이다. 

‘가야 한다.. 어서.. 사람이 많은 곳으로…!’

겐끼는 본능적으로 사람이 많은 곳을 찾았다. 그곳 은 해안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언덕 너머에 불빛이 보였다. 겐끼는 너무나 강렬한공포에 질려 이미 수십리 길을 미친 듯 달려왔지만 적은 보이지도 않 는 존재이니 그 존재가 자신의 뒤를 따르는지 아닌 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조금도 쉴 틈이 없었 다. 다만 밝고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그런 보이지 않 는 존재가 쉽게 다가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있었 던것이다. 그리고 겐끼의 예감은 맞은 듯 했다. 한 참을 달리던 겐끼는 어느 항구 어귀에 도달한 뒤 그 대로 정신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몇 사람의 병졸들 이 겐끼를 발견하여 횃불을 든 채 그에게 몰려 들었 다. 한사람이 겐끼에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왜 다쳤으며 왜 이런 꼴이 되어 여 기에 온 것이냐? 이 부대의 소속인가?”

겐끼는 미처 무어라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조금 후 다가온, 장교인 듯한 자 가 겐끼를 보고 외쳤다.

“너도 이 수군부대 소속이란 말이지? 그런데 건방 지게 밖에 나가서상처를 입고 오다니! 군기가 엉망이구나! 혼을 내주어야 하겠지만 다쳤으니 봐준다.

그 속죄, 조선에 가서 공을 세워 갚아라!”

“조선…?”

겐끼는 흐려지는 의식 가운데에서도 인자로서의 단련 때문인지 기를 쓰며 물었다. 그러자 한 졸병이 대답했다.

“몰랐느냐? 우린 조선으로 간단 말이다. 이순신인 지 뭔지 하는 망할녀석을 잡으러 말야. 어서 낫기나 해라. 하하하…”

‘잘 되었다.. 일단 조선으로.. 조선으로 가서….’ 

겐끼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정신을 잃어 버렸다. 그러자 몇 명의병졸들이 궁시렁 거리면서 겐끼를 짊 어지고 새로 건조된 거대한 배 안으로 들어가 버렸 다. 배는 바로 조선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순신 이라는 희대의 강적을 상대하기 위해, 일본수군의 정예가 모두 뽑혀서급히 출발하는 것이었다. 겐끼는 거의 천운(運)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고 보아도 좋 았다. 그러나 겐끼가 탄 배의 뒷쪽에는 누구의 눈에 도보이지 않았지만 갈기를 곤두세운 마수, 풍생수가 눈을 부릅뜨며 배의뒷모습을 성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배가 출항하자 풍생수는 서서히, 배의 속도에 맞추어 서서히 그 뒤를 따라 어둠속을 헤치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5권에 계속>


22) ‘풍림화산’이라는 글자가 써 있는 깃발이나 표찰은 일본에서 상당히 여러 곳에 보 인다. 이것을 지명이나 무슨 부적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실은 병법 의 요체를 알기 쉽게 정리한 문구이며, 일본 전국시 대 때의 전쟁의 대천재라고 하던 가이구니(甲斐國 갑비국)의 다케다 신겐이 가훈처럼 사용하던 말에 지나지 않는다.

23)이 금부채는 조선군이 노획하는데, 이순신은 이 부채를 소중히 여겨 조정에진상했다. 이 부채는 히데요시가 과거에 수군대장이던 가메이 고코노리에 게 주었던 것을 다시 기지마에게 준 것으로 추정된 다. 겉에는 6월 8일 ‘히데요시(秀吉)’라는 서명과 오른쪽에는 ‘하시바 지쿠젠노가미(羽柴筑前)’라고 씌어 있으며, 왼편에는 ‘가메이 류큐노가미도노(龜 井琉球守殿)’라 씌어 있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이 왜장이 하시바 지쿠젠노가미일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하시바지쿠젠노가미는 히데요시가 사용 했던 옛 이름과 관직이다.

왜국측 사서를 뒤져보면, 오다 노부나가가 쿄토를 점령하여 관직을 받았을 때그의 유력한 부하들도 관 직을 받았는데, 이 지쿠젠노가미는 그때 히데요시가 받은 관직이었다. 원래의 히데요시의 이름은 기노시 타 도키치로였는데, 후에 히데요시로 개명했고, 이 때 관작을 받으면서 성이 촌스럽다 하여 역대 오다 가문의노신(臣)의 성(姓)인 시바다(田)와 니와 (丹羽)씨의 한 글자씩을 따서 하시바라고 성을 바 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은 왜장이 지쿠젠노가미라는 이 순신의 믿음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이 부채는 과거 하시바의 이름을 쓰던 시절에 히데요시가 사용 하던것인데 후에 가메이 고코노리에게 준 것이다. 이는 부채 왼편에 씌어 있다는 ‘가메이 류큐노가미 도노,’ 즉 ‘가메이, 유구국주에게’라는 말과 잘 일치 하고 있다.

그러나 가메이 고코노리는 이때의 전투에서 죽지 않 았으므로, 죽은 인물은 함께출전했던 기지마 미치노 인 것으로 추정된다.

24) 그때의 일이 일본측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되 어 있다.

‘가메이가 부산포를 거쳐서 조선으로 도해할 때, 조 선군선 수천 척이 달려들어불화살을 쏘아 가메이의 배를 불태워 버렸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70여 일 을소천성에 숨어 지냈다.’

가메이가 얼마나 놀라 혼이 나갔으면 이십여 척에 불과한 이순신의 함대가 수천척으로 보였겠는가?

25) 일설에 의하면 여기서 죽은 것이 바로 가메이 라는 설도 있으나, 가메이는 후에 살아남아 일본으 로 달아났다는 증거가 많이 있다.

26) 기는 외다리의 괴수로 황제(黃帝)헌원이 치우 와 싸울 적에 이 ‘기’를 잡아북으로 만들어 뇌공의 뼈로 만든 북채로 쳐서 천하를 놀라게 하며 진군했 다는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기’의 모습은 <산해경> 에도 나온다.

27) <삼국지연의>에 보면 제갈공명은 오나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유비를 ‘어복포’라는 곳으로 가게 하 는데 그곳에는 제갈공명이 돌로 진법을 펼쳐둔 곳이 었다. 유비의 뒤를 추격하던 오나라의 지략가 육손은 그 팔진에 빠져들었다가 진에 휘말려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한다. 혼이 나간 육손이 유비의 뒤를 쫓는 것을 단념하여 유비는 겨우 살아난다는 내용이다. 물론 정사 삼국지에는 없는 가상의 이야기지만 제갈공명이 ‘팔진도’라는 진법을 창안했다는 것은 거의 확 실한 것같다.

28) 당시 일본 불교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나무 아미타불’ 같은 불호보다도 ‘나무묘법연화경’의 불 호를 주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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