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8화
그러자 승아는 코웃음을 쳤다.
“흥! 나라?”
승아는 다시 한 번 코웃음을 치고 은동에게 손가락 질을 하며 말했다.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면 몰라. 말 끝마다 나라나 라… 제발 내 앞에서만이라도 그런 위선적인 말은 안하는게 어때?”
은동은 화가 났다. 위선이라니!
“뭐가 위선이란 거야!”
“지금 이 조선이라는 나라, 내가 보기에 정말 한심 해. 알아?”
“감히 그런 소리를 하다니! 조선이 왜 한심한 나라야!”
은동은 흥분했다. 아무리 승아가 환수인 호유화이고 법력이 높다고 하지만 그런 대역무도한 소리를 하다니! 그러나 승아는 침착했다.
“내가 여기 온 지는 며칠 되지 않았어. 하지만 둘 러보니 정말 한심하기 이를데 없더군. 도대체 무슨 놈의 나라가 전쟁이 나고 며칠만에 이토록 밀린단 말야? 이 나라에서도 군대가 있을 것이고 군대를 키운다고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었을 텐데, 그건 전 부 어디 갔느냐 말야?”
그 말에 은동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할 수가 없 었다. 당시 조선의부역제도는 상당히 고된 것이었 다. 당시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조선의 병정들은 거 의가 급료를 받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개인장비는자기의 돈으로 마련해야만 했다. 십육세 부터 육십세에 이르는 남자 장정은 노비가 아닌 이 상에는 누구나 군역의 의무를 지고 있었고 번이 돌 아 올때마다 몇 개월에서부터 일년이상까지 군역을 치러야 했다. 조선의 군인중 군인을 직업으로 하는 자를 정군(軍)이라 하였는데 그 정군에게는 보 (保)라 하여 정군을 재정적으로 돕는 예비군이 딸려 있었다. 물론 고급군인이 되어 관직이나 품계를 받 으면 봉록이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일반 직업군인은 그 보에게서 받는 군포(軍布)로 생활을 충당하여야 했다. 당시는 아직 화폐거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 고 대신 쌀이나 포 같은 물건이 화폐의 역할을 대신 하고 있었던 때였던 것이다. 중종조의 기록을 보면 보통의 보병은 한 달에 7-8필의 군포를 내는 것으 로 되어 있었으며 포는 조선초기에는 쌀 다섯말 정 도의 가치를 지녔으나 방직이 대량으로 행해진 임란 정도의 때에는 쌀 한말 정도의 가치였다. 그러니 보 병 한 명이 한달에 쌀7-8말 정도를 바치는 셈이니 그 부담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흉 년이 들면 군포를 최고 10배까지 징수하는 바람에 견디다 못한 보군이 도망을 쳐버리고 그에 견디지 못한 정군도 도망을 쳐서 이 군역의 폐단때문에 작 은 마을 하나가 송두리째 야반도주를 하여 유민(流 民)이 되어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또한 지방의 관리들은 그러한 정군을 허위로 등록하고 군포를 수 탈하여 사리사욕을 채운 경우가 허다하였으니, 막상 난리를 당하였을 때 군대가 거의 효용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것이다. 은동은 이러한 자세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하였으나 군역이 ‘몹쓸 ‘으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은동이 말이 없자 승아는계속 말했다.
“그것 뿐이야? 양반이니 상민이니 이렇게 구분을 해서 사람을차별해서 재주있는 사람을 제대로 가려 쓰지 못하니 원…”
승아는 계속 조선에 대한욕을 해댔다. 승아, 아니 호유화는 몸에 들어있는 사백년 후의 시투력주를 응 용하여 이미 며칠에 걸쳐서 공을 들여 미래의 천기 를 투시하여 왔다. 그 목적은 왜란종결자의 정체를 알아내려는것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자세한 것을 알 아내는 것 보다는 미래의 생활과사회상이 보다 많이 느껴졌다. 그러다보니 호유화는 화가 나는 것을 막 을수 없었다. 미래에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다. 스 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여러가지 기술과 학문을 발전시켜서 깜짝 놀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이 변화는 불과 사백년 후에 일어날 것이었으나 호유화가 알고 있는, 천 사백년전과 지금 조선과의 변화보다도 엄 청나게 큰 것이었다. 아니, 비교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그때는 신분의 차이라는 것은 거의 없었다. 비록 돈을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의 차이는 두 드러졌지만 나면서부터의 차이는없었다. 그리고 아 무도 지금처럼 끼니 걱정을 하거나 굶어죽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비록 그 때의 사람들도 살 기 어렵다, 살기 힘들다고불평을 달고 다니는 것 같 았지만 지금만큼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 이 불평하는 것은 없어도 정말 생명을 부지하는데는 지장이 없는 사치품이 모자라다는 것으로 불만을 가 지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사백년 후의 군대는… 내 노라 하는 호유화조차 무서울 정도였다. 사백년 후 의 화포에 비한다면 지금의 화포는 장난감조차도 못 되었다. 하늘을 나르는 비차(飛車)들이 있었고 땅을 달리는 무서운 철우(鐵: 쇠로 만든 소. 호유화는 지금의 탱크를 본 것이다.)들이 불을 뿜어 대는가하면 화탄(彈)한 발에 마을이 글자 그대로 사라 져버리기도 했다. 사백년 후의 조선은 그 정도로 강 해져 있었다. 호유화는 지금으로서는 적수가 없는 형편이었지만 미래로간다면 철우 하나도 절대 당해 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의 한심한조선은 어떠한가? 왜군이 조금 침략했다고 해서 이 모양 이꼴이 된단 말인가? 승아의 모습을 하고 호유화는 계속 그런 것들을 은동에게 말했다.
사실 호유화는 조선이 어찌되건 사람들이 어찌 되건 간에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은동은 자신이 꼭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맹세까지 한 터였다.
그런데 은동은 지금 이렇게 비리비리한 조선이라는 나라에 있으면서 답답하게도 나이도 어린 것이 충성 을 바친답시고 하고 있으니 분통이 터졌다. 은동이 만약 싸움에 나가서 죽는다면 자신은 얼굴을 들 수조차 없을 것이고, 은동이 싸움에 나가는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무능하고 인재가 없어서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니 이 놈의 조선이라는 무능한 나라가 은동을 죽이는 셈이 될지도 모르니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은동은 눈을 크게 뜨고 호유화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들으면 들 을수록 신기한 이야기였다.
“정말.. 사백년 후에는 아무도 굶주리지 않아?”
굶주림은 당시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공포였다. 은동의 집은 그리 가난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굶주림은 무서웠다.
“그럼! 틀림 없어.”
그러자 은동은 다시 물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도 전부 그래?”
“어.. 그건.. 음… 몇몇 나라는 고생을 하지만 그 래도 거의 대부분의나라들은…”
그러자 운동은 말했다. 은동은 조선이라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가 모욕을 받는 것이 화가 났고 그러자 조선이 나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그러려면 자연히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밖에 없었 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국이라는 중국에 비해서도 결코 백성들 살림살이가 어려운 편은 아니라고 들었 는걸? 나중에 몇 백년 후에 어찌되었건 지금은 그 렇단 말야. 대국에서 흉년이 나면 몇 백만명씩 굶어 죽고 난리가끊이지 않는대. 하지만 조선에서는 흉년 이 들어도 굶어 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사실 조선시대의 굶주림은 지금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크고 일상적인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식생활이 항상 어려웠다고 생각되는 것은 일제시대를 거치면 서 일제의 수탈이 골수에 파묻혀 그 전에도 내내 그 러했던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중 기까지만 해도 많은 토지를 집중적으로 지닌 지주 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고 대부분의 농민은 자영농이 었다. 그리고 소작을 한다해도 당시 소작의 댓가는 반반이었고 지대나 기타의 세금등은 지주 측에서 부 담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와 비슷한 시기의 명 나라를 본다면 소작은 보통 7:3으로 지주가 압도적 으로 많은 양을 가져 갔기 때문에 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 했던 것만큼 조선 농민이 굶주림에 시달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기록을 볼 때 쌀이 생산되는 지방에서는 거의 모든 민중이 약간의 잡곡을 섞은 쌀밥을 주식으로 삼았었다. 단 한가지, 사람들이 굶 주리는것은 흉년이 들 때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쌀 농사는 망치게 된다. 전반적으로 비가 오지 않을 경 우에는 식량이 부족할 수 밖에 없으며 저장수단이발 달하지 못한 당시의 기근은 지금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단 당시의 조선은 환곡 등의 구휼제도가 애초부터 법으로 정비되어 있었다. 환곡은 탐관오리 들이 고리대를 붙이는 치부의 수단으로 쓰였지만 흉 년이 들면어느 정도의 역할을 발휘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구빈제도는 당시의 다른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간혹 조정에 서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양식을 풀곤 했지만 그것 이 법제화 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서방의 각 나라들은 그런 개념조차 없었다. 서양에서 구빈제도라는 것이 시행되기 시작하는 것은 수백년이 지난 후인 18세 기부터 정도이다.